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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인간혁명 30권 제2장 雌伏(52~57)
<자복 52>
야마모토 신이치는 참석자와 함께 시코쿠 멤버들의 무사한 귀가와 모든 참석자의 건강 그리고 집안의 번영을 기원하는 근행을 하기 위해 교류간부회가 한창인 대강당에 모습을 나타냈다. 몇몇 반가운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신이치는 동지 몇 사람에게 차례로 말을 건넸다.
그리고 시코쿠 장년부 간부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간부는 으스대거나 다른 사람을 꾸짖으면 절대 안 됩니다. 어디까지나 불자(佛子)로서 공경하고 소중히 대해야 합니다.
도다(戶田) 선생님이 제자를 야단치시는 경우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깊은 뜻이 있었습니다.
첫째, 광선유포를 위해 제자를 훈련해 자신과 똑같은 경애로 끌어올리고 일체를 의탁하려는 경우입니다.
그 사람이 짊어진 책임이 무거울수록 정말로 엄하게 질타하셨습니다.
둘째, 마(魔)에 신심이 흔들리는 사람을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고 그 마를 타파하기 위해 질타하신 적도 있습니다.
인간 중에는 제멋대로 행동해 다른 사람과 화합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자멸적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 어려움을 피하려는 사람, 정작 중요한 순간에 책임을 전가하거나 대충 넘기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한 경향성이나 그 뒤에 숨어 있는 나약함, 교활함, 두려움이라는 일흉(一凶)에 마가 파고들어 자기 신심의 성장을 방해하고 나아가 행복으로 가는 길을 막습니다.
그러므로 도다 선생님은 그 일흉을 자각시키고 단절하려고 질타하셨습니다.
셋째, 많은 사람에게 폐를 끼치고 광선유포의 단결을 교란시키는 경우에는 본인을 위해, 또 모든 사람을 위해 그렇게 하지 않도록 꾸짖으셨습니다.
즉 어떤 경우에도 도다 선생님의 일념 오저에는 대자대비(大慈大悲)가 있었습니다. 그러한 마음도 모른 채, 선생님의 언행을 겉만 보고 흉내 내듯 동지를 야단치는 경우가 있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어떠한 간부에게도 그럴 권리는 없습니다. 잘못을 바로잡아야 할 경우라도 잘 알아듣도록 타이르면 됩니다.”
<자복 53>
신이치는 참석자들에게 근황 등을 묻고, 가벼운 화제로 신심과 리더의 자세를 지도하고 격려했다. 모두 그렇게 자유로운 대화를 바라고 있었을 것이다.
이야기는 동지를 대하는 간부의 자세에 이르렀다.
“간부는 어디까지나 회원의 의사를 존중하고 상대에게 상처를 주는 일이 없도록 마음을 써야 합니다. 또 사람들은 모두 다 다릅니다. 모든 사람이 순수하게 이야기를 들어줄 리 없습니다.
리더는 고생이 많겠지만, 넓은 마음으로 모든 사람을 감싸고 행복해질 수 있도록 온 힘을 다해 인내심을 갖고 격려해야 합니다. 거기에 불도수행(佛道修行)이 있습니다. 그 고생은 모두 자신의 공덕과 복운이 됩니다.
초창기 학회가 ‘일본 남자의 노래’에 ‘바다와 같은 자비를 갖고’라는 구절이 있지 않습니까. 노래는 그렇게 부르면서 실천하지 않으면 안 되지요.”
웃음이 번졌다.
“그럼 함께 근행합시다!”
신이치를 중심으로 근행을 시작했다. 사제(師弟) 함께 광선유포를 서원하는 독경, 창제 소리가 힘차게 약동하는 음률이 되어 울려 퍼졌다. 오후 3시 반부터 회식을 겸한 간담회를 열었다.
신이치는 8층 장년부, 부인부 쪽에 참석해 같은 테이블에 앉아 있는 멤버들의 보고에 귀를 기울였다. 이윽고 5층에 있는 청년들도 합류해 문화행사를 시작했다.
‘난고쿠토사를 뒤로 하고’ 합창과 아와오도리(민요춤) 등을 차례로 선보였다. 신이치는 ‘다 같이 즐기자’고 말하고 연기 하나하나에 아낌없는 박수를 보냈다. 노래와 춤이 끝나자 신이치가 말했다.
“이번에는 제가 피아노를 치겠습니다.”
먼저 ‘아쓰타무라’ 선율이 울려 퍼졌다. 신이치는 지금이야말로 은사 도다 조세이 처럼 북해에 흩날리는 눈보라에 맞서 홀로 일어선다는 용기와 패기로 용감하게 나아가라는 바람을 담아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시련은 사람을 단련시킨다. 따라서 광포를 방해하는 맹렬한 눈보라에 감연히 맞서 도전하는 사람은 최강의 용자(勇者)가 된다.
<자복 54>
신이치는 피아노로 ‘아쓰하라 삼열사’와 ‘벚꽃’을 연주했다.
‘늠름하고 용감한 신앙자로 성장하라!’ ‘행복의 벚꽃을 피우는 인생의 봄을!’이라는 기원을 담은 연주였다.
신이치는 이렇게 생각했다.
‘지금 이때 구도심을 불태워 파도를 넘어 요코하마까지 찾아온 시코쿠 동지들의 과감한 행동은 광선유포 역사에 찬연히 빛나, 틀림없이 미래에까지 영원히 전해질 것이다. 학회가 어려울 때, 어떻게 행동하여 새로운 돌파구를 여느냐가 중요하다.’
신이치는 “끝으로 ‘다이난코(大楠公)’를 연주하겠습니다. 또 만납시다” 하고 말하고 다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렸다.
피아노 선율을 들으니 ‘다이난코’에서 노래하는 아버지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아들 마사쓰라의 모습이 마치 창가(創價)의 사제처럼 느껴졌다.
모두 마음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
‘우리는 학회정신을 단호히 계승하겠습니다. 어떠한 사태에 맞닥뜨려도 광선유포의 길을 꿋꿋이 열겠습니다. 시코쿠는 지지 않겠습니다. 창가 승리의 깃발을 흔들겠습니다!’
구도심으로 불타는 동지들의 눈에 눈물이 반짝였다. 그리고 다 함께 시코쿠 창가학회를 위해 만세삼창을 했다. 큰 박수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회식을 겸한 간담회가 끝났다.
신이치가 이렇게 말했다.
“감사합니다! 건강하세요! 오늘은 여러분이 타고 떠나는 배를 배웅하겠습니다. 시코쿠에 남아 있는 가족들에게 그리고 각자 조직의 동지들에게 아무쪼록 잘 부탁한다고 전해주세요. 또 청년부는 아버지, 어머니를 소중해 해주세요!”
시코쿠 멤버가 가나가와문화회관을 나왔을 때는 이미 짙은 어둠이 깔려 있었다. 부두에는 승선하는 시코쿠 동지를 배웅하기 위해 200명 남짓 되는 가나가와 멤버들이 모여 있었다. 음악대가 시코쿠 노래 ‘우리의 천지’를 연주하자 배에서 작별의 의미를 담아 여러 색깔의 종이테이프를 던졌다.
이어서 가나가와 멤버가 연주에 맞춰 현가(県歌) ‘아 태양은 떠오른다’를 열창한 뒤, 다 함께 ‘광포로 달려라’와 ‘위풍당당의 노래’를 합창했다.
마음을 하나로 모아 노래하는 창가 법우(法友)들의 노랫소리가 별이 빛나는 밤하늘에 울려 퍼졌다.
<자복 55>
‘부웅부웅’ ‘선플라워 7호’ 출항을 알리는 뱃고동 소리가 밤바다에 울려 퍼졌다. 시코쿠 동지들은 갑판 위로 나와 있었다. 배는 조용히 출발했다.
부둣가로 배웅하러 온 가나가와 동지들이 입을 모아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 하고 외치면서 손을 흔들었다. 바닷가에는 창문 틈 사이로 불빛이 새어 나오는 가나가와문화회관이 서 있고 요코하마 시내에서 이어지는 등불이 걸려 있다.
그때 갑자기 문화회관의 불빛이 일제히 꺼졌다. 맨 위층 창문에서 가는 빛줄기가 춤추고 있었다. 선박 전화로 연락이 왔다.
“지금 야마모토 선생님과 사모님이 문화회관 맨 위층에서 손전등을 비춰 여러분을 배웅하고 계십니다. 배에서 보이십니까?”
즉시 선내 방송을 통해 멤버들에게 알렸다. 모두 갑판 위에서 맨 위층에서 나오는 불빛을 향해 열심히 손을 흔들면서 목청껏 외쳤다.
“선생님! 시코쿠는 분발하겠습니다!” “안심하십시오!”
“지역 광포에 앞장서겠습니다!”
모두 눈물을 글썽였다.
신이치는 배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언제까지나 손전등을 비췄다.
멀리 배에서 외치는 동지들의 목소리가 신이치 부부에게 들릴 리 없다.
그러나 신이치와 미네코는 우리 동지가 마음으로 외치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또한 두 사람이 보내는 빛은 시코쿠 멤버들의 가슴에 꺼지지 않는 용기와 희망의 등불이 되어 타오르고 있었다.
니치렌대성인(日蓮大聖人)은 “길이 먼 것에 뜻이 나타나는 것일까”(어서 1223쪽) 하고 말씀하셨다. 구도심이 있는 사람은 성장한다. 환희차고 감사하다. 그것은 새로운 전진을 낳는 커다란 원동력이 된다.
신이치는 이날 밤에도 배가 흔들리지 않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창제했다. 또 밤이 깊어지자 배에 연락해 다시 한번 ‘이번에 오지 못한 분들에게 아무쪼록 안부 잘 전해달라’는 말을 전했다.
이튿날 아침에도 안부를 확인했다.
신이치에게는 제자들이 바로 가장 소중한 보배이자, 미래를 비추는 태양이었다.
<자복 56>
시코쿠 동지들이 ‘선플라워 7호’를 타고 가나가와문화회관을 방문한 지 약 한달이 지난 2월 17일, 가고시마현 아마미오섬 지역본부(훗날 아마미광성현)의 여자부원 86명이 신이치가 있는 도쿄 다치카와문화회관을 방문했다.
1년 전 2월 1일, 신이치는 규슈연수원에서 열린 규슈기념간부회에 참석했다.
‘일곱개의 종’을 총마무리하는 인도 방문을 앞두고 참석하는 간부회였다. 규슈 각현에서 모인 참석자 중 아마미에서 온 여자부 대표도 있었다.
신이치는 연수원에서 다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아마미 멤버에게 이렇게 말했다.
“무엇이든 요청할 사항이 있으면 나중에 여자부장 편에 말해주세요. 무엇이라도 좋습니다. 사양하지 않아도 됩니다. 저는 최대한 여러분의 요청을 들어주고 싶습니다. 낙도에서 거듭 고생하며 분투하는 보배와 같이 소중한 여러분이니까요.”
“창가여자회관에서 아마미오섬 지역본부의 여자부 근행회를 열어 주십시오.”
1977년 12월, 도쿄 시나노마치에 여자부 회관으로서 창가여자회관이 개관했다. 이후 전국의 여자부원이 방문하기를 바랐다.
신이치는 그 요청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여자부원들은 함께 다짐했다.
“각자 자기 지역에서 광포 확대의 크나큰 파동을 일으키고 광선유포의 스승인 야마모토 선생님 슬하에 모입시다!”
종문(宗門)의 승려가 비열하게 학회를 계속 공격했다. 그런 상황에서 멤버들은 창가라는 정의의 깃발을 내걸고 정열을 불태워 홍교하러 뛰어다녔다.
그러나 규슈연수원에서 신이치를 만난 지 석달도 되지 않아 신이치가 회장을 사임한 것이다. 갑자기 태양이 먹구름에 뒤덮인 기분이었다. 그래도 지지 않았다.
“이럴 때일수록 더욱 홍교에 승리해 선생님을 안심시켜 드립시다!”
역경은 인간의 진가를 가리는 시금석이다.
<자복 57>
일찍이 아마미오섬 일부 지역에서 학회원을 겨냥한 극심한 박해사건이 있었다.
섬의 유력자들이 어본존을 몰수하거나 학회원의 일자리를 빼앗는 짓을 일삼은 것이다. 학회원에게는 생필품도 팔지 않았다. 차를 몇 대나 동원해 학회를 배척하는 데모를 벌이기도 했다.
아마미의 여자부원들은 어린 시절 이러한 역풍 속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분한 눈물을 삼키며 자타 함께 행복해지기 위해 열심히 홍교하러 다니는 모습을 보며 자랐다.
아마미섬 지역본부의 여자부장인 오사다 레이도 그중 한 사람이다.
아버지는 오사다가 한살 때 바다에서 조난 사고를 당해 타계하셨다. 병약한 어머니가 바느질을 해서 홀로 오사다와 언니를 키웠다. 생활은 매우 가난했다.
1958년 가족이 다 함께 입회했다. 어머니는 ‘우리가 숙명을 전환하고 행복해지는 길은 이 신심 밖에 없다’며 진지하게 학회활동에 힘썼다.
그러자 하루하루 생활에 의욕이 생기고 희망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몸도 좋아지자 점차 확신이 싹텄다. 어머니는 말수가 적은 편이었는데, 초등학생인 오사다를 데리고 홍교하러 다녔다.
낡은 풍습이 뿌리 깊은 지역이었다. 홍교하러 남의 집을 찾아가도 늘 멸시와 비웃음, 욕설이 뒤섞인 말만 돌아올 뿐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지지 않았다.
“학회의 신심은 정말 올바릅니다. 신심을 하면 반드시 행복해집니다.” 하고 확신 있게 말했다. 오사다는 사람들의 행복을 바라며 열심히 신심에 힘쓰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인간의 강인한 빛을 본 기분이었다.
오사다가 초등학교 고학년일 때 어머니는 감기가 심해져 고열에 시달렸다. 얼음주머니를 올려놓아도 금방 녹아버릴 정도였다. 밤새 간호했다.
누워 있는 어머니가 반복해서 이렇게 말했다.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너희들은 절대 학회에서 멀어지면 안 된다. 어본존만큼은 절대로 놓아서는 안 된다….”
이 말은 어린 딸의 생명에 깊이 새겨졌다. 이윽고 어머니는 건강을 회복해 힘차게 학회활동에 힘썼다. 바느질도 일감이 늘어나 안정적으로 생활하게 되었다.
공덕의 체험은 확신을 품게 하고 신심을 더욱 강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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