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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의 전체 주제가 ‘종교와 문화’에 관한 것이지만, 범위를 좁혀 ‘기독교라는 종교와 문화’로 한정짓고 싶다. 그 이유는, 내가 학부에서 철학을 전공하며 종교일반에 대해 공부하기는 했지만, 또한 석사 과정 졸업 논문에서 비교종교학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이웃종교에 대해 감히 이러쿵 저러쿵 말할만큼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종교는 삶이며 체험이다. 이론 만으로는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는 것이다. 내가 함부로 불교에 대해서, 또한 깊고 심오한 영성을 가진 이웃종교들에 대해서 함부로 언급하여, 그 종교가 갖고 있는 심오한 아름다움을 훼손할까 두렵다.
그러므로 부득이 이웃종교 - 요즘 종교간의 대화를 모색하는 사람들은 ‘타종교’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종교는 상호 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자라온 ‘이웃’이며, 인류와 세계의 희망을 위해 공헌해야 할 공통의 숙제를 안고 ‘함께 진리의 길을 찾아가는 길벗’이라는 공통 인식이 있기 때문이다 - 에 관한 논해야 할 부분이 있을 때는, ‘이웃종교의 아름다움’에 한해서만 언급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이웃종교의 문제점을 지적할만큼 종교에 대해 폭넓게 알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이해해 주시기 바란다.
독실한 기독교인이라면 종교를 문화의 범주에 넣는다는 것 자체로 기분이 나쁠 수 있겠다. 아니, 종교를 문화 속에 포함시키는 것까지는 이해한다 하더라도 기독교를 문화 속에 넣는다는 건 도저히 용서못하겠다고 분개할 수 있겠다.
이렇게 기독교를 이웃종교와 차별화하고, 문화의 범주를 넘어선 특별한 것으로 구별짓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는 기독교 전통은 “기독교는 종교가 아니라 복음이며, 하나님의 계시”라는 특이한 생각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사실 이런 식의 선민사상은 유일신 종교의 보편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유대교나 이슬람교, 기독교 모두 이런 식의 ‘절대신념체계’를 갖고 있으며, 이런 신념은 당연히 선민사상으로 연결된다. 절대자는 자기들의 신념 체계를 통해서만 ‘하늘(차원)의 진리’에 도달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셨고, 이웃종교를 통해서는 상대적으로 조금 길을 열어주셨거나, 혹은 진리에 도달하는 길을 완전히 차단하셨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정 종교 교리가 아무리 자기만의 절대성을 주장해도 종교는 인간 문화의 총체적인 산물이며, 상호 간에 연결되어 있다.
문화란 무엇인가? 사전적 의미의 문화는 ‘인류의 지식·신념·행위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문화의 정의를, 영국의 인류학자 E.B.타일러는 저서 《원시문화:Primitive Culture》(1871)에서 깔끔하게 정리했다. “문화란 지식·신앙·예술·도덕·법률·관습 등 인간이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획득한 능력 또는 습관의 총체”라는 것이다. (두산세계대백과사전). 즉 종교는 인류의 가치적 소산으로서의 철학·예술·과학 등과 더불어 인류 문화의 한 부분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렇게 종교를 인류 문화의 한 부분으로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종교를 철학이나 예술, 과학 등과 같이 이성과 판단력에 의해 비판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문화란 사람이 사람을 위해 발전시킨 수단으로서 기능하기 때문이다. 종교 역시 사람을 위한 종교, 사람을 행복하게 하는 종교가 되어야 한다. 사람을 죽이는 종교, 사람 사이에 갈등을 심는 종교는 존재할 가치가 없다는 말이다.
1. 사람 살리는 종교, 사람 잡는 종교
그런데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종교가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는커녕, “사람 잡는”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볼 수 있다. 오늘날 우리는 ‘네오콘’이라는 특수 종교 집단에 의해 움직이는 이상한 나라 때문에 전 지구촌이 흔들리는 이상한 세계에 살고 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미국의 정권을 잡은 보수 기독교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나는 ‘미국’이라는 말을 쓸 때마다, 가운데 ‘개’자를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미(개)국’으로 말이다. 실례가 되는 표현인가? 그렇다면 내 말을 잘 들어주시기 바란다.
오늘날까지 인류 문화를 이끌어온 다양한 문화와 신념체계를 ‘악한 것’ 혹은 ‘상대적인 것’으로 분류하고 자신들의 신념체계만 절대진리를 담보하고 있다고 여기는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무리들이, 그 배타성과 독선을 앞세워 정권을 잡았다. 그들은 기독교(개신교)의 배타적인 정신에 의하지 않으면 세계 평화는 불가능하다고 믿는다. 이런 비상식적인 사람들이 국민에 의해 폭넓게 지지받고, 그 신념체계를 공공연히 지지하는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았다. 이런 나라를 미개국이라고 부르지 않으면 어떤 나라를 미개국이라고 불러야 할까? 나는 이들보다 더 미개한 사람들을 알지 못한다. 오해하지 말기 바란다. 미국인 전체가 미개하다는 말은 아니니까. 부시의 당선이 부끄러워 이민을 가야겠다고 말하는 미국인들이 있기 때문에 미국에 미개인이 많기는 하지만, 미국인이 모두 미개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1) 부시와 빈 라덴
9.11. 테러 이후 부시는 복수를 다짐했다. 성서를 절대 진리로 믿는 독실한 크리스챤인 부시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잊었나 보다. 하긴 형제를 죽인 원수를 어찌 사랑할 수 있는가? 차라리 “나는 분노에 가득 차 있다. 내 형제를 죽인 원수를 반드시 갚겠다” 라고만 말했다면 차라리 그와 미국인의 아픈 마음을 충분히 이해해 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종교적인 메시지를 담았다. “악의 축을 지구에서 몰아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신이여, 우리를 도우소서” 라는 기도말까지 덧붙였다.
부시 못지 않게 빈 라덴 역시 ‘악의 축’인 미국을 용서할 수 없었다. 전 세계를 집어삼키려는 악마를 처단하는 것은 신성한 사명이었고, 그 사명을 위해 “미안하지만 수천 명의 죄없는 사람들이 죽는 것은 감수할만한 일”이었다.
부시와 빈 라덴, 그들은 독실한 종교인이다. 그것도 그들 모두 유일신 종교인으로 그들의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이라는 한 조상을 만나게 된다. 유일신 종교의 커다란 특징 중 하나가, 자신이 믿는 신념체계는 절대자가 친히 내려주신 절대 계시이므로 오류가 없다고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쉽게 확신하여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확신주의자들에 대해 한 사회학자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종교를 잘못 믿음으로 해서 받을 수 있는 피해 중 가장 큰 것은 ‘자주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을 박탈당하는 것’이다.”
어쩌면 부시나 빈 라덴 모두 피해자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들이 자신의 정권과 이득을 위해 종교를 이용하는게 아니라 진정 자신의 종교적 신념에 의해 그런 일을 벌인 사람들이라면, 그들의 눈을 멀게 하고, 이성과 판단력을 마비시킨 종교 교리, 부시와 빈 라덴, 아니 수많은 부시들과 빈 라덴들을 조종하고 있는 그 배타적인 ‘교리’라는 놈이야말로 인류의 행복과 생존을 위협하는 ‘인류의 공적’이다. 나는 그 놈을 반드시 잡고 싶다.
2) 유럽의 30년 전쟁
근세 유럽을 피로 물들인 30년 전쟁은 기독교인들끼리 싸운 ‘형제의 전쟁’이었다. 17세기 초반, 유럽 전체가 구교와 신교로 나뉘어 30년 동안 서로 싸우며 죽이고 죽었다.
“하나님께서 친히 세워주신 교회의 권위를 부정한 사악한 개신교인들을 박멸하기 위해” 구교는 일어섰고, “유일무이한 계시의 말씀인 성서의 권위를 인간의 전통으로 바꾸어 악마의 도구가 되어버린” 구교를 타도하기 위해 신교 역시 일어섰다. 서로를 사탄이라고, 악마라고 부르면서 속된 말로 “피터지게” 싸웠다. 30년 동안 지속된 처절한 싸움을 통해 겨우 그들이 배운 것이 ‘공존’이었다.
그들이 함께 믿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고 싶다. 모든 기독교인은 하나님을 인격신으로 믿는다. 그래서 아버지라고 부른다. 자식들이 서로 자기 생각만이 옳다고, 자기와 생각이 다른 저 놈은 원수요 마귀라고 부르며 싸우는 모습을 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땠을까? 그런데 그 아버지는 왜 자식들의 처절한 싸움에 개입하지 않았을까? 개입하지 못한 것일까, 안한 것일까? 이쯤되면, 전지전능하다는 하느님의 능력과 존재 양식, 인격성, 성품까지 점검받아야 하는게 아닐까?
3) 강의석과 대광고등학교
작년 6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의석군 사건 역시 그 놈의 ‘교리’라는 허깨비가 사람을 잡은 경우라고 할 수 있겠다. “예수를 믿지 않으면 아무리 착하게 살아도 지옥에 갈 수밖에 없으며, 아무리 태산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예수 믿고 회개하면 천국에 간다.”는 것이 개신교의 핵심 교리이다. 이 교리를 절대 진리로 믿고 있는 보수적인 개신교인에게는, 한 사람이라도 더 전도하여 ‘예수 믿는 사람’ 만드는 것이 절대선일 수밖에 없다.
대광고는 바로 이런 신앙관에 기초하여 설립되었다. 그러므로 대학에 보내는 것보다, 국어 영어 수학 가르치는 것보다, 상식적이고 합리적인 인격인으로 양성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 아니 그와는 비교할 수 없는 절대절명의 사명이 “한 사람이라도 더 예수 믿게 하여 천국보내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대학가면 뭐하겠는가. 60-70년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으면 지옥에 갈텐데... 아무리 훌륭하고 합리적인 인격을 가졌으면 뭐하겠는가. 예수 믿지 않으면 어쩔 수 없이 지옥에 던져져 꺼지지 않는 불 속에서 영원히 고통을 당할텐데...
대광 사람들은 결코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매우 양심적이고 헌신적인 교육자들이다. 대광은 투명한 모범사학이다. 그랬기에 그처럼 꿋꿋하게 자신의 신념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 약점이 있었다면 그처럼 당차게 사회와 지성인들에 맞서 싸울 수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들의 신념이 정말로 타당한 진리라면, 그들이 옳은 것이다. 그렇게 해야 한다. 그 길만이 생명을 살리는 길이니까... 대광 사람들과의 대화는 쉽지 않다. 아니, 불가능할 지도 모른다. 그들은 확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교리를 저버리는 것은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나는 그들에게 오직 한가지만 주문하고 싶다. 당신들의 그 신념을 한번 만이라도 의심해 달라. 당신들의 그 신념이 예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무지와 역사의 왜곡에 의해 잘못 만들어진 교리는 아닌지, 한 번만이라도, 제발 한 번만이라도 의심해 달라. 그리고 차분히 역사 공부, 열린 신학에 대한 탐구를 진지하게 해 달라.
믿음으로 대광을 지키겠다는 대광 사람들을 비롯하여, 배타적이고 독선적인 교리가 옳다고 찰떡같이 믿고 있는 보수 기독교인들에게 ‘기독교 언어’로 말하겠다. 만일 당신들이 예수보다 사람이 만든 교리와 전통을 더 중시한다면, 그것이 바로 우상숭배다. 하나님보다 배타적인 교리를 더 받든다면, 당신들은 신성모독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4) 슈바이처 박사와 테레사 수녀
지금까지 종교가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살펴보았다. 물론, 기독교만이 아니라 다른 이웃종교들도 잘못된 교리나 관행에 의해 사람을 죽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처럼, 나는 이웃종교에 대해 잘 모른다. 내가 이웃종교의 경전을 조금 들여다 보았다고 해서, 논문 좀 들쳐보았다고 해서 함부로 평할 만큼 종교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게 아니다.
그러므로 내가 살아왔던 기독교 전통의 범주 내에서 계속 말할 수밖에 없다. 만일 종교가 이렇게 사람 죽이는 일만 계속 한다면, 당연히 종교는 없어져야 한다. 그런 시각에서 지금 안티기독교인들이 ‘기독교 박멸 운동’을 벌이고 있다. 나는 그들을 이해한다. 아니, 어느 면에서 그들과 함께 하고 싶다. 한국 기독교가 진정 인류와 사회를 위한 종교로 거듭날 수 없다면, 나도 기독교박멸에 동의하겠다. 그러나 아직까지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나는 ‘기독교 박멸’이 아니라 ‘기독교의 교리적 독선과 배타성 박멸’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걸 없애면 기독교는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가? 종교의 참다운 가치가 교리에 있는가, 삶에 있는가? ‘구원받고 천국간다’는 개념이 왜 만들어졌는가? 사람을 살리는, 영원히 살리는 기능에 초점을 맞춘 개념 아닌가? 교리는 그 수단이 아니겠는가?
이런 점을 일찍이 간파하고 ‘불확실한 미래의 저기’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지금 여기’에서부터 ‘사람 살리는 일’에 나선 이들을 소개하고 싶다. 우리가 너무나 잘 아는 슈바이처 박사와 테레사 수녀에 대한 얘기다.
그 분들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으므로 반복하지 않겠다. 그들은 왜 아프리카로, 혹은 인도로 가서 사람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고 돌보아주며 치료해주고 섬겼는가? 그들은 사람을 ‘교리를 통해’ 보지 않았다. 다시 말하면 ‘예수 안믿으면 지옥갈 죄인’으로 보지 않았다. 기독교 교리가 아닌 생동적인 신앙에 의해, 피부 색깔이 다르고 문화도 다르지만 그들 모두를 ‘하나님의 형상(인격)대로 지음받은 고귀한 인격체’로 보았다. ‘하느님의 인격을 닮은 사람, 그래서 그토록 고귀한 사람’이 처절한 삶을 살고 있다. 슈바이처는, 테레사는, 그런 현실을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어찌 하느님의 딸아들들이 그토록 비참한 삶을 살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존귀하신 하느님의 딸아들답게 살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못하다. 그렇다면 내가 가서 그들을 섬기고 그들을 존귀한 삶으로 인도하리라...
그것이 바로 슈바이처 박사와 테레사 수녀가 아프리카와 인도의 오지로 찾아간 이유였다. 그리고 그런 삶이야말로, 진정 종교인이 갖고 있는 아름다운 정신이요 힘이다. 예수께서 가르쳐주신 인류 사랑의 정신은 바로 그것이었다. 기독교의 중심은 바로 그런 인류애가 되어야 한다고 나는 확신한다.
2. 종교는 인간 행복을 위한 수단이다
1) 꾸란의 힘과 정신
‘꾸란(코란)’하면, 악마의 경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것 같다. 나도 한 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다. 그러나 나의 그런 미련한 생각은 대학 3학년 때 ‘종교철학’이라는 과목을 배우면서 여지없이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당시 교수님께서 내주신 숙제를 하느라 꾸란을 읽던 나는, 한 구절에 이르러 숨이 멎어버릴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진실로 너희의 종교는 하나이니라.” ‘너희의 종교’는 유일신 삼형제, 즉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를 말한다. 꾸란은 유대교와 기독교를 형제로 품고 있었다. 기독교는 이슬람을 철천지 원수요 미개하고 잔혹한 이방종교로 여기고 있었는데...
우리는 엉뚱한 생각을 마치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꿈 깨라”는 말을 곧잘 한다. 이슬람교를 하찮은 종교로 치부하는 어리석은 기독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빨리 꿈 깨라. 계속 그 꿈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면 당신들의 종교는 아놀드 토인비의 예언처럼 “역사의 박물관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이왕에 이슬람 얘기를 했으니, 하나만 더 하고 싶다. “한 손에 검, 한 손에 꾸란...” 이라는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으리라. 어떻게 이해하는가? “믿으래, 죽을래?”로 이해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그건 무식한 서양놈들이 기독교적 편견과 증오심에서 곡해한 것이다. 이 말은 이런 뜻이다. “너희가 검을 들고 전쟁터에 나가더라도 한 손에는 꾸란을 들어라. 만약 꾸란을 들지 않고 검만 든다면 너희는 짐승이 될 것이다.”
성서의 세계가 전부라고 믿는 보수 기독교인들이여, 마음의 눈을 열어라. 세계는 넓고 종교는 다채롭다. 혼자 무지개(하나님의 약속의 상징)를 독차지하려고 하지 말라. 영롱한 일곱빛깔 무지개의 한 부분이 되라.
2) 원효 대사 이야기
원효대사께서 하신 말씀 중에 ‘환호환 탄환사’라는 말씀이 있다. 마술사(환사)가 마술을 부려 호랑이를 만들어냈다. 그런데 그 허깨비호랑이(환호)가 돌아서서 마술사를 집어삼켰다는 뜻이다. 사람이 “이렇게 하면 행복할거야, 저렇게 하면 행복할거야” 하면서 여러 가지 ‘삶의 기준’들을 만들어냈다. 그것들이 모여져서 ‘지침’이 되었다. 그것이 더욱 모아지고 사람들의 ‘순수한 열정’, 혹은 이런 저런 이유로 해서 생기게 된 ‘이기적인 왜곡’, 또는 ‘사회적 필요’ 등에 의해 경전으로 탄생하게 되었다. 그것은 어쨌거나 “사람의 행복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 놈의 지침이, 그 놈의 경전이 사람을 죽이기도 한다. 허깨비 호랑이가 자기를 만든 마술사를 집어삼키게 된 것이다. 원효 대사는 이런 현상을 보고 탄하였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그 놈의 신념, 그 놈의 종교가 사람잡는 일은 동서고금을 통해 여전했던 모양이다.
원효대사 이야기 중에 너무나 잘 알려진 이야기가 있다. 중국 유학 길에 어느 동굴에 들어가 주무시다가 너무 목이 말라 주변을 더듬어보니 웬 바가지가 손에 잡혔단다. 들어보니 친절하게 마실 물까지 들어있는게 아닌가. 대사께서는 시원스레 물을 들이키시고 갈증을 푸셨다. 숙면을 취하셨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아침에 깨어보니 그 바가지는 해골이요, 해골 바가지 안의 물은 시체썩은 물이었다는 이야기다. 그 사건 이후로 대사는 큰 깨달음을 얻고 중국 유학을 포기하셨다. 이미 얻을 것을 다 얻으셨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사건을 통한 대사의 깨달음의 내용에 대해서는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 사건을 경험한 대사께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심생즉종종법생, 심멸즉종종법멸’... “마음이 나면 만가지 법이 함께 생겨나고, 마음이 멸하면 만가지 법이 함께 멸한다.”는 뜻이다.
예수께서는 ‘천국이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하지 말라’고 하셨다. 나는, 천국은 우리 마음 안에 있다고 믿는다. 지옥 역시 우리 마음 안에 있다. 나를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조상님, 부모님이 예수 안믿었다고 지옥에 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필코 천국에 가겠다는 그 마음은 지옥이 아닐까... ‘지옥이 비기 전에는 성불하지 않으리라’ 하신 지장보살의 마음은 바로 천국이 아니겠는가...
3) 예수 -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종교는 인간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다. 예수님은 이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계셨다. 그는 ‘사람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교리’나 ‘지침’ 따위는 쉽게 어길 수 있었다. 안식일에 해서는 안된다고 규정된 일을 예수는 거리낌없이 행하셨다. 사람들은 그를 질서를 파괴하는 이단자로 보았다. 그런 사람들을 향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는 것이다.” 좀 더 풀어 말하면, 안식일 규정은 사람을 행복하게 하려고 제정된 것이다. 좀 더 확대해 말하면, 율법도 사람을 위해, 종교도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말이다.
사람이 중요하다. 사람이 목적이다. 종교는 수단이다. 사람을 행복하게 하기 위해, 사람을 살리고, 사람 사는 세상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 종교가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죽이는 종교, 사람 사이에 갈등을 심는 종교는 없어져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4) 르네상스 이후 기독교의 고민 - 신이냐 인간이냐
종교개혁 - 사실 이 말도 문제가 있다. 종교개혁이 아니라 교회개혁이라고 해야 한다. 종교개혁이라는 말 속에는 마치 기독교만이 종교이고, 다른 이웃종교는 종교가 아닌 것처럼 생각하는 기독교인의 무지와 교만이 깔려 있지만 워낙 보편화된 용어이니 그대로 쓰기로 한다 - 과 르네상스 이후, 서구 기독교는 물밀처럼 도전해오는 인본주의의 도전에 존립이 위태로운 상황으로 내몰렸다.
특히 개신교 종교개혁운동으로 카톨릭의 1000년 아성이 흔들리자, 카톨릭 내에서 자정운동이 일어났다. 개신교가 태동된 데에는 카톨릭에 책임이 있으므로 카톨릭 내에서도 대항종교개혁운동(counter-reformation)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회(societ of Jesus)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가 선봉에 서서 교육과 선교에 박차를 가했다. 개신교가 미처 정체성을 다잡기 전에 선교활동으로 방향을 돌린 카톨릭은 제국주의 노선과 맞물려 개신교보다 100여년 앞서서 전세계에 선교의 불을 지필 수 있었다.
그러나 유교와 힌두교, 불교 등 동양의 고등종교와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선교사들은 자신의 신념체계에 대한 확신을 더 이상 간직할 수 없었다. 동양의 고등종교들은 성서에 등장하는 이방종교와는 비교할 수 없는 차원의 것이었다. 그들은 자신의 괴로운 심정과 흔들림을 교황청에 보고하였다. 교황청은 바티칸회의를 열고 이 문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근 200여년간에 걸친 치열한 교리 논쟁은 마침내 1960년을 전후해서 수년 간에 걸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결실을 보았다. ‘교회 밖에는 구원이 없다’는 전통적인 카톨릭 신앙이 크게 선회하였다. 당시 공의회의 이론적 기반을 쌓은 칼 라너는 ‘익명의 그리스도인(anonymous christian)’이라는 독특한 개념을 선보이며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지만 마음과 양심으로 그 뜻을 따르는 모든 사람들은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며, “그리스도의 은총은 그들에게도 적용된다”고 하여 ‘교회 밖에서도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개신교에 대해서도 ‘분리된 형제들’로 인정해 주었다. 이웃종교와 선린우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이론적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는, 이웃종교와의 교류가 보다 빈번해진 가운데, 이와 관련하여 기독교는 다음과 같은 세가지 태도를 갖게 되었다.
배타주의 - 기독교 외에는 구원이 없으며, 윤리적, 철학적 가치는 인정할 수 있으나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가능하다는 이론.
포용주의 -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주체는 오직 예수지만,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구원의 경륜은 너무나 크고 넓어 익명의 그리스도인을 포함하므로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을 수 있다는 이론으로 카톨릭 신앙의 주류를 이룸.
다원주의 - 모든 종교는 진리를 향해 함께 걷는 길벗으로, 산 정상에 오르는 길은 다양하지만 정상에 오르면 모두 만날 수 있는 것처럼, 종교의 교리와 예식, 양태가 서로 다르다 하더라도 결국은 모두 같은 진리를 향하고 있고, 결국은 모두 만날 수 있다는 이론.
오늘날과 같은 다원화 시대에 2000년 전에 형성된 교리를 바탕으로 삼는 배타주의 이론은 끝없는 갈등을 양산해 낼 수밖에 없다. 적어도 포용주의나 다원주의로 나아가지 않는 한, 보수주의 내지 근본주의 기독교는 ‘이슬람 원리주의’와 함께 ‘세계적 문제아’로 수많은 사회적 갈등과 싸움을 토해낼 수밖에 없음을 미국의 ‘부시적 신앙인들’이 보여주고 있다.
예수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 있다”고 말씀하셨다. 종교는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 사람이 종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기독교인 중에 이 명제를 거스르는 사람은 예수를 배반하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3. 현대 사회에서의 종교의 역할
1) 과학과 통제력
얼마전 배아줄기세포 연구로 유명한 황우석 교수가 가톨릭교회의 정진석 대주교를 만났다. 두 사람의 대화가 시종 긍정적이고 밝은 분위기에서 유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대주교가 황교수의 연구에 대해 갖고 있던 기본적인 우려는 바뀌지 않았던 모양이다.
9.11.테러사건 이후, 잊을만 하면 터지던 대형 테러가 지난 7월 7일, 올림픽 유치로 축제 분위기에 젖어 있던 런던를 타격했다. 앞으로 언제 어떤 형태의 새로운 테러가 발생해서 지구촌을 또 다시 경악하게 할 지 아무도 모른다. 앞으로는 화학약품에 의한, 혹은 생물학에 의한 대규모 테러가 일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그 피해는 9.11.테러보다 훨씬 더 광범위하고 지속적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국제적으로 이에 대한 대비책은 너무 취약하다.
이제 우리 인류는, 우리 스스로 발전시킨 과학에 의해 언제 어떤 위기를 당하게 될지 모르는 위험에 처해 있다. 불행하게도 현대 과학자들은 과학 자체를 발전시키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과학이 바로 사용될 수 있도록 통제하는 데는 성공하지 못한 것 같다.
통제력을 갖지 못한 과학의 발전, 그것은 ‘과학의 발전’이 아니라 ‘과학의 난개발’이라고 불러야 옳을 것이다. 발전이란 이전보다 향상됨을 뜻한다. 그러나 과학 자체의 발전이란 것이 생태계를 파괴하고 인류에게 더 큰 위협을 주는 것이라면, 그것은 발전이 아니라 난개발이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과학이 진정 ‘발전’이 되려면, 과학 자체의 ‘발전’과 비례해서 ‘통제력’도 함께 발전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과학은 이미 인간의 통제력을 벗어나서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생명과학의 급격한 발전으로, 이미 생명체를 복제해 내는 일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 유전자 조작을 통해서 새로운 ‘종’을 만들어내는 일도 코 앞에 다가와 있는 것 같다.
어느 이론이든 보편화되면 될수록 통제하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핵을 만드는 기술이 보편화되면 핵을 통제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해질 것이다. 유전자 조작술이 보편화되면 지금은 실험실에서 과학자가 겨우 해내는 일을, 후에는 기술자가 마음대로, 원하는 형태의 생명체를 공장에서 만들어내게 될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렇게 되면, 국제적인 협약으로 통제하는 것은 아마 불가능할 것이다.
핵이나 생명공학의 기술 수준이, 테러조직이 약간의 자금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으로 보편화될 때, 그 때가 아마 통제가 불가능한 시점이 되지 않을까? 결국 인류가 무분별하게 난개발해 놓은 과학이 인류의 재앙으로 연결될 가능성은 매우 높아 보인다.
이미 과학 ‘자체의 진전’은 가속도가 붙기 시작해서, 엄청난 진전을 이루어가고 있는데 비해, 우리 인류가 가진 ‘통제력’은 너무나 미비하다. 어쩌면 이미 때가 늦었는지도 모르겠다.
내가 지금 엉뚱한 공상을 하고 있는 것일까? 그런 것이라면 참 좋겠다. 그러나 지금까지 인류는, 공상이라고 생각해 온 많은 일들을 현실화시켰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우리는 박수를 쳐 왔다. 그러나 이제는 박수를 치기 전에, 생각 좀 해 봐야 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가 아니라, “해도 되느냐 안되느냐”를 생각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바로 이런 문제, 즉 과학이 “할 수 있느냐 없느냐”에 집중하고 있는 현실에 균형을 이루기 위해 “해도 되느냐 안되느냐”를 생각하는 인류 집단이 꼭 있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 역할은 교육이 감당할 수도 있고, 국제적 환경단체나 거국적 시민단체 등도 감당할 수 있어야 하겠지만, 종교계 역시 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이런 점에서, 현대 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을 여전히 “매우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2) ‘인내천’ 사상과 ‘하느님 형상’론
현대사회에서 종교가 꼭 필요한 이유에 대하여, 또 한가지 예를 들고 싶다. 나는 ‘진정한 사람다움의 세계를 위하여’ 현대사회에서 종교의 역할이 꼭 필요하다고 믿는다. 동학이 가르치는 ‘인내천’ 사상이나 기독교 정신의 훌륭한 유산인 ‘하나님의 형상’론을 예로 들어보자. “사람이 곧 하늘”이라는 동학의 인간관과 “사람은 하느님의 형상대로 지음받았다”는 기독교 인간관은 큰 흐름에서 맥을 같은 하는 이론이다. 이 두 이론에 의하면, 존재하는 모든 사람은 “그 조건이나 환경을 초월하여 존재 자체로 무조건 귀하다”는 결론에 이른다. 출생 신분이나 학벌, 라이선스에 의해 그 사람의 가치가 규정되는 현실 세계에서 ‘인내천 사상’이나 ‘하느님 형상론’의 가르침은 인간의 존엄성을 되찾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핵이론’으로 기능할 수 있다. ‘모든 조건을 넘어 있는 그대로 존엄함’을 인간 세상에 구현하기 위한 종교의 가르침은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큰 폭발력을 가진 동인이 될 것이다.
물론 다른 신념체계에 의해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논할 수 있고 실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타자(조건이나 환경, 라이선스 등)의 간섭없이 ‘사람에 대한 절대 긍정’이 종교적 사유 밖에서도 지속적이고 정열적으로 추진될 수 있을까? 추진될 수 있다 하더라도 과연 종교만큼 밀도있게 추진될 수 있을까? 만약 슈바이처 박사와 테레사 수녀가 그 마음 속에 예수를 품지 않았더라도 그들의 휴머니즘만으로, 그들의 신념만으로 자기를 온전히 내어주며, 그토록 헌신할 수 있었을까? 만일 간디에게 힌두교라는 깊고 심오한 종교적 심성이 없었다면, 게다가 이슬람교와 기독교을 아우르는 폭넓은 종교적 탐구심과 경외감이 없었다면, 과연 간디의 삶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
논의를 마치며 - 종교는 ‘지월’이다.
종교, 특히 한국에서 개신교는 역기능이 순기능에 비해 너무 기승을 부리므로 차라리 박멸해야 한다는 것이 안티기독교인들의 논리다. 안티기독교인들 중 상당수는 과거에 기독교인이었으며, 안티 운동의 초반에는 ‘기독교 개혁’론을 수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후 안티기독교운동은 ‘개독(기독교)박멸’로 중심축을 이동했다.
과연 개신교가 인류와 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생생한 종교로 거듭날 가능성은 없는 것일까? 내가 하는 ‘기독교 의식개혁 운동’의 골자는 ‘기독교 교리가 갖는 독선과 배타성 극복’에 집중되어 있다. 만일 그 과정에서 기독교가 소멸된다면, 나는 그것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기독교보다 사람이 중요하기 때문이며, 그것이 바로 예수의 진정한 정신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예수는 사람이 행복할 수 있고 사람 사는 세상이 화목해질 수 있다면, 자신이 또 다시 십자가에 처해진다 하더라도 기꺼이 그 길을 갈 것이다. 불교에 ‘살부살조’라는 말이 있다. 선 수행 중에 조사(선사)가 와서 방해하면 조사를 죽이고, 부처가 와서 방해하면 부처를 죽이라는 말이다. 기독교도 예수를 죽일 수 있어야 한다. 예수를 죽일 수 있을 때, 비로소 기독교는 예수를 진정으로 바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한 가톨릭 선교사의 고백을 나눔으로, 강의를 마치고자 한다.
종교적 신조는
실재의 진술이 아니라 한 암시,
인간의 사고가 못 미치는 저편에 있는
어떤 것에 대한 한 실마리입니다.
요컨대, 종교적 신조는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일 뿐입니다.
어떤 종교인들은
그 손가락 연구에서 넘어서는 일이 없습니다.
어떤 이들은
그 손가락을 빨기에 열중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그 손가락을 써서 자기 눈을 후벼냅니다.
이들은 종교로 말미암아 눈이 먼
고집쟁이 맹신자들입니다.
그 손가락에서 충분히 떨어져서
그것이 가리키는 것을 바라보는
그런 종교가는 참으로 드뭅니다...
이들은 신조를 넘어가 버렸기에
신성모독자로 여겨지는 사람들입니다.
앤소니 드 멜로
분도출판사 간 ‘일분 헛소리’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