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상 〔곽여(與)의 전기가 포함됨〕 곽상의 자는 원로(元老)니 청주(淸州)사람이다. 하급 아전 출신으로 연줄을 얻어 올라가 선종을 국원저(國原邸)에서 섬겼으며 선종이 즉위하게 되자 그를 감찰 어사로 등용하였다. 그 후 벼슬이 추밀원 좌승선으로 승진되어 왕궁에 자유로 출입하게 된 후부터 권세가 날로 강해졌으며 일찍이 왕의 교시를 왜곡하여 전달한 것이 발각되어 해당 부서에서 그를 탄핵하고 철직을 제기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숙종이 잠저에 있을 때 그를 불러서 보고 서대(犀帶)를 선물 주었으나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그러자 선종의 병세가 위중하여서 곽상이 날마다 왕의 간병을 하고 왕궁에 있을 때 숙종이 왕의 침전 문 앞으로 와서 곧바로 들어가서 문병하려 하는 것을 곽상이 제지하면서 말하기를 “지금 주상(主上)께서 병환이 위독하신데 왕자(王子)도 소환 명령이 없이는 곧바로 들어가지 못하는 법이올시다”라 하고 들여놓지 않았다. 숙종이 즉위한 후 그가 선왕에게 충심으로 복무하였다는 것을 높이 평가하고 장차 높은 자리에 등용코자 호부상서로 임명하고 외직으로 서경 유수로 내보냈다가 과만도 되기 전에 소환하여 형부상서로 임명하였더니 간관이 왕에게 아뢰기를 “곽상은 유수 재직중 별로 좋은 성적도 없으니 3년의 임기가 지난 다음에 임용하는 것이 옳다”고 하였으나 왕은 그 말을 듣지 않았으며 상서 우복야, 참지정사로 순차를 뛰어 등용하였다. 평장사 윤관(尹瓘)이 전폐(錢幣-돈)를 사용하자는 건의를 할 때 곽상은 전폐가 우리 나라 풍속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극력 반대하고 상소하며 간쟁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미구에 치사하고 집에 있다가 예종 원년(1106)에 죽었는바 당년 73세였고 시호는 순현(順顯)이라 하였다. 곽상은 성질이 소박하고 정직하였으나 다른 기능은 없었다. 평생에 자기 가산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집에는 아무런 유산도 없었다. 아들은 곽원(垣)과 곽여(與)이다. 곽여(與)는 어렸을 때 꿈에 어떤 사람이 이름을 여라고 지어 주었는데 드디어 이것을 본명으로 삼았으며 자는 몽득(夢得)이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맵고 냄새나는 채소를 먹지 않았고 여러 아이들과 같이 놀지도 않고 항상 자기 방에서 글공부에만 열중하였다. 과거에 급제한 후 궁내에 배속되어 합문 지후(閤門祗候)로 있다가 홍주 목사(洪州牧使)로 나가 있을 때 성 바깥 시냇가에 작은 암자를 짓고 장계초당(長溪草堂)이란 이름을 붙이고 공무의 여가만 있으면 매양 그곳에 가서 휴식하였다. 임기가 만료되자 예부 원외랑으로 들어갔다가 금주(金州)로 가서 은거하였다. 예종이 태자로 있을 때 그를 알고 있었으므로 즉위한 후 중사(中使)를 보내서 그를 소환하여다가 궁중 순복전(宮中純福殿)에 거처하게 하고 선생으로 칭호하였다. 그는 검은 두건을 쓰고 학창의를 입고 항상 왕의 곁에서 조용히 담화와 토론도 하고 시를 지어 주고 받고 하였으므로 당시 사람들은 그를 금문 우객(金門羽客-왕궁 안에 있는 신선)이라고 일컬었다. 왕은 그가 오랫동안 궁중에 있으므로 혹시 한적한 생활이 그립지나 않는가 하는 배려로써 서화문(西華門) 밖에 별장을 지어 주었다. 곽여가 일찍이 송나라로 사신 가는 왕자지(王字之)와 문공유(文公裕)를 위하여 자기 별장에서 전송하는 연회를 차리고자 왕에게 청하였더니 왕이 주과(酒果)를 주었는바 정도에 지나치게 성대한 연회를 배설하였으므로 당시의 여론은 이것을 비난하였다. 그 후 그는 궁중에서 물러가서 은거할 것을 굳이 요구함으로 왕이 동편 교외 약두산(若頭山) 봉우리에 거처할 집을 꾸려 주었다. 그는 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 짓고 거처하는 방을 허정당(虛靜堂), 서재를 양지재(養志齋)라고 이름 지었는바 왕이 친필로 현판을 써서 주었다. 하루는 왕이 미행으로 곽여의 산재(山齋)를 방문했는데 마침 곽여가 성 안으로 들어가고 집에 없었다. 왕은 그를 만나 보지 못한 섭섭한 마음으로 한참이나 배회하다가 시를 지어서 벽에 붙여 놓고 돌아갔다. 그 후 또 산재를 방문하였을 때 왕은 그의 손을 잡고 그를 칭송하는 구호(口號)를 읊었다. 대체 그에 대한 왕의 총애와 우대가 이러하였다. 인종 8년(1130)에 죽으니 향년 72세였다. 왕이 부고를 받고 애석하게 여겼으며 근신을 보내서 제사 지내 주고 진정(眞靜)이란 시호를 주고 또 지제고 정지상(鄭知常)에게 명령하여 산재기(山齋記)를 지어 비석에 새겨 세우게 하였다. 곽여는 몸이 ?灌淪構?얼굴에는 수염이 없었으며 눈은 구슬을 걸어 놓은 것 같았다. 그는 많은 책을 읽었으며 심지어 도교, 불교, 의학, 약학, 음양설에 관한 서적까지 모두 독파했으며 또 한 번 보기만 하면 암기하고 잊어 버리지 않았다. 그 뿐 아니라 궁술, 기마, 음률, 바둑 등에 대해서 해보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결혼하지 않았고 홍주에 있을 때 한 기생을 친해 두었다가 돌아올 무렵에 그 기생에게 약을 먹인 다음 신선이 되어 갔다고 거짓말을 선포하는 한편 몰래 서울로 데려다 살다가 급기야 그 기생이 늙어서 볼품없이 되자 제 집으로 돌려 보냈다. 또 산재에서는 일상 종첩(婢妾)을 데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한 당시의 여론이 좋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