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 속에서 피어난 사랑
― 한 사람을 데려다준 길에서 만난 하느님의 손길
추석날이었다.
명절이면 누구나 가족을 생각한다.
따뜻한 밥 한 끼를 함께 먹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오랜만에 만난 얼굴을 바라보며 웃는 날.
그러나 병원의 추석은 달랐다.
그날 병원은 유난히 조용했다.
평소보다 봉사자들의 발길도 뜸했고,
병실에는 가족을 만나지 못한 환자들이 많았다.
명절이라는 이름이 오히려
그분들의 외로움을 더 크게 만드는 것 같았다.
나는 디에고와 함께 병원을 향했다.
우리는 그날을 특별히
**‘외로운 이웃에게 다가가는 날’**이라고 정했다.
가족이 없는 사람에게
가족의 마음이 되어주고,
찾아오는 사람이 없는 사람에게
잠시라도 찾아오는 사람이 되어주고 싶었다.
그날 만난 한 형제가 있었다.
디에고는 남자 환자들에게 참 살가운 친구가 되어주었다.
그 형제도 디에고에게 마음을 열었다.
자신의 살아온 이야기며
마음속에 담아두었던 이야기들을 하나둘 꺼내놓았다.
그러다가 내게 중요한 부탁을 했다.
“저는 곧 이 병원을 떠나야 합니다.
결핵 치료를 위해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결핵원으로 가야 하는데요……
그날 저와 함께 가주실 수 있습니까?”
나는 흔쾌히 그러겠다고 했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디에고가 함께 갈 수 없게 되었다.
순간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다.
하지만 약속은 약속이었다.
‘혼자라도 데려다드리자.’
그렇게 나는 그 형제와 함께 길을 나섰다.
그런데 가는 길에 형제가 말했다.
“가기 전에 부모님 산소에 잠깐 들르고 싶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공동묘지로 향했다.
그런데 형제가 알려준 산소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한참을 헤매다 보니
그곳은 우리가 알고 있던 묘지가 아니었다.
낯선 화교들의 공동묘지였다.
해는 서서히 기울고 있었다.
낮의 빛이 하나둘 사라지고
산에는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른 묘지를 찾아 다시 올라갔다.
그때 형제가 말했다.
“제가 혼자 올라가서 찾아볼게요.”
나는 차 안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차 문을 닫는 순간부터
이상하리만큼 마음에 두려움이 밀려왔다.
‘혹시…… 내가 잘못 따라온 것은 아닐까?’
‘혹시 이 형제가 나를 다른 곳으로 데려온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더구나 형제는 소주와 오징어까지 준비해 가지고 있었다.
순간 마음속에 무서운 생각이 스쳤다.
‘혹시 술을 마시고 나에게 무례하게 굴면 어떻게 하지?’
해는 저물고 있었다.
낯선 곳이었다.
함께 온 사람은 산으로 올라갔다.
나는 혼자 차 안에 남았다.
그때 나는 비로소 알았다.
사람을 돕는 마음과 두려운 마음은
동시에 내 안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봉사자였지만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도 평범한 사람이었다.
무섭고, 불안하고,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나는 더 이상 내 힘으로 버티지 않고
주님께 마음을 열었다.
그리고 기도했다.
“주님……
저는 지금 이 형제님을 돕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그런데 너무 무섭습니다.
저에게 힘을 주세요.
제가 잘못 판단하지 않도록 지켜주시고,
이 형제님도 지켜주세요.
주님, 저와 함께 계셔 주세요.”
기도를 마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형제가 산에서 내려왔다.
나는 순간 숨을 크게 내쉬었다.
형제의 손에는
아까 가지고 갔던 소주와 오징어가 그대로 들려 있었다.
“산소를 찾을 수가 없네요.”
그 한마디를 듣는 순간
내 마음에는 안도감이 밀려왔다.
아…… 주님께서 지켜주셨구나.
나는 다시 그 형제를 차에 태웠다.
그리고 수녀원이 운영하는 결핵원을 찾아 길을 나섰다.
그때는 지금처럼 네비게이션이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낯선 길을 찾아가는 일이 쉽지 않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한 걸음 한 걸음 길이 열렸다.
마침내 수녀님을 만났고,
형제는 그곳에 무사히 안착할 수 있었다.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리고 불광동으로 돌아와
디에고를 만났다.
그날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다.
“정말 무서웠어.”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웃으며
또 함께 감사했다.
두려웠지만 해낼 수 있었던 것은
내 용기가 커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해 주셨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그 일은
내 기억 속에 조용히 묻혀 있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러던 어느 날
그 형제에게서 연락이 왔다.
나는 반가운 마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들려온 소식은
내 마음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결핵원에서 치료를 잘 받고
건강을 되찾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자기 힘으로 작은 방 한 칸을 얻어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는 소식이었다.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나는 그 집을 찾아갔다.
작은 방이었다.
그런데 방 안에는
생활에 필요한 물건들이 거의 없었다.
형제가 말했다.
“냉장고가 하나 있으면 좋겠는데……
집이 작아서 큰 것은 필요 없고
작은 냉장고 하나면 됩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내게 있는 냉장고가 떠올랐다.
‘그래, 저 냉장고를 드리면 되겠다.’
그래서 기쁜 마음으로
그 냉장고를 선물하기로 했다.
그 이야기를 함께 봉사하던 사람들에게 전했다.
그러자 한 대녀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대모님, 그러면 대모님은 냉장고가 어떻게 해요?”
나는 웃으며 말했다.
“나도 새 냉장고 하나 준비해야지.”
그런데 그 대녀가 뜻밖의 말을 했다.
“그럼 제가 대모님께
더 큰 냉장고 하나 사드릴게요.”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한 사람이 받은 사랑이
또 다른 사람의 사랑을 깨웠다.
내가 냉장고 하나를 내어놓으니
누군가는 내게 더 큰 냉장고를 내어주었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사랑은 없어지는 것이 아니구나.
나누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사람의 마음에서 다시 태어나는구나.
한 사람의 작은 손길이
또 한 사람의 손길을 부르고,
작은 기쁨 하나가
더 큰 기쁨으로 돌아오는구나.
그날 나는 오래전
그 어두운 공동묘지에서 느꼈던 두려움을 떠올렸다.
만약 그때 두려움 때문에
그 형제를 혼자 보내버렸다면?
만약 “무서우니 못 가겠다.”고
약속을 포기했다면?
아마 그날의 이야기는
거기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두려웠음에도
기도하며 한 걸음 내디뎠다.
그리고 그 한 걸음이
한 사람의 새로운 삶으로 이어졌다.
결핵을 이겨낸 형제는
이제 자신의 작은 방에서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도 그를 위해 기도한다.
건강하게 살아가기를.
다시는 외롭지 않기를.
누군가에게 받은 사랑을
언젠가는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고 믿는다.
그날 내가 차 안에서 떨리는 마음으로 드렸던 기도도,
그 형제가 무사히 새로운 삶을 시작한 것도,
냉장고 하나가 또 다른 사랑을 불러온 것도
모두 하나의 길 위에 있었다고.
사랑은 때로 두려움의 문을 열고 들어온다.
처음에는 무섭다.
내가 가진 것을 잃을까 두렵고,
내가 상처받을까 두렵고,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두렵다.
그러나 그 두려움 속에서
주님께 한 걸음 내어놓으면
그곳에서 사랑이 피어난다.
아주 작은 사랑일지라도 괜찮다.
한 사람의 손을 잡아주는 것.
한 번 찾아가 주는 것.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것.
작은 냉장고 하나를 건네는 것.
그 작은 사랑이
누군가에게는 다시 살아갈 힘이 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또 다른 사랑을 낳는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그래서 오늘도 기도한다.
**“주님,
제가 두려움 때문에 사랑을 멈추지 않게 해주세요.
제가 가진 작은 것이라도
필요한 곳으로 흘려보내게 해주세요.
그리고 제 작은 손길을 통해
당신의 사랑이 또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게 해주세요.”**
그렇게 사랑은
조용히 퍼져간다.
소리도 없이,
자랑도 없이.
한 사람에서 또 한 사람에게.
그리고 어느 순간 돌아보면
처음에는 보이지 않았던 수많은 사랑의 흔적이
우리 삶 곳곳에 피어 있다.
그날의 두려움 속에서
나는 사랑을 배웠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사랑은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두려워도 주님의 손을 잡고
한 걸음 내딛는 사람이 시작하는 것임을.
🌿
첫댓글 아씨씨 성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에 나오는 대목이 떠오릅니다.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