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워라, 봉은사 결사 시절
瑞海 興敎|서울 대각사 주지
1.
1960년대 중반 무렵, 범어사 노장님(동산대종사)께서 입적하시기 전부터 젊은 우리들은 광덕스님이 서울 영동 봉은사 주지직을 맡으면 함께 모여 살기로 결의했다.
우리가 그토록 따랐던 광덕스님은 본래부터 수행이 철저했고 덕행이 뛰어났으며 포교 전법에 대한 사명감 또한 남다른 데가 있었다. 그리고 우리가 뜻을 모으는 데 무엇보다 가장 큰 힘이 되었던 것은 광덕스님의 매우 인간적인 따뜻한 자비심이었다. 그야말로 광덕스님은 상경하애의 표본 같은 분이었기에 함께 모여 출가 수행자로서 여법하게 수행하면서 부처님 은혜를 갚는 것에 대해 대중 모두가 기뻐하며 참여하기를 희망했고 광덕스님은 따르기로 굳게 경심했던 것이다.
당시 대중들은 광덕스님이 주지로 있는 회중에서 함께 살면, 서로 배우는 것도 많고 각자 올바른 수행자의 모습을 확립하여 누구나 존경받는 큰스님이 될 것으로 목표하고 다짐했다. 그것은 광덕스님의 지혜와 자비의 힘과 선견지명 때문이었다. 실지로 광덕스님과 함께 생활해 보면 수행의 심연에서 오는 안정감과 풍성함, 사물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과 미래에 대한 통찰력, 일상의 자세한 관찰력은 사뭇 뛰어났고 예지적인 지성을 바탕으로 처리하고 판단하는 대중의 통솔력은 조금도 기울어지지 않고 원만하였다. 벌써 그 당시, 광덕스님의 한창 때인 삼십대 후반부터 범어사에서뿐만 아니라 종단에서까지 큰스님으로 존경 받을 정도였다면 또 무슨 말이 더 필요하겠는가?
종단의 종무 행정에 있어서도 탁월한 안목과 빈틈없는 일 처리로 이미 정평이 난 지 오래였고, 사회지도자로서 역사 발전을 내다보는 미래안도 명백했기에 범어사 대중들뿐만 아니라 광덕스님과 조금만 인연이 있거나 심지어는 광덕스님의 이야기를 멀리서 전해 듣기만 하고도 신뢰와 부러움을 사게 될 정도로 광덕스님은 모든 분야에서 일등 스님이었고, 또한 모범적인 출가 수행자였다. 아무튼 광덕스님은 충분히 한 도량의 지도자가 될 만한 역량과 포부를 갖추고 있었고, 특히 부처님 가르침에 대한 신심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뛰어났음에 재론의 여지가 없다.
당시 광덕스님이 진리를 위해 몸바치는 구세대비의 원력과 대중을 이끌고 보살피는 자비 헌신은 육신보살로까지 칭송되었다. 이는 당시 광덕스님 또래의 젊은 스님으로서는 실로 드문 경우였고 흔치 않은 일이었기에, 새로운 신앙결사의 지도자로 더 없는 적격자가 광덕스님이라고 대중들은 스스로 판단했으며, 그래서 무조건이다시피 광덕스님을 따랐던 것이다. 막상 봉은사의 생활이 곤고 (困苦)하고 수행이 힘들었어도 광덕스님이 앞장서서 인도하는 일이었으므로 대중은 오히려 기쁨을 가졌고 또한 용기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광덕스님에 대한 믿음과 존경을 바탕으로 우리들은 어린아이처럼 떼를 쓰다시피 광덕스님이 봉은사 주지 맡기를 역설했고, 나아가 청정수행 결사를 내세워 스님을 집요하게 설득했다. 한사코 봉은사 주지직을 마다하는 광덕스님에게 대중의 힘으로 우격다짐을 벌이듯이 수행결사의 명분을 줄기차게 내세웠던 것이다. 마치 우리는 결사 항전하는 독립군처럼 의기충천하여 자비심 많고 인정스럽기 그지없는 광덕스님을 압박(?)해 갔고, 마침내 승낙을 받고 대중은 기쁜 마음과 희망찬 기세로 서로 소임을 나누어서 새 살림을 시작했던 것이 봉은사 결사의 그 단초였다. 그리고 광덕스님 자신이 대학생 포교에 대한 염원을 가졌던 터였기에 가능했던 일임을 밝혀둔다.
2.
사실 그 무렵(1960년대 중반)에는 나라 전체가 가난했기에 어디를 가나 가난과 궁핍이 석양의 산그늘처럼 길게 드리워져 있을 때였다. 봉은사라고 해서 먹고사는 사정이 특별하게 다를 것이 조금도 없었다. 심지어 때때로 양식이 떨어져 소임자들끼리 서로 바라보며 한숨지으며 걱정한 때도 여러 번이었고, 행여나 광덕스님이 알세라 쉬쉬 해가며 오직 부처님께 기도하며 매달려 통사정하기도 했다. 비록 물질적으로는 그렇게 가난하고 사는 형편이 궁색하고 어려웠지만 우리들 각자의 뜻은 조금도 꺾이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간이 지날수록 칼날처럼 날이 서서 예리한 광채를 뿜어냈다.
우리는 절 살림이 어려울수록 광덕스님을 중심으로 수행정진과 일상 생활을 알뜰하고 절도있게 꾸려갔으며, 무엇 하나 대충 넘기거나 수홀히 하는 일 없었고, 가람 수호와 수행정진에 여념 없이 오직 출가 본분에 충실했던 것이다. 돌아보면 이 모두가 광덕스님 덕분이라는 생각이 새삼든다. 스님의 공정한 판단과 놀라운 신심, 보통사람이 생각할 수도 없는 높고 깊은 서원력, 가슴속 알 수 없는 깊이에서 솟아나는 자비 덕화의 힘으로 그토록 힘들었던 가난도 이겼고, 수행결사의 높은 뜻도 이뤘으며, 대중도 원만하게 화합하여 생활했다. 참으로 대견하고 보람있던 시절이었고 우리들 모두의 빛나는 인생의 전성기였음을 자각하고 이제 거듭 광덕 사형님을 우러르며 마음을 다해 감사하고 싶다.
어찌보면 조금은 역설적이거나 억지 간은 말이 될지 몰라도 나라 전체의 경제가 어려웠고 봉은사가 가난했기에, 우리들의 수행은 더 철저했고 우리들의 정신은 더 올곧았는지 모른다. 가난과 궁핍에는 고통과 불편도 따르겠지만 공부하고 뜻을 이루는 데는 좋은 약이기도 했으며, 게으른 마음에는 아픈 채찍이기도 했다.
그 당시 우리들은 마치 고결한 지사처럼 청빈을 자랑으로, 수행의 높은 뜻을 기쁨으로, 전법도생과 가람수호를 보현행으로 받아들였다. 뿐만 아니었다. 그 당시 삼십여 명의 출가 대중들은 광덕스님을 수행의 스승으로, 결사의 중심으로 받들던 때였으니 스님의 말씀이 곧 규범이었고, 그분의 서원이 대중의 원이었고, 광덕스님의 삼엄한 계행이 대중의 거울이 되었다. 그야말로 광덕스님을 중심으로 일사불란한 정신질서와 화합을 형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봉은사의 모든 대중이 함께 모여 좌선하고 공양하며 공사 벌이는 큰방에 들어서면 ‘청정막방일(淸淨幕放逸)’이라고 하는 붓글씨가 커다랗게 벽에 붙어 있었다. 청정과 정진, 근면이 결사대중들의 수행좌표였고 기울이었던 까닭이다.
이러한 봉은사 결사의 수행정신은 동참했던 대선덕들에 의해 한국불교의 새로운 수행 분위기를 형성하며 곳곳으로 번져갔다. 바로 그 당시 결사에 동참하여 대중의 윗자리에 있었던 도천. 도광선사들께서 용주사에 새로 선방을 만들었고, 그 후로도 도광선사께서는 지리산 화엄사로 청정 결사정신을 계속 이어갔으며, 도천선사께서는 금산 태고사로 막방일의 결사정신을 살리고 펼쳐 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역시 봉은사 결사의 맨 윗자리에 계셨던 범어사의 지효 대사형께서는 도봉산 천축사에 무문관을 짓고 당대의 뛰어난 선사들과 육년 결사 정진에 들어가기도 했다. 이 무문관 결사정진은 하나의 큰 사건으로 종단 내외에 새로운 전환점으로 인식되었다. 그 여파는 실로 대단했다.
시끄럽고 어수선하던 종단 정화불사 이후 무문관의 출현은 수행의 중요성을 고취하는 가장 획기적인 일이 되었으며, 그러므로 순식간에 종단의 분위기를 수행위주로 일신하였다. 이 장거 또한 봉은사 결사로 기인된 것이며, 훗날 부산 범어사까지 그 힘이 뻗어 나갔다. 범어사 극락암을 개축하여 종신 무문관으로 삼고 특별정진과 대서원을 일으켜 분발했던 삶들의 원류가 바로 봉은사 결사였다.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당시에는 미처 생각도 못하고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 시간의 경과와 함께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져 갔고 면면히 이어져 종단의 힘찬 발전과 한국불교의 정신적인 밑바탕이 되었으며 그 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모든 일이 거의 그렇듯이 이러한 결사도 그 당시에는 사람들의 눈이 현실이라는 한계의 벽에 막히고 가리워서 그 참뜻을 제대로 이해하고 알기 어려웠다. 심지어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 또한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 봉은사 결사의 참뜻을 조금이나마 더 깊이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봉은사 결사의 수행공동체는 이와 같이 흐트러짐 없는 질서와 상경하애의 대중화합에 의하여 잘 유지되었고 모범적으로 발전해 나갔다.
광덕스님 시봉일기 7권 『사부대중의 구세송』 글 송암지원, 도피안사
첫댓글 보현선생님께서 말씀도 하셨지요.
시봉일기 7권이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요.
당시 스님과 함께한 여러 스님들의 글들이라 생생한 큰스님의 향기와 정신을 거듭 느낄 수 있는 좋은 자료입니다.
시봉일기를 읽고 큰스님은 이런 분이라고 말하면 옆에 있는 서방님은 글로 나타내서 그런 부분만 비춰지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하지만 여러 스님들께서 한결같은 말씀이시라 어찌 한치의 허트러짐이 있으리오.
봉은사의 수행정진 풍토가 전국 사찰에 널리 퍼짐과 마찬가지로 보현의 소식 널리 퍼지길~~~
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 _()()()_
보현행원으로 보리이루리~~ 마하반야바라밀.._()()()_
큰스님께 감화를 받고 큰스님의 불광운동에 동참하신 스님들께서 지금도 운동을 하시는지 의문이 듭니다.
큰스님의 불광운동이 널리 퍼져서 많은 이들이 함께 행복할 수 있기를 기우너합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
큰 스님들의 법문에 화엄의 보현행을 말씀하시면 더 널리, 우리 불자들 또한 열공하여 자신있게 보현행을 노래한다면 더 널리 퍼져가리라 싶습니다. 내생명부처님무량공덕생명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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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마하반야바라밀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