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원 알기 위해서는 고대 국가의 중심부 아닌 기원지에 주목해야
알타이 사얀山에서 비롯해 순록의 먹이인 이끼 따라 한반도로 이동
바이칼은 거대한 화산지대이며 약 1만3,000년 전 빙하기 후기 이후 고도가 낮고 온천수가 솟아나는 등 사람이 살기에 적합해 유라시아 북방 몽골리안의 창세기가 쓰인 장엄한 역사무대다. 북방민족의 유전자 풀이 이 지역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지형적으로는 알혼 섬과 동쪽의 바르구진 섬, 그리고 서남단을 감싸도는 알타이 산맥에서 바이칼 호로 길게 뻗은 거대한 사얀 산맥, 이르크추크, 코 산맥, 기나긴 붉은가지버드나무 (紅柳) 산맥, 울란우데로 이어지는 큰 틀이 이 지역의 골격을 이룬다.
바이칼 최대의 섬인 알혼 섬은 몽골·시베리아 샤머니즘의 메카다. 이 섬에는 우리 고대설화 인 ‘나무꾼과 선녀’ 이야기와 비슷한 코리족 시조 탄생 전설이 어린 부르칸 바위가 있고 바르 구진 섬과 분지에는 그 코리족의 처족(妻族)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하여 코릴라르타이 메르 겐 아버지와 바루구진 고아 어머니가 짝지어 몽골 여시조 알랑고아가 탄생한다는 설화의 배 경이 이곳이다.
청나라의 학자 정겸(丁謙)은 ‘후한서 오환선비전 지리고증’(後漢書烏桓鮮卑傳地理攷證)에 서 ‘대선비산(大鮮卑山)의 원형이 지금의 알타이·사얀 산맥 지대에 있다’고 말했다. 따라서 알타이·사얀 산맥은 고조선(古朝鮮)의 선(鮮)과 깊은 관계가 있는 산맥이라 할 수 있다. 붉은 가지버드나무 산맥은 홍유(紅柳)·유화(柳花) 성모신앙이라고 할 부르칸과 알혼 섬 부르칸 바위와 재미있는 연결고리를 이루고 있다.
부르칸은 ‘밝’이 아니고 ‘붉’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북방민족들은 태어나고 죽어 돌아가는 곳을 ‘붉은 산’(紅山·赤山)이라고 표현한다. 부르칸은 조상의 공동묘지라는 뜻이다. 그래서 몽골인들은 칭기즈칸의 무덤을 부르칸 산에서 찾는다. 부르칸은 투르크·몽골 말로 하느님 혹은 무당이라는 뜻이다. 여러 전설이 이 산맥에 주로 깃들여 온 점은 아주 흥미있는 일이다.
구릉 같은 밋밋한 소산(小山)이 대부분인 몽골·시베리아 지대에서 홍유 산맥만은 유달리 한 국의 대산(大山)을 닮아 습기가 적다. 스텝 지대에서 볼 수 있는 난쟁이 민들레가 없었다면 꼭 한국에 있다고 착각할 지경이다. 홍유 산맥의 작은 마을에서 코리 부랴트 말을 지키고 있 는 원주민을 만나 느끼는 감격 또한 필자에게는 감회가 새롭다.
바이칼은 몽골·시베리아 고원의 스텝·타이가·툰드라 지대가 모두 만나는 일종의 허브(Hub) 요, 개활지다. 이 지대를 장악할 힘과 경쟁력을 갖지 못한 단계의 어떤 집단이나 개인도 이 곳에 오래 둥지를 틀고 살 수 없었다. 몽골·시베리아 고원은 험준하고 광활하면서도 오비 강 과 예니세이 강을 끼고 있어 비교적 비옥하고 거대한 타이가 스텝 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특히 알타이 사얀 산 일대는 신흥세력이 기반을 구축하기에 적합한 둥지다. 여기서 자라 성 인이 된 집단이 무한경쟁이 요구되는 바이칼 벌판으로 진출해 인력과 식량을 확보하며 고 대 유목제국으로 나아가는 기틀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제국 성립을 기점으로 역 사를 소급해 올라가면 자연스럽게 한민족 북방기원설이라고 할 스키토·시베리아 기원설과 만나게 된다.
기존 한민족의 기원에 관해서는 북방기원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인류 사상 최초로 야생식물 의 작물화와 야생동물의 가축화가 이루어진 지역이 서아시아임은 고고학적 연구 성과로나 생태유전학적으로 모두 확인되고 있다. 선사 이래 식량 생산이 시작된 후 인류는 ‘스텝의 길’ 혹은 ‘몽골리안 루트’를 통해 이동한 것으로 전한다.
또한 유라시아 대륙은 시베리아를 중심축으로 하는 유목적 기동력의 가세로 사람과 생산력 및 전투력이 신속히 이동할 수 있었다. 그 결과는 자명했다. 유라시아 대륙이 다른 대륙에 대해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다. 칭기즈칸 몽골 제국도 여기서 창출됐고, 근대 영·미 해양 세계 제국 또한 그러했다.
사얀 산·바이칼 거쳐 유목제국으로
한민족의 북방기원설은 이런 생태환경의 발전 과정에서 비롯한 것이다. 스키토·시베리아 기 원설이나 오르도스 기원설은 모두 이런 생태 환경을 그 역사 무대로 삼고 있다. 백두산 호랑 이와 시베리아 호랑이가 생태유전학적으로 비슷하다면 백두산의 조선족 또한 그럴 수 있 다. 고원지대에서 고원지대로 돌아다니며 사는 동물의 생태상 그런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백두대간은 그래서 민족의 기원을 추구하는 문제와 관련해 주목해야 할 역사적 연구 대상이 다. 따라서 ‘유목사적 시원(始原)’이라는 시각에서 보면 한민족은 지리적으로 근접한 중국 의 중원지역보다 오히려 알타이·사얀 산맥이나 티베트 고원과 역사적으로 더 밀접하게 접맥 (接脈)돼 있을 수 있다.
시베리아는 스텝·타이가·툰드라 지대로 이루어진 거대한 벌판이다. 아시아 대륙의 4분의 1 을 차지하고 지구 육지면적의 10분의 1에 이른다. 침엽수림 위주로 지구상에서 가장 드넓 은 타이가 지대는 ‘숲의 바다’이며 수많은 짐승의 서식지다. 이런 생태권은 한편으로는 대서 양까지 이어지고 다른 한 편으로는 북아메리카 지역에 이른다.
여기에서 ‘시베리아의 황금’이라는‘모피’(fur)가 주산품인 것은 당연하다. 이런 고원지대에 ‘ 모피의 길’로 불리는 이동 루트는 당연히 백두대간과 접목된다. 아울러 태평양에서 북극해· 대서양으로 이어지는 ‘강해(江海)루트’도 주목의 대상이다. 시베리아에서는 바다 식량자원 이 육상에서 얻는 것보다 많다.
강해루트를 통한 민족 이동 가능성은 한반도가 3면이 바다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에서 그 가 능성이 비롯된다. 그래서 한민족은 알타이·사얀 산맥에서부터 고원 지대를 따라 뻗어내려 춘천에 ‘맥국’(貊國)이라는 ‘산달(山獺) 너구리나라’를 세웠다. 바이칼 호와 거대한 동·서 사 얀 산맥을 거쳐 예니세이 강의 지류인 통구하의 저습지대를 따라 이어져 내려온‘예국’(濊國) 이라는 ‘(숫)수달(水獺)나라’도 강릉에 세워졌다.
역사를 과거의 일로만 본다면 진실에 접근하는 데 한계가 있다.
한민족의 기원을 추적하기 위해서는 고대 국가가 형성된 중심부가 아니라 기원지에 주목해 야 한다. 한민족의 역사적 태반(胎盤)을 보면 고조선(朝鮮)인은 농경 기원이 아니고 순록유 목 기원이다. 따라서 장백산맥의 이른바 큰 산(大山)이 주무대가 아니다. 그 건너편의 대·소· 외흥안령으로 이어지는 시베리아 스텝·타이가·툰드라 지대의 구릉 같은 길고 작은 산이며, 순록의 겨울 주식인 선(蘚·이끼)이 있는 곳이다.
새로운 목초지로 온 고조선人
순록의 먹이인 이끼는 생태상 습기가 많은 응달에서 잘 자란다. 따라서 서(西)시베리아인은 이끼(蘚)가 더 잘 자라나는 새로운 목초지인 선(鮮)을 찾아 알타이·사얀 산맥 지대에서 태평 양(해가 뜨는 동쪽· 朝) 쪽으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끼의 길’을 따라 이동해온 순록유목민이 바로 고조선(朝鮮)인들이다. 그러나 이들은 동쪽 으로 이동해 왔지만 해를 쫓아온 것은 아니다. 남러시아 스텝 지대의 순록유목민은 ‘이끼의 길’을 따라 북쪽에 있는 대서양으로 가기도 했다.
지난 3월 국립중앙박물관 초청으로 온 아오치르 몽골역사박물관장과 체벤도로지 고고학실 장은 몽골·시베리아 서쪽에 있는 순록유목민이 알타이·사얀 지대의 선(鮮)과 코리(高麗)족이 라고 설명했다. 또한 시베리아 동쪽에 있는 순록유목민은 캄차카 반도에 사는 축치와 코리 야크 자치주의 원주민들이라고 했다.
이 같은 몽골·시베리아의 역사를 낳은 ‘자궁’이 바로 바이칼이다. 바이칼은 스텝·타이가·툰드 라가 한데 모인 북방유목민족사의 허브다. 코리족의 시조 탄생지 알혼 섬은 바이칼호에서 가장 큰 섬이다. 조선인의 기원지 사얀(鮮) 산맥은 바이칼 호를 서쪽에서 남쪽으로 병풍처 럼 둘러싸고 있다. 알혼 섬에는 야외 신단이 부르칸 바위에 차려져 있다.
지금도 부랴트 코리족 샤먼은 ‘나무꾼과 선녀’라는 코리족 시조의 탄생설화를 담은 무가(巫 歌)를 춤을 곁들여 부른다. 이는 알타이·사얀 산맥에서 바이칼 호의 알혼 섬을 거쳐 칭기즈 칸이 태어난 헨티 산과 대흥안령·백두산·금강산의 감호(鑒湖, 고대 투르크 말로 무당 혹은 하느님)에까지 그 맥이 이어진다. 마침 생명공학 벤처기업 마크로젠이 ‘동북아 민족 기능성 게놈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코리족의 분포와 역사적 이동루트를 구체적으로 연구 추적하고 있어 그 귀추가 주목된다.
한편 한민족과 몽골족은 소흥안령 상단 징키르 강을 축으로 어느 시기에 이르러 동서로 분 리됐다. 북방유목민족이 형성된 것은 바이칼 지대지만 고대 국가들은 태평양과 인접한 비옥 한 아무르 강 지역이었다. 또한 몽골과 러시아 국경 언저리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올라간 외 흥안령과 대·소흥안령 지역도 고대 국가들이 태동한 곳이었다.
조선과 부여·고구려는 태평양으로 강이 흐르는 거대하고 비옥한 ‘만주권역’에 둥지를 틀면 서 고대 정복제국으로 발전했다. 한민족의 시원을 연구하는 데 ‘코리’에 대한 규명은 아주 중 요하다. 코리는 동(東)몽골에서는 고올리라고 말한다. 한자로는 고리(槁離)·구려(句驪)·곽락 (郭洛) 혹은 고려(高麗)라고도 적는다.
필자는 코리는 ‘순록’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투바대학교의 엔베아바예프 교수는 ‘ 몽골비사’에서 ‘거러거’를 순록이라고 했고, 아오치르 관장은 ‘오룬춘’의 오룬이 옛 문헌에 는 ‘코룬’으로 되어 있다며 순록유목민이 오룬춘이라는 족명의 본뜻이라고 했다.
중국 내몽고자치구의 고고학자인 육사현(陸思賢) 교수는 ‘선비곽락대’ 연구 논문에서 ‘곽락’ 을 선비족 무덤 출토 유물을 분석한 근거로 ‘순록’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일본의 고고학자 마 쓰모토 히데오 교수는 코리는 코리야크 족명의 말로 순록이라는 뜻이며, 실제로 그들은 오 랜 세월 한결같이 순록 유목을 주된 생업으로 해오고 있다고 말했다.
북방민족은 모두 순록인
순록은 에벤키족 말로 ‘오롱’, 오룬춘족 말로는 ‘올렌’, 다구르족 말로는 ‘오른 복’으로 표현된 다. 또한 러시아어로는‘셰베르니(북의) 알롄’이라고 한다.‘오로오’라는 뜻은 ‘길들이지 않은’ 이라는 말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순록(馴鹿)은 원주민들에게는 한자 이름과 정반대로 ‘길들 지 않은 ’사슴(不馴鹿)이 되는 셈이다.
트루크·몽골 말로는 순록을 ‘차아 복’이라고도 한다. 차아는 ‘…을 향해’라는 뜻으로 조선의 조(朝) 와 같다. 중국 길림(吉林)성의 조선족도 순록유목민이다. 반면 대흥안령 북부 훌룬부이르맹 선비(鮮卑)족 원주지에서는 한국인을 선어(鮮語)를 쓰는 선족(鮮族)이라고 부른다. 선(鮮) 에서 선(蘚)을 뜯으며 사는 순록유목민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목초지 선(鮮)에 사는 사람 이라는 뜻이다. 마치 목초지 옹크에 사는 순록유목민을 ‘에벤키’라고 하는 것과 비숫하다.
이처럼 순록유목민에 대한 다양한 이름들은 모두 몽골·시베리아 원주민들의 언어다. 아울 러 이 지대에서 처음으로 고대 유목제국의 틀을 마련한 순록유목민에 관한 호칭이다. 이처 럼 고구려의 종족 이름과 나라 이름인 고려(고올리)는 코리야크족이나 오룬춘족, 다구르족, 투르크·몽골족의 말로 ‘순록’이라는 뜻이다.
당연히 고구려말로도 순록은 코리(高麗)라고 했다.‘몽골’은 맥(貊)+고려(너구리+순록)의 합 성어다. ‘캄’과 ‘부르칸’은 모두 하느님 또는 무당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만, 그 유래에 대해 서는 밝혀지지 않았다.‘코리’와 ‘차아복’ 역시 연구해야 할 과제다. 선비칸의 황금 허리띠 고 리인 ‘선비곽락대’(鮮卑郭洛帶)의 장식을 자세히 살펴보면 이끼가 있는 목초지 ‘선’에서 꼴 을 뜯고 있는 순록의 그림이 있는 것이 보인다.<사진참조>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조선’과 ‘고려’는 둘이 아니다. 조선(朝鮮)은 순록유목민을 목초지 선 에 초점을 맞추어 선족이라고 했다. 고려는 고원지대의 작은 산인 사얀 산맥(鮮에서 蘚이라 는 꼴(牧草)을 뜯어먹고 사는 순록유목에 초점을 맞추어 곽락고려족이라고 부른데서 비롯 됐다. 다만 여기서 유목할 수 있게 가축화한 순록과 단순한 사냥감인 야생 사슴으로 구분하 는 것은 식량 생산 단계와 식량 채집 단계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하다.
고려의 여(麗)자가 ‘아름다운 뿔 한 쌍이 난 사슴’을 뜻하고, 신라의 벼슬 이름 이벌찬(伊伐 ) 과 각간(角干)이라는 글자의 어원은 ‘뿔이 대권을 움켜쥔 영도자의 상징’이다.
고려(高麗)라는 국명은 순록을 의역(意譯)했을 가능성이 크다. 오늘날 한국의 국제적 호칭 인 ‘코리아’가 한국사의 ‘순록유목사’와 선(鮮)의 ‘고려’(高麗)·순록(馴鹿)인 ‘코리’(郭洛)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한민족의 시원 격인 조선과 고구려인은 농 경이 아니고 특수목축인 순록 유목에서 출발한 것이다.
조선과 고구려인은 철기 제조 능력과 함께 타이가라는 숲의 바다에서 무한경쟁이 강요되는 개활지인 광활한 스텝 지대로 나왔다. 말을 타고 양을 유목하면서 목축·농업도 했다.
이 과정에서 마침내 조선·부여·고구려나 북위·돌궐·발해·거란·여진·몽골 등 북방민족들은 정 복제국으로 발전하게 된다. 반면 중국의 한(漢)족은 황하 유역의 그리 넓지 않은 농경 지대 를 토대로 식량 생산에 우위를 보이면서 한민족을 비롯한 북방민족들보다 수적 우세를 확보 해온 사람들이다.
농경민인 중국인의 기원지에는 당연히 순록의 주식인 이끼(蘚)도 없고 스텝의 양초(羊草) 도 없다. 중국이 고구려를 자신의 역사라고 보고 고구려인을 중국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이러한 점에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주재혁 강원대 사회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