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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잘 살아봅세 원문보기 글쓴이: 수냐타
학교 찾아 삼만리, 희망 찾아 삼만리
제목 : 학교 가는 길 (Buddha Collapsed out of Shame)
연도 : 2007
제작 : 이란, 프랑스
감독 : 하나 마흐말바프
배우 : 니키바크 노루즈 (박타이 역), 압바스 알리좀 (압바스 역)
아브도라리 후세이나리 (탈레반 소년 역)
이 영화와 제목이 같은 캐롤라인 우드워드의 <학교 가는 길>이라는 동화가 있다. 여덟 살이 되어 초등학교에 들어가게 된 소녀가 이른 아침 고요와 어둠을 뚫고 혼자서 학교에 가야하는 두려움을 동화적 감성과 따뜻한 상상력으로 쓴 성장동화이다.
이 영화 역시 6세의 소녀가 학교에 가고자 하는 의지와 바람을 보여주고 있긴 하지만 동화처럼 신비롭거나 따뜻한 상상력은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다. 그야말로 날 것의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뿐이다. 아프카니스탄의 을씨년한 벌판과 메마른 산악들이 보일 뿐이다. 그리고 전쟁의 상흔 속에서, 증오와 동심의 극단에서 살아가는 어린 영혼들의 모습을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6세 소녀 박타이의 소박하지만 간절한 희망을 기름기 걷어내고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더 사실적이고, 인간적이고, 감동적이다. 이란 영화들이 그렇듯이.
영화의 시작은 이미 1천 6백년 동안 회교도에 의해서 얼굴과 다리가 훼손된, 그나마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유네스코 세계 문화 유산인 바이얀 석굴의 불상으로부터 시작한다. 동쪽의 대불은 높이가 38m, 서쪽의 대불은 55m로 세계 최대 불상을 간직한 아프카니스탄의 바이얀 지역이 이 영화의 지리적 배경이다.
중세 이슬람 건축의 최고 걸작인 문화경관과 고대 유적지인 아프카니스탄은 또한 고대 불교 유적의 보고(寶庫)이기도 하다. 동서 연결의 실크로드이기도 하고 종교의 격전장, 세계적 냉전의 화약고이기도 했던 곳이다.
이곳은 6세기 경 실크로드의 교역로였으며, 불교가 번성하면서 많은 석굴들이 조성되었고, 그 안에는 훌륭한 벽화들도 보존되어 있다. 이곳은 세계의 불교도들이 즐겨 찾는 순례지이기도 하며, 중국의 현장 스님과 우리 나라의 혜초 스님도 다녀갔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고대로부터 문명이 오가는 길목으로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번성했던 곳이지만, 한편으로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을 받아 전쟁으로 얼룩진 땅이기도 하다.
현재는 모습을 볼 수 없지만 2003년부터 유네스코에서 복원작업을 하고 있다.
가까운 과거 1979년에는 소련 침공과 더불어 이슬람 게릴라 무장조직인 무자헤딘이 격전을 벌어졌던 곳이기도 하며, 미국의 원조 하에 소련을 10년만에 몰아낸 뒤 종파 문제로 온건한 반탈레반 세력에 맞서 강경 탈레반 조직이 싸운 곳이기도 하다. 2001년 9월 11일, 미국의 쌍둥이 빌딩 대폭발 테러사건으로 미국이 탈레반 정권과 오사마 빈 라덴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때, 이곳의 탈레반 세력은 산악지대를 이용해 게릴라처럼 은신을 하면서 결사의 항전을 벌이기도 했다. 빈 라덴이 사살되고 온건파가 정권을 장악했지만 종파와 이념에 따라 갈갈이 찢겨진 무자헤딘인지라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아프카니스탄의 역사와 내전의 얼룩이 이 영화의 백 그라운드임을 안다면 영화를 감상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잠시 뒤 로켓과 폭탄을 사용해 세계유산인 석불을 폭파하는 뉴스 릴(news reel) 장면으로 이어진다. 역사적으로는 2001년 3월의 일이다. 두 불상이 탈레반에 의해 무참히 파괴된다. (정확히 이야기하면, 1998년 9월 일부를 폭파시키고, 2년 반 뒤 남은 부분을 깡그리 없애 버렸다. 이 바이얀 석불 파괴를 지시한 장본인은 바로 탈레반의 창설자이며 최고지도자인 모하메드 오마르이다. 모하메드 오마르는 무자헤딘의 전사로도 싸웠던 경력이 있는 성직자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정치적 목표는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신정 국가를 창설하는 것이다. 그는 "서기 5세기경의 고대 불상을 포함한 모든 불상들을 이슬람에 대한 모독으로 규정하는 포고문을 발표, 이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지 않도록 파괴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쌍둥이 불상의 파괴는 그로부터 6개월 뒤 지구의 반대편 미국 쌍둥이 빌딩 폭파의 전조(前兆)가 된 사건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탈레반의 기반이 된 것은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 서구식 근대화에서 소외된 이슬람 세력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더 소외된 그룹이었다. 이들은 외세와 서구의 소위 근대적 가치에 영합하며 부패한 엘리트를 증오하고, 자신들이 해석한 종교 이념에 따라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급속도로 아프가니스탄을 장악하면서 그들은 그러한 생각을 공유하는 어떤 그룹보다도 성공을 거두었지만 자신들을 백안시하는 서구 세력에 끊임없이 반발했다. 바미얀 대불의 파괴는 그들이 규정한 비(非)이슬람적 질서와 가치에 대한 도전을 담은 강력한 정치적 선언이자 선전포고였다고도 할 수 있다.)
영화 속 사람들은 산악지형의 동굴 속에 산다. 암벽에는 1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석굴이 있고 주변 석굴은 전쟁으로 집을 잃은 난민들의 보호처이다. 전기도 없고 빛도 없지만 그게 편하기 때문이다. 아니 공습과 폭격으로부터 안전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야전이다. 그러한 척박하고 열악한 환경에서 아이들이 산다. 순진한 영혼의 소유자 박타이가 산다. 6살의 이 천진난만한 소녀의 바람은 오직 학교에 가는 것이다. 학교에 가서 옆집 친구 압바스가 읽어준 이야기를 배우기 위함이 이 소녀의 희망이다. 배우고 싶은 이야기 또한 너무도 소박하다.
"나무 밑에 남자가 있었습니다.
남자 머리 위로 호두가 떨어졌습니다.
놀라서 벌떡 일어난 남자가 말했습니다.
천만다행일세. 호박이 떨어졌다면 난 죽었을 거야."
열악하고 살풍경한 환경에 속에서 살면서도, 그나마 호두가 떨어져 죽지 않아 다행이듯이 박타이는 마음 속에 긍정의 씨앗을 품는다. 박타이는 이 긍정의 씨앗을 틔울 수 있는 곳이 학교임을 안다. 그리고 엄마에게 도움을 청해 학교에 갈 준비를 할려고 하지만 엄마는 보이지 않는다.
"엄마, 어디 있어요?"
암벽과 절벽으로 이어진 바위산을 떠돌며 엄마를 찾지만 일나간 엄마를 찾을 수 없다.
"엄마, 나 무서워요!"
애타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녀를 도와줄 엄마나 어른은 어디에도 없다. 결국 어린 박타이는 혼자 학교 가는 방법을 찾는다. 이 소박한 꿈을 이루기 위해 박타이는 학교를 찾아나서지만 쉽지 않다. 학교 가는 길은 쉽지 않고 고통의 연속이다. 고난의 행군이다.
또한 박타이에게 있어서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다. 어린 소녀에게 집은 외로운 공간이다. 엄마는 일찍부터 일나가서 없고 아빠는 보이지 않는다. (추측컨대 탈레반 전사로 전장에 나갔거나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 젖먹이 동생을 엄마대신 돌봐야하는 노고는 어린 박타이에게 힘에 부치는 일이다. 동생이 사라지지 않도록 끈으로 붙들어 매놓고라도 학교에 가야 한다. 학교는 박타이에게 있어서 배움의 터전이고 해방구이자, 희망의 불씨이다. 그래서 박타이는 학교 가기를 열열히 희망한다. 학교는 그녀의 꿈공장이기 때문이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배울 수 있고 또래 친구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타이는 학교를 가지 위한 필사의 노력을 한다. 공책과 연필을 준비하기 위해, 공책 10루피(200원), 연필 10루피, 총 20루피를 벌기 위해 집에서 키우는 닭의 알을 장터에내다 판다.
장터 역시 박타이에게는 만만찮은 곳이다. 어느 누구도 달걀에 관심이 없으며, 심지어 지나가는 행인에 의해서 달걀이 바닥에 떨어져 깨진다. 박타이는 간절히 보상해달라고 하지만 어른들은 눈길조차 주지않고 귀찮아 한다. 그래도 박타이는 울지 않는다. 낙담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은 달걀을 팔려고 최선을 다한다. 의지로 빛나는 박타이의 눈망울이 강단지고 귀엽다. 그녀에게는 기대와 희망과 가능성만이 있고 불가능이란 단어는 겨자씨 만큼도 없다.
결국 빵을 필요로하는 대장장이의 요구대로 달걀을 빵으로 바꾸기 위해 빵집으로 향하지만 그녀 앞에 무서운 개가 도사리고 있다. 개를 피해 달걀을 빵으로 바꾼 박타이는 결국 대장장이 노인에게 빵을 팔아 돈을 마련한다. 하지만 공책밖에 살 수 없다. 연필이 없어 엄마의 립스틱을 몰래 챙기고 보무도 당당히 학교를 찾아 나선다.
학교 가는 길 역시 박타이에게는 지뢰밭의 연속이다. 기껏 찾아간 학교는 남학생들 학교이고, 해가 넘어가는 쪽으로 가야 여학교가 나온다고 한다.(이슬람의 율법 꾸란에 따르면 남성이 여성보다 먼저 창조되었고, 남성이 여성보다 우월하고 권위있는 존재이다. 남녀는 같이 있어서는 안되며 같이 있으면 악마가 함께 한다고 여긴다.)
박타이는 다시 길을 떠난다. 그 길에 탈레반의 남자 아이들을 만나고 전쟁놀이의 희생양이 된다. 미국의 스파이로 잡히고 어렵게 구한 공책도 찢겨져 남자아이들의 종이 비행기 재물이 된다. 그래도 박타이는 울거나 좌절하지 않고 끈기있게 학교를 찾아간다. 불굴과 의지의 승리를 보여준다. 박타이에게 학교란 무엇인지, 왜 그렇게 간절한지 의아하면서도 그녀의 순진무구한 마음과 모습에 우리들은 어느새 무장해제를 당한다.
박타이의 위태롭고 불안한 여정은 종이배로 상징된다. 박타이가 학교를 찾아가는 도중에 강가에서 노인을 만난다. 노인은 박타이에게 여학교를 알려주면서 남아 있는 공책을 찢어 종이배를 만든 뒤 강물에 띄운다. 종이배는 강물을 흘러가다가 중간 중간에 돌부리와 수초에 걸린다. 기우뚱 뒤집힐려다가 다시 떠내려간다. 영화는 인서트 컷으로 이러한 장면들을 살작살짝 보여준면서 박타이의 위태로운 앞길을 상징적으로 묘사한다.
결국 박타이는 여학교에 당도하고 교실에 들어가지만 그곳 또한 안전지대는 아니다. 박타이가 그토록 고대하던 희망의 안식처가 아니다. 그녀를 반겨주는 이는 아무도 없다. 어느 누구하나 그녀에게 자리를 내주는 친구는 없고 밀쳐내기 바쁘다. 연필 대신 가져온 엄마의 립스틱은 연필이 아니라 또래와 어울리는 분칠 놀이감이 된다. 립스틱 장난이 선생님한테 걸려 박타이는 교실에서 쫒겨나기까지 한다. 꿈에 그리던, 그렇게 소망하던 학교에서도 그녀는 박대를 당한다. 한줄기 희망을 길어올릴 수 있다고 믿었던 곳으로부터 냉대를 당한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박타이는 다시 전쟁놀이를 하는 남자 아이들을 만난다. 그녀가 간직했던 소망이, 믿음이 무너졌기 때문일까? 남자 아이들의 전쟁놀이가 싫다고 도망쳤던 박타이가 이번에는 그들의 장단에 순응하는 모습이다. 도망가고 거부하지만 이전 같지는 않다. 복수를 꿈꿨던 압바스는 남자 아이들의 공격에 저항조차 않고 쓰러져 죽은 척을 한다. 그리고 박타이에게 외친다.
"죽은 척 하면 살 수 있어!...죽은 척 하면 널 놔줄 거야!"
박타이는 과연 죽은 척을 했을까? 아니면 그토록 싫은 전쟁놀이를 뿌리쳤을까?
카메라는 두 손을 들고 있는 박타이의 그림자를 보여줄 뿐이다.
이 영화에서 나오는 박타이는 마치 수녀같다. 아니 성녀같다. 자신에게 벌어지는 어떠한 힘든 상황이나 사건에도 저항하거가 맞서지 않는다. 우둔하리만치 수용한다. 자신의 깜냥껏 상황을 이겨낼 뿐이다. 남을 탓하거나 욕하지 않는다. 엄마가 없어도, 지나가던 행인이 달걀을 깨뜨려도, 남자 아이들이 전쟁놀이로 괴롭혀도, 학교 또래 친구들이 자리를 내주지 않아도, 노인이 몇 장 남지 않은 공책을 찢어 종이배를 만들어도 언성을 높이거나 다툼을 하지 않는다. 그러려니, 여여(如如)하게, 묵묵히 받아들인다. 속이 답답하고 터져도, 안쓰럽고 딱해도 그것은 관객의 일일뿐 그녀의 몫은 아닌 듯하다. 그래서 더욱 가슴이 미어진다. 먹먹해진다. 한편의 영화를 통해 순결한 영혼의 성자를 만난 듯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효과를 증폭시키기 위해서 카메라는 박타이의 얼굴을 클로즈 업으로 자주 잡는다. 소녀 박타이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 해맑고 순수 결정체의 눈을 보고 있노라면 우리의 갈급한 영혼은 이내 정화되고 세파에 찌든 욕심은 눈녹듯 사라진다. (클로즈 업의 예술적 형식미를 보여준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 감독의 <잔 다르크의 수난(1928)>에서 나오는 여주인공의 투명한 눈망울을 보는 듯하다.)
힐링의 근원(根原)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너무나도 현실적이다. 영화의 원제 <Buddha Collapsed out of Shame>처럼 성녀같고, 붓다같은 박타이의 갈등과 현실을 너무나도 사실적으로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바이얀의 석불의 포탄으로 파괴되고 사라지듯이 박타이의 소망과 희망도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하는 여운을 영화의 말미에 남겨두기 때문이다. '붓다가 부끄럽게 사라지듯'이 박타이도 그의 믿음과 희망의 불씨가 안타깝게 사그러지는 게 아닌지 말이다. 수치스럽게 죽은 척을 해야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건 아닌지...? 수렁 깊은 딜레마에 빠진 박타이의 현실, 아니 우리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또한 이 영화에서 박타이와 아이들 동심을 앗아간 것은 어른들이고 명분없는 전쟁이다. 어른들은, 심지어 박타이의 엄마는 딸의 바람을 들어줄 기미는 고사하고 보이지도 않는다. 박타이의 소중한 달걀을 깬 사람도, 달걀 대신 빵을 사겠다며 박타이를 고생시키는 사람도, 길을 물어보지만 별 도움 없는 교통경찰도 어른이다.
전쟁은 또한 동심과 이성을 파괴한다. 동심은 적대감과 복수심으로 불타고 이성적 가치판단 조차 흐려놓는다. 전쟁놀이를 하던 아이들은 처음에 자신들이 탈레반이라며 박타이와 압바스를 미국의 스타이로 간주한다. 하지만 나중에는 미국의 특공대가 돼서 박타이와 압바스를테러분자라며 쫒는 모순된 모습을 보여준다. 전쟁만이, 상대를 죽이는 적대감만이 존재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섬뜩하고 참담하지만 이게 현실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감독역시 이 점을 너무도 잘 알고 있다.
"아프가니스탄은 비전형적인 나라이다. 25년이라는 긴 기간 동안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에서 알카에다와 탈레반, 서양인들의 기독교적 가치까지 그 권력이 행사되어왔다. 각각의 지배자들은 이 나라를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 모든 권력을 몰아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연속적인 해방의 염원, 그 결과는 혈기를 잃고 무너져 내린 땅이다. 물질적인 손상은 단지 시가지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 모든 아프가니스탄 아이들의 일상적인 놀이는 전쟁 상태에서의 그들의 삶의 경험을 재생해 내는 것이다. 아이들은 어른들의 무기를 흉내 내고, 어린 소녀에게 돌을 던지려 하거나 지뢰를 묻은 척 한다. 놀이의 주요 테마가 전쟁이었던 이 아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어떻게 정상적인 관계를 이어갈 수 있겠는가?" - 하나 마흐말바프
하나 마흐말바프!
그녀는 압바스 키에로스타미, 자파르 파나히, 바흐만 고바디와 더불어 이란을 대표하는 거장 모흐센 마흐말바프 감독의 막내딸이다. 그 아비에 그 딸이 아니랄까봐 장편 데뷔작인 이 작품으로 그녀는 벨기에 플랑드르 국제 영화제에서 최우수상에 노미네이트되며 일찍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플랑드르 국제영화제는 30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벨기에 최고 권위의 국제영화제이다. 또한 토론토 영화제와 로마 영화제에서도 상영되어 화제를 모았을 뿐만 아니라, 봉준호 감독이 <살인의 추억(2003)>으로 최우수 감독상을 수상하고 김기덕 감독이 <빈집(2004)>으로 작품상을 수상한 바 있는 산 세바스티앙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할 정도로 작품성과 그 실력을 인정받았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따로 없다!
마흐말바프 가문은 가족 전체가 영화인이다. 반정부 운동을 하기도 했던 그녀의 아버지는 <가베(1996)>, <고요(1998)>등을 연출하며 휴머니즘적인 영화세계를 구축한 거장이고, 칸느 심사위원상의 <칸다하르(2001)> 등을 제작, 감독까지 한 이란을 대표하는 세계적인 명장이기도 하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여자가 된 날(2000)>에서 각본과 감독을 담당했던 마르지예 마흐말바프이다. 또한 그녀의 언니인 사미라 마흐말바프도 <사과(1998)>, <칠판(2000)> 등을 연출한 여성감독이다. (생존해 있으면서 영화를 감독하는 씨네 페밀리로는 미국의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와 그의 딸 소피아 코폴라, 게리 마샬과 그의 여동생 페니 마샬, 벨기에의 다르덴 형제, 한국의 김곡, 김선 쌍둥이 형제 등 있다. 하지만 가족 전체가 영화감독인 경우는 이란의 모흐센 마흐말바프 가족이 유일하다. 마흐말바프 가족은 아마 유례가 없고 전무후무한 씨네 페밀리일 텐데 그의 아내 마르지예 메쉬키니, 그리고 그들의 두 딸 사미라 마흐말바프와 하나 마흐말바프, 아들 메이삼 마흐말바프까지 죄다 영화감독이다.)
그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고 아버지가 운영하는 <마흐말바프 영화 학교>에서 5년간 영화를 공부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영화 <순수의 순간(1996)>에 배우로 출연했으며 <고요>, <내가 여자가 된 날>, <사과> 등의 작품에서 일찍부터 스크립터로 일하면서 영화계에 입문했다. 9살 때 만든 첫 단편 영화 <이모가 아팠던 날(1996)>은 로카르노국제영화제에서 상영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14살 때 언니인 사미라의 작품 <오후 다섯 시(2003)>의 촬영현장 뒷얘기를 다큐멘터리로 찍은 <광기의 즐거움(2003)>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 초청되는 등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수상한 바 있다. 이는 언니가 20세 때 기록한 칸느 영화제 심사위원상 수상이라는 최연소 수상 기록을 갈아엎는 전대미문의 기록이기도하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 마흐말바프는 18세 약관의 나이로 데뷔하여 그녀는 아버지, 어머니, 언니와는 또 다른 자신만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가면서 전 세계의 영화계가 주목하는 가장 촉망 받는 신예 여성감독으로 떠오르고 있다.
* 힐링 포인트
1. 박타이가 공책과 연필을 사기 위해 달걀을 파는 장면
2. 여학교를 찾으러 이곳저곳을 헤매는 박타이의 모습
3. 어렵게 찾은 여학교 교실에서 엄마의 립스틱으로 글씨를 쓰는 박타이의 모습
4. 남자애들의 전쟁놀이에 괴롭힘을 당해도 화내거나 저항하지 않고 순수함을 잃지 않는 박타이의 눈동자
5. 박타이가 남자애들의 전쟁놀이에 두 팔을 벌리고 죽은 척하는 장면
* 덤으로 볼 추천 영화
이반의 어린 시절(1963), 컴앤씨(1985),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1987), 체리향기(1997), 거울 (1997), 천국의 아이들(1997), 천상의 소녀(2003), 취한 말들을 위한 시간(2000), 참새들의 합창(2008), 칸다하르(2001), 집으로 가는 길(1999), 제9중대(2005), 밀양(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