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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표소(票务中心)에서 셔틀 전동차 표를 끊는 동안 햇빛을 피하여 그늘에서 기다리는 일행. 11월의 날씨답지 않게 20도 중반대의 기온을 보였다. 셔틀 전동차에 오르는 일행들. 적지 않은 인원이라 두 대에 나누어 타고 갔다. 나는 첫 번째 차의 뒤로 앉는 좌석에 앉아서 타고 갔다. 매표소를 지나 아치형 문이 나오는데 그곳을 지나면 석굴 풍경구이다. 아치 위쪽에 용문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석판이 있다. 석굴은 돈황의 막고굴과 비슷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막고굴은 사암이라서 쉽게 파지는 반면 이곳은 바위여서 파내기가 힘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막고굴은 불상을 새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아 외부서 거의 만들어서 안치를 하고, 이곳의 것은 바위를 그대로 깎았다. 화장실 안내판. 용문석굴의 특징을 잘 살려서 만든 것 같다. 돌을 깎아서 만든만큼 결 등에 의해서 아주 잘 다듬어지지는 않은 것 같다. 천장의 벽화가 볼만했을 것 같은데 바위굴이어서 오랜 세월에 퇴색되었다. 막고굴은 거의 프레스코화 기법에 가까워서 색깔 등이 생생하게 살아 있는데... 비교적 잘 살아 있는 천장의 채색 벽화. 나는 미술사학자도 아니고 또 시간도 없고 해서 주마간산격으로 지나쳐야 했다. 손바닥만한 작은 불상인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만졌는지 기름때가 타서 반질반질하다. 우리나라의 석굴암 본존불 같은 모습을 한 불상도 있었다. 역시 손바닥 만한 크기이다. 이하(伊河) 건너편으로 보이는 향산사. 이곳은 만불동이다. 눈에 보이는 것은 본존불과 협시불 5좌 및 뒤쪽의 수십 개이지만 좌우의 점 같은 것이 모두 불상이고 만여 개이기 때문에 이렇게 부른다고 한다. 가까이서 본 작은 불상 조각. 안타까운 것은 이 많은 불상의 얼굴을 모두 정확하게 얼굴 부분을 리한 도구로 깎아냈다는 것이다.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도교신자와 문화대혁명 때의 홍위병의 조직적인 소행이라고 한다. 역사상이 아주 생동감있고 힘이 느껴진다. 용문석굴의 하이라이트는 이곳 봉선사의 비로자나불이다. 정말 규모도 그렇고 새긴 기법도 그렇고 무엇하나 나무랄 게 없는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비로자나불의 모델은 측천무후라고 한다. 아름다운 모습을 영원히 남기기 위해 고종을 졸랐다고 하는데 그림으로 그리려니 빛이 바랜다고 이렇게 돌을 깎아서 만들었다고 한다.약 1400년이 지나도록 이런 모습으로 남아 있지만 만년을 갈까? 인간의 영원은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대하여 가까이 당겨서 찍어본 비로자나불 좌우의 협시불도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였다. 나한과 보살의 모습 역사. 힘이 느껴지고 조금 해학적인 모습이다. 이 역사상을 흉내내어 사진을 찍은 일행이 있다. 측면으로 돌아나오면서 본 비로나자불 다시 돌아서 남은 코스를 보러... 만든 사람은 벌집처럼, 구경하기 위한 시설은 거미줄처럼. 이곳은 전구간이 이렇게 다 가볼 수 있는 것이 최대 장점인 것 같다. 구간이 끝난 지점에서 뒤쪽으로 처진 일행을 기다릴 겸 휴식을 할 겸 모인 장소에서... 이하를 건너는 다리 위에서 본 용문석굴. 가이드가 이곳이 포토존이라고 설명을 해줬다. 이하를 건너서 본 봉선사의 모습. 전모를 보려면 이곳이 제격인 것 같다. 이어지는 코스는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향산사. 향산사는 당나라의 3대 시인으로 꼽히는 백거이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곳이다. 다시 가파른 계단에 사람들이 조금 부담을 가졌다. 가이드 말이 오늘은 평지고 어제처럼 많이 걷지 않을 거라 했는데 스마트폰의 만보기가 알려주는 바로는 어제나 움직인 거리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향산사의 종루. 10원에 세 번을 타종할 수 있다. 일행 가운데 종을 친 사람이 더러 있었다. 자재원통이란 편액이 있다. 장송별서. 이곳은 장개석과 송미령이 낙양에 머물 때 이용했던 곳이라고 한다. 공산당이나 국민당이나 모두 흠모하는 중국의 국부 손문. 손문의 가장 큰 공은 3000년 이상 이어오던 중국의 왕정을 끝냈다는 점일 것이다. 불광보조라는 편액이 붙어 있는 대광보전 이곳의 불상은 우리나라의 것과는 물론이고 중국의 여타 절에 있는 것과도 사뭇 달라보였다. 이날 이곳에는 우리 뿐만 아니라 서울의 불교 모임에서 온 그룹도 있었다. 연못 안의 금붕어. 밑에는 신자들이 던진 동전이 보인다. 물고기에게는 좋지 않을 것임이 분명한데... 저녁빛을 받아 건물의 색이 곱다. 향산사를 내려가는 모습. 아래의 오른쪽에 있는 스님은 동국대의 교수라고 한다. 대동한 일행 가운데 나이가 더 어려보이는 사람이 없어보였는데 그냥 아무에게나 명령 조로 말을 놓았다. 수련이 덜 될 스님일 것이라고들 한마디씩 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을 떠나 수도자의 정신이 결여된 것 같았다. 향산사 바로 옆의 백원은 백거이의 묘역이다. 백거이의 모덤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어둑했다. 백거이의 후손이 쓰고 새긴 백거이의 「이리원상초」라는 시. 백거이 묘 앞에서 조별로 사진을 한 컷씩 하고 내려왔다. 패방에는 망궐이란 글자가 있고, "숭산의 안개는 푸른 비단 장막을 반쯤 걷고, 이하의 물결은 프른 비단 이불을 평평하게 깔았다."라는 주련이 보인다. 2조의 즐거운 식사. 2조는 9명인데 1조 조장이 종종 놀러가서 10명이 되는 수가 많았다. 우리 조의 미스터 쓰 권오관 사장이 가서 술을 한 잔씩 돌리고 왔다. 정주로 돌아가는 버스 안. 모두들 피곤해서 곯아 떨어졌다. 이동 거리는 조금 있었지만 이곳을 기준으로 햇을 때는 결코 먼 거리가 아니었고 덕분에 네 밤을 한 호텔에서 묵을 수 있어서 좋았다. 권사장 호텔 객실에서 본 27기념탑과 광장. 바로 앞쪽에 상성(商城) 빌딩(大廈)가 있었는데 상성이라는 간판만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