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부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
최용현(수필가)
1929년, 독일의 문호 E.M.레마르크는 18세 때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험을 바탕으로 쓴 장편소설 ‘서부전선 이상 없다(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를 출간하였다. 이듬해, 미국의 루이스 마일스톤 감독은 이를 동명의 영화로 만들었는데, 제1차 세계대전을 다룬 최고의 걸작으로 평가받으며 아카데미 작품상과 감독상을 받았다.
1979년, 제2차 세계대전에서 폭격기 조종사로 참전했던 미국의 델버트 만 감독이 다시 동명의 영화를 연출하여 CBS TV에서 방영하였다. TV용으로 만든 것이지만, 웬만한 전쟁영화 못지않은 물량투입을 했다. 이 영화는 처음엔 뿔 달린 철모를 쓰다가 나중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독일군 철모를 쓰는 등 고증에도 충실했고 작품성도 뛰어나 골든 글로브상과 에미상을 수상했다. 러닝 타임이 157분이지만, 128분으로 편집하여 극장개봉을 하였다.
오래 전 주말에 TV에서 이 영화를 보고 잔상(殘像)이 오래 남아서 그날 밤에 잠을 설쳤던 기억이 있다. 최근에 다시 보니 그때의 감흥이 되살아났다.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무렵, 그림그리기를 좋아하는 독일의 고3학생 폴 바우머(리차드 토마스 扮)는 고등학교 졸업과 동시에 친구 20명과 함께 자원입대를 한다. 담임선생이 ‘너희들은 독일을 지키는 불멸의 영웅이 되어야 한다,’고 애국심에 호소하며 선동하자 이들이 기꺼이 호응한 것이다.
신병훈련소에 입소한 이들은 교관인 힘멜스토스 하사(이안 홈 扮)가 아무 이유 없이 진흙탕에서 뒹굴게 하는 등 가혹행위에 가까운 혹독한 훈련을 시키지만 잘 버텨낸다. 신병훈련이 끝나고 프랑스군과 대치중인 서부전선에 배치되어 기차역으로 향하던 이들은 독일군 사상자들이 기차에서 들것에 실려 나오거나 목발을 짚고 내려오는 것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폴의 급우 6명이 같은 소대에 편성되었는데, 그 소대에는 캣(어니스트 보그나인 扮)으로 불리는 터줏대감 고참병이 있었다. 40대 중반의 나이로 아버지뻘인 그는 ‘훈련소에서 배운 것은 모조리 잊어버려라.’고 하면서 쏟아지는 포화와 살벌한 참호전에서 살아남는 요령 등 경험에서 우러난 노하우를 이들에게 전수해준다.
거듭되는 전투로 전우들이 하나 둘 부상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는다. 폴의 친구 케머리히는 학교에서 체조선수를 했을 정도로 건강했으나, 부상으로 후송된 병원에서 다리를 절단하고 우울증에 빠져 숨진다.
신병훈련소 교관 힘멜스토스는 시장(市長)의 아들을 진흙탕에서 뒹굴게 하다가 전방의 소대장으로 좌천되어 폴의 옆 소대로 배치된다. 그는 프랑스군과의 전투에서 진격명령이 떨어지자 참호에 웅크리고 앉아서 벌벌 떠는데, 무슨 조화를 부렸는지 나중에 황제인 빌헬름 2세로부터 철십자 훈장을 받는다.
떨어지는 포탄의 파편에 부상을 입은 폴과 크롭은 병원으로 후송되고, 증상이 심했던 크롭은 다리를 절단한다. 부상에서 회복된 폴이 휴가를 받아 집에 들르자, 암이 재발한 어머니는 누워서 지내고 있었다. 폴은 숨진 케머리히의 어머니를 찾아가 ‘케머리히는 고통 없이 바로 숨졌어요.’ 하고 말한다. 그러나 그의 어머니는 믿을 수 없다며 ‘너 그게 거짓말이면 다시는 집에 못 와도 좋다고 맹세를 해라.’고 한다. 폴은 할 수 없이 맹세를 하는데….
폴은 다시 부대로 복귀한다. 전우들 몇 명은 이미 전사했고, 그 빈자리는 나이 어린 신병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며칠 후에 폴의 정신적인 지주였던 캣마저 중상을 입고 쓰러지는데, 폴이 들쳐 업고 진지로 돌아오는 도중에 숨지고 만다.
2년이 흐르고, 이제 고참이 된 폴은 그때 다리를 절단하여 불구가 된 크롭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함께 입대한 20명의 졸업생 친구들 중에서, 13명 사망, 4명 실종, 1명 정신병원 입원으로 생존자는 너와 나 둘뿐이다.’라고 쓴다. 힘멜스토스도 전사했다고 한다.
종전을 한 달 앞둔 1918년 10월 11일, 참호에서 새소리가 들려오자 폴은 수첩을 꺼내 고사(枯死)한 나무에 앉은 새를 스케치하다가 프랑스군 저격수가 쏜 총에 맞아 숨을 거둔다. 그날 독일 총사령부가 발표한 공보(公報) 문구는 이러했다.
‘All Quiet On The Western Front(서부전선 이상 없다)’
‘서부전선 이상 없다’는 허허벌판에 길게 이어진 참호의 세팅과 퍼붓는 포격, 처절한 백병전 등 여느 전쟁영화 못지않은 실감나는 전투 신을 재현했는데, 당시 서독은 거의 현대화되어 있어서 개발이 덜 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비교적 저렴한 비용으로 촬영했다고 한다. 요즘 이 정도 물량의 전투장면들을 영상화하려면 5천만 달러 이상의 비용이 든다고 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3천2백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인류역사상 제2차 세계대전 다음 가는 집단학살극이었다. 카메라는 왜 싸워야 하는지 왜 죽여야 하는지도 모르고 서로 죽이고 죽는 아비규환의 현장을 실감나게 담아낸다. 이 영화는 애국심 하나로 자원입대한 열아홉 살 소년들이 전장(戰場)에서 겪는 참상과 차례로 죽어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반전영화이다.
주인공 폴은 한밤중에 참호에서 마주친 프랑스 병사를 단검으로 찌르는데, 그가 고통스러워하며 죽어가는 모습을 옆에서 애처롭게 지켜본다. 그러다가 그의 가족에게 편지를 쓰려고 주소를 찾기 위해 그의 지갑을 뒤지는데, 지갑 속에는 가족사진이 들어있었다. 그 사진을 보던 폴이 눈물을 흘리면서 하던 독백을 옮겨 적으면서 이 글을 끝내고자 한다.
“널 죽이고 싶지 않았어. 네가 달려들 때 네 총과 단검과 수류탄을 보고 놀라서 엉겁결에 찔렀어. 전쟁만 아니었으면 우린 친구가 될 수도 있었어. 너도 어머니가 있을 거야. 아버지도. 네가 가진 죽음의 공포와 고통, 나도 똑같이 느끼고 있어. 용서해줘, 친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