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의 누적이 역사가 되고, 기억이 쌓이면 또한 역사가 되듯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힌 역사
가 세대를 달리하면서 엇갈리듯 옛 기억을 생성하며, 기억은 우릴 아주 단순하고 소박했던 동
심의 순간으로 돌려놓는다. 이를 추억이라 말하곤 하는데, 아랫목 이불에 몸을 녹이는 것이
겨울밤 최고의 행복이었지만,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하고 제사시간을 기다리던 어릴 적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른다. 사람의 신체 중 가장 무거운 것이 눈꺼풀이라 하지만, 아무리 힘
센 장사도 눈꺼풀이 감기면 속수무책이다. 게스츠름 감기는 눈을 하고 있는 자화상에 실없는
웃음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없는 모습이기도 했다. 집안 기일(忌日)이 주로 동절기에 몰려있기
에 겨울철은 항상 식구들은 바쁘게 돌아간다. 제사 이전부터 준비하는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
입제(入祭)날 진설음식을 장만하려면 수고로움은 말할 것도 없다. 가마니를 마당에 펼쳐놓고
기왓장을 잘게 부셔 고운가루를 만들어 짚을 뭉쳐 놋쇠제기를 닦기에 여념이 없었으며, 부엌
에선 전 부치는 냄새가 진동하던 그때의 아련함이 흑백영화의 한 장면처럼 오버랩 되어온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자정(子正:밤12시) 사이렌이 울리면 제사는 시작되었다.
그 시절은 물자(物資)도 풍족치 못하고 겨울밤의 추위에 진저리를 치곤했지만, 철없는 나는
이날만은 많은 음식을 먹을 수 있었기에 몸과 마음은 넉넉했다. 4대봉제사로 한해 제사를 8번
지냈으며, 종부(宗婦)인 어머니의 수고스러움은 너무나 가혹했고 따뜻한 물은 항상 부족했다.
얼음장 같은 물에 예사로 손을 담구며, 나물 맛이 좋다는 시고모의 말에 가볍게 미소를 짓곤
했던 그녀는 종부로써의 사명감과 그 짐을 모두 지다보니 이게 숙명이려니 생각하고 나쁜 기
색은 표내지 않았다. 이것만은 아니었다. 음복 상(床)을 차리고, 참례자들의 이브자리를 손보
며, 아침식사준비와 그들의 점심 도시락까지 챙기면 어느새 아침은 밝아왔다. 제사는 노동집
약적인 일이였다. 그러나 요즘은 제사로 인해 생기는 갈등이 여전하고 ‘증후군’이란 신조어가
만들어져 젊은 새댁들은 스트레스를 하소연한다. 그리고 ‘제사 빠지는 법’같은 조언도 온라인
‘커뮤니티’에 뜬다. ‘시댁 가기 한 시간 전에 애가 열이 나서 아프다고 말한다.’ ‘출장이 잡혔
다고 한다.’ 등 여러 핑계를 대라는 식이다. 이렇게 보면 제사는 이제 가사노동의 핵심쟁점이
되었고, 줄이고 간소화하며 집안사정에 맞게 제도적 정비가 필요해졌다.
선친께선 폐해를 아시고 30년 전 자시(子時:오후 11시 반부터 오전 0시 반까지)에 지내던 새
벽제사를 저녁 9시 무렵으로 늦추었다. 즉 망자의 망일(亡日:죽은 날)에 지내는 것이다. 유교
의 본산인 성균관에서도 자시가 정설로 되어 있지만, 세월의 흐름 속에 변화는 불가피하다보
고 각 집안의 형편 따라 지내라는 애기를 한다. 선친의 선각(先覺)과 마음은 후손들의 제례시
간에서 나타났다. 집안의 제례의식은 감히 누구라도 어떻게 하지 못한다. 그건 그 집안의 관
습과 인습이기 때문이다. 제례의 변화 바람은 유교의 산실인 영남, 특히 안동지방에서 일기
시작했다. 경북지역에서 불천위 제사를 지내는 170여 종가 가운데 이미 절반은 현실에 맞게
제례방식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는 한국국학진흥원이 작년에 비공개로 조사한 내용이며, 지난
18일 의성김씨 청계(靑溪)종택은 300여 년 간 이어오던 새벽제사를 처음 저녁8시로 늦추었다.
이것은 “새벽에 올리는 제사가 불편하다”는 종중의 중지를 모은 결과였고 종택(宗宅)에 많은
후손들을 참례시키자는 의도였다. 전통은 현실의 흐름을 고집하지 않으며 시대와 타협하고,
새롭게 변하고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허나 세상 걱정 없었던 그 시절 사이렌소리가 생
각나는 것은 부모님과 함께한 그때가 그립기 때문이었다.
비밀글 해당 댓글은 작성자와 운영자만 볼 수 있습니다.17.06.02 12: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