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진강 따라걷기 – 3회차, 마지막.
6월 15일.
오늘은 자전거를 타고 동진강 하구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일정입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전거를 타고 어디를 답사하는 일은 추천하고 싶지 않습니다.
일행과 함께 움직여야 하니까 체력도 평소에 길러 두어야 하지만 개인적 관심사를 앞세워 별도 행동을 해서도 안 됩니다. 무엇엔가 관심이 있는 사람은 자전거를 타지 말고 걸어서 직접 눈으로 보고 다니는 것이 좋겠네요.
내가 오늘 그랬으니까요. 잠깐 사이에 길을 잃어 엉뚱한 데를 헤매다가 일행에게 누를 끼쳤습니다.
그리고 너무 긴 거리를 달리느라 몹시 피곤합니다. 손목도 아프고 엉덩이도 아프고…
일곱 시간을 자전거로 움직이는 것이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 만석보 옛터 -
신태인읍의 시가지를 벗어나 다시 강둑길로 올라섭니다.
아침부터 바람이 꽤 강하게 부는군요.
2킬로미터 남짓 달린 곳에서 ‘두물머리’를 만나게 됩니다.
지금까지 따라오던 동진강(옛 이름은 ‘태인천’이었다네요)과, 왼쪽에서 북상하던 정읍천이 이곳에서 만나는 것이지요.
신태인대교 북쪽 끝에서 내려다보니 예전의 국도를 이어주던 예전의 다리가 보입니다.
난간은 없고, 폭은 2차선 규모. 가운데 노란 줄이 그어져 있습니다. 차가 다니는 길이었던 것이지요.
건너면서 보니 상판은 역전의 용사답게 너덜너덜, 구멍이 패인 곳도 여러 군데 있습니다. 그래도 한 시대를 정읍의 남부와 북부 지역을 이어준 사명을 다 하고 4차선 지방도의 다리에 역할을 넘겨주고 이제 퇴역했군요.
옛 다리 같은 것을 보는 느낌은 늘 그렇습니다.
“그래도 철거하지는 말자. 「천년 정읍」에 1백년짜리 다리 하나쯤 있어도 되지 않는가.”
너무 새로운 것으로만 뒤집어씌워지는 우리나라의 도시들을 보면서 늘 하던 생각입니다.
5천년 역사는 고사하고, ‘6백년 도읍’ 서울에 6백년 된 물건이 남아 있는가? 라는.
다리를 건너가면 정읍천과 나뉘는 어귀에 자그마한 동산이 있습니다. 이 동산은 동학농민혁명의 기폭제가 된 「만석보 폭파 의거」를 기념하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정읍천과 만난 직후의 동진강 초입에 바로 만석보 옛 자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언덕에서는 만석보 옛터 기념공원이 내려다보이기도 합니다.
동학혁명의 발단이 된 이 일에 대해서 다시 언급할 필요는 없겠습니다.
고부군, 군수 조병갑, 만석보, 가렴주구, 높은 물세… 등. 이미 잘 알려져 있는 근세역사의 키워드들입니다.
이 길은 ‘말목장터로’로 불립니다.
방금 지나온 옛 신태인교와, 이 언덕에서 왼쪽 아래로 보이는 이 또한 오래된 정읍천을 건너는 옛 다리로 이어지는 지방도가 바로 말목장터로.
이평면 사무소 바로 앞의 장터가 그곳인데 고부관아로 쳐들어가기 전 농민군이 집합했던 곳이 말목장터였다지요. 그리고, 그 아래에서 전봉준이 폐정쇄신과 보국안민을 앞세우고 농민봉기를 주창했다는 장터의 감나무.
그 이평면 핵심지역이 이곳에서 3킬로미터도 채 떨어지지 않은 남서쪽에 있지만, 일행은 굳이 들르지 않고 여정을 계속합니다.
언덕에서는 두 물이 만나는 장면을 내려다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시원해집니다.
「정읍천 건너는 옛 다리」를 건너 동진강의 왼쪽 둑길로 올라섰습니다.
만석보 옛터를 알리는 비가 두 군데에 서 있습니다. 하나는 다소 상류 쪽의 「만석보 유허비」, 또 하나는 정확한 자리에 있는 「만석보유지」.
2000년 5월에 세운 「만석보유지」에는 이평면장도 관여했군요. 2000년이면 동학혁명이 비로소 새로이 조명을 받기 시작하던 시기입니다.
- 강변 둑길 달리기 -
왼쪽 둑길은 넓게 펼쳐진 들판 가운데를 달리는 다소 지루한 코스입니다.
하지만 가끔 휴게소를 만들어 두기도 했고, 둑 아래 들판에 물을 대는 수로가 크게 휘돌아 흐릅니다. 이 굵은 수로는 아마도 낙양리 취수구에서 시작한 정읍 대간선수로가 아닐까 합니다.
덕천천의 오수를 정화하여 내보내는 큰 정수장. 국정양·정수장이라 했습니다. 오래된 수문이 여전히 버티고 있군요.
조금 더 내려간 곳에서는 정읍 간선수로에서 갈라져 나가는 중수로의 물이 힘차게 쏟아져 나가고 있습니다. 동진강 남쪽의 들판을 적시러 달려가겠지요.
달리는 데 집중해야겠습니다.
둑길 왼쪽으로는 오래된 큰 마을들이 꽤 많이 나타나는데 일일이 들러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자전거를 멈춰가면서 사진을 찍는 일조차 여의치 않습니다.
- 군포교, 백산 -
2.5킬로미터를 더 달려간 곳에 30번 국도가 달리는 군포교를 만납니다.
이곳에서 좌회전하여 1킬로미터만 내려가면 동학혁명 때의 8천 농민군 집결지 부안 백산성이 있습니다.
“앉으면 죽산(竹山), 서면 백산(白山)”이라는 말을 낳은.
농민군이 일어서면 그들의 흰 옷이 산을 뒤덮어 허옇게 보였다가, 앉으면 세워든 죽창의 숲만 삐죽삐죽 보여 죽산이 되었다가 했다는 뜻이지요.
이 지역에는 백산이나 죽산이라는 이름을 가진 지명이 너무나 많아 동학 창의지로서의 백산이 어딘지 자주 헷갈리곤 합니다.
이번 동진강 여행이 동학혁명의 자취를 따르는 여행을 겸하고 있기는 하지만, 오늘의 여정이 너무나 길고 빡빡한지라 백산을 들르지 않고 아쉬움 남긴 채 여정을 계속합니다.
여기에도 옛 다리와는 별도로 새 다리가 놓여 있지만, 우리는 옛 다리를 건너갑니다.
다리 앞의 버스 정류장에 한 노인이 쉬고 있다가 우리 일행에게 잘 다녀오라고 인사해 주는 것이 고맙습니다.
다리는 그 시절의 유행대로 격자무늬의 낮은 난간이 있는 시멘트 다리입니다. 동진강을 건너는 몇 안 되는 다리인 만큼 길이는 무척 깁니다. 역시 가운데 노란 중앙선이 있었던 흔적.
옛 군포교를 건너 왼쪽으로 꺾으면 이번에는 강의 오른쪽 둑길이 됩니다.
- 연포까지 -
군포교 북단에서 550미터 위치에 ‘동진강제수문’이 나타납니다.
바닷물 역류방지 등 여러 목적으로 있던 수문이겠지요. 지금은 반짝이는 금속재질의 장식이 얹힌 현대적 시설로 바뀌어 있습니다.
이곳부터는 둑길 위를 달리는 것은 여의치 않습니다. 풀이 길게 자라 있는 황무지 같은 공간이기 때문입니다.
둑길을 내려서서 강 북쪽 들판을 끼고 달리는 농로로 접어듭니다.
강 수면을 보지 못하고 달리는 길은 크게 재미 없습니다만...
낙양리 취수문에서 출발한 정읍 간선수로가 함께 달리고 있어 반갑기도 합니다.
신태인대교에서 3.6킬로미터, 연포리입니다.
연포리는 이미 동진강 하구에 가까운 지역.
서해안고속도로가 보이기 시작입니다.
일행 중 이준유 형님이 오늘따라 많이 힘들어 하시는 것이 처음부터 역력했는데, 14킬로미터를 달려온 이 지점에서는 정말 힘든 표정입니다. 약간의 오르막만 있어도 ‘저단기어로 빨리 밟기’가 잘 안 되어 실속(失速), 자전거에서 내려 걷기를 반복하는 형님...
그래도 저 연세에 젊은 사람들 못지않은 정열로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만경강·동진강 따라 걷기에 참여해 오고 있으니 존경해야지요.
잠시 쉬는 중에 강둑길에 올라서서 이 마을을 감도는 수로의 사진을 찍습니다. 이 수로는 관개용수로라기보다는 폐수를 모아 내보내는 수로인 듯.
워낙 구절양장 빙빙 돌아 들판 구석구석까지 커버하는 수로 시스템인지라, 어디가 맑은 물 통로이고 어디부터가 폐수처리구인지 도무지 분간하기 힘듭니다. 때로는 어느 쪽이 상류이고 어느 쪽이 하류인지조차 헷갈립니다. 전부를 알려고 하는 일 자체가 무리한 것이겠지요.
- 동진대교, 새만금 입구 -
서해안고속도로 아래를 지나 동진대교 동쪽 끝에 도달합니다.
언뜻 보기에 호텔처럼 보이던 건물이, 가까이 가서 보니 동진강휴게소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찾는 손님이 없어 문 닫은 지 오래되어 보입니다.
‘1천년에 걸친 전라도 차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늘 주장하는 정모씨, “이 지역에 무슨 사업을 한들 잘 되겠어요?”가 또 나옵니다. 새만금 방조제 이후 서해안지역의 여러 산업이 몰락하고 덩달아 관광사업도 문을 닫게 되는 것은 필연의 결과일 것입니다.
이 언저리는 고부천이 합류하는 곳이어서 강폭이 어마어마하게 넓어집니다.
동진대교를 건너 서쪽으로 넘어가면 그곳은 부안 땅.
우리는 건너가지 않고 다리를 가로질러 동진강 하구를 향해 북상합니다.
이 강도 백강(白江)이라 불렀던 모양이지요?
금강하류, 우리가 보통 백마강이라 부르는 부여 익산 이웃의 금강 하류만 칭하는 이름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윽고 원평천이 합류하는 어귀. 길고 큰 다리가 또 하나 새로 놓였습니다.
이 다리(이름?)를 건너 둑길을 계속 따라가면 동진강의 끝에 도달할 것이로되,
그렇게 가야할 의미는 별로 없어 보입니다. 이미 새만금구역에 들어선 셈이고 공사가 진행 중이어서 다니기 어지럽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동진강 따라 걷기는 사실상 종료.
- 원평천 따라 거슬러 가다 -
원평천을 따라 동쪽으로 상류를 향해 올라갑니다.
얼마 가지 않아 커다란 수문을 만나는데, 매우 현대적인 모습을 하고 있네요. 아마도 바닷물의 역류를 막을 목적으로 세운 수문인 듯.
원평천 둑길을 달리는 것은 비교적 쾌적합니다. 바람을 등지고 달리는 길이기도 하고 물 빛깔도 맑습니다. 여러 차례의 정화를 거쳐 하구 가까이 내려오는 동안 깨끗해진 것이겠지요.
옛 다리의 교각만 남아있는.
원평천 하구의 수문에서 5킬로미터를 역주행해 온 곳에 쌍궁교가 있습니다.
여기에서 이준유 형님, 드디어 허벅다리의 경련을 이기지 못하고 자전거와 함께 쓰러집니다.
모두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해결책을 강구합니다.
딸 인실씨에게 연락하여 차로 모시러 오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결론.
그러나 그 시각까지 기다릴 수 없어 자전거 여행을 이어 갑니다. 그 투혼이 정말 존경스럽습니다.
쌍궁교에서 2킬로미터를 더 거슬러 달린 곳에서 벽골제로를 만나고, 이곳은 내가 며칠 전 벽골제 공원에 들어가지 못한 채 버스를 타고 귀가했던 그곳임을 알게 되지요.
- 김제쌀로 지은 밥 -
인실씨 가족은 이곳 공원 안의 식당으로 오기로 했습니다. 우리도 여기서 점심을 먹습니다.
돌솥에 지은 쌀밥은 기름기가 자르르 흐르는 보기에도 맛있어 보이는 밥입니다.
쌀농사를 하는 민족이 우리입니다. 어떤 이는 한자를 우리 민족이 만들었다고 주장하는데 그 근거를 쌀농사문화에서 비롯한 한자들이 매우 많다는 점에서 들고 있더군요.
한자의 기원으로 알고 있는 갑골문자가 상(商)·하(夏)·주(周) 등 고대국가 발상지인 샨둥반도 지역에서 발견되었다 하여 한(漢)족이 만든 것으로 착각하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쌀농사를 한 것은 그들이 아닌 우리민족이었습니다. 중국의 동북지역은 쌀농사가 되지 않는 곳입니다.
단야식당에 모여 앉았습니다.
식당 벽에 벽골의 어원에 대해 설명이 붙어 있습니다.
「벼ㅅ고을」→벽골→碧骨.
벽골제의 최초 조성은 백제 초기 비류왕 때인 서기 330년이라고 삼국사기에 씌어 있다 합니다.
그 무렵부터 이미 이 지방은 벼농사에 적합한 넓은 들이 특징이었던 것이지요.
이 식당의 이름으로까지 차용한 「단야의 설화」에 대해서는 이견이 많은 듯합니다. 하지만 이미 기정사실화 되고 단야루·단야각 등 기념물을 많이 만들어 버린 연후이므로 더 이상의 논란은 쓸데없을 것 같습니다.
인실씨 가족도 도착했습니다. 함께 점심을 먹고, 벽골제공원 내부를 구경합니다.
미리 알았다면 공원 뒤쪽의 「개구멍」으로 들어와서 볼 수 있었는데, 사전지식 없이 둑길로만 걸어 벽골제 암거를 보려 했던 나의 ‘무모함’이 우스워지는군요.
여러 설명문과 안내판들을 통해 벽골제의 참모습을 많이 알게 됩니다.
다섯 군데의 커다란 수문으로 저수지 물을 빼내어 들판에 공급했다는 것.
그 중 두 군데 장생거(長生渠)와 경장거(經藏渠)의 수문만 현존하고 있다는 것.
아직도 남아있는 둑은 3킬로미터에 달한다는 것.
내가 며칠 전에 보고 ‘거석문명의 신비한 흔적’이라 감탄하며 수문의 기둥이 아니었을까 추측하던 그것은 역시 옳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경장거의 수문기둥이었던 것입니다.
공원 안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 거대한 장생거 수문의 모습은 감동 그 자체였습니다.
소박한 가공인 듯 보이면서도 필요한 곳의 기능은 제대로 하도록, 꼼꼼히 홈을 파고 그 홈에 느티나무 판을 끼워 셔터로 쓴 옛 사람들의 솜씨.
저 단단한 화강암을 저렇게까지 다룰 수 있었던 선조들에게 경례.
땅 아래에 묻힌 부위만도 5자에 이른다고 했으니, 며칠 전에 했던 그 부분의 내 추측 역시 옳았군요.
대나무인지 짚인지 그 소재에 대해 설왕설래하던 쌍룡 조형물도 그럭저럭 보기 좋습니다. 단야 설화와 함께 이루어지는 쌍룡의 설화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는 듯 보입니다.
“백룡과 청룡의 싸움 끝에 단야의 희생으로 청룡을 이긴 백룡, 그 백룡의 도움으로 제방을 완성했다.”
어찌 보면, 현대에 와서도 마찬가지로 있는 개발과 보존을 각각 주장하는 세력 사이의 싸움이 있었던 것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또, ‘단야의 희생’은 결국 통일을 이룬 신라세력의 압제를 상징한 것은 아닐까요?
감동적인 이야기를 계속하는 것은 의미 없습니다. 관심 없는 사람에게 이런 이야기는 시간낭비일 뿐이어서요...
한 가지 족집게 노릇을 또 좀 하자면,
벽골제 공원 안에 있는 가장 중요한 안내판에
설명문 내용이 어렵고,
오타가 많이 눈에 띈다는 것입니다.
원성왕(元聖王)을 원경왕(元經王)으로,
월승리는 月昇(일본어판)인지 月升(중국어판)인지 서로 다르며,
金堤‘郡條’를 김제‘君組’(중국어판)로...
경장거를 보러 갑니다.
공원의 뒤쪽, 「개구멍」으로 나가면 내가 보지 못하여 그리도 아쉬워 한 암거의 출구 뒤쪽이 됩니다.
일행은 그냥 달려가고, 나만 혼자 둑을 올라 그 암거를 보려고 했습니다. 이것이 실수였네요.
둑을 기어올라 보니 펜스가 쳐져 있고 도무지 접근할 방법이 없군요. 수문 위로 올라서는 것은 더욱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럴까 저럴까 궁리하면서 시간을 좀 보내다가, 나중에 혼자 따로 와야겠다고 생각을 바꾸고 뒤미처 쫓아갔는데, 놓친 것입니다.
또 하나의 실수는 이 치명적인 순간에 나의 고질병인 ‘길치’가 다시 작동, 방향을 거꾸로 생각하고 일행과는 반대쪽으로 한참을 달려간 것입니다.
이래서 단체행동 때는 개인의 생각을 고집해서는 안 됩니다. 다시는 사진 찍을 생각으로 미적거리지 않을 것을 다짐합니다.
기다리고 있을 일행을 생각하니 미안하고 무안하고 나의 길치가 한심하고, 바람을 안고 달리는 일은 힘들고 답답했지요.
겨우 일행을 따라잡았습니다.
그런데 정국장의 길 안내에 특별한 것이 있는가 했더니 결국 며칠 전 내가 다니던 그 열악한 길에 다름 아니었습니다. 걸어서 다니던 때에는 그나마 풀숲을 헤치고 밟으면서라도 다닐 만 했지만 자전거를 타고 지나는 것은 지난한 일입니다.
더욱이나 내게 배정된 자전거는 타이어 폭이 좁고 날렵한 이른바 ‘싸이클 경기용’ 자전거.
아스팔트 도로에서는 쌩쌩 잘 나가지만 바닥이 울퉁불퉁한 길에서는 괴롭기만 합니다. 속도를 내기는커녕 넘어지지나 않으면 다행인. 엉덩이도 아프고 손목도 비명을 지르기 시작합니다.
특히 주민들을 철수시켜 비어버린 용골마을 옛 자리를 지날 때 가장 그랬습니다.
겨우 일행의 맨 꽁무니를 따라 느적느적 다닐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지나쳐 갔던 길을 거꾸로 타고 가는 셈인데,
경로 상에 있는 경장거의 수문 기둥을 보고도 그냥 통과, ‘신비의 카누 다리’도 본체만체 통과, ‘원조 중의 원조 수문’을 보면서도 멈추지 않고 통과...
사물을 보는 감수성은 사람마다 다른 것이겠지요만.
이제는 얼른 페달을 열심히 밟아 출발지로 되돌아갈 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아직 10킬로미터나 남아 있고 오후 4시가 가까운 시각이기 때문에요.
김제 대간선수로를 따라 거꾸로 오는 마지막 여정.
월승리, 청천리, 육리, 양괴리, 우령리를 거쳐 호남선 철로 아래를 지나 신태인 실내체육관 앞에 도착합니다.
길고 긴 여정이었습니다.
함께 하신 모든 분께 감사와 존경을 보냅니다.
특히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신 이준유 형님, 건강하십시오.
|
첫댓글 감사님도 수고 많으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