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베스, 그는 번영신학의 선구자인가?
한 때 “야베스의 기도”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적이 있었습니다(대상4:9-10). 야베스가 고난 가운데 있었지만 믿음의 간구로 창대케 되는 복을 받았습니다. 지금도 그의 믿음과 기도를 본으로 삼고 실천하면 그가 받은 복을 받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여기에 자극을 받아 한 때 야베스 기도의 열풍이 불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좀 아쉬운 것은 “기도하면 무조건 복을 받는다”는 기복주의 신앙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비판도 만만치 않았다는 겁니다. 야베스의 믿음의 간구에 대한 성경의 내용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다만 이것을 주제로 다루는 사람들이 단순한 신앙공식에 맞추어 풀어내려다 보니 오용되는 문제가 발생된 것입니다.
야베스가 출생할 때 재난과 고통의 상황이었습니다. 정확하게 어떤 상황인지는 밝히지 않지만 그의 어머니가 그를 ”수고로이 낳았다“고 하며, 그의 이름을 ”고통의 아들“이라고 한 것을 보면 출생과 양육 환경이 상당히 힘든 상황이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요즘 아이를 출산하고 기르기 힘든 지경에 놓여 입양을 보내거나 힘겹게 양육하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기도 내용에도 이를 뒷받침할만한 것이 있어요. ”주께서 내게 복을 주시려거든 나의 지역을 넓히시고 주의 손으로 나를 도우사 나로 환난을 벗어나 내게 근심이 없게 하옵소서.“ 그가 고통스러운 상황을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도 기도했던 흔적이 역력히 드러납니다.
역대기는 바벨론 포로귀환 후에 쓰여진 책으로 하나님의 선민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심어주려고 합니다. 유대는 여호와의 선민이며 그가 친히 돌보시는 민족임을 확실하게 인식시켜 여호와의 영광을 바라보는 믿음을 주고자하는 의도에서 기록했습니다. 이스라엘이 포로로 돌아왔지만 완전한 자유와 해방이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백년이 다 되도록 여전히 바사의 속국이고, 다윗 후손의 왕이 아닌 총독이 다스리고, 새로 지은 성전은 솔로몬 성전의 규모에 비해 매우 초라하고, 이방민족들은 수시로 괴롭히는 등 여전히 고통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이 여호와에 대한 불평과 불만이 제사와 일상의 삶에서 분명히 나타나는 것을 포로이후 선지서를 통해서 알 수 있지요(학, 슥, 말).
포로귀환후의 고통스러운 현실은 회복에 담긴 종말론적인 하나님의 계시를 놓치게 합니다. 예를 들면 가나안은 장차 완성될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예표 합니다. 가나안의 생활은 주의 날에 완성되는 영원한 안식의 나라를 소망하며 믿음으로 사는 곳입니다. 마찬가지로 포로귀환 공동체에도 이와 같은 도식이 그대로 적용됩니다. 약속하신 포로귀환이 이루어질 때 선조들 때에 계시된 영원한 도성을 향한 섭리가 지속되고 있다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완전한 회복의 메시지를 확신하며 주어진 환경에서 소임을 다하면 이전보다 못한 현실이지만 “이 성전의 나중 영광이 이전의 영광보다 크리라(학2:9)”고 약속 하신대로 전 보다 더 나은 주의 임재와 영광을 누리도록 축복을 하십니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메시지를 보지 못하면 현실은 마냥 불편하고 불평 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역대기 저자는 포로귀환 공동체에게 야베스(고통의 아들)라는 한 인물의 일생과 유대의 현 상황을 대비시켜 그들에게 믿음의 불을 지피려고 합니다. 야베스가 선민을 돌보시고 완전한 회복을 약속하신 하나님이 자신의 현실도 회복시켜 주실 것을 굳게 믿으며 도우심을 구했더니 형제 중 가장 존귀한 자로 복을 주신 것처럼, 이스라엘도 완전한 회복의 은혜를 확신하며 현실과 맞장을 뜨면서 도우심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야베스를 고통의 아들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만드시는 하나님이 유대도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의 격려처럼 “큰 산을 평지”(슥4:7)로 만드시는 역사를 볼 수 있다는 믿음을 주려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 기도에는 유대가 “종말론적 소망으로 현실을 극복하라”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야베스 이야기를 역대기 저자의 관점에서 보면 오용되지 않고 진실한 믿음의 기도를 드리는 길로 안내 해줍니다. 이러한 배경을 놓치면 야베스의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로 둔갑하여 신앙을 오염시키게 됩니다. “기도하면 복을 받는다”는 번영신앙으로 전락시키고 맙니다.
종말론적인 신앙은 성경이 가르쳐주는 가장 신실한 신앙의 결정체입니다. 믿음의 조상도 이 신앙으로 살았습니다. “요1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히11:10...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그 뒤를 따르는 모든 믿음의 선조들이 동일한 신앙으로 세상을 이기고 환난을 극복하고 악 조건 속에서도 주의 임재로 가득한 믿음의 삶을 보여주었습니다(히11장). 그러나 중세에 이르러 교회가 부와 권력을 손에 쥐자 종말론적인 신앙이 자취를 감추고 땅의 번영에 집착하는 신앙으로 둔갑하였습니다. 종교개혁으로 다시 되찾았지만, 500년이 지난 지금은 다시 땅으로 내려오고 말았습니다.
지금은 종말론적인 소망과 영광을 이따금 보험통장을 꺼내들고 든든한 노후를 그리며 흐뭇한 미소를 짓듯이 심리적인 안정을 찾으려 간간히 들춰 보는 정도입니다. 이러한 신앙은 “고통의 아들”에서 “가장 존귀한 자”로 바꾸어 주시는 주의 강력한 임재를 기대 할 수 없습니다. 이 상태에서 드리는 야베스의 기도는 도깨비 방망이가 되고, 고통의 아들로 그대로 남게 됩니다. 여호와의 종말론적 약속을 마음에 새기고 무시로 이를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며,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 수고를 마다지 않으며 야베스의 기도가 드려질 때, 이를 돌파하게 하시는 주님의 기이한 섭리를 보게 될 것입니다.
첫째, 환경자체를 바꾸시는 은혜가 임 할 수 있습니다. 야베스의 경우 입니다. 또 이스라엘의 경우입니다(시126편). 포로에서 해방으로 바꾸어 귀환하게 하실 때 꿈꾸는 것 같았습니다. 입은 웃음이 가득했고 혀에는 찬양이 가득했습니다. 이방인도 여호와가 큰일을 행하신다고 찬양합니다. 둘째, 환경은 바뀌지 않지만 충분히 극복할만한 은혜를 주십니다. 포로동안 회당을 짓고 말씀을 가르치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약속의 성취를 소망하며 살았습니다. 초대교회가 박해의 한경은 바뀌지 않아도 이러한 은혜를 주시므로 믿음을 지켰습니다. 반드시 대적을 제압하시리라는 확신과 그 날을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도록 영적인 은혜를 넉넉히 주셨습니다.
종말론적인 소망을 가진 사람들은 이러한 은혜로 붙드시므로 현실을 극복하는 삶이 나타납니다. 입에는 웃음이 가득하고 입술에는 감사와 찬양 넘치는 삶이 전개 됩니다. 그러나 “믿으면 복을 받는다, 기도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앙은 손에 잡히는 것이 있으면 감사하고 없으면 불평 합니다. 기복주의는 늘 감사와 찬양으로 일관하는 삶을 살기 힘이 듭니다. 분명한 것은 바른 믿음에 기초하지 못한 모든 신앙의 건축물은 땅과 하늘을 한번 뒤흔드시는 종말론적 심판을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거지요.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시는 불이심이라(히12:26-29).
예수그리스도 날에 완전하게 성취될 그 날을 늘 소망하는 믿음으로 살며 현실에 각자 주어진 소임에 충실한 자에게 주시는 주의 임재가 늘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그래서 날마다 감사와 찬양이 넘치는 신앙으로 사시는 신자가 다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