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의리산성(원수봉산성)을 찾아서: (11-09번 연번 93회차) 산과 산성 답사 결과
대전에서 1번 국도를 따라 연기군이 있는 조치원쪽으로 차를 달리면 (금남면) 대평리를 지나 금강이 나오고 다리를 건너면 행정도시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세종시가 펼쳐진다. 좌측 금강변따라 건설중인 일부 아파트와 4대강 보의 하나인 금남보가 모습을 드러낸다.
예전의 마을 모습은 온데간데 없다. 상전벽해라는 말이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인지 완전히 다른 모습이다.
금강다리를 지나면 바로 나성리 토성이 있고, 조금 지나서 3거리에서 우회전하여 금강변을 따라 동쪽으로 달리면 전월산이 있는 양화리 삼/산세거리에 이른다. 삼세거리는 경상도, 전라도로 갈라지는 곳이라해서 생긴 이름이라고 한다. 이 세거리에서 냇물을 따라 북쪽 방향으로 올라가면 연세초등학교가 나오고 산밑으로 동네가 있다. 진의리 이다. 진의리(眞儀里)는 지명유래를 보니 진여울에서 나온 것으로 금강여울이 길다해서 생겼다고 한다. 진의리 뒷산에 산성이 있고 이 산성은 바로 원수봉과 이어진다. 결국 양화리(陽化里)는 뒤에 전월산(轉月山:약270m)을, 진의리는 뒤에 원수봉(元帥峰:약230m))을 두고 앞으로는 금강을 바라보고 있다. 금강과 마을 사이로는 장남평야가 넓게 펼쳐져 있다. 지금은 금강변에 쌓은 튼튼한 제방 덕택에 넓은 장남평야를 안고 있지만, 예전에는 마을 앞까지 강물이 드나들었을 것이다.
그래서 생겨난 이름이 진여울이라는 데 수긍이 간다.
진여울은 어찌어찌하여 진의리라는 그럴듯한 한자지명을 얻게 된 것이리라.
예전에는 경상,전라도로 가는 중요 도로가 진여울 앞으로 해서 앵정이나루로 지나가고 있슴을 양화리 앞의 세거리 지명에서 알 수 있다.
나루와 도로를 지키는 그 곳에 진의리 산성 /원수봉 산성은 자리잡고 있다.
동네 노인에게 원수봉과 진의리 산성을 물으니 성재길을 일러준다.
성재는 원수봉과 진의리 산성 사이에 있는 고개다.
(진의리) 백동에서 원사골로 해서 연기현 치소가 있었던 연기리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연기군의 뿌리가 연기리이니 지금은 비록 작은 마을이지만 여전히 당산/당산성도 있고, 옛관아터에 옛지명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곳이다.
성재라는 이름도 성이 있는 고개라는 뜻이니 산성과 관련이 있는 이름이다.
진의리산성을 찾아 나선다.
우선 지형도를 보면서 지명유래를 살펴본다.
(1:5만 국립지리원 발행 1978년판)
지명 유래(연기군 홈피에서 발췌)
진의리
조선 태종(太宗)때에는 공주(公州)에 속했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公州郡) 삼기면의 지역이었다. 이 지대 앞을 흐르는 '금강의 여울이 길다'해서 '긴여울''진탄(眞灘)''진의(眞儀)?라 불려 왔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혁 때 '창동(倉洞)''덕성동''가정리''성전리''송현리'와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 '복룡리'를 병합하여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어 진의리(眞儀里)가 되었다.
진여울
구리(舊里)에 있는 장군봉(將軍峰)이 마치 장군들이 대좌하고 원수가 출진(出陣)하는 형상이라 해서 진탄이라 하였다. 진탄(陣灘)이 곧 '진여울'과 통하는데 '진여울'이란 여울이 길다는 뜻에서 금강변(錦江邊)의 진여울이라 부른다.
창말
진여울 옆에 있는 마을이다. 창동(倉洞), 모창골 이라고도 부르는데 옛날에 창고가 있었던 마을이라 하여 '창말'이라 부른다.
흰여울/백동(白洞)
진여울 남동쪽에 있는 마을이다. 백동(白洞)또는, 백야동(白也洞)이라고도 부르는데 '희여울'이란데서 연유한 지명(地名)이며, 지금은 변해서 '흰여울'이라 부른다.
장군바위
부하를 통솔하는 형상의 바위로 고려 충렬왕 때 연기대첩시 장군이 이곳에 올라 지휘했다고 한다.
종촌리(종촌리)
조선 태종(太宗)때에는 공주(公州)로 합쳐지기도 했었으며 조선말엽에는 공주군 삼기면의 지역이었었다. 지대가 낮은 산등성이에 있으므로 일찍부터 개화(開化)한 지역이다.
낮은 산등성이에 있다 해서 '밀마루''종촌(宗村)'이라 부르다가 '장터'로 통칭하기도 했었다. 1914년에 행정구역 개혁 때 이웃마을을 병합하여 종촌리(宗村里)라 하고 연기군 남면에 편입(編入)되었다. '밀마루'가 종촌(宗村)이라 부름은 종(宗)은'밀종', 촌(村)은 '마루촌'이란 이치에서 그리된 것이라 한다. ‘장대(場垈)'라고도 부른다.
전에는 '도리미'라 불렀다.
앵청이나루
예전 이곳에 '앵청이'라는 아가씨가 주막을 하고 있었는데, 뭇 사내들이 이 곳에서 쉬어가곤 하다가 나루터 이름도 그 아가씨 이름을 따서 '앵청이나루'라고 부르게 되었다.
앵청이 나루는 강 건너 반곡과 연결되어 있으며 전설에 의하면 앵청이라는 처녀가 우연히 알게 된 새우젖 장사 총각과 만나 백년가약을 약속하였는데 그 총각이 새우젖을 가지러 배를 타고 서해안으로 갔다가 약속된 날짜에 돌아오지 않자 그곳에 주막을 만들어 운영하면서 매일같이 기다렸지만 결국 만나지 못했다는 이야기이다. 그 여인은 남자를 기다리다 뭇 사내의 유혹을 모두 물리치고 처녀로 늙어 죽었다고 전해진다.
산세거리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를 갈 수 있는 세 갈래의 길이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양화리와 진의리를 통털어 이르는 마을 지명이다.
느랑이고개
'느랑이'동쪽에 있는 고개를 '느랑이'고개라 부른다. 조치원에서 대전(大田)과 공주(公州)로 통하는 고개인데, 고려 충렬왕 17년(1291년)에 한희유(韓希愈), 김흔(金?)등이 원(元)나라 장수 설도간(薛?干), 나만알대왕(那蠻?大王)과 함께 '원수봉'과 정좌산(正左山)에 웅거하였다가 크게 침입하는 거란군사들을 맞아 정좌산(正左山) 아래에서 싸워 이기고 이 고개에서 또 크게 이겨 공주(公州) 고마나루까지 추격 섬멸하였는데, 적의 시체가 30여리에 널려 있었다. '의랑티(儀浪峙)'라고도 부르는 고려 때의 격전지이다.
나성과 나성 나룻터
백제시대 웅진성을 방어하는 성(城)이 있다 해서, 나성(羅城), 나리재라 부르다가 서기 1913년에는 공주군 요당면에 속했고, 서기 1914년 행정구혁 개혁 때 이웃 구역(區域)을 병합하여 나성리(羅城里)라 하고 연기군(燕岐郡) 남면(南面)에 편입(編入)되었다. 옛날에는 나루재라 불렀는데 그 후, 성(城)이 있어 나성(羅城)이라 불렀다고 한다. 독락정(獨樂亭)위에 있는 성이 토성(土城)이어서 나리재와 토성을 합쳐 '나성'이라고 불렀다. 수로가 발달했고 나루터에서 나리재로 변형되었다고 본다.
나성나룻터
나성(羅城)앞 금강(錦江)에 있는 나루터로, 나성(羅城)에서 금남면 대평리(大平里)로 건너가는 나루터를 '나성나루터'라 부른다.
(*진의리토성/산성에 관해서는 언급이 없다.)
<대평리 금강교를 지나 우측으로 나성을 막지나면 3거리가 나오고 우회전해서 동북쪽으로 바라본 진의리산성(전면)과 뒤의 뿔처럼 솟은 원수봉>
<금강변을 따라 가다 양화리 세거리 앞에서 본 진의리 산성(앞의 낮으막한 세봉우리)과 뾰족한 원수봉 :
사이로 성재가 있다. 원수봉 뒤로 또다른 뾰족봉우리가 작게 보인다 >
<바짝 다가가서 본 원수봉의 모습>
<원수봉 정상에서 동쪽으로 바라본 전월산: 그 앞으로는 금강이 흐른다.>
<전월산의 서쪽 앞에는 양화리 동네가 있고 앞에는 금강이 흐른다. 세거리 에서 앵청이나루로 건너서면, 연기군 금남면 이 있고 금병산 줄기가 동에서 서로 이어진다. 6 .25 때도 금강방어선의 격전지 :금강방어선이 무너지자 대전을 포기하고 낙동강전선까지 후퇴한다. 강과 산은 현대에도 중요한 전략적 지형지물>
<금강너머로 대전의 금병산 줄기가 병풍처럼 이어져 나가고, 끄나는 곳에 우산봉이 안산산성을 안고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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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봉 정상에서 내려다 본 진의리 산성의 속모습>
(원수봉에서 바라본 계룡산 연봉들- 앞에는 장남평야가 드넓다. 금강 다리가 보이고,
그 옆에 나성이 있는 나성리만 세종신도시 건설현장에 섬처럼 있다.일부 아파트가 건축중이다. 금강 금남보 공사현장이 바로 아래로 있다.)
<원수봉 정상에서 북쪽의 연기리 당산성 쪽과 조치원 시가지>
< 성재에서 원수봉 올라가는 기슭에 있는 원수산 유래비: 문필봉 등의 다른 이름, 원나라군 의 반란 진압 이야기 등이 적혀있다.>
<성재에서 진의리 산성으로 향하다 뒤돌아본 원수산의 뾰족한 봉우리 모습>
<성재고개 원수산줄기가 진의리산성으로 연결되는 열십자 한복판에 서있다.>
<진의리산성 올라가기 : 토성의 윤곽이 보인다. 산성임을 알려주는 표지 하나 없는 곳을 더듬더듬거리며 확인해본다.>
<전형적인 토성의 모습으로 성안은 평평하기가 이를데 없다. 민간인 모의 흔적들이 여기저기 있고>
< 평평한 회곽도와 잘 닦아논 듯한 평지에는 억새와 아까시들이 묘목밭처럼 자란다.>
<치처럼 여겨지는 토성의 서쪽 편>
<도너츠처럼, 장자리는 토성이고 그 둘레를 평평한 곽도로 둘러싸고, 중앙에는 장대지처럼 생겨 마치 네모난 짚모자 형상이다.>
<모자 정상부에는 움푹 파인곳이 숲에 가려져 있다. 저장고터로 추정되는 곳>
<토성의 외곽 부분이 비교적 선명하게 남아있다. = 나중에 체육공원으로 조성하기 안성맞춤인데, 걱정이 앞선다.>
< 서쪽계곡부에서 찾아낸 우물: 지금도 사용중인지 치성드린 흔적들이 있다. 물길과 수구, 연지 등이 함께 있었던 듯 늪지 형태다.>
< 예전 모습을 간직한 우물의 안쪽>
<성의 안쪽에 있는 수구와 문지 접근로 살펴보기>
< 근처에서 주워 모은 토기 조각들>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가 갈라지기도 하고 합쳐지기도 하는 세거리 복판에 행정중심도시가 들어선다. 역사의 우연인가, 필연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