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마음챙김과 완전한 지혜-위빠싸나 수행의 완성
아짠은 아나함과(不還果)를 완전히 확립했지만 설법을 하고 제자들을 수련시켜야 하는 책임감 때문에, 완전한 궁극의 도달을 위해 정진을 계속할 시간이 없었다. 그러나 치엥마이 숲에서는 홀로 편력을 하며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 정진했으며, 뜻밖의 여러 가지 선물도 얻었다. 그 숲은 아주 쾌적한 분위기로 충만하여 몸과 마음은 기운이 넘쳐서 정진을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출 수 있었다. 마음은 경계를 늦추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최상의 다르마가 곧 구현되고 고의 소멸이 멀지 않은 것 같았다. 힘센 다르마의 사냥개가 교활한 번뇌의 여우를 궁지로 몰아넣어 싸움은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이제 궁지에 몰려 힘이 약해진 번뇌에게는 오직 파멸만이 남아 있었다. 다르마의 사냥개가 번뇌에 달려들어 곧 끝장을 낼 것이다. 아직 싸움이 끝나지는 않았지만 결과는 결코 역전될 수 없었다.
마음의 계발이 이 정도 단계에 이르면, 마음은 확실히 완전한 마음챙김(mahāsati)과 완전한 지혜(mahāpannā)를 확고하게 갖추게 된다. 이 단계에서는 마음챙김과 지혜를 통제하기 위한 특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아도, 그것들의 작용이 약해지거나 없어지지 않는다.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자동적으로, 완전한 마음챙김과 완전한 지혜가 안팎으로 자신을 둘러싸며 빠르게 퍼져 나간다.
이 상태에 이르면, 마음챙김과 지혜를 의도적으로 계발하고 통제해야만 하는 수행의 초기 단계와는 확연히 다르다. 초기 단계는 아이들이 즐기는 ‘뱀과 사닥다리’ 놀이가 진행되는 과정과 매우 흡사했다. 한 번 빠르게 위로 도약하는 듯하다가, 다음번에는 함정에 빠져 처음 시작되었던 곳으로 도로 곤두박질치는 점에서도 유사했다. 이것은 하고 저것은 하지 말라는 지시들, 이런저런 이유로 이렇게 저렇게 관찰하는 지혜, 이런저런 것들을 적절히 다루는 방법, 이 모든 것들은 완전한 마음챙김과 완전한 지혜를 이루기 위한 요소들로서 단단히 새겨진다. 완전한 마음챙김과 완전한 지혜가 작용하는 데에는 어떠한 의식적인 노력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밤낮으로 매순간 작용하여, 마치 물이 꾸준히 물웅덩이로 흘러 들어와 절대로 마르지 않는 것과 같다.
감각(受)· 인식(想) 또는 기억․ 의지적 작용(行)․ 의식(識)의 상호 연계성을 찬찬히 관찰하였고, 마음챙김과 지혜의 화살은 이 4온을 일관된 목표로 삼았다. 아나함과의 단계에 이르렀으므로, 5온 중 물질은 관찰의 주제로서의 중요성을 잃는다. 나머지 비물질인 4온은 소위 ‘남자’ ․ ‘여자’ 혹은 ‘동물’등의 배후에 영속하는 실재성을 지니지 않는 것으로서, 4온이 일어나고 머물며 유지되고 사라지는 모든 변화의 과정을 자아가 아닌 무아(無我)에 입각해 광범위하고 철저하게 관찰해야 한다. 비물질인 4온 중 어느 것에도 ‘남자’ ․ ‘여자’ ․ ‘동물’ ․ ‘나’ ․ ‘너’ ․ ‘그’ ․ ‘그녀’ ․ ‘그들’이라는 구분은 없다. 이러한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단순한 기억이나 지식에 의해서가 아니라 통찰력과 지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지식과 지혜의 차이는 워낙 커서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난다는 점을 유념해야만 한다.
지적 축적의 기억을 통한 인식은 감정을 자극하고 정신을 산만하게 만들며 자기기만을 증가시키는 경향이 있다. 이른바 설법이라고 하는 형태에서도 이러한 경향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수준이 낮은 강의는 흔히 사소한 말싸움이나 남의 허물 찾아내기, 따발총 쏘듯 말하기 등으로 얼룩져 있다. 아이러니컬하게도, 이 모든 것들은 번뇌를 소멸시키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가시킨다.
참된 설법의 목적은 번뇌의 근절이다. 더없이 그럴듯한 말로 떠벌이면서 지혜를 계발하고 진리를 찾겠다는 것은 단지 번뇌로 귀결되는 헛된 노력일 뿐이다. 번뇌는 수행을 통해 지혜가 계발되는 정도에 따라 감소되다가 종국에는 완전히 제거될 수 있다. 완전히 계발된 지혜의 감시 하에서는 은폐될 수 있는 번뇌란 없기 때문에 마음챙김과 지혜는 모든 번뇌를 파괴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이다. 바로 이 지혜를 통하여 붓다와 그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깨달음을 성취할 수 있었다.
지식이나 경험, 또는 심사숙고만으로는 절대로 그 경지에 이를 수 없다. 지식이나 경험이 쓸모없다는 말이 아니라, 그것들은 지혜 계발의 초기 단계에서 좋은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심지어 그 단계에서도 잘못된 지식과 경험이 진리를 찾는데 방해가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붓다와 그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한결같이, 지혜의 계발을 통해서 세상에 진리를 전파할 수 있었다. 단순히 지식이나 경험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따라서 불자들은 항상 지적 관념을 경계하고 그것을 절대로 지혜로 착각하지 않도록 수행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식을 통한 인식은 번뇌를 줄여 주지 않으며, 그 방법으로는 절대로 번뇌를 제거할 수 없음을 명심해야 한다. 지적 관념에 의해서 장악된 마음은 여전히 번뇌에 의하여 지배된다.
‘지식의 산은 인간을 향상시키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 시킨다’는 태국 속담이 있다. 지혜를 계발하기 위하여 붓다는 칼라마 사람들에게 심사숙고, 추측, 소문 등을 통한 교리나 개인적인 스승에 대한 믿음을 경계하도록 가르쳤다. 그는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으로 진리를 깨달아서 지혜를 통하여 스스로 무엇이 좋고 나쁜지를 가릴 수 있어야 한다고 충고했다. 이렇게 얻은 지식은 스스로 증명된 것이어서, 어떤 추론이나 논리 같은 것들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붓다와 그의 성스러운 제자들은 그들의 지혜를 입증시켜 줄 다른 누구에게 의지할 필요가 없었다. ‘산디티꼬(sanditthiko)’(스스로 입증한다는 뜻)를 특징으로 하는 다르마가 그들의 가장 믿음직한 보증인이었다.
아짠에 따르면 이 같은 수행 단계에서는 선정에 들어 법열이 일어난다. 먹고 싶은 욕구나 자고 싶은 생각이 전혀 들지 않으며, 몇 날 며칠 밤낮으로 정진해도 전혀 피곤함을 느낄 수 없다. 마음은 어떤 주저함이나 분별심이 없이 번뇌에 대항하여 끊임없이 투쟁한다. 한 순간도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이제 고독한 생활 속의 모든 시간을 낭비하지 않게 된다.
체디 루앙 사원을 떠난 뒤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짠은 농 우(Nong Auh)라는 커다란 늪 지역에 도착했다. 태국 말로 ‘auh'는 기분 좋은 놀라움을 나타내는 감탄사이다. 시도와 실패를 거듭한 후 갑자기 미몽에서 깨어나는 상태를 뜻하기도 한다. 이곳에서 아짠의 마음은 잘 훈련된 기운찬 말처럼 굉장한 힘을 표출하기 시작했다. 마음은 위를 향하여 치솟았다가 아래로 깊숙이 파고든다. 메시지를 포착하고 의식의 모든 세계에 펼쳐지는 장면과 사건들을 목격하기 위하여 뻗어 나가다가 내부의 번뇌를 뿌리 뽑기 위해 다시 돌아온다.
이 엄청난 힘은 오랫동안 다른 사람들에 대한 책임감에 얽매여 억눌렸던 기운이었다. 마음은 속세의 온갖 규범의 구속을 받아 왔다. 그러나 일단 문이 한번 열리자 그 구속에서 풀려나게 되었다. 마음챙김과 지혜의 힘은 더욱 힘차게 역동적으로 움직였다. 마음을 삼계(욕계․ 색계․ 무색계)를 관찰하기 위해 밖으로 방사되었다. 그리고는 다시 내부를 들여다보기 위해 안으로 들어왔다.
마음은 모든 면에서 최선의 힘을 다했다. 모든 허망한 거짓들을 자르고 분쇄하고 관통하였다. 거대한 힘을 지닌 바다 속의 큰 물고기처럼, 마음은 갑자기 다이빙을 했고 환희와 기쁨으로 빛나며 온갖 종류의 곡예를 펼쳤다. 뒤돌아보면, 수평선 위에 악과 위험의 검은 구름이 위협적으로 불어나는 것이 어렴풋이 보였다. 그러나 그런 장면마저도 오히려 무슨 일이 있어도 해탈을 위하여 투쟁해야만 한다는 결의를 북돋워 주었다. 앞을 바라보면 찬란한 광채가 빛났다. 마치 그것은 무량한 지혜의 보물을 향유하라고 손짓하는 듯이 보였다.
아짠의 일생에는 위와 같은 이야기와 관련된 중요한 일화가 훨씬 더 많이 있다. 그러나 위에서 언급한 것 이외에 모든 일화를 옮겨 적기란 불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