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東里<소설가 김동리> 선생의 詩… 우리가 노래 10개를 만들었습니다"
"한 曲 만드는데 대략 20~30분 '향수' 작곡할 때는 열 달 걸려"
#월남(越南)
중공군(中共軍)이 압록강을 건넜다. 그 소문이 평양에 쫙 퍼졌다. 김희갑(金熙甲·74)에게 아버지가 말했다. "남쪽으로 가자." 아버지는 평양 광성중 졸업식을 앞둔 아들이 인민군 의용군으로 끌려가는 걸 두려워했다.
그때 남동생이 생떼를 부리기 시작했다. "왜 나만 빼고 둘만 소풍을 가느냐"는 것이었다. 1951년 1월 4일 가족은 헤어졌다. 아버지와 아둘 둘은 남(南)으로 왔다. 어머니와 딸 둘은 북(北)에 남았다. 그 작별이 12년이 넘는 이별이 됐다.
남쪽에서 김희갑의 운명이 바뀌었다. 연필 대신 기타를 잡은 그는 '한국의 세고비아'로 불리게 됐다. 고(故) 박시춘·박춘석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3대 대중가요 작곡가가 돼 이 땅의 심금을 울렸다. 그가 만든 곡(曲)이 3000을 넘는다.
- ▲ 김희갑은 매일 아침 기타를 치면서 로맨틱하게 양인자를 깨운다. 아내가 글을 쓰면 남편은 그 글로 곡(曲)을 만든다. 책, 음반, 악기가 모여있던 작업실에서 부부가 웃고 있다. 이날 검은 옷을 입었던 양인자는 사진기자가“칙칙하게 나온다”고 하자 노란 스웨터로 갈아입었다. 그런 그에게 사진기자가 다시 “목이 허전해 보인다”고 하자 스카프까지 두르고 나왔다. ☞ 동영상 chosun.com /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해방 한 달 후 함북 나진에서 소녀가 태어났다. 양인자(梁仁子·65)는 그곳에서 여섯달을 살다 부산으로 왔다. 선박정비사를 하던 아버지는 이미 세상에 없었다. 이 유복자(遺腹子)의 앞에는 '재미없는 인생'이 기다리고 있었다.
부산여중 3학년 때 '사건'이 일어났다. 국어시간에 끼적거린 '소설(小說) 숙제'가 대박을 터트렸다. '돌아온 미소', 중3 여학생이 쓴 이 소설에 언론은 일제히 호들갑을 떨었다. "한국의 (프랑스아즈) 사강이 탄생했다!"
그런데 그것뿐이었다. 그 '천재'가 서른이 다 될 때까지 번번이 신춘문예에 낙방했다. 김동리(金東里)마저 그걸 안타까워했다. 스승은 이문구(李文求)에게 당부했다. "재주는 있는 아이니 '한국문학'을 통해서라도 데뷔시켜주게…."
#킬리만자로의 표범
두 사람에게 가왕(歌王) 조용필이 찾아왔다. "제가 만든 곡만 부르다 보니 매너리즘에 빠진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색깔의 노래로 분위기를 바꾸고 싶어요. 선생님이 써주십시오." 김희갑은 아내에게 가사를 쓰라고 했다.
양인자는 싫다고 했다. "노랫말은 쓰고 싶은 말을 다 쓸 수 없다"는 이유였다. 김희갑이 말했다. "그럼 다 써. 멜로디는 내가 알아서 붙여볼게." 부부가 만든 곡은 장장 6분 분량이었다. 그걸 본 음반제작사에서 펄쩍 뛰었다.
유행가엔 불문율이 있다. '3분20초에서 30초'라는 것이었다. 만일 부부가 억지 부려 녹음한 곡을 임정수 '지구레코드' 사장이 듣지 않았다면 지금도 노래방을 울려대는 가요계의 전설(傳說)이 탄생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하모니카, 만돌린, 기타
김희갑의 집안은 부자(富者)다. 할아버지는 한의사, 아버지는 의사였다. 그랬던 부자(父子)를 전쟁이 헝클어놓았다. 미군부대에서 아버지는 접시 닦고 아들은 허드렛일했다. 김희갑은 2년 뒤에야 대성고에 입학할 수 있었다.
김희갑은 축구선수가 꿈이었다. 그랬던 팔자(八字)를 바꿔놓은 게 다름 아닌 하모니카다. 친구가 부는 모습을 보고 단박에 매료됐던 것이다. 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고물상(古物商)으로 갔다. 그는 하모니카 아닌 만돌린을 들고왔다.
―특이한 선친이십니다.
"음악에 원래 조예가 깊은 분이었어요. 제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아버지가 강동 탄광병원장으로 갔어요. 일제(日帝)가 강제로 발령낸 겁니다. 아버지는 근로자들 치료는 조수(助手)에게 맡기고 공연만 하러 다녔습니다. 색소폰도 불고 아코디언도 켜면서."
―왜 하필 만돌린이었을까요.
"제일 쌌으니까요. 6개월가량 악보(樂譜) 보는 법, 연주하는 법을 아버지에게 배웠습니다."
―재미있던가요.
"기본 연주법을 배운 뒤엔 독학으로 공부했지요. 헌책방에서 일본어로 된 교본(敎本)을 구한 뒤 번역해서 익혔습니다. 한마디로 푹 빠졌지요."
―원래 집안이 의술(醫術)이 업(業)인 것 같은데.
"아버지도 나중엔 화를 내셨지요. '음악은 의사가 된 뒤 천천히 취미로 해도 된다'고 설득하려 했어요. 전 '공부는 자신이 없지만 음악엔 자신이 있다'고 응수했어요. 말을 안 듣자 제 만돌린을 내동댕이쳐 부쉈어요. 그걸 전 다시 본드로 붙여 연습을 했지요."
―기타와의 인연은 언제.
"먼 친척 중에 김영순씨라고 계십니다. 김브라더스의 부친이시고 예명이 '베니킴'이었는데 당시 악단장(樂團長)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분이 저희 집에 와 고 이난영의 노래 '목포는 항구다'를 연주했습니다. '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도 저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아버지를 졸라 다 깨진 기타 하나를 사 배우기 시작했지요."
―음악적 재능이 있는 모양입니다.
"재능도 있어야지만 연습이 더 중요하지요. 매일 새벽 3~4시까지 연습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서정식씨가 찾아왔어요. 미8군에서 밴드마스터를 하던 분이었습니다. 제게 '이 동네에 기타 잘 치는 고등학생이 있다는데 누군지 아느냐'고 묻더군요. '기타 치는 학생은 저밖에 없다'고 했지요. 그때부터 머리 빡빡 깎은 고교생 신분으로 미군 클럽에서 1주일에 3~4회씩 공연했습니다."
―선친께서 그땐 반대하지 않았나요.
"제 뜻을 돌릴 수 없다는 걸 아셨나 봐요. '하고 싶으면 해보라'고 하셨어요."
―고교 졸업하던 해에 '김희갑 악단'을 결성했죠.
"저를 포함해 6인조였습니다. 다섯은 고교 동창이었고 한 분은 다섯살 위 선배였어요."
―1·4후퇴 때 헤어진 어머니와 여동생들은?
"운명이 묘한 게…, 다른 데도 아닌 대구에서 다시 만났어요. 바로 옆 동네에 살고 계셨어요."
―기뻤겠습니다.
"북의 가족들과 떨어져 지낸 기간이 10년이 넘으면서 제가 아버지께 재혼(再婚)을 권했어요. 처음엔 '됐다'고 했지만 두고두고 말씀드렸어요. 아버지가 새어머니를 맞은 뒤 친어머니가 찾아오신 겁니다."
―저런.
"친어머니가 포기하셨어요. 친어머니는 여동생들과 살다 93세에 돌아가셨습니다. 새어머니는 남동생을 둘 낳고 지금 93세인데 대구에서 사십니다. 제가 양식(洋食)을 좋아하는 게 김치 맛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매일 빵 굽고 버터 발라 양배추에 마요네즈만 뿌려먹었으니까요. 다 전쟁 때문에 벌어진 일이지요."
- ▲ 문갑식 기자
#천재와 불운
소설 한 편으로 가난에 찌들었던 가정이 환해졌다. 콩나물 팔던 홀어머니와 지지리도 일이 풀리지 않던 15살 위 오빠를 먹여살리는 '가장(家長) 양인자'가 된 것이다. 불우한 집안에 찾아온 모처럼의 안온은 고교 졸업까지 이어졌다.
'선작오십가자필패(先作五十家者必敗)'라는 말이 있다. 초반 대박을 믿지 말라는 뜻이다. 양인자가 그랬다. 서울사대 시험날 지각해 낙방했다. 서라벌예대 문예창작과에 수석합격했지만 그때부턴 신춘문예가 한사코 등을 돌렸다.
―가난하면 책을 읽습니까.
"그게 제일 돈이 안 드니까요. 그림을 그리려면 하다못해 크레용이라도 사야 하잖아요."
―국어시간의 숙제가 어떻게 출판까지 됐습니까.
"당시 경남지역 국어교사 모임이 있었대요. 그중에 소설가 손동인 선생이 경남고 국어교사였어요. 그분이 제 국어선생님으로부터 제 소설 이야길 듣고 '어디 보자'고 했답니다. 한번 읽어보곤 '되겠다' 싶었대요. 당시 부산엔 출판사도 없었어요. 대구로 가 책을 냈지요."
―'돌아온 미소'가 어떤 내용인가요.
"아이들끼리 토라지다 다시 친해지고…, 뭐 그런 내용이에요. 지금 보면 창피해요. 남아 있는 책도 없고. 하지만 그때 서울에서 제일 컸던 장안서점에서 그 책을 사려는 사람들이 몰려 줄까지 섰습니다."
―당시에도 신춘문예 열풍이 대단했습니까.
"11월이면 고시(考試)공부하듯 전부 신춘문예 모드로 돌입하지요. 제가 시인 임영조·권오운, 소설가 이동하씨와 함께 문학했어요. 다들 가난했지만 낭만과 자존심만은 대단했습니다. 소설 쓰다 줄거리가 안 풀리면 서로 '어떻게 했으면 좋겠느냐'고 묻기도 했고요."
―대학 졸업 후 기자(記者)가 됐지요.
"서울 중구 필동에 '여학생'이란 잡지사가 있었어요. 그 잡지사 사장께서 제 졸업식날 학교로 찾아왔어요. '돌아온 미소'를 잘 읽었다면서 '우리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은 생각이 없느냐'고 일종의 스카우트 제의를 한 거죠."
―기자를 하면서도 신춘문예에 도전했지요?
"당시 잡지사에 기자가 다섯 있었어요. 방송작가로 유명한 김수현씨가 저보다 세 살 위였습니다. 그도 신춘문예를 노렸어요. 신춘문예는 1월1일자 신문에 발표하지만 통지는 12월20일쯤 오잖아요. 그때까지 연락이 안 오면 풀이 팍 죽죠."
―스트레스가 심했습니까.
"김수현씨가 한 번은 신춘문예에 낙방한 뒤 '이따가 들어올 때 쥐약 좀 사오라'고 하더군요. 진짜로 사갔어요. 그걸 본 편집장께서 어리석은 짓들 한다며 벌컥 화를 냈지요. 김수현씨는 그다음 해에 기자를 그만뒀어요."
―그럼 어디로?
"어느 날 제게 '나 드라마 쓴다'고 하더군요. 당시만 해도 소설 쓰던 사람이 드라마 쓰는 건 여자가 살다살다 다방이나 술집에 가는 것처럼 여기던 시절이었어요. 그가 라디오 드라마 응모작품을 써놓고 방송사에 가져가는 날 제게 그러더군요. '인자야, 난 워낙 재수가 없는 년이니 네가 좀 들고가라'고요."
―그래서요.
"당시 문화방송이 인사동에 있었습니다. 김수현씨가 대학 선배를 만나러 올라간 사이 전 지하다방에서 작품을 펴봤어요. 정말 재미있었어요."
―어느 정도나요.
"'글 다 읽을 때까지 김수현씨가 내려오지 않았으면'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으니까요. 그게 그분의 데뷔작 '저 눈밭에 사슴이'였습니다."
―김수현씨의 글이 신랄한 것으로 유명하지요.
"저희끼리는 '시한폭탄(時限爆彈)'이라고 부를 정도지요."
#음악 제패
'김희갑 악단'이 6개월 만에 해체됐다. 해군군악대장 출신이 대구에서 최고의 7인조를 결성했다. 서울 입성(入城)을 노리는 그 팀에 그가 뽑힌 것이다. 하지만 매일 트럭 타고 다니며 연주하는 고된 생활에 젊은이들도 버티지 못했다.
결국 서울에 남은 것은 기타 김희갑과 드럼 치던 허영욱뿐이었다. 그랬던 그를 서울에 남아 있게 붙잡은 게 미8군 무대에서 공연하던 '락쇼'의 박인순 단장이었다. 락쇼는 미8군 최고 클럽으로 불리던 '에이원 쇼'로 개명(改名)한다.
―대구에서 공연은 주로 어디에서 했습니까.
"나이트클럽은 가벼운 경음악(輕音樂)을 했고 카바레는 무도곡(舞蹈曲)을 연주했지요. 극장 쇼도 있었습니다. 대구에선 공군 홀에서 주로 했는데 그때 정일권 장군, 김구 선생의 아들인 김신 장군 같은 분들을 봤어요. 서울 미8군 무대에 서는 쇼단(團)에는 수준이 있었어요. 더블 A부터 D급까지, 급료에 차이가 많이 납니다."
―그러다 에이원쇼 악단장이 됐지요.
"만 7년을 했어요. 함께 활동하던 가수가 '노란샤쓰 입은 사나이'로 유명한 한명숙, 윤복희, 윤항기 등이었습니다."
―악단장이면 파워가 대단했을 텐데 혹시 스캔들은….
"스캔들이 나면 그 단체에서 나가야 합니다. 그만큼 규율이 엄격했어요."
―미8군 무대를 그만둔 이유는 뭡니까.
"당시 악단들의 수준이 상당했어요. 저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갑자기 고 이봉조씨가 '밤안개'로 방송가에서 유명해졌어요. 그가 시대의 흐름을 앞질러 본 거지요. 저도 늦었지만 그만두고 사회로 나왔습니다."
―'사회'라뇨?
"일반 나이트클럽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5년 동안 연주활동을 하며 작곡을 배웠습니다. 이화여대 교수를 지낸 이교숙씨라고, 해군군악대장 출신입니다. 2년 동안 1주일에 1번 1시간 동안 화성악, 대위법을 배웠어요. 교습생들이 다 프로페셔널들이었는데 그분은 제일 잘하는 사람을 기준으로 삼아요. 못 미치면 탈락시키고요. 숙제가 굉장히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나온 게 김희곡 작곡 제1집이지요.
"12곡을 실었는데 태원의 '사랑아 내 사랑아', 남진의 '불타는 연가' 김상희의 '진정 난 몰랐네' 같은 곡이었어요."
―이봉조씨 때문에 작곡의 길로?
"얼마 전 작고한 박춘석 선생님 권유로 기타 연주도 하고 편곡도 했어요. 오아시스 레코드 손진석 사장께서 제가 공연하는 충무로의 나이트클럽 '엘파소'에 1주일이면 두세 차례 찾아와 밥 사주고 술 사주면서 이러셨어요. '김 선생, 남의 것 편곡만 하지 말고 작곡을 해야지, 왜 이러고 있느냐'고 해요. 1년간 집요하게 권유하기에 넘어간 거죠."
―그렇게 작곡이 싫었나요?
"당시엔 연주가 메인(Main)이고 작곡은 사이드잡(Side job)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작곡해봤자 휴가비 20만~30만원 받는 게 전부였어요. 저작권이 생기기 전까지는요. 지내고 보니 그분이 제겐 은인(恩人)이지요."
―여러 가수에게 곡을 줬을 텐데 누가 제일 기억에 남습니까.
"3000곡 넘게 만들었지만 실제 부른 가수는 그리 많지 않아요. 가수는 체력관리를 잘해야 해요. 술을 너무 좋아하면 오래가지 못하거든요. 남진은 데뷔 때부터 기름진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발성(發聲)이 정감이 있었고요. 나훈아와는 딱 한 번 영화음악할 때 함께 일했어요. '형제들'이라고. 남진, 나훈아 주연영화인데 주제가를 둘이 불렀지요."
―왜 나훈아가 여전히 인기가 있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이잖아요. 나훈아의 별명이 '나통곡'이었어요."
―이미자, 패티김을 비롯해 송창식, 김세환 같은 통기타 가수들에게도 곡을 준 적이 있지요.
"송창식이 부른 '상아의 노래'는 원래 이미자에게 준 곡을 리바이벌한 겁니다. 김세환에겐 '그럴 수가 있나요'를 줬지요. 양희은과는 '하얀 목련' 딱 한 곡 했습니다. 이은하가 부른 '봄비', 키보이스의 '바닷가의 추억, 박건의 '지금도 마로니에는', 이승재의 '눈동자' 같은 곡들이에요."
1973년 양인자는 밑바닥에서 허우적댔다. 10년 넘게 중풍 앓는 노모(老母)와 오빠를 그는 부양하고 있었다. 기자 생활하며 받는 월급으로는 턱도 없는 가난이었다. '눈덮인 킬리만자로 정상에서 얼어죽는 표범'이 바로 그였다.
그때 동화(童話)에 등장하는 '동아줄'이 내려왔다. 김수현이 내려보낸 것이었다. 그가 말했다. "어떤 일을 하면 제일 잘하겠는지 생각해보라"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고민하던 양인자가 선택한 건 라디오 드라마 '부부만세'였다.
―'부부만세'가 뭔가요.
"코미디언 구봉서, 배삼룡씨가 출연한 프로그램이었어요. 부부만세의 한 편 줄거리를 쓰니 김수현씨가 누구를 찾아가보라고 하더군요. 바로 유인촌 문화관광부 장관의 형인 유길촌씨였어요. 원고를 보여 드리니 퍽 마음에 들어했어요."
―그때부터 일이 풀렸지요.
"비슷한 시기에 이문구 선생께서 하던 한국문학에 제가 쓴 소설이 실려 작가로 인정받게 됐지요."
―김동리 선생이 꽤 아꼈던 모양입니다.
"제가 항상 1차에서 떨어졌거든요. 선생님은 항상 '당선될만한 작품인데…'라며 아쉬워했어요. 그때 게재된 소설이 '외항선'이었습니다."
―그 뒤 TV드라마도 썼지요.
"사극(史劇)으로 유명한 MBC 이병훈 PD와 '제3교실'을 하게 됐습니다."
―그즈음 김희갑씨도 만나게 됐다고 들었는데.
"김 선생(양인자는 남편을 선생이라 불렀다)은 제가 '우기(雨期)의 연인'이란 라디오 드라마 극본을 쓸 때 알게 됐어요. 드라마가 15회쯤 나갈 때 김 선생이 전화를 걸어왔어요. '주제가가 아닌 일반가요를 함께 하고 싶다'고. 그전까지 주제가는 제가 작사해 PD에게 주면, PD가 김 선생한테 넘기니 서로 볼 일이 없었지요."
―그 전화를 받고 냉큼 가사를 써줬나요.
"거의 잠도 못 자고 글 쓸 때였어요. 차일피일하는데 김 선생이 또 전화를 걸어왔어요. 그래서 옛날 노트를 뒤적거려 쓴 게 혜은이가 부른 '열정'과 박혜령이 부른 '소녀의 꿈'이었습니다."
―일이 부부의 인연을 가져온 거군요.
"제가 당시 남편과 사별(死別)했을 때였고 김 선생도 이혼한 상태였어요. 그즈음 '주간중앙'의 서병후 기자가 일을 냈어요. 그가 지금 '타이거 JK' 서정권의 부친이에요. 서 기자가 처음엔 전화를 잘못 건 듯했는데 대뜸 '전화한 김에 물어봅시다, 김희갑씨완 언제 결혼합니까'라고 묻더군요. 당황해 '계획이 없어요'라고 했는데 잡지에 대서특필됐어요. 제목이 '수상한 관계'였는데 외국 작곡가, 작사가의 결혼사례까지 넣어서요. 두세 달 뒤 결혼했지요."
―사랑하지도 않았는데 기사(記事) 때문에 결혼했다는 겁니까.
"이 나이에 스캔들이 나면 얼마나 곤란할까 하고 생각하다 '이참에 결혼해버리자'고 한 거지요. 저와 김 선생 모두 밤샘 일을 하고 다음 날 아침 눈이 벌게서 결혼식장인 여의도 63빌딩에 갔어요."
―두 분이 함께 작사 작곡한 노래가 몇 곡이나 됩니까.
"세보진 않았지만 400곡 가까울 겁니다."
―90년대 들어선 뮤지컬도 하고 있지요. '명성황후' '몽유도원도' '킬리만자로의 표범' 같은.
"뮤지컬은 연출가 윤호진씨가 제의했어요. 그분이 '명성황후'를 기획할 때 소설가 이문열씨에게 집필을 의뢰했습니다. 이문열씨는 명성황후를 '시아버지에게 대든 여자'쯤으로 생각했대요. 그런데 파고들수록 자기 인식이 잘못됐다는 걸 알고 '여우사냥'이란 희곡을 완성했어요. 두 분이 누구에게 작곡을 맡길까 상의하다 윤호진씨가 '향수'를 작곡한 김희갑이 어떻겠느냐고 하니 이문열씨도 찬성했대요. 이문열씨는 김 선생을 직접 만나기도 했어요. 그분은 사람을 척 보면 뭔가를 안대요."
―곧바로 작사 작곡에 돌입했나요.
"거기 삽입되는 곡이 60여곡인데 뮤지컬이 무엇인지 모르잖아요. 둘이 함께 영국과 미국에 가서 '레미제라블' '팬텀 오브 오페라' '미스 사이공' 같은 작품을 비교하며 봤지요. 그리곤 기초작업을 했어요. 구기동에 살 때인데 6개월 가까이 열심히 산에 다녔어요. 정작 작사·작곡은 두 달 만에 다 끝났습니다."
#부부
김희갑, 양인자를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사람이 조용필이다. 김희갑은 그가 부산에서 무명시절을 보낼 때부터 알고 있었다.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히트한 걸 보고 '노래는 잘하는데 왜 뽕짝을 할까'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둘은 라디오 드라마 '꽃순이를 아시나요'를 통해서 만나게 됐다. 주제가를 처음 부른 하남석이 13일 만에 대마초 사건으로 하차했다. 대타 조용필도 얼마 안 가 대마초 사건에 연루됐다. 세 번째 주제가를 부른 이가 김국환이다.
―술 잘 마시는 가수를 싫어한다는데 조용필의 술 실력도 대단하지 않나요.
"술꾼 맞아요. 1, 2차 때는 밴드 불러다 자기 좌석에 앉혀놓고 술 마시게 한 뒤 자기가 노래하고 연주합니다. 새벽 1~2시부터 다시 여의도 포장마차에서 소주 파티를 해야 끝납니다. 그래도 자기 관리에 철저해요. 남의 등에 업혀 여관에 가도 다음 날 지장이 없어요. 조영남이 그랬대요. '그 친구(조용필)는 늘 술 마시면서도 음악얘기만 한다'고. 사실 그래요. "
―시인들이 뽑은 한국 10대 가요 가운데 조용필의 '킬리만자로의 표범'이 2위, 역시 조용필의 '그 겨울의 찻집'이 9위에 뽑혔더군요.
"'그 겨울의 찻집'은 양 선생이 경복궁에 있는 '다원'이라는 찻집에서 드라마를 구상하다 쓴 겁니다."
―가수들 중에 예의 없는 사람도 있을 텐데.
"가수와 작곡가의 관계는 냉정한 겁니다. 노래를 잘 소화시킬 수 없으면 곡을 안 주지요. 그건 가수도 마찬가지고요."
―이야길 듣다 보면 연주자로서의 자부심이 아직도 대단한 것 같습니다. '기타 하면 누구'라는 말도 있던데.
"전 지금도 연습을 하고 레코딩도 합니다. 지금 말한 그는 악보를 읽을 줄 몰라요. 쇼단을 할 당시에도 두드러진 존재는 아니었고 연주 때도 실수가 많더군요. 공부를 정석으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지요."
―조용필 보고는 왜 뽕짝(트로트)을 하느냐고 하면서 '립스틱 짙게 바르고' '정주고 내가 우네 '같은 뽕짝은 왜 만들었습니까.
"젊을 때는 어려운 거 외국거 유행하는 거만 좋아했는데 세월이 가니 달라져요."
―작곡을 빨리 하는 걸로도 유명하지요.
"가사를 초견(初見)하면 감이 잡히지요. 가사 자체에 운율이 있으니까. 보통 한숨에 하는데 대략 20~30분?"
―가장 오래 걸린 게 정지용의 시 '향수'였지요.
"가수 이동원을 아끼는데 그 친구가 1988년 '향수'를 들고왔어요. 월북시인 정지용이 해금(解禁)된 게 그 무렵입니다. 도저히 노래가 안 되겠더라고. 열달 걸려 만들었는데 동료 선후배들이 놀랐어요. '희갑이가 그 시를 노래로 만들었다고?'라고요. 대중가요 작곡가의 자존심을 살렸다는 뜻이지요. 그게 나중에 도움이 많이 됐어요."
―뭐가 도움이 됐다는 겁니까.
"저와 아내가 3월 26일 경주 '동리목월문화제'에서 김동리 선생의 시(詩) 열 수를 노래로 만들어 발표합니다."
―김동리 선생이 시도 썼습니까.
"그분이 소설로 알려졌지만 시도 썼어요. 김동리 선생 10주기 때 처음 기획된 건데 한 곡 두 곡 만들다 보니 열 곡이 됐습니다. 이번엔 그룹 코리아나의 리드보컬 이애숙, 김태곤 등이 부를 예정입니다. 새로운 장르의 음악이 될 거라고 자부합니다."
―여러 분야에서 활약했습니다. 연주, 작곡, 뮤지컬에 새 장르개발까지. 영화음악도 몇백편을 했지요?
"1975년부터 6년간 300편 가량했습니다. 첫 작품이 이두용(李斗鏞) 감독의 태권도 영화였는데 그 이후로 한참 동안 태권도 작품만 들어오는 거예요. 전 사랑영화, 청춘영화도 하고 싶었는데 '태권도=김희갑'이 되고 만 거죠."
―이두용 감독의 '피막'이 칸 영화제에 출품됐을 당시엔 영화보다 김 선생의 음악이 더 주목받았다는 이야기도 있던데요.
"당시 오케스트라뿐 아니라 가야금, 거문고, 대금 소리까지 삽입했어요. 이 감독이 현지에 다녀온 후 '주문이 많이 올 것'이라고 했어요. 그런데 하나도 안 들어오던데요."
부부는 용인 동백에 살고 있었다. 창(窓)밖으로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오후 1시 시작된 이야기가 5시간을 넘기고 있었다. 아내는 남편 건강을 챙기려 연신 과일과 음료, 건과류를 가져왔다. 그걸 기자도 눈치봐가며 집어먹었다.
'연예계에는 폭행사건도 많았다는데…'라고 물었다. 김희갑이 말했다. "명동 신상사는 '목포의 눈물'을 좋아했어요. 그가 들어오는 걸 보고 연주해주면 무척 좋아했죠. 충무로 '오따'는 '갈대의 순정'만 연주하면 술이며 담배를 던져줬고요. 생각하는 것처럼 살벌한 사회는 아닙니다."
김희갑 취재가 김희갑 양인자 취재로 변했다. 그걸 눈치챈 양인자가 말했다. "지난번 최하림 시인 기사에 나온 부인처럼만 해주세요." 하늘에서 수제비 같은 눈이 쏟아졌다. 두 사람 얘기 쓰려면 힘깨나 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