아파트 1층서 10여년째 살지만 "자식 잘 키웠으니 여기가 명당" 풍수 始祖 도선스님 평전 펴내…
"산사태·홍수 나기 쉬운 곳 골라 절과 탑 쌓은 '치유의 지리학'"
풍수 연구자인 최창조(66) 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의 집은 서울 신도림역 근처 구로동 아파트다. 10여 년째 1층에 살고 있다. 의외였다.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천혜 조건에 전원주택을 짓지는 못할망정, 울창한 나무에 가려 한낮에도 그늘지는 아파트 1층이라니. 그는 "엘리베이터 타지 않아서 좋고, 무슨 일이 있을 때 나오기 좋고, 적당히 그늘이 있어서 좋고. 무엇보다 이 집에서 아이들 잘 키웠으니 그게 명당"이라고 했다. 최 교수의 아들은 강원지방경찰청에서 여성·청소년 보호 업무를 전담하는 경찰이다. 교육 행정직으로 근무했던 딸은 10분 거리에 산다.
그는 미신으로 치부되던 전통 풍수에 현대 지리학을 접목한 학설로 화제와 논란을 동시에 낳았다. "도시화가 진행된 현대에는 빌딩이 산(山)이고, 도로가 강(江)"이라든지 "좋은 땅은 사람들이 먼저 알아보는 법이기 때문에 지가(地價)가 높은 곳이 명당(明堂)" 같은 주장이 대표적이다. "광복 이후 최초의 체계적 풍수 연구자"(노자키 미쓰히코 일본 오사카 시립대 교수) 같은 평가도 있었지만 학문적 체계를 중시하는 지리학계에서는 그를 '풍수를 합리화하는 발상'이라고 비판했다. 반대로 풍수 학회에서는 '내가 좋으면 명당'이라는 최 교수의 주장은 '상대주의적 관점'이라고 비판했다.
청주사범대와 전북대에 이어서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그가 강단을 박차고 나온 것도 벌써 24년 전이다. "왜 서운한 게 없었겠어요. 잘 지내던 사람을 굳이 서울대로 불러놓고 제게 공격을 퍼부어댔으니 섭섭했고 치사하다는 감정도 들었죠." 하지만 그는 "지금은 한영우 서울대 명예교수처럼 제가 힘들고 외로웠던 시절에 따뜻하게 위로해주셨던 분들만 기억하려고 한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풍수의 '학문적 영주권'을 위해 고군분투했지만 지금은 건축과 인테리어에도 방위와 배치를 중시하는 '풍수 만능 시대'다. 하지만 그는 "풍수는 어디까지나 인문학의 영역에 해당하는 학문"이라고 말했다. 최 교수는 한화·삼성·SK 등 대기업 회장들의 자문을 맡았지만 한 번도 묏자리를 봐준 적은 없었다고 한다. 신축 공장이나 아파트 부지에 대한 상담이나 조언이 대부분이라는 것이다. SK와 삼성은 자문 계약이 끝났지만, 한화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최 교수는 자신에 대해 "낯을 가리고 대인기피증이 심한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일단 할 말이 생기면 느린 속도로 또박또박 끝까지 마쳐야 직성이 풀리는 듯했다.
최근 그는 신라 말기의 승려이자 한국 자생적 풍수의 시조로 꼽히는 도선(道詵) 스님(827~898) 평전을 냈다. 제목도 '한국 자생 풍수의 기원, 도선'(민음사)이다. 명당 찾기에 치중하는 중국 풍수와는 다른 한국적 풍수의 기원을 찾기 위한 학문적 고민의 결과물이다. 최 교수는 "도선 스님과 그의 제자들은 한때 1000여 개에 이르는 절과 탑을 쌓았지만, 이 가운데 온전하게 남아 있는 곳은 한 곳도 없다"고 했다. 대부분 폐사되거나 유실된 이후 재건했다는 것이다. 최 교수는 "산사태와 홍수가 나기 쉬운 위험한 장소를 일부러 골라서 절과 탑을 쌓은 것이야말로 도선 풍수 사상의 핵심"이라고 했다. "병든 어머니가 땅이라면 한국의 풍수는 거기에 절과 탑을 지어서 상한 기운을 북돋으려는 '치유의 지리학'"이라는 것이 그의 해석이다.
"조상의 덕을 받기 위한 '발복(發福)'이 아니라, 모자라는 기운을 보완하는 '비보(裨補)'가 한국 풍수의 특징이자 매력"이라는 최 교수의 지론은 여전히 알쏭달쏭했다. 21세기에도 풍수가 필요한 이유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이 한 편의 연극이라면 땅은 무대일 뿐이고 중요한 건 연출자와 배우이겠지요.
'목수는 연장 탓을 하지 않는다'는 말도 일리가 있고요. 하지만 좋은 연출가는 여전히 무대에 신경을 쓰고, 뛰어난 목수는 언제나 연장을 소중히 챙기잖아요. 풍수는 그런 무대이자 연장 아닐까요." 구로동 아파트 1층 거실에서 시작된 인터뷰는 길 건너편 동네 횟집에서 청주 4병을 비우고서야 끝났다. 그는 "안주 없이 술 마신다"며 젓가락 한 번 잡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