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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칠석제 연인의 날-한국여성향토문화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소서노
춘천, 고대역사문화를 절대로 파괴해서 안 되는 이유와
역사문화 콘텐츠를 숙명적으로 개발해야만 하는 이유
노중평
1. 고대역사문화 유적의 파괴를 중지하고 콘텐츠 개발로 눈을 돌려야 한다.
- 이유 1. 紅山文化를 創始한 風夷族과 鳥夷族이 약 1만 년 전 桓國時代에 한반도에 살았다는 증거가 되는 현장을 레고랜드 건설로 파괴하거나 덮어버리는 것은 역사 파괴라는 범죄행위가 된다.
- 이유 2. 中島의 古代集團住居地를 漠朝鮮의 역사유적으로 밝히지 못하면 단군조선의 역사는 중국으로 넘어간다.
- 이유 3. 단군조선시대에 한반도는 漠朝鮮, 산동반도는 番朝鮮, 渤海灣(遼西) 遼東은 眞朝鮮이었다. 중도는 漠朝鮮의 漠이다.
- 이유 4. 막조선의 역사 현장인 중도를 살려내면, 3조선역사를 정립하고, 민정체성을 확립하고, 조선의 역사 복원의 현장이 확보된다.
- 이유 5. 고대 춘천, 즉 濊邑을 건설한 인종이 夫餘國을 세운 濊貊族과 同系 血族이다. 夫餘國과 濊邑의 貊族과 歷史의 동질성이 확보된다.
- 이유 6. 中原의 春秋戰國時代에 한반도에 濊貊이 있었다.
- 이유 7. 풍이족, 조이족, 조선, 막조선, 막, 예읍, 예맥과 관련이 있는 콘텐츠를 개발하여, 현재의 역사, 문화, 관광 자원을 업데이트 하면 대한민국이 역사, 문화, 관광의 대국으로 나갈 수 있다.
먼저, ‘중도역사문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하여 ‘언제? 어디서? 누가?’를 찾는다.
언제와 누가와 어디에서
1). 1만 년 전에, 한반도에 처음 들어온 인종이 風夷와 鳥夷라는 기록
한국
『扶蘇譜書』: 昔有赤帝諱復解號曰祝融 爲‘桓國之帝’開於己卯 都於風州倍谷 娶‘鳥夷’之女姮英 爲后生九子封九州...始出太夏公 卽赤帝祝融之六十一孫也 彼卽‘風夷人’
해석
*‘桓國之帝’開於己卯 都於風州倍谷 娶‘鳥夷’之女姮英
한국의 제가 기묘년에 풍주 배곡에 도읍하고 조이의 여자 항영을 비로 삼았다.
* 爲后生九子 封九州
한인과 항영이 혼인한 후에 아들 아홉을 낳아 9주에 봉했다.
* 始出太夏公 卽赤帝祝融之六十一孫也 彼卽‘風夷人’
태하공 즉 적제 축융의 61세 손이다. 그가 풍이인이다.
중국
《集解》:“鸟夷,东方之民”
清代学者 胡渭 : 今 日本、朝鲜等地当之
●중국은 ‘홍산출토유물’을 ‘風夷部落’과 ‘鳥夷部落’에서 제작한 유물로 정리하였다.
2). 1만 년 전에 風夷와 鳥夷가 살았던 韓半島의 여러 명칭
한국
『檀君世紀』: 三世 嘉勒 戊申十年 豆只州濊邑叛命 余守己斬其酋素尸毛 犂今轉音爲牛首國也 其後孫有陜野奴者 逃於海上據三島 偕稱天王)
『단군세기』: 막조선(한반도)=豆只州, 牛首國, 漠朝鮮
춘천=濊邑, 漠(*추장=소시모리 반란, 여수기 토벌 무신10년 BC 2173)
漠은 貊의 變音, 貊은 獩와 同義語. 貊族의 종족이동으로 멕이코(멕시코), 마야 등의 파생어가 됨
중국
『呂氏春秋』 : 번조선(산동반도)=濊: 東海濱 朝鮮之地
(*동해빈은 번조선이 도읍한 곳)
3). 濊族과 貊族이 합쳐서 濊貊(惠漠)族이 되어 건국한 나라
-濊貊이 肅愼國과 夫餘國을 건국하였다
-濊貊이 漠朝鮮(국도 濊邑)을 건국하였다
4). 濊貊(肅愼, 夫餘 건국)에 대한 한국과 중국의 기록
한국
『扶蘇譜序』
始出太夏公卽赤帝祝融之六十一世孫也 彼卽風夷人也
太夏公初居于灤河當肅愼 洪帝時入於弗咸山北 仍封其地
其國名曰有蘇 以上詳載於桓國史
처음 나온 태하공은 적제 축융의 61세손이다. 그는 풍이인이다.
태하공은 처음에 난하 당시 肅愼에 살았다. 홍제 때 불함산 북쪽으로 들어 와 봉지를 받고 봉지의 이름을 유소라 하였다.
이상은 한국사에 상세히 실려 있다.
(1). 赤帝祝融은 한국을 세운 한인천제이다.
(2). 태하공은 晋州蘇氏의 시조이다. 처음에 己姓 이었다가 檀國의 洪帝에게서 蘇姓을 賜姓하였다.
(3). 태하공은 風夷族이다. (추론, 풍이족은 한인천제 때 赤峰 紅山 출발)
(4). 지금의 난하가 태하공 당시에 숙신이었다.
(5). 홍제 시에 불함산에서 난하로 들어와서 홍제로부터 封地를 받았다. (추론, 풍이족 이동시에 적봉에서 난하 쪽으로 와서 살았다)
(6). 홍제에게서 봉지를 받고 이름을 有蘇라 하였다.
(7). 지금은 일실된 『한국사』에 상세한 기록이 있다.
중국
据《三国志·魏志·夫余传》记载:
“夫余……国有故城,名濊城,盖本濊貊之地,而夫余王其中。
”濊城,即为濊人所建的城。吉林市龙潭山下的古“濊城”,是秽人的活动中 心.......
东北地区到会的“肃慎、秽、良夷、高夷、孤竹、不屠何”等东北夷,其中 “秽的代表,就应该是居住在“濊城”的濊王,其“濊王之印”,亦为中原王 朝所赐。
『삼국지』 「위지 부여전」 기록에 따르면, 부여는...고성이 있는 나라이다. 이름을 濊城이라 한다. 본래 예맥의 땅이다. 부여 왕 중에, “예성 은 예인이 세운 성이다. 길림시 용담산 아래에 옛 예성이 있다. 예인 활동의 중심지였다.
주나라 성왕 때 주나라 때 소개하여 대회를 성사시켰던 낙양이 있다. 동북지구에 모여 이룩한 나라가 ‘예. 양이, 고이, 고죽, 불도하’가 동북夷族이다.
그 중에서 예(穢)가 대표적인 이족이다. 예성에 예왕이 살았다. 그 증표가 예왕의 인이다. 역시 예왕의 인은 중원의 왕조가 내린 것이다.
(2). 위 문장에서 콘텐츠에 쓸 인종 찾기
(1. 濊와 秽(穢) : 濊는 산동의 東海濱에서 이주해 온 漁民 濊로 볼 수 있고, 穢는 내륙에서 이주해 온 農民 穢로 볼 수 있다.
(2. “濊城”的濊王에서 城이 濊王이 있는 國都라는 것이다. 濊王之印은 濊國王의 玉璽로 볼 수 있다.
(3. 中原王朝所赐는 ‘중원의 왕조가 옥새를 내렸다’는 뜻인데, 중원의 왕조는 번조선의 왕인 番韓으로 볼 수 있다.
(4. 肃慎、秽、良夷、高夷、孤竹、不屠何는 동북아에 있었던 小國의 이름이다. 모두 濊가 세운 소국들이다.
(5. 예족이 濊城에 夫餘國을 세웠다.
(3). 長春은 濊族의 활동지역
《后汉书·东沃且传》、《三国志·沿传》都记载当时在长春一带濊族等多个民族活动的情况。
『후한서』 「동옥저전」, 『삼국지』 「연전」 모두 당시에 長春 일대가 濊族 등 다수 민족이 활동한 정황이 있다고 하였다.
(1. 吉林에서 濊族이 夫餘國을 세웠다.
(2. 長春은 濊族의 활동무대였다.
(3. 春川은? 濊邑-漠-漠朝鮮의 國都?
(4. 平壤은? 北漠
5). 춘천 콘텐츠를 만들기 위한 濊邑의 일실된 역사기록의 복원이 가능할까?
-복원하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왕권을 상징하는 銅斧와 비파형 銅劍이 집단주거지인
中島 古邑地에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삼국지』「위지 부여전」을 텍스트로 한 일실된 濊邑 역사기록 복원
-복원의 사유-중국기록의 夫餘國과 한국기록의 濊邑이 동계혈족이기 때문이다
据《濊邑傳》记载:“濊邑(漠)……国有故邑,名濊邑,盖本濊貊之地,而濊貊酋
夫余 城 城 夫余王
其中。”濊邑,即为濊人所建的邑。春川市牛頭山下的古“濊邑”,是秽人的活动中
城 城 吉林市龙潭山 城
心。东北地区到会的“肃慎、秽、良夷、高夷、孤竹、不屠何”等东北夷,其中“秽
的代表,就应该是居住在“濊邑”的濊王,其“濊王之銅斧,琵琶形銅劍”,亦为番朝鮮韓所赐。 城 印 中原王朝
6). 濊貊은 惠漠이다
喜都——古典时代的长春
在喜都(今长春)融合成为惠漠(濊貊部族),
为了纪念两大部族融入肃慎王国,
肃慎王遂改国号为德惠(得濊),改“喜都”为“合龙(合隆)城”。
西汉时期建立扶余国,渐与中原东汉文化交流。(baidu.com)
惠漠 -- 고대의 장춘
(1). BC 1800년, 숙신 이남의 濊貊(*한반도 이북지역)을 惠漠이라 하였다.
(2). 두 인종이 점차 喜都로 옮겨 모이면서 섞이게 되었다.
(喜都는 지금의 長春-진조선의 국도 吉林 가까이에 있다)
(3). 惠漠(濊貊) 부족이 되었다.
(4). 두 부족이 융합하여 肅愼國을 세워 기념하였다.
(5). 肅愼王은 국호를 德惠(得濊)로 고쳤다.
(6). 西漢時에 惠漠이 夫餘國을 건국하였고, 점차 중원의 東漢文化와 교류하였다.
《左传.昭公九年》:“肃慎、燕、毫,吾 北土也。”
『左传』 「昭公九年」:“肅愼, 연, 호, 오” 는 북쪽 땅이다。
《后汉书·东夷传》:“挹娄,古肃慎之国也”
『后汉书』 「东夷传」:“읍루, 옛 肅愼의 나라이다.”
《北史.勿吉传》:“勿吉国在高句丽北,一曰靺鞨......卽古肃慎氏也。”
『北史』 「勿吉传」:“물길국은 고구려 북쪽에 있다. 말갈이라 한다. 즉 옛 肅愼씨이다.”
7). 漠朝鮮
『太白逸史』: 檀君王儉立都阿斯達 今松花江也
始稱國爲朝鮮 三韓, 高離, 尸羅, 高禮, 南北沃沮, 東北夫 餘,濊與貊, 皆其管境也
『태백일사』: 단군왕검이 아사달에 도읍을 정하니, 지금의 송화강이다. 조선이라 부르기 시작했는데, 삼한, 고이, 시라, 고례, 남북 옥저, 동북부여, 예와 맥, 모두가 조선의 관경 안에 있다.
8). 3朝鮮 竝立期
檀君朝鮮의 강역
(1). 1기: 『朝鮮紀(李固善)』 第4世 檀帝 夫婁 辛丑元年...九月封 仲弟 夫餘于遼西曰茫球王 封三弟夫宇于東海濱曰東平王 封 四弟夫蘇于綏芬河曰句麗王
1기: 전3조선기
제4세 단제 부루 신축원년...9월에 중제 부여를 요서에 봉 하여 망구왕이라 하였고,
3제 부우를 동해빈에 봉하여 동평왕이라 하였고,
4제 부우를 수분하에 봉하여 구려왕이라 하였다.
(2). 2기: 3조선기
『한단고기桓檀古記』 三月十六日築壇祭天
遂卽位藏唐京改國號爲大夫餘改三韓三朝鮮
自是三朝鮮雖奉檀君爲一尊臨理之制
2기:『한단고기』3월16일 단을 쌓고 하늘에 제사지냈다.
장당경에 가서 즉위하고 국호를 대부여로 고쳤다.
3한3조선으로 고쳤다.
스스로 3조선이 하나와 같이 3조선의 체제를 받들었다.
* 이때의 삼조선은 眞朝鮮(遼西, 遼東), 番朝鮮(山東), 漠朝鮮(韓半島 以北), 三韓(韓半島 以南)이었다.
그림 4 단군왕검은 단국의 국도 수분하를 출발하여 송화강 유역의 아사달(길림)에 와서 BC2333년에 조선을 건국하였다. 이곳이 3조선에서 진조선지역이다.
* 漠은 眞朝鮮, 番朝鮮, 莫朝鮮 중에서 漠朝鮮을 말한다.
『단군세기」 44세 단군 구물에 나오는 막조선漠朝鮮의 漠은 ‘3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는 한반도가 漠’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3). 3기: 막조선기
《經稗》 3권에 朝鮮句麗諸國 禹時實皆在靑城
『경패』 3권에 조선 구려 등 여러 나라가 실제로 모두 청주 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
* 진시황 8년(BC 238)에 번조선과 진조선이 멸망하였다.
* 漢 무제가 BC 108년에 秦을 멸망시켰다.
* 한 무제가 같은 해에 막조선을 멸망시켰다.
* 한 무제가 위만을 멸망시켰다.
*『단군세기』는 47세 고열가 단군이 계해년(BC 238) 入山修 道(구월산)에 들어 갔다고 하였다.
* 단군이 없는 조선을 5가가 6년(革年) 동안 다스렸다.
중국기록
《史記》 * BC 108년 한무제가 한반도에 있는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이듬해에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주, 한 무제가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것이 아니라, 위만이 番韓 準에게서 빼앗은 번조선 땅(산동반도 66만㎢) 중에서 위만이 점령한 땅 30만㎢를 빼앗은 것으로 보인다.
이해에 위만의 땅과 함께 막조선(한반도 22만㎢)이 멸망하였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대신에 산동반도에 있었던 진짜 위만의 땅 30만㎢을 기록에서 누락시켜 역사에서 사라지게 하였다.
(4), 위만의 국도
(1. 위만의 국도를 평양(왕검성)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
(2. 요동군의 험독으로 보아야 한다.
(3. 險瀆의 險이 儉으로 변음이 되었다고 본다.
(4. 王儉城은 險이 儉으로 변음이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5). 王險城과 王儉城
(1.『태백일사』「삼한관경본기」檀君王儉時: 阿斯達(吉林)-王儉城
(2. 《史記》 西漢時: 險瀆(遼寧城)-王險城, 險이 儉으로 변음
(3.『북부여기 상』3세 단군 高奚斯: 馬(漠)韓의 서울 平壤 王儉城- 漠이 馬로 변음
(6). 위만의 험독과 막조선의 멸망
(1. 한무제가 BC 108년에 위만의 험독과 막조선을 멸망시켰다.
(2. 《사기》에 평양(왕검성)에 있는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기록은 험독의 위만과 막조선의 北漠을 위만의 험독으로 대체한 기록이다.
(3. 《오례통고五禮通考》 201권: 한무제가 설치한 玄菟, 樂浪 2군이 다 옛 嵎夷의 땅으로 靑州지역에 있었다고 하였다.
(4. 옛 우이 땅이었던 청주지역은 한반도가 아니라, 산동성, 요녕성, 하북성 일대에 해당한다.
결론
진은 진조선과 번조선을 멸망시켰고, 한은 막조선과 위만을 멸망시켰다.
마지막으로 콘텐츠 개발을 위하여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 고인돌, 집단주거지 등 가시적인 유물은 발굴된 현지에 보존할 수 있도록 전시물 보존대책을 세워야 한다.
- 본 제안서에서 취급하려는 것은 무형의 역사문화 콘텐츠 개발 방향을 제시 하자는 것이다.
* 콘텐츠 개발의 목적
1. 춘천의 중도는 조선을 구성하고 있던 3조선 중에서 막조선의 국가군장의 도읍지임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유적지이다.
2. 중도 유적지의 훼손을 방지하여 보존한다.
3. 중도를 중심으로 한 조선의 역사문화 콘텐츠를 개발하여 활성화 한다.
4. 국가미래문화의 창달은 물론 막대한 관광수입의 증대를 기하도록 한다.
* 콘텐츠 개발의 방향
1). 역사성을 살리는 고조선 역사문화 콘텐츠를 제작한다
桓國, 倍達那羅, 朝鮮
2). 각 시대별 인종명칭을 활용한다.
桓國時代: 風夷, 鳥夷, 島夷, 九桓, 九皇
倍達那羅時代: 風夷, 九黎, 倍達
朝鮮時代: 濊, 貊, 濊貊, 東夷, 東平國, 望球國, 句麗國, 朝鮮, 眞朝鮮, 番朝鮮, 漠朝鮮
春秋戰國時代: 濊貊, 三韓, 馬韓, 萊夷, 牟, 涿, 苗, 弁韓, 辰韓
2). 각 시대별 국가명칭을 활용한 역사문화 콘텐츠를 개발한다.
桓國, 倍達那羅, 豆只州, 牛首國, 朝鮮, 眞朝鮮, 番朝鮮, 漠朝鮮, 濊貊,
萊國, 鄒國, 牟國
3). 중원과 한반도를 무대로 한 역사문화 콘텐츠를 개발한다.
山東地域: 번조선,
遼西∙遼東地域: 진조선,
韓半島2/3地域: 막조선
吉林: 아사달,
춘천: 漠∙濊邑,
평양: 北漠, 王儉城
* 역사문화 콘텐츠 제작에서 역사성을 훼손하지 않아야 할 조건
1).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조선시대와 조선시대 전후로 한다
2). 작품의 지리적 배경은 중도에 있었을 것으로 생각되는 막조선의 막(예읍)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전개되어야 하되 대륙으로 확대되어도 무방하다.
3). 역사의 학습효과가 있어야한다
4). 국민정서에 합치해야한다
5). 범 인류가 추구할 수 있는 보편성이 확보되어야한다
麻姑之那(역사상실, 영토상실, 인종상실) Complex의 치유
6). 간단성, 단순성, 지속성, 현장성, 집단성, 대중성, 역사성이 구비된 축제를 개발한다.
7). 스토리텔링을 반드시 해야 하되 예술의 장르에는 성역을 두지 않는다.
드라마, 영화, 뮤지컬, 음악, 춤, 그림, 소설, 시, 번역 등
8). 원작의 경우에 다양한 전문성과 기능을 활용할 수 있는 집단창작도 가능하다.
9). 매 작품마다 창작을 위한 역사자문기구를 구성하여 창작품에 역사성을 확보하도록 해야 한다.
* 콘텐츠에 포함하여야 할 내용
야외용 콘텐츠 제작을 원칙으로 한다
1). 역사기록에 있는 2세 부루단군 때의 國中大會 축제 개발
2). 祭天儀式
3). 濟唱
4). 단군왕검을 感應神靈으로 呼唱하는 請陪
(1). 감응청배(산천거리, 도당거리)
(2). 제석거리(삼신칠성거리)
(3). 별성거리(한인천제청배거리)
(4). 창부거리(부루단군청배거리)
(5). 성조거리(성조대신청배거리)
(6). 대감거리(단군왕검청배거리)
5). 祭禮
(1). 麻姑를 本主로 모시는 제례
누구든지 참여자가 본주의 호명으로 신이 되어 祭酒를 마시는 의식
본주가 덕담으로 참여자에게 예언해 준다
(2). 한인, 한웅, 단군왕검을 三聖으로 모시는 제례
누구든지 참여자가 宗廟祭禮에 준한 俎薦祭로 진행하는 의식
大祝이 天符經을 朗誦한다
(3). 조상에게 올리는 三獻祭祀
누구든지 자기 조상에게 올리는 初獻, 亞獻, 終獻의 三獻祭祀
5). 스토리텔링 축제
(1). 등단하여 10년 이상 활동한 작가에게 작품의 스토리텔링을 위촉하는 축제
각 장르별로 작품료를 지급하며 창작을 독려한다.
(2). 등단한 10년 이하 작가에게 작품의 스토리텔링을 위촉하는 축제
각 장르별로 작품료를 지급하며 창작을 독려한다.
(3). 공모하여 신인을 뽑는 축제
각 장르별로 공모하여 신인을 뽑도록 하는 축제
6). 선정된 스토리텔링을 작품으로 제작하여 축제에 올린다
(1). 작품은 장르를 불문하고 제작한다.
(2). 제작된 작품은 상연, 상영, 공연, 발표, 발매한다.
(3). 작품제작 희망자는 내국인, 외국인을 불문한다.
2015. 3. 6. 제안자 노중평
~위 글은 "세계석학들 춘천중도로 세계사 다시 쓰다"1:
환단만년참정의실천단-대표법인 한국여성향토문화연구원,한국신교협동조합
3월 6일 학술회의 (국회) 발표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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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칠석제 연인의 날-한국여성향토문화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소서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