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엔 자개장이 부의 상징이었다. 1990년대 초반까지도 그는 “주문이 밀려 피해 다녔다”고 했다. 그러나 수입가구들이 밀려들고 IMF 외환위기가 터지면서 나전칠기 가구는 사양길을 걷기 시작했다.
“자개장을 만들던 사람들의 책임도 컸죠. 수요가 많을 때 너도나도 만들면서 질 낮은 제품이 나돌았기 때문에 소비자들이 순식간에 눈을 돌렸습니다. 나전칠기를 만드는 데 쓰는 상사칼 하나만 들고 나가면 돈 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였으니까요.”
전에 벌어둔 돈이 있으니 공장 문을 닫아도 됐다. 그러나 그는 다른 취미가 없었다. 그는 나전칠기를 떠난 삶을 생각할 수 없었다. 하여, 그는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기 시작했다. 돈을 쉽게 벌 수 없게 된 게 오히려 또 다른 기회가 된 것.
그는 박물관 연구반에 등록했다. 1년에 두 번씩 외국에 나가 그곳 박물관에서 나전칠기 제품을 찾아 연구했다. “이집트와 터키에도 나전칠기 제품이 많더라고요. 중국에서 건너간 것인지 터키 왕궁의 박물관에서 많이 봤어요.”
어디서 새로 유물이 발견됐다는 소리를 들으면 바로 달려갔다. 안압지에서 금은평탈(金銀平脫·금판 은판으로 문양을 붙인 후 그 위에 옻칠을 해서 연마하는 기법)로 만든 유물이 발견되자 이를 재현해 내기도 했다.
작업하고 난 후 버리던 쪼가리 자개를 자개 타일로 활용하는 방법이나 자개를 붙이는 자개 전기인두 등을 개발, 특허를 받았고 나전칠기와 매듭을 접목해 문화상품을 개발한 적도 있다.
요즘 그가 매달리고 있는 것은 주로 실험성 짙은 대작들. 대개의 경우 도안을 구상하고 한 땀 한 땀 수놓듯이 만들어가다 보면 수개월에서 1~2년씩 걸리는 데다 재료도 비싸 몇몇 작품은 1억 원을 훌쩍 넘는다.
그는 상품이 아닌 작품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많은 것이 바뀌었다고 했다. 누가 사는지 모르던 예전과 달리 작품을 사간 사람이 식사 초대를 하는가 하면, “대를 물려 쓰겠다”며 고마워하는 사람도 있다. 2006년 방한했을 때 그의 작품을 사갔던 아랍에리미트연합 왕세자는 “어머니 드리겠다”며 얼마 전 새로 주문했다고 말했다.
그의 곁을 지키던 아내는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 작품을 만들다 죽으면 사람들이 ‘도대체 어떤 기법으로 제작한 것일까?’ 의아해 할 정도로 깜짝 놀랄 작품을 만들겠다고 하지요.”
※자세한 내용은 톱클래스 3월호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