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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사, 여행 스크랩 천연 박물관을 다녀온 느낌이 드는 남양주 광릉
늘푸른나라 추천 0 조회 55 13.07.02 09:46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광릉 국립수목원으로 가는 길,

사전 지식 없이 갔다가 되돌아 나와야 했습니다

광릉 국립수목원은 인터넷 예약제로 운영되고 있어서

그냥 갔던 나는 다음을 기약하고 돌아섰습니다

수목원을 나와 가까이 있는 조선왕조의 숨결이 느껴지는

 광릉을 가보기로 하였습니다

가볍게 산책하듯 거닐기에 좋았던 느낌,

복잡한 세상과 단절된 듯한

흙길을 걸으며 왕릉이 있는 곳까지 걸었습니다

그 길이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중 하나인 광릉을 돌아보고 왔습니다

 

 

 

 

 

 

 

 

남양주 광릉(사적 제197호)
광릉은 조선 7대 대왕인 세조(재위 1455∼1468)와 부인 정희왕후 윤씨(1418∼1483)의 무덤이다.

세조는 세종의 둘째 아들로 형인 문종이 세상을 떠난 후 어린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계유정란을 일으킨 후에 1455년에 단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았다.

세조는 군제 개편·집현전 폐지 등으로 왕권을 강화하고, 토지제도 정비·서적간행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1468년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정희왕후 윤씨는 조선시대 최초로 수렴청정을 시행하였다.

수렴청정은 나이 어린 임금을 대신해서 왕대비가 정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당시 예종·성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므로 정사를 돌보게 된 것이다.

정희왕후는 성종14년(1483)에 세상을 떠났다.

왕의 유언에 따라서 무덤방은 돌방을 만드는 대신 석회다짐으로 막았고, 무덤 둘레에 병풍석을 세우지 못하게 하였다.

돌방과 병석을 없앰으로해서 백성의 고통과 국가에서 쓰는 돈을 크게 줄일 수 있게 되었다.

무덤 주위에는 난간석을 세우고 그 밖으로 문인석·무인석·상석·망주석·호석·양석을 세웠다.

난간석의 기둥에는 십이지신상을 새겼는데 이는 병풍석을 세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는 광릉 밖에 없으며, 글자로 난간석에 표시하거나 나중에는 24방위까지 새겨 넣게 된다.

무덤배치에 있어서도 최초의 동원이강의 형식이다.

 지금까지는 왕과 왕비의 무덤을 나란히 두고자 할 때는 고려 현릉·정릉 식의 쌍릉이나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의 무덤인 영릉의 형식으로

 왕과 왕비를 함께 묻는 방법을 취하였으나, 광릉은 두 언덕을 한 정자각으로 묶는 새로운 배치로 후세의 무덤제도에 영향을 끼쳤다.

세종의 영릉이 조선 전기 왕릉 제도를 총정리한 것이라 한다면,

광릉은 조선 전기 왕릉 제도의 일대변화를 이룬 조선 왕릉 제도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문화재청-

 

 

 

 

 

 

 

이른 아침 시간에 왕릉으로 오르는 푸른 숲에 들어선 느낌은

말로 표현이 어려울 만큼 상쾌하고 아름다웠습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새소리를 듣고

푸른 숲 사이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결이

달콤하기까지 했습니다

주말이라서 복잡할 것 같아 일찍 갔던 탓에

정말 한적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입구에 하마비가 있었습니다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남아있는 하마비랍니다

누구나 타고 가던 말에서 내려서 걸어가야 했던 길임을 표시해두었더군요

그곳을 지나 숲길을 걸었습니다

복잡한 도심을 벗어나 이토록 평화롭고 고즈넉한 길을

걸어볼 수 있다는 것이 마음을 들뜨게 했습니다

길옆으로 키가 큰 나무가 에워싸고

흙길로 이어지는 그 풍경이

마치 산림욕장에라도 온 기분이었습니다

 

 

 

 

 

세조는 생전에 친히 자리를 보아두었다가 이곳을 자기의 능지로 쓰기로 결정하고

곧 봉산으로 지정했답니다. 이 때문에 세조 재임 때부터 벌목을 금지한 탓에

5백 년 수령을 자랑하는 고목들이 지금껏 남아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운악산 남쪽 기슭에 있는 광릉 숲은

광릉 덕분에 생긴 것이랍니다

 

 

 

 

고즈넉함을 즐기며 걷다 보니

능입구를 알리는 신성한 지역임을 표시하는 홍살문이 보였습니다

 

 

 

 

 

 

홍살문을 지나면서 맨 먼저 만나게 되는 정자각이 있습니다

제사를 올리는 정자각이죠

정자각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세조 능이, 오른쪽에는 세조 왕비인 정희왕후 능이 보입니다

거대한 두 개의 푸른 언덕이 눈앞에 펼쳐지더군요

언덕으로 이루어진 능에는 가까이 가볼 수 있도록

돌계단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짝. 홀수 제로 한곳씩 돌아볼 수 있게 해놨더군요

제가 찾았던 날은 정히왕후 능만 올라가 볼 수 있었습니다

 

 

 

 

 

 

 

위에 보이는 능이 조선 7대 왕인 세조(1417~1468)의 왕릉이고

아래 보이는 사진이 세조 왕비인 정희왕후(1418~1483)의 능입니다.

 

 

 

 

내가 찾았던 날은 정희왕후의 능을 올라가 볼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기억에 남은 정희왕후의 이야기가 생각나는 것은 무엇일까

단종 1년 수양대군은 어린 조카를 없애기 위해 거사를 준비하는 중

당시 정보 누설로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수양대군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거사를 격려했다는 왕후였다

그렇게 어린 단종을 보냈다는 이야기는

슬프지 않을 수가 없다

 

정희왕후는 윤번의 딸로 수양대군(세조)이 왕위에 오르자 왕비로 책봉되었고

슬하에 덕종, 예종의 2남과 의숙공주를 두었다

장남 덕종이 요절하고 1468년 차남 예종이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로 수렴청정을 하였고

예종이 재위 13개월 만에 죽고 요절한 덕종의 둘째 아들 자을산군(성종)을 즉위시킨다

성종의 나이 13세였다

정희왕후는 어린 성종을 대신해 무려 7년 동안 수렴청정을 했던 왕후로 유명하다

수렴청정 기간 결단력 있는 성품을 마음껏 발휘하여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성종이 성년이 되자 섭정을 끝내고 1476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났다

정희왕후는 온양 행궁시 66세로 승하할 때까지 그 힘은 궁궐에 넘쳐났다고 전한다.

 

 

 

 

 

조선 제7대 왕 세조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그다지 좋은 평가는 아니란 생각을 합니다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한 잔혹한 왕으로 우리에게 더 알려졌다고 봅니다

그러나 역사는 흘러갔고

그는 지금 말이 없습니다

그저 고요한 풍경 속에 잠들어있는 평화로워 보이는 능을 바라보는 우리...

지금 우리는 지나간 이야기를 생각해낼 뿐입니다.

 

(참고로 다 알고 있는 세조(수양대군)의 역사적인 자세한 내용은 생략했습니다)

 

 

 

 

수라간 터가 있더군요.

아래 사진처럼 수라간이 있었는데

지금은 터만 남아 있었습니다

 

 

 

 

 

 

 

개방된 정희왕후의 능으로 올라가 보기로 하였습니다

능에 깔린 푸른 잔디가 정말 시원해 보였습니다.

 

 

 

 

 

정희왕후의 능침에서 바라보는 경관이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푸른 잔디 능선이 왕릉의 신비감과 청량감을

동시에 느껴보게 하더군요..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문화재청-

 

 

 

 

 세조의 능은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지고 골이 깊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에 있다.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자리의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 3월 30일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문화재청-

 

 

 

 

세조의 능은 올라가볼 수 없어 멀리서 담아보았습니다.

 

 

 

왕릉을 돌아보고 돌아가기 위해

다시 올라왔던 숲길을 따라 걸었습니다

날씨는 흐렸지만

울창한 숲이 주는 상쾌함이 신선했습니다.

 

 

 

숲길을 따라 내려오는데

간간이 비추는 햇살이 있더군요

어린 새싹들에 비추는 햇살이 눈이 부셨습니다.

 

 

 

 

왕릉을 관리하시는 분께서

카메라를 메고 있는 우리를 보고

예쁜 초롱꽃이 있다고

초롱꽃 군락지를 소개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숲으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

길에 서서 멀리서 담은 초롱꽃이랍니다

참 예뻤습니다.

 

 

 

 

 

 

 

 

 

왕릉을 돌아보고 내려오는 길에

입구에 있는 재실을 돌아보았습니다.

 

 

 

 

이곳 광릉은 역사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울창한 숲길을 걸어보고

자연을 느껴보는 것도 참 좋았습니다

정말 명당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광릉 일대는 정말 거대한 숲이 오랜 역사를 이야기하듯

천연 박물관 같은 느낌이 들어 감탄하게 되더군요

아름드리 고목이 줄지어 있는 길을 지나며

정말 아름다운 길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광릉 국립수목원은 돌아보지 못했지만

다음엔 실수 없이 예약하고 돌아보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수목원을 지나 봉선사로 향했습니다

다음 편으로 광릉 봉선사를 소개하겠습니다

 

 

비가 오네요...

조금은 시원한 바람이 부는 아침입니다

다음 view가 바뀌면서 뭐가 뭔지 정신이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변함없이 여행기를 소개하는 일이 제가 할 일이 아닌가 싶어요

 하는 일이 있다 보니 블로그에 오래 있지 못하지만

시간이 되는대로 블로그를 들여다보면서

여러 이웃님의 블로그를 다 돌아보고 추천은 드리지만

워낙 많은 분이라서 누구는 댓글을 달아드리고 누구는 빼고 ㅠㅠ 할 수 없어 ...

포스팅은 전부 보고 추천은 드리고 있습니다

죄송하지만, 이점 양해를 부탁 드리며

시간이 허용하는 대로 인사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다녀가시고 댓글 주신 이웃님께 이 자릴 빌어 진심으로 고맙단 인사 놓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기분 좋은 하루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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