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대 - 현종 이연 (재위 : 1659~1674)
수많은 사람들이 '예송논쟁'으로만 기억하고있는, 과소평가되고 있는 군주의 하나인 '현종'입니다.
* 현종의 어필입니다.
* 효종의 아들로 효종이 심양에 인질로 가있을때 심양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 역대 국왕 중
유일하게 외국에서 태어난 임금이기도 하죠. 이후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면서 왕세손이 되었고,
효종이 즉위한 뒤에는 세자로 책봉되었습니다. 사실 단종과 함께 세손, 세자, 왕으로 이어지는 정통코스를
정상적으로 밟은 얼마 안 되는 인물입니다.
* 효종이 죽은 뒤 즉위하자마자 '예송논쟁'에 휘말리게 됩니다. 이 예송논쟁은 국사에 언급될 정도로 당시에는
중요한 정국의 이슈가 되었지만, 알려진 것만큼이나 현종과 당시 조정 신료들이 재위기간 내내 예송에만
매달린 건 절대 아니었습니다.
예송논쟁이란?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왕실의 전례문제(典禮問題)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성리학의 핵심문제이면서 왕위계승원칙(지금의 憲法과
같음)인 종법(宗法)의 이해 차이에서 비롯된 율곡학파(栗谷學派)인 서인과 퇴계학파(退溪學派)인 남인간의 정권주도를 둘러싸고
일어난 성리학 이념논쟁이었다.
인조에게는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석린
(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봉림대군에게는 뒤에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이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머니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가서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런 와중에서 효종이 즉위해 주화파를 몰아내고 10년 동안 송시열 등 척화파 사림의 지지를 받아 북벌을 준비하다 갑자기 죽게
되었다. 그리하여 효종에 대한 조대비의 복상기간을 3년(만 2년)으로 할 것인가 기년(朞年, 1년)으로 할 것인가에 대한 논쟁이
일어났고, 이 논쟁을 1차예송인 기해예송(己亥禮訟)이라 한다.
조대비 복상은 우선 정태화가 ‘장자이든 차자이든 1년이라’는 ≪경국대전≫에 있는 규정을 내세워 기년상으로 정해졌다. 그러나
허목과 윤선도가 이의를 제기하면서 논쟁이 확산되었다. 주자의 ≪가례≫에 따르면 부모가 장자에 대해서는 삼년상이고 차자
이하의 아들에게는 기년상이었다.
조대비는 효종의 어머니라서 신하가 될 수 없고 효종은 조대비에게는 둘째아들이므로 차자로서 기년상이 당연하고, 비록 왕위를
계승했으나 사종지설(四種之說 : 왕위를 계승했어도 삼년상을 할 수 없는 경우) 중 체이부정(體而不正 : 嫡子이면서 長子가 아닌
경우)에 해당되어 기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 서인의 주장이었다.
반면 효종이 비록 둘째아들이지만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자로 대우해 삼년상을 해야 한다는 주장이 허목(許穆) 등 남인의
주장이었다. 이들 남인과 연합한 소북계(小北系)의 윤휴(尹鑴)는 누구든지 왕위를 계승하면 어머니도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입장에서 삼년상을 주장하였다.
이는 ≪가례≫에 입각해 종법을 왕이든 사서인(士庶人)이든 모두에게 똑같이 적용해야 한다는 수주자학파(守朱子學派)와
≪주례≫·≪의례≫·≪예기≫ 등의 고례에 입각해 왕에게는 종법을 사서인과 똑같이 적용할 수 없다는 탈주자학파(脫朱子學派)간의
이념논쟁이었다.
또한, 이는 종법에 따르면 원칙적으로 소현세자의 아들이 왕위계승을 해야 하고, 효종은 원래 둘째아들로서 왕위계승의 자격이
없었는데 변칙적으로 왕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는가 않는가의 차이이기도 하였다.
우연히 이 때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살아 있어 이러한 기년상의 주장은 왕위계승이 효종의 아들 현종이 아니라 적통(嫡統)인
소현세자의 아들에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으로 오해되기에 충분하였다.
실제로 이러한 오해의 소지를 기회로 윤선도는 이종비주(貳宗卑主 : 宗統을 宗統과 嫡統으로 나누어 임금을 천하게 함.)을 내세워
기년상을 주장하는 송시열 등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려다가, 도리어 송시열 등에 대한 흉악한 모함으로 다루어져 유배가게 되었다.
이후 예송은 표면적으로는 복제문제라는 단순한 전례문제로 논의되지만 내면적으로는 송시열 등의 서인세력을 역모로 몰아
제거하고 남인세력이 정권을 장악하려는 논쟁으로 비화되어 남인의 윤선도 구명운동과 더불어 지방유생의 대립으로 확산되었다.
결국, 1차 예송은 소현세자의 막내아들이 죽고, 현종의 아들 이순(李焞)이 현종 8년 왕세자로 책봉되자 일단락되고 서인과 남인의
대립은 송시열과 허적의 정책대립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1673년(현종 14) 인선왕후(仁宣王后 : 효종비)가 죽자 서인과 남인의 대립이 다시 예송으로 재현되었다. ≪가례≫에 따르면
효종비를 장자부(長子婦)로 보면 기년이요, 차자부로 보면 대공(大功 : 9개월)이고 ≪경국대전 經國大典≫에 따르면 큰며느리든
둘째며느리든 모두 기년이었다. 서인 쪽에서는 1차 예송 때처럼 차자부로 다루어 대공설을 주장하고 남인은 장자부로 다루어
기년상을 주장해 논쟁이 일어나는 것이 2차 예송인 갑인예송(甲寅禮訟)이다.
갑인예송에서는 서인인 현종비의 장인 김우명(金佑明)과 김우명의 조카 석주(錫胄)가 송시열을 제거하고 서인정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남인과 연결해 남인의 장자부 기년설을 찬성하였다. 그리하여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의 복제는 기년상으로 정해지고
정권은 허적(許積)을 비롯한 남인에게 기울었다.
이 때 현종이 갑자기 죽고 숙종이 즉위해 송시열과 그를 옹호하는 서인세력을 제거하고 윤휴·허목 등의 남인에게 정권을 맡겼다.
그러자 이에 반대해 서인들이 송시열 구명운동을 벌이고 효종의 차자 기년설의 정당성을 주장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송시열을 제거하고 정권을 주도하려던 김석주가 오히려 남인세력에게 밀려 위태롭게 되자 다시 서인세력과 연결해
허적·윤휴 등을 역모로 몰아 남인세력을 제거하는, 1680년(숙종 6) 경신대출척이 일어나면서 예송은 일단락되었다.
예송은 17세기에 율곡학파로 대표되는 서인과 퇴계학파로 대표되는 남인이 예치(禮治)가 행해지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실현방법을 둘러싸고 전개한 성리학 이념논쟁으로, 조선 후기 가장 이상적인 정치형태였던 붕당정치를 대표하는 정치적인
사건이었다.
그 동안 조선 후기를 부정적으로 보는 중요한 사건으로 예송을 민생과는 아무 관계없는 1년상이나 3년상이니 하는 공리공담으로
알려져왔다. 그러나 예송은 조선 후기 왕위 계승을 비롯해 사회구성을 어떻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다룬 중요한 이념논쟁이었다.
원칙적으로 누구든지 예(禮)는 같아야 한다는 천하동례파(서인)와 임금의 예는 일반 사람들의 그것과는 달리 변칙적으로 적용될
수도 있다는 왕자례부동사서파(남인)와의 이념논쟁의 결과로 나타난 정쟁이었다. 이는 필연적으로 성리학 이념과 직접 관련되는
호포법, 노비종모종량법, 궁방전 등의 정책대결을 수반하였다
* 현종은 그 누구보다 크게, 불가항력적인 대자연의 피해를 입은 왕이기도 합니다. 전 세계적인 이상저온
현상으로 인해 곡물생산이 뚝 떨어져 기근이 일어나고 각종 전염병이 창궐하는 등의 사태가 일어났습니다.
이를 역사는 '경신대기근'이라고 기록하는데, 국사책에도 잘언급되지않는 이 대재앙은 당시 조선의 총인구중
25%가 죽고, 절대다수가 굶주리는 '살아있는 지옥' 그 자체였습니다.
* 그래도 현종은 나름대로 민생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현종의 시대에 대동법이 호남지역까지 확대
시행되었는데 호남이 곡창지대라는 점을 감안하면 민생고 해결에 어느정도 효과가 있었을거라고 보입니다.
* 백성들을 장악하기 위하여 오가작통 사목을 제정했고 수리시설과 양전사업에 힘썼으며, 나라 재정을
수습하고 동활자 10만개를 주조하는등의 치적도 남겼습니다. 군사적으로는 북벌정책은 계승하지 않았으나
부왕의 군사력 강화정책을 계승하여 화포를 개량하여 대량 생산하는 등 군비증대를 하였고, 온천 행 때마다
군사훈련을 시키기도 하였을 정도로 군사력 증강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또한 큰아버지 소현세자처럼 서양의
문물이나 과학기술 분야에도 관심이 많아서 혼천의의 개량이나 자명종 제작에도 힘을 기울이기도 했죠.
* 그러나 북벌이라는 대표적 키워드가 있는 아버지 효종과 장희빈과 인현왕후 사이의 썸씽으로 잘 알려진 아들
숙종에 가려서 상당히 관심도나 존재감이 떨어지는 임금이기도 합니다. 심지어는 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무능하거나 심약한 듣보잡 군주로 기억되곤 하는데, 그래서인지 사극에서도 장희빈을 다룬
사극에서 '사망'하는 장면으로만 등장하거나 그냥 선왕으로 이름만 언급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ㅡㅡ
* 하지만, 사극의 소재거리를 남기지 않았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큰 격변 없이 정국을 이끌어 갔다는 뜻도 될
수 있습니다. 또, 예송논쟁은 너무나도 정치적이고 법적인 문제라 사극으로 만들기엔 현대인 입장에선 그다지
흥미있는 소재가 아니기도 합니다.
* 그런 흉흉한 배경 속에 귀신 소동이 궁궐에서 일어났는지, 현종이 직접 대화 중 귀신 소동에 대해 언급한
장면이 실록에 나오기도 합니다.
* 몸이 병약하여 평생 동안 고생했는데 특히 피부병과 그로 인한 부스럼이 심해 고름이 한 되나 나올 정도의
종기가 얼굴에 붙은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네요. 그래서인지 재위 기간 내내 온천을 자주 애용한 군주로 가히
조선 역대 국왕 중 최고의 온천 매니아라 해도 과언이 아닌 왕입니다.^^ 존재감과 개성이 그렇게 뚜렷한
임금은 아니지만 예송논쟁을 통해 서인 중심으로 빠진 붕당정국의 균형을 맞추려고 했고, 이에만 메달리지
않아 병자호란 이후 혼란에 빠진 나라를 수습하는 데 노력하는 등 치적을 제법 많이 남겼습니다. 예송논쟁을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 때문에 조선 역대 국왕 중 가장 과소평가되고 있는 군주 중 한 명이죠. 오늘날
예송논쟁은 '정치인들의 쓰잘데기없는 당파싸움'이라는 부정적인 시각이 존재하나, 이는 일제강점기시 일본인
사학자들이 우리 역사를 비하하기위한 이유로, 당시의 고도의 정치적 논쟁에 무의미한 당파싸움의 색만을
입혀버렸다고 보는게 맞습니다.
* 다른 얘기지만, 그 외 온천을 자주 애용한 왕으로는 세종, 세조, 숙종, 영조가 있습니다. 세종은 안질, 세조는
가려움증, 숙종은 어지러움, 영조는 피부병으로 고생했는데 온양온천이 유명해진 이유가 이 임금들이 모두
여기서 효험을 봤다고 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현종도 온양온천을 자주 이용했습니다. 참으로 뜬금없지만, 저도
온천을 참 좋아합니다.^^
* 후궁 없이 중전 명성왕후(명성황후 민씨가 아닙니다) 김씨에게만 충실했는데, 금슬 자체는 그럭저럭
좋았다고 하나 그렇게 사이가 좋아서라기보다는 왕후가 워낙 성깔이 있기로 유명해서 이 때문에 후궁을 들이지
못했다고도 합니다. 화를 낼 때는 단호했지만 아버지나 아내, 아들과는 정반대로 헌종은 기본적으로는 매우
온화한 성품이었다네요. 정종처럼 애처가와 공처가의 일면을 동시에 지녔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 참고로 이 때부터 조선 왕조는 점점 후손이 귀해지기 시작했는데 결국 어렵게 왕통을 이어가다가 헌종 때
단절되었고 철종이 간신히 이었으나, 그마저도 단절되면서 왕위를 이을 가까운 왕손이 없다는, 명종의 후사
때모다 훨씬 심각한 상황까지 가게 됩니다. 이것은 후기에 들면서 초기와 달리 자손이 귀해지고 세도 정치
때문에 다수의 왕족들이 살육됐기 때문입니다.
* 능은 경기도 구리시 동구릉 내에 있는 숭릉입니다. 명성왕후 김씨와 나란히 묻혔습니다. 현재 이 능은 비공개
능역으로 복원공사중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