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사여행]
사회주의 중국 건설을 향한 발걸음: 홍(紅)·전(專)의 대결
이념 vs 실용 … 혼돈 극복하고 中 부흥
정권 수립 후 ‘홍·전’ 세력 힘겨루기
1960년대 모택동 ‘홍’ 대약진운동 실패했으나 문화대혁명으로 재부상
1980년대 등소평 ‘전’ 개혁·개방정책으로 경제성장 일궈 강대국 건설

모택동(오른쪽)과 화국봉의 회동을 그린 그림(1977년 5월). 필자 제공

모택동에게 한 홍위병이 홍위병 완장을 달아주고 있다.

인민복 차림의 등소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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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1일 중공정권이 수립됐다. 그전의 중원대륙이 장개석과 모택동을 축으로 한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결장이었다고 한다면, 정권 수립 이후 중국은 이념을 앞세우는 홍(紅) 세력과 실용을 중시한 전(專) 세력 간의 힘겨루기였다고 볼 수 있다. 조속히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해야겠다는 이념적 강박관념에서 모택동은 건국 초 신민주주의 추구를 시발로 대약진운동·문화대혁명 등을 밀어붙였다. 이에 무리가 생기면서 1960년대 초중반에는 경제발전을 우선시하는 유소기(劉少奇)와 등소평(鄧小平)에 의한 실용주의 노선이 추구됐다. 지속된 홍·전의 갈등에서 일단 승자는 후자였다. 1980년대 이래 개혁·개방 정책이라는 등소평의 노선이 부강한 중국을 선사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홍·전 대결이 끝난 것은 아닐 것이다. 심각한 부패, 빈부 격차 및 도농(都農) 격차 등 자본주의화의 모순이 더욱 심화되면 언젠가 다시 ‘홍의 시대’가 찾아올지 모르기 때문이다.
천안문 광장에서 승리의 축포를 울린 공산당은 이제 중국을 공산주의 사회로 전환하는 과업에 착수했다. 처음 설정한 것은 일명 ‘신(新)민주주의 시기(1949~1953)’였다. 이는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단계 사이의 과도기적 상태를 의미했다. 서양과는 달리 ‘반(半) 봉건 반(半) 식민지’ 상태에 있던 중국의 특수한 여건을 감안, 1940년 모택동이 창안한 개념이었다. 이 시기에 추진된 대표적인 정책으로 토지개혁법(1950년 6월)과 농업·공업의 합작화 사업을 꼽을 수 있다. 실행 과정에서 대두된 저항세력을 인민재판이라는 공포와 ‘3반(反) 5반(反) 운동’이라는 선전·통제로 억눌렀다. 항일전쟁·국공내전 등 장기간 혼란을 겪어온 당시 상황에서 하루빨리 질서를 잡고 국가의 기틀을 세우기 위해서는 급진적 정책 시행이 불가피한 측면도 있었다. 하지만 ‘무상몰수·무상분배’ 원칙하에 강행된 토지개혁 과정에서 70여만 명이 반동분자로 몰려 숙청당하는 등 인권유린이 만연했다.
‘신민주주의’ 단계를 이어서 추진된 것은 ‘과도기의 총노선(1953~1958)’이었다. 앞의 단계를 통해 농업과 공업 생산력이 회복세를 보이자 좀 더 노력한다면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달성할 수 있겠다는 판단 하에 설정한 시기였다. 바야흐로 1953년 제1차 5개년 계획이 시작됐고, 1954년에는 기존의 ‘공동강령(임시헌법)’을 대신해 국가 헌법이 정식으로 채택됐다. 이 시기에 추진된 개혁 작업은 공업화와 농업·수공업·공상업의 개조를 의미하는 ‘1화(化) 3개(改)’로 요약할 수 있다. 궁극적으로 생산수단의 공유화를 목표로 일명 ‘합작사(合作社)’를 통한 농업의 집단화와 상공업 분야의 집단화가 추진됐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 전반적으로 농업과 공업 생산력은 증가했으나 점차 도농(都農) 및 공농(工農) 간의 불균형적 발전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과도기의 총노선을 통해 어느 정도 사회주의 단계가 완성됐다고 판단한 모택동과 공산당 수뇌부는 자신들이 꿈꿔온 공산주의 사회를 실현하려는 거대한 실험, 즉 ‘대약진운동(1958~1960)’에 착수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정책은 전국의 농촌을 인민공사(人民公社, 1공사 평균 5000호로 구성)로 집단화하는 것이었다. 특히 철강생산에서 단기간 내에 서방 선진국을 따라잡겠다는 의욕 하에 인민공사 단위로 철강 증산을 독려했다. 전국의 논밭에 조잡한 모양의 구식 용광로가 설치돼 목재를 고갈시키기 시작했다. 곧 이러한 소동의 한계가 드러났다. 과장된 보고, 무리한 목표 설정이라는 기만의 악순환으로 누적된 문제들이 불거졌다. 자연 파괴가 자연재해와 겹치면서 농업생산량이 급감, 2000만~3000만 명에 달하는 아사자(餓死者)가 발생했다. 힘겹게 생산한 철강도 대부분 불량품으로 판명됐다.
상황이 악화일로를 치달으면서 1960년 모택동은 대약진운동 실패의 책임을 지고 제2선으로 물러났다. 이념을 우선시한 ‘홍’의 시대가 가고 실용을 내세우는 ‘전’의 시대가 왔다. 이제 유소기와 등소평이 정치 일선에서 국가경제를 재건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제한적이나마 자본주의적 요소가 도입됐고, 덕분에 1960년대 중반에 이르러 경제가 점차 회복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중요한 요소를 간과하고 있었다. 바로 모택동의 본심(本心)이었다. 그는 진정으로 정치 일선에서 물러난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입지가 점차 좁아지고 있음을 직감한 모택동은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전’의 진영을 향해 회심의 일격을 날렸다.
바로 1966년 이후 거의 10년 동안 중국을 아수라장으로 만든 ‘문화대혁명(1966~1976)’을 일으킨 것이다. 표면적으로 모택동은 대약진운동의 실패 원인으로 지목된 중국인의 사상·문화 개조(改造)를 내세웠으나 속셈은 자신의 정치권력을 되찾으려는 데 있었다. 당시 북경시 부시장 오함의 역사극 ‘해서파관(海瑞罷官)’을 모택동에 대한 은유적 비판이라고 평한 요문원의 글과 이에 동조한 북경대학의 대자보가 불씨가 돼 극좌 사회주의 대중운동에 불이 붙었다. 이어서 모택동이 정치 전면에 등장, ‘사령부를 폭격하라’는 급진적 언사로 일명 ‘홍위병’이라고 불린 어린 청소년들을 선동 및 동원하면서 이 운동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중국경제의 재건을 꾀하던 유소기와 등소평은 거대한 홍위병의 물결에 휩쓸려 실각했다. 대신에 모택동의 후광을 입은 4인방과 인민해방군을 장악하고 있던 임표(林彪) 등 ‘홍’의 세력이 급부상했다. ‘봉건적 잔재를 일소하라’는 외침에 지식인·기술자와 같은 인적 자산이 극심한 탄압과 고통을 받았고, 공자사당·불상 등 문화재를 비롯한 물적 자산이 파괴되고 잿더미로 변했다. 법치가 무너지고 민중의 ‘집단 광기’가 중국 전역을 붉게 물들였다. 하지만 어느 것도 영원할 수 없는 법.
1976년 주은래 및 모택동의 죽음과 더불어 중국은 또다시 ‘전’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바로 그 중심에 ‘오뚝이’로 불린 등소평이 버티고 있었다. 모택동 말년에 복권돼 그의 사후 화국봉(華國鋒)과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등소평은 1978년 이래 ‘실사구시(實事求是)’에 입각해 대내적으로는 개혁을, 대외적으로는 개방을 향후 중국이 나아갈 방향으로 천명하고 적극 추진했다. 공산주의 경제 체제 하에서 낙후된 농업 및 공업 분야의 개혁을 단행하고,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과 경제교류를 활성화하기 위해 남부 해안지대에 경제특구를 설치(1979)하고 이를 확대했다.
이후 놀라운 경제성장률을 보이면서 중국경제는 고속 질주해왔다. 물론 1980년대 말 제2차 천안문 사태로 알려진 정치민주화 요구를 무력으로 진압하는 한계를 드러냈으나 이것조차 중국의 힘찬 기세를 막을 수는 없었다. 개혁·개방 30여 년이 지난 오늘날 중국은 G2로서 미국과 더불어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올라섰다. 과연 그 앞날은 어떨까? 역사의 수레바퀴가 보여주듯이 언젠가 거친 ‘홍(紅)’의 시대가 재현될 수 있을까?
육군사관학교 군사사학과 교수
Songs From a Secret Gar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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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크릿 가든: Songs From a Secret Garden
Secret Garden 1995–present
No.1 - Nocturn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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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bum Title: Songs From a Secret Garden - Secret Garden
Studio/Live Studio Mono/Stereo Stereo Audio CD (April 16, 1996) Label: Polygram Records / PHILIPS (P) 1995 PolyGram A/S Norway (C) 1996 Philips Classics Marketed in the UK by Philips Class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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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겁고 행복한 나날 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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