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 용품 업계 선도하는 M&A 달인
윤윤수 회장
"타이틀리스트 100년 만에 처음 컬러볼…
中시장 노렸죠"
김남인 기자/조선일보 : 2012.05.09.
가능성만 보고 전 재산 걸어 -
나이키·아디다스 등 제치고 인수, 1년 만에 1억3400만달러 이익 달성
100년 전통 깨고 경영 혁신 -
Made in USA 고집 버리자고 설득
실패 경험 통해 '긴장감' 배웠다 -
대학 세 번 떨어지고 서른에 졸업
"샐러리맨의 화신, 미다스의 손, 돈 버는 마술사…."
윤윤수(67) 아쿠쉬네트·글로벌휠라(FILA) 회장에게 따라붙는 별명이다.
지난 4일 서울 장충동 아쿠쉬네트(Acushnet) 본사 회장실. 방에는 골프공 천지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윤 회장은 대뜸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골프공을 건넸다. 흰색과 형광 연둣빛 등 두 가지였다.
"신상품인 '벨로시티'(velocity·속도)입니다. 같은 힘을 줬을 때 어떻게 하면 거리가 더 나갈까 고민해서 내놨어요. 한·중·일 고객들은 컬러볼을 좋아해 색깔도 넣었습니다. 강렬해도 촌스럽지는 않죠?" 그의 얼굴엔 천진난만한 미소가 돌았다.
▲ 지난 4일 서울 장충동 아쿠쉬네트 본사에서 만난 윤윤수 회장이 타이틀리스트의 신제품 ‘벨로시티’ 앞에 섰다. 공에 색깔을 넣은 건 윤 회장의 아이디어로, 타이틀리스트 10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거대한 중국 시장을 공략하기 위해서다. /이덕훈 기자 leedh@chosun.com
공에는 검정 글씨로 '타이틀리스트(T itleist)'라 적혀 있었다. 1910년 미국에서 설립돼 전 세계 시장점유율이 50~60%에 달하는 1위 골프공 브랜드다. 작년 5월 휠라코리아와 미래에셋컨소시엄이 타이틀리스트의 모기업인 세계 1위 골프용품 업체 아쿠쉬네트를 인수하면서 전 세계 골프장에 들어가는 타이틀리스트 제품이 한국에서 개발되고 있다. 타이틀리스트에서 컬러볼이 나온 건 100년 만에 처음이다. 윤 회장이 컬러볼을 기획하자 보수적인 아쿠쉬네트 직원들은 회사가 한국 기업에 넘어갔을 때만큼이나 놀랐다.
인수발표 후 1년간의 성적은 '우수'다. 최근엔 미국의 하버드경영대학원에서 "흥미로운 케이스스터디 사례"라며 취재 요청까지 해왔다. 기대 이상의 수익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 월스트리트저널은 당시 "한국 기업이 경이적인 일을 해냈다"고 평했다.
윤 회장은 "인수제안을 한 쪽에서 지난해 1억500만달러의 세전 이익이 날 거라고 했는데, 실제로는 1억3400만달러를 내 24% 초과달성 했다"고 설명했다.
윤 회장의 인생은 한편으로 드라마다. 휠라코리아와 글로벌휠라 인수에 이어 아쿠쉬네트까지 사들였다. 아쿠쉬네트 인수 때는 투자자들이 담보를 요구해 윤 회장은 자신이 가진 휠라 지분을 포함, 전 재산을 걸어야 했다. 많은 이들이 자신이 가진 걸 지키거나 물려주기 위해 골몰하는 나이에 윤 회장은 또 한 번 도박을 감행한 것이다. 그러나 윤 회장은 "절대 도박이 아니었다"고 했다.
―도박이 아닌 이유는.
"돈을 벌 수 없는데 베팅을 했다면 그건 바보다. 아쿠쉬네트는 막강한 브랜드파워와 기술력을 바탕으로 잠재력이 무한한 업체였다. 다만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고 있었고, 내가 그 부분을 채울 수 있겠다 싶었다. '이거 사면 돈 벌겠구나' 싶었다."
―돈 벌 수 있다고 생각한 이유는.
"중국이라는 거대 시장에 주목했다. 아직은 골프 인프라가 절대 부족해 물건을 팔고 싶어도 유통망을 확보하기 쉽지 않다. 단독 매장을 열었을 때 매출 규모가 어느 정도 돼야 매장 유지가 가능한데, 어패럴(의류)이 추가된다면 가능한 일이었다. 내년 1월 어패럴이 출시된다."
▲ 월리 유라인 아쿠쉬네트 최고경영자(CEO)와 윤윤수 회장이 미국의 아쿠쉬네트 공장을 둘러본 후 대담을 나누며 웃고 있다. /아쿠쉬네트 제공
―아쿠쉬네트를 어떻게 혁신했나.
"미국에 있던 3개의 공 제조공장을 닫고 태국에 새 설비를 짓고 있다. 그전까지는 공의 원재료인 천연고무를 동남아에서 들여와 미국에서 공의 코어(core)를 만들고 그걸 다시 태국으로 보내 겉 표면을 씌우고 있더라. 코어까지 태국에서 만들면 1박스(12개)당 2달러20센트가 절약된다는 계산이 나왔다. 연간 600만 박스 생산량에 2달러20센트를 곱하면 엄청난 거다. 태국 공장도 내년 4월에 완공된다."
―미국 임직원들이 새 오너의 말을 듣던가.
"아쿠쉬네트 기존 주인(포천브랜즈)은 상당히 보수적이었다. 100년 전통의 브랜드 명성을 지키기 위해 모든 제품 생산을 미국에서 해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반대였다. 휠라는 100% 외부에 아웃소싱을 주고 판매해 성공해왔다. 둘의 철학을 섞으면 시너지가 날 것이라고 직원들을 설득했다."
―인수 후 어떤 리더십을 보여줬나.
"인수 작업이 완료된 작년 7월부터 미국·유럽·아시아의 아쿠쉬네트 지사와 공장을 돌았다. 전 세계를 두 바퀴 정도 돈 것 같다. 하루 세 끼를 현지 직원들과 먹고 현장 분위기와 시스템을 최대한 머릿속에 집어넣었다. 그래야 결정을 내릴 때 감이 오기 때문이다. 그러자 직원들 사이에 '미스터 윤은 이 사업을 아주 심각하게 생각하는 비즈니스맨이다'라는 평판이 퍼졌다. 그 후부터 나를 믿어줬다."
―인수 전략은.
"경쟁자들의 약점을 이용했다. 나이키·아디다스 등 상대는 모두 골프 사업을 하고 있어 아쿠쉬네트까지 가져가면 골프용품 시장을 독과점하는 모양새였다. 미국 정부에 '독과점이 아니다'라는 점을 입증하는 데 8개월 이상의 시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소유주에게 독과점 시비가 없는 우리와 거래하는 게 안전하다는 걸 설득했다. 기존 경영진에게는 '당신들의 방식을 지지하며 우리는 새로운 사업에만 전념한다'는 메시지를 분명히 해 우리 편으로 만들었다. 그 덕에 경쟁사가 제안한 가격보다 5000만달러나 싸게 인수할 수 있었다."
―골프 핸디는.
"골프를 배운 게 쉰넷이었다. 그전까지는 한창 고생할 때라 골프 칠 돈도 없었다. 주로 산에 올랐다. 지금도 1년의 절반은 해외 나가 있으니(항공기 마일리지가 500만 마일이다) 자주 못 친다. 핸디는 20~22 정도. 홀인원은 2004년과 2008년 두 번 했다. 87타가 베스트다. 골프는 네 살 연하의 아내가 나보다는 훨씬 잘 친다."
―휠라코리아 회장이 된 후 '연봉 300만달러의 사나이'가 됐다. 돈 많이 벌었나.
"연봉의 절반은 세금으로 나가고 반의반만 집에 가져갔다. 나머지 4분의 1은 장학금 등으로 어려운 사람을 위해 썼다. 언제라도 실패할 수 있다는 긴장감으로 살았다."
―어린 시절은.
"고생 많이 했다. 어머님이 나를 낳은 지 100일 만에 전염병으로 돌아가셨다. 경기도 화성군 비봉면의 가난한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 폐암으로 돌아가셨다. 눈을 감기 직전 '엄마 없이 자란 자식, 내가 장가가는 거라도 봐야 하니 제발 살려달라'고 애원하셨다. 그 모습에 충격을 받고 의사가 되려 서울대 의대에 도전했다. 세 번 낙방했다. 마지막엔 2지망인 치의예과에 합격했지만 적성에 안 맞아 그만두고 한국외국어대에 가 내 나이 서른에 졸업했다. 정부에서 한창 수출산업을 장려하고 있었고, 나 역시 첫 직장인 해운공사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실패 경험을 들려달라.
"1983년 ㈜화승의 미국지사장을 맡고 나서 ET인형 수출을 해보자 싶어, ET완구를 만들어 열심히 실어내고 있는데 미국에서 ET상표권을 가진 미국인이 상표권소송을 제기했다. 미국 항구에 도착한 컨테이너 6개 분량의 인형을 모조리 불태워야 했다. 회사에 당시 돈으로 4억원의 손실을 끼치고 퇴사해야 했다. 나이 마흔에 벌어놓은 돈 한 푼 없이 말이다. 내 사업을 시작했지만, 밤낮없이 일해도 쉽지 않았다. 밤마다 술접대하고 다음 날 새벽 7시 출근해 하루 종일 일했다. 그렇게 뛰다 휠라와 인연이 닿았다."
―이젠 성공했으니 마음 놓고 골프 쳐도 되는 것 아닌가?
"성공? 영원한 건 아무것도 없다. 나 역시 이 기업을 계속 키워야 한다는 긴장감에 피가 마른다. 2007년 글로벌휠라를 인수한 후 미국의 휠라 유통센터에서 연설을 마치고 난 뒤였다. 20대 초반의 한 흑인 청년이 다가와서 내 옷깃을 잡았다. '당신은 매직 퍼슨(magic person)이다. 어떻게 하면 당신과 같은 사업가가 될 수 있나'고 묻더라. 나는 그를 앉힌 후 내 좌우명을 얘기해줬다. '정직하고 성실해야 한다. 그리고 행운이 필요하다. 아무리 정직하고 성실해도 누구도 당신이 성공하리라 보장 못 한다. 그러나 행운은 정직하지 않고 성실하지 않은 사람에게는 절대 오지 않는다'라고."
[윤윤수 회장은…] 휠라 월급쟁이서 본사 인수한 승부사… 적자 기업 되살려
윤윤수 회장이 '수퍼 월급쟁이'에서 기업 오너로 변신한 것은 2005년이었다. 자신이 대표를 맡고 있던 휠라코리아 지분을 내부 경영자 인수방식으로 전량 사들여 기업 소유주가 된 것이다. 당시 인수대금은 1억2700만달러로, 윤 회장과 임직원들이 내놓은 돈에 대출을 받아 휠라코리아를 토종 기업으로 바꾸어 놓았다.
2년 뒤인 2007년, 윤 회장은 휠라글로벌 브랜드 사업권마저 인수했다. 당시 휠라는 쓰러져가는 기업이었다. 미국에서 매년 적자가 수천만 달러씩 쌓여, 당장 수백명의 직원을 해고하고 수십 개 매장을 닫아야 했다.
"휠라의 전 세계 장기 라이센스를 팔아 3억달러를 마련해 1억달러는 구조조정에 쓰고 나머지는 은행빚 갚는 데 써야 했습니다. 아내가 많이 말렸죠. 지금으로도 충분한데 왜 도박을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나 역시 매일 돈 깨지는 소리에 잠을 이루지 못했죠."
그리고 2011년, 윤 회장은 연 매출 1조원이 넘는 세계 1위 골프용품업체 아쿠쉬네트 까지 품에 안았다. 미래에셋에서 처음 윤 회장에게 아쿠쉬네트 인수에 참여하지 않겠느냐고 제안했을 때 그는 세 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 글로벌 휠라가 피나는 구조조정을 거쳐 가까스로 안정된 후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쿠쉬네트 의 사업현황을 받아보고 미국 현지 공장을 둘러보자 다시 승부사 기질이 발동했다. 급성장하는 아시아 시장과 접목시키면 크게 성장할 수 있겠다 싶었던 것.
그는 "인수 성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2015년 말까지 '법인세·감가상각·이자비용 차감 전 이익'(EBITDA)을 2배로 만들어야 합니다. 2011년 3월부터 1년간 실적보다 딱 2배를 하겠다는 조건을 걸었습니다. 그렇게 못 하면 내가 갖고 있는 모든 걸 잃게 돼 있죠."
그는 "전 재산을 담보로 인수 자금을 마련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2016년 초 홍콩 증시에 상장하겠다고 약속했는데 수익률이 15% 이상은 나와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윤 회장은 "지금으로도 수익률이 대략 19% 정도는 나올 것으로 본다"며 미소를 띠었다. 그는 자신감에 차 있었다. 그의 리더십은 자신감에서 시작된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