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365 김두호기자] 대한민국의 오늘은 가히 ‘박근혜 정국’이다. 이명박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와의 경선에서 패배했지만, 이회창의 출마선언과 여러 의혹들이 붉어지면서 박근혜의 한마디에 모두가 귀를 기울이고 있다. 우리 현대사에서 결코 잊을 수 없는 1979년 10월 26일. 그로부터 세월의 물살은 28년이 흘렀다. 그 비극의 날로부터 질풍노도의 세월을 헤쳐나와 이윽고 선친이 있던 그 자리, 눈물로 떠났던 그 집으로 다시 들어갈 꿈에 도전했던 박근혜.
부모를 모두 잃고 청와대를 떠날 무렵 그는 어떤 심경이었을까? 과연 지금의 자신을 상상이라도 했던 걸까? 필자가 서울신문사 주간국 취재1부 기자시절에 취재해서 쓴 박근혜 전 한나라당대표의 당시 기사를 되살렸다.
■ 고 박정희대통령의 유자녀가 청와대를 떠났다.
‘곧 돌아오마.’면서 신당동 대문을 나선지 18년만에 말없이 돌아와 지난날의 정취가 서린 거실의 상청에 모셔졌다. 청빈한 군인생활 때 다섯 가족이 단란하게 살던 서울 신당동 62의 43호 사저. 공인으로서 마침내 똑같이 목숨까지 바치면서 민족중흥의 초석이 되어간 집주인 부부는 이제 영혼의 세계에서 사인으로 돌아가고 유자녀만이 동네주민들의 감회와 눈물어린 마중을 받으며 옛집을 찾은 것이다.
■마지막 배웅
21일 상오 9시 30분께 청와대 구내방송은 직원들에게 고 박대통령 유족의 이사 소식을 전했다. ‘서거하신 박대통령각하의 유족들이 오늘 청와대를 떠납니다. 마지막 고별인사를 드립시다.’
흐린 하늘에서 이따금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한 이날은 박대통령이 서거한지 만 27일째 되는 날이었다. 평소 가까이서 박대통령을 보필한 청와대 직원들은 무겁고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고별 채비를 했다. 떠나는 유족을 배웅하기 위해 본관 앞뜰에서 정문까지 늘어선 직원들 중에는 비서실과 경호실, 그리고 오랫동안 유족들과 정이 들었던 작업복 차림의 주방종사원, 청소미화원도 있었다.
영식 지만생도는 지난11일 재학중인 육사로 돌아갔고 이날 두 영애만이 출발에 앞서 본관 접견실에 마련된 아버지 상청에서 영정 봉안제례를 지냈다. 청와대에서의 마지막 고별제례였다.
분향이 진행되는 동안 작은 영애는 언니의 등에 머리를 파묻고 흰 손수건으로 괴는 눈물을 닦기도 했다. 제례가 끝나자 장조카 박재홍씨가 앞가슴에 박대통령의 영정을 모시고 통곡하면서 접견실을 나섰다. 뒤따라 훈장을 든 생질 은희만씨. 검은 투피스 상복 차림에 검은색 핸드백을 든 두 영애가 본관문을 나섰다.
사색에 잠겨 거닐던 뜰 안 그리고 고독한 영도자의 숱한 애환이 서린 청와대를 떠나 영혼의 세계에서 평민으로 돌아가는 박대통령의 영정은 생전에 고인이 앉았던 승용차의 좌석에 모셔졌다. 본관을 나선 큰 영애는 도열한 비서실 직원들에게 목례로 작별인사를 했고, 15년11개월 동안 구석구석 정들었던 청와대 뜰에 한동안 시선을 돌리기도 했다. 그러나 큰 영애는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끝내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자매가 애완견「방울이」(스피츠)와 함께 평소 사용하던 피아트 승용차에 오르자 비서실직원들은 복받치는 만감의 교차 속에 울음을 삼켰다. 승용차가 정문을 벗어나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영정 봉송차와 유족의 모습을 놓치지 않으려는 듯 경호실 직원들은 거수경례로, 여직원들은 손으로 두 볼을 닦으며 한동안 자리를 떠날 줄 몰랐다.
■라일락 향기의 추억
초 겨울 날씨 속에 북악산 기슭의 청와대를 떠난 유족들은 신당동 옛집 앞에서 삽시간에 몰려든 2백여 이웃들의 마중을 받았다. 박대통령 가족이 사저를 떠나기 전부터 이웃에 살았다는 박영배씨(60세,신당동55)는 ‘육여사께서 라일락과 목련을 많이 심은 몇 년뒤 봄철이면 그 향기가 이웃 멀리까지 풍겼다.’ 면서 박대통령 유족들이 다시 이웃으로 오게 된데 대해 깊은 감회에 젖기도 했다.
길을 메운 주민들과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눈 두 영애는 활짝 열린 대문을 들어서면서 소녀시절에 살았던 옛집을 확인하려는 듯 사방을 둘러보기도 했다. 아버지의 영정은 5평거실의 새 빈소로 옮겨졌다.
카펫이 깔린 좁다란 거실엔 소파와 책장,장식장, 냉장고가 들어서서 한층 좁게 보였다. 책장엔 세계백과사전, 세계역사사전등 과거 박대통령이 애독하던 책들이 그대로 꽂혀 있었고, 장식장엔 두 영애가 간직해온 인형들이 자리해 있었다. 오른편 벽에는 박대통령과 큰 영애 부녀가 활짝 핀 벚꽃을 배경으로 미소 짓고 있는 상반신 대형컬러사진이 걸려있어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옛집을 찾은 유족은 상청을 옮기게 된 사유를 고인에게 고하는 제례인 고유제를 올리면서 신당동 생활을 시작했다.
이사 온 첫날밤 두 영애는 상청에 저녁상식을 올린 후 사촌오빠 박재홍씨와 저녁을 같이하며 차분하게 앞일을 의논하며 지냈다. 친척, 친지, 청와대직원, 보도진등 붐비던 사람들이 돌아간 옛집은 다시 조용한 분위기를 맞은 것이다.
■혁명의 산실
다섯가족이 둘러앉아 이야기꽃을 피우며 다란하게 살았던 옛집에는 아직도 주인부부의 다정다감했던 정취가 집안 구석구석에 서려있다. 대지 99평에 건평 39평의 방 3개짜리 일본식 목조건물인 이집은 처음 이사했을 당시는 건평17평에 대지 30평이고 나무 한그루 없는 낡고 황량한 주택이었다. 주인은 뜰 앞에 정원을 만들고 산당화(山棠花)도 심고, 목련과 향나무도 심는등 틈틈이 보수를 했다. 붉은 기와지붕은 색이 바랬지만 철제대문과 담, 정원의 돌들은 그때나 다름이 없다. 62년10월 집주인은 ‘곧 돌아온다.’ 며 대부분의 세간을 그대로 남기고 가족과 함께 장충동 최고회의의장 공관으로 떠났다. 이집은 군 시절 부하인 박환영씨(47)에게 맡겼다. 이집에서 고인은 5.16혁명을 주도했고, 한나라의 위대한 영도자가 되어 떠난 것이다.
18년. 뜰 앞에 심어놓고 떠났던 한뼘 만한 산당화는 어른키로 자랐고, 그 무렵 소년 지만군의 키만하던 목련도 이제 지만생도의 키보다 2배가 넘게 자랐다.
이제 역사의 집이기도 한 신당동 62의 43. 이집은 원래 고 박대통령이 육군준장으로 전세방을 전전하다가 두 번째로 장만한 집이었다. 7사단장을 지내던 58년5월에 충현동 집을 구화 3백20만환에 팔고 陸여사가 알뜰하게 은행적금을 넣은 1백여만 환을 보태 4백50만환에 사들였었다. 대통령부부는 낡은 이 목조건물을 형편이 닿는 대로 고치고 다듬었다. 베란다를 꾸미기 위해 사냥개의 OOO를 팔기도 했다. 육여사는 어린시절부터 좋아했던 나무들을 정원에 심었다. 이사온 지 7개월만에 지만군이 태어났고 곧 소장으로 진급해서「좋은 집터」라고 가족들은 즐거워하기도 했던 곳.
지금도 이 부근에서 오래 살아온 주민들은 박대통령이 아침7시 군용지프로 출근 할때면 육여사가 지만군을 안고 배웅하던 모습이나, 육여사가 근처 중앙시장으로 장보러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다. 동쪽으로 향한 4평 크기의 방을 박대통령이 서재 겸 거실로 사용했고, 남쪽으로 향한 방이 안방, 그 뒷방을 두 영애가 사용했다. 지금도 목재 장롱과 육여사가 사용하던 책상, 박대통령이 읽던「이순신장군」「세계전사」등의 책이 그대로 남아있다. 대통령은 청와대로 입주한 후에도 3~4개월에 한번 씩 찾아도 ‘정원의 나무나 돌을 옮길 때도 내게 먼저 알리라.’ 며 옛 추억이 담긴 이집에 애착을 갖고 있었다고 관리인은 전한다.
육여사가 서거한 직후 이집을 찾았던 朴대통령은 육여사가 사용 하던 책상 앞에 앉아 한동안 생각에 잠겨 떠날 줄 몰랐고, 이집에서 관리인과 함께 지낸 장모가 별세한 후로는 대통령의 발길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동안 1년 반 전 청와대에서 데려다놓은 6년생 하얀 진돗개가 朴씨와 함께 집을 지켜왔다.
■정원수의 정령들
생전에 하얀 백목련을 몹시도 좋아했던 고 육영수여사. 손수 심어두고 떠난 이집 정원의 목련이 63년 박대통령이 5대대통령으로 당선되던 해 봄과 가을 두 번 꽃을 피웠고, 7,8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도 산당화와 함께 두 차례 활짝 꽃을 피우는 길조를 보여 주위 사람들을 기쁘게 했다고 관리인은 말한다.
정원 꽃나무에도 혼령이 스며있는 것일까. 산당화는 봄에 꽃이 피지만 알 수 없게도 대통령이 서거하기 3일전부터 빨간 꽃망울을 맺어 열다섯 송이를 피웠다고 한다. 그러다가 국장이 끝나면서 한꺼번에 시들어 집을 지켜온 사람들은 꽃송이도 주인의 넋을 안고 스러져 갔다고 믿고 있었다.
75년 이래 어머니 대신「퍼스트레이디」역할을 맡아 ‘새마음 운동’을 보급하는 등 아버지 대통령을 지성껏 보필해온 큰 영애. 대통령의 딸임을 애써 감추며 소박한 생활로 일관해 온 작은 영애, 그리고 보리쌀 혼식 밥에 김치 깍두기 도시락을 즐겨 싸가지고 다니던 지만생도….
이제 대통령 내외분은 역사로 돌아가고 세 자녀만이 청빈하게 살다간 대통령부부의 손길, 입김이 그대로 남아있는 옛집을 찾은 것이다.
‘빨리 떠나야지요. 곧 다시 뵐 것 같은데..금방이라도 저를 부르며 대문을 들어 서실 것만 같은데 이제 두 번 다시 뵐 수 없다니 정신을 차려야지요. 빨리 떠나야 해요. 가족처럼 가까이 어른을 모셨기에 유자녀들의 눈앞에 있으면 더 마음만 아프게 할뿐이지요.’
21년간 박대통령의 사저를 지켜온 박씨도 박 대통령의 유족이 옛집으로 돌아오면서 자신의 짐을 챙겨 신당동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