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유(1456~1526) 의 기행문 유서석산기 중 유상대 모습 | 칠보이야기
46세 현영(鄭玄英 : 文獻公)--49세 진(震)---50세 계안
(繼安)---6子 정성손(誠孫)--- 정지유(鄭之遊)
경주정씨 49세 정진은 고려말 고현내면에 살았던 임은에 사위였고 불우헌 정극인과 동서지간이었으며 함께 낙향한 분이다
선생이 태인현 고현내면에 입향후 아들이 정계안이며 정계안은 아들이 7명ㅇ니데 정성손은 6째 아들(장흥공파,鄭誠孫)로 묘가 순창에 있는것으로 보아 순창에서 살은것으로 추정된다.
추정1) 정성손에 처가는 순창군에 있는 설씨 가문으로 순창군 팔덕면에 설인검의 증손 사위이다. 따라서 정성손의 맏아들인 정지유는 伯父와 할아버지가 사시는 태인현 고현내면 어렸을때 자주왔을 것이고서 불우헌 초당에서 수학하였을것이다.
순창 쌍치면 학선리에서 굴치로 넘어와서 반곡마을 뒷길로 넘어노면 지체굴이 나오고 지금은 저수지가 생겨 저수지를 지나서 내려오면 은석마을 이 나오는데 조금 지나면 무성서원이 있는 원촌 마을이니 아침먹고 걸으면 점심먹기 전에 도착할 가까운 지역이며 자주왔을것이고 어쩌면 큰 집에 머물르며 불우헌 초당에서 공부를 하다가 가까이 있는 유상대에 자주 놀러갔을 수도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추정2) 정지유의 부친인 정성손은 설인검의 증손사위인데 순창군 팔덕면이 세거지로 순창에 장가를 가서 아들 3형제를 낳은 후 고현내면에 돌아왔을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정지유와 아들에 묘가 고현내면 원촌마을 뒷산인 향도동에 있다는 것이다.
위 두가지 어느 쪽이든지 정지유는 고현내면에서 성장하며 공부하였기에 유상대와 유상곡수는 자주 접했을 것이다
정지유의 생졸년대 (1456~1526)
1988년 경주정씨 문헌공파 족보에
정지유에 生年은 세종 병자년~ 종중 병술 卒
오류를 수정하면 세조 병자년~ 중종 병술 卒
1456년에 때어나서 1526년에 돌아가신 것으로 보면 동생 정지영 정지반(1464~1517)과 비교하면 맞을듯하다
지금 유상대의 모습과는 다르지만 500년 전에는 정말 아름다운 경치로 느껴지지만 , 지금은 유상대 주위에 야산이 사라지고 논 밭이 되어 500년 전에 야산이었다는 것도 추정하기가 힘들다.
遊瑞石山記
詩山下流觴臺 臺上嘉木 叢列臺下曲水縈廻此 乃孤雲崔先生之所創也
遺風依然若存於水石林木之間余由是感慕每有遠遊之志矣
월성세고 中 면와유고 中 鄭之遊 作 遊瑞石山記(무등산기)
서석(瑞石/무등산)은 진실로 유람하고자 했던 곳이다. 예부터 많은 유자가 있었으니 점(點)은 기우(沂雩)에서, 요부(堯夫)는 제로(齊魯)에서 놀았고 자장(子長)은 남회(南淮)를 안석(安石)은 동산(東山)을 유람하였다.그런데 서석만은 유독 유람하는 자가 없었다. 주자께서 말한 "유람하는 이들이 올라오지 않았을 뿐" 이라 함은 바로 이를 말함이다.
나 또한 어려서 유람다닌 적은 없었으나,
백, 숙. 계 세 사람이 시를 읆고 글읽는 여가에 시산(時山) 노닐었다.
시산 아래는 유상대(流觴臺)가 있었는데 대의 위쪽에는 아름다운 나무들이 즐비하게 늘어섰고
대의 아래에는 굽이도는 물줄기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이 고운(孤雲) 최선생이 만드신 곳이라 선생의 유풍이
계곡과 돌 그리고 나무들 사이에 예전 그대로남아 있는 듯하였다.
나는 이에 감동 받아서 항상 멀리 유람할 뜻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데 때마침 막내 동생의 둘째 아들인 언방(彦邦)과 소쇄(瀟灑)양처사의 아들인 고암(鼓巖) 자징(子澂)이 모두 상사(上舍) 김송명(金松命)의 위 아래 사위가 되었다. 듣자하니 소쇄원(瀟灑園)은 경치의 아름다움과 계곡과 바위의 기이함은 곧 남쪽 고을 제일 명승지라 한다동생의 아들은 소쇄원 양처사의 동쪽 울타리에 있대어 살고 있는데, 지석(支石)에서부터 서석과는 거리가 멀지 않다. 저 서석산은 호남의 진산이어서 그 웅대하고 수려한 모습은 낱낱이 말할 수가 없을 정도이다. 돌길을 오르는 노력을 하여 풍혈의 절정에 오르면 우거진 숲, 밝은 꽃들이 피어나 맞이한다. 지팡이를 짚으며 돌아가도 잠든 원숭이, 깃든 새들은 놀라 울지 않는다. 패옥울리는듯한 소리에 이 산의 일권지다(一券之多)를 알만하다. 규봉이 벽처럼 둘러서 있어 만 길이나 높은 것을 볼수 있다. 이에 속세 밖으로 눈이 탁 트이고, 맑게 갠 산 아지랑이 가운데서 마음속 회포(懷抱)가 씻겨 내려가니 어찌 진계(眞界)의 훌륭한 유람이 아니겠는가?
생각컨데 기우나 제로의 유람은 천리(天理)의 흐름에 따라 인욕(人欲)이 사라지는 유람이고, 남회와 동산의 유람은 문장의 기운을 돕거나, 혹은 정회(情懷)를 드러내는 유람이니, 그 유람하며 관찰하는 이치는 아마도 같을 것이지만 그 즐거움의 크고 작음은이 다른 것은 마음에 얻는 것이 어떠한 가에 달려있기 때문이다.그런 즉 지금 서석을 유람함은 또한 천리(天理)을 익히며 익히며인욕(人欲)을 없애려 함인가? 아니면 장차 사기(詞氣)를 돕고 가슴 속 정회를 풀려는 것인가?.
아우는 부지런히 힘쓰라,
51세-6子-정성손(誠孫)--장흥공파-(1子,정지유, 3子,지반1464~1517)
정지유의 동생 정지반의 생졸년이 1464~1517년인것으로 보아 정지유가 순창에 살면서 큰집인 고현내면에 자주 왔을 것이고 큰 집은 유상대와 가까운 원촌마을이였기에 정지유는 어릴때부터 부모님과 함께 동생들과 유상대를 보고 1500년 이전에 글을 썻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에 보이는 정상 시산으로 500년 전에는 시산 앞이 야산이 있었다는 구전이 전해져 오며, 1930년 전후로 발전소가 건설되고 동진강 둑을 새로 만들때 야산에 흙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며 시산과 유상대 사이에는 논과 밭이 되었다.
지금 유상대 풍경은 논가운데 있으며, 물줄기도 유상대와 1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흐르지만 조선시대 선현들이 남긴 많은 시를 보면 물이 유상대 아래로 굽이굽이 흘렀다고 기록하였다. 어릴적 보고 자란 사람도 이해하기 어려운데 유상대를 보러온 여행객들은 옆에는 논이 있고, 수청댐이 생겨 물이 흐르지 않은 작은 하천이 있으니 더욱 유상대 모습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으로 생각됨으로 그림으로나마 먼저 복원되기를 바란다.
월성세고 中 면와유고 遊瑞石山記(무등산기)
6자 정성손(장흥공파)-경주정씨 문헌공파 홈피 기록입니다
공(公)의 휘(諱)는 성손(誠孫)이고 생몰(生沒)은 미상(未詳)이며 병조참판(兵曹參判) 휘(諱) 진(震)의 다섯째 아들로 무과(武科)에 올라 동래부사(東萊府使)를 역임하였으며 부인은 순창설씨(淳昌薛氏)로 견(堅)의 딸이고 공(公)의 묘소는 전북 순창군 품곡우치(品谷牛峙)의 유좌(酉坐)에 부인과 쌍분(雙墳)되었다.
49세 정진(震)-생졸년 미상
50세-정계안(繼安)
51세-1子-정인손(仁孫)--순흥공파
51세-2子-정의손(義孫)--추파공파
51세-3子-정예손(禮孫)--우후공파
51세-4子-정지손(智孫)--장흥공파--정온--정언충(묵재공1491~1557)
51세-5子-정신손(信孫)--죽산공파
51세-6子-정성손(誠孫)--장흥공파-(1子,정지유, 3子,정지반1464~1517)
51세-7子-정경손(敬孫)--별제공파
정지유는 태인현 고현내면에 입향한 정진에 진손자이고 태인현 옆 고을인 순창에 살았다
정언충은 태인현 고현내면에 입향한 정진에 고손자이고 고현내면에 살았으며, 정언충에 당숙이 정지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