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내리고 있었다.
서울 여의도 한강변 산책로, 오전 6시 17분. 조깅을 하던 시민이 벤치 옆에 쓰러진 남자를 발견했다. 남자는 50대 초반으로 보였고, 양복 차림이었으며, 손에는 반쯤 구겨진 서류 봉투를 쥐고 있었다. 지갑도, 신분증도 없었다. 다만 양복 안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이 나왔다.
국가안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박세준
형사 강민재가 현장에 도착한 것은 오전 7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그는 우산도 없이 빗속에 서서 시신을 내려다보았다. 15년 경력의 강력계 형사답게, 그는 현장을 보는 순간 직감했다.
이건 단순한 죽음이 아니다.
외상은 없었다. 심장마비처럼 보였다. 하지만 강민재의 눈은 벤치 아래 떨어진 작은 물체를 놓치지 않았다. 빗물에 젖어가는 USB 드라이브 하나.
그는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집어 들었다.
누군가 이걸 빼앗으려 했거나, 아니면 일부러 떨어뜨린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식 결과는 이틀 후에 나왔다.
사인은 급성 심근경색. 겉으로는 자연사였다. 하지만 혈중에서 검출된 미량의 화합물이 감식반장을 멈추게 했다. 자연적으로 생성될 수 없는 성분이었다. 누군가 정교하게, 그리고 치밀하게 손을 쓴 것이었다.
강민재는 박세준의 연구실을 찾았다.
연구원 동료들은 입을 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복도를 지나다 그와 눈이 마주친 젊은 연구원 하나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강민재는 그 순간을 기억해두었다.
박세준의 책상은 말끔히 정리되어 있었다. 너무 말끔했다. 오래 자리를 비운 사람의 책상이 아니었다. 누군가 다녀간 흔적이었다.
서랍 안에는 딱 한 가지만 남아 있었다.
노란 봉투.
강민재는 봉투를 열었다. 안에는 A4 용지 세 장이 들어 있었다. 첫 번째 장 상단에는 붉은 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비공개 — 대북 핵시설 위치 관련 정책 브리핑 초안
배포 금지 / 열람 제한
그리고 두 번째 장 하단에는 누군가 손으로 휘갈겨 쓴 메모가 있었다.
"장관은 이미 알고 있다. 그리고 말했다."
강민재의 손이 멈추었다.
강민재는 그날 저녁 뉴스 아카이브를 뒤졌다.
열흘 전 국회 외교통일위원회 회의. 통일부 장관 정동영이 의원들의 질의에 답변하는 장면이었다. 화면 속 장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마이크 앞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그 입에서 나온 말.
"해당 시설의 소재지는 이미 파악되어 있으며, 관련 연구기관의 보고서에도 명시된 바 있습니다."
회의장은 잠시 술렁였다. 하지만 장관은 개의치 않았다. 강민재는 영상을 일시정지했다.
보고서. 연구기관의 보고서.
그는 박세준의 노란 봉투를 떠올렸다. 그리고 USB 드라이브를. 다음 날 아침, 그는 국가안보정책연구원장 면담을 요청했다.
원장 오재덕은 예순에 가까운 인물로, 흰 머리카락과 깊은 눈주름 사이로 오랜 세월의 무게가 느껴졌다. 그는 강민재를 보자마자 먼저 말했다.
"형사님, 그 보고서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강민재는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무슨 뜻입니까?"
"장관이 국회에서 인용했다는 보고서 말입니다. 우리 연구원은 그런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한 적이 없습니다. 우리 이름이 붙은 가짜 문서가 어딘가에서 만들어진 겁니다."
침묵이 흘렀다.
빗소리만이 창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강민재는 용의자를 세 명으로 압축했다.
첫 번째는 연구원 내부의 누군가였다. 박세준이 비공개 브리핑 초안을 작성하는 과정에서 그 내용을 빼돌린 자. 동료 중에 유독 눈을 피하던 젊은 연구원, 이름은 최현우. 입사 3년 차, 외교부 고위직 출신 아버지를 두고 있었다.
두 번째는 장관 측근이었다. 장관이 국회에서 언급한 보고서가 가짜라면, 그 가짜 문서를 장관에게 건넨 자가 있다는 뜻이었다. 장관 비서실장 윤태경. 전직 국정원 출신, 과묵하고 빈틈없는 인물. 그러나 강민재의 탐문 결과, 그는 박세준과 대학 동기였다.
세 번째는 외부 세력이었다. 미국 측이 기밀 유출에 항의하며 대북 정보 공유를 제한했다는 사실. 그것이 의도된 결과라면? 누군가 한미 정보 협력에 쐐기를 박으려 했다면?
강민재는 수사 노트에 세 이름을 적고 그 아래 선을 그었다.
이 세 개의 그림자는 어디서 만나는가.
국과수 디지털 포렌식팀이 USB 분석 결과를 보내온 것은 사건 발생 닷새 후였다.
USB 안에는 파일이 단 하나였다.
암호화된 영상 파일. 강민재는 팀 내 해킹 전문가 박지수를 불렀다. 그녀는 세 시간 만에 암호를 풀었다.
영상이 재생되었다.
화면은 어두운 회의실이었다. 화질이 거칠었다. 숨겨진 카메라로 찍은 영상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안에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한 명은 최현우였다.
또 한 명의 얼굴이 보이는 순간, 강민재는 숨을 멈추었다.
윤태경이었다.
"이걸 장관님께 올리면 됩니까?"
최현우의 목소리였다.
"그래. 출처는 연구원 공식 보고서로 포장해. 아무도 원본을 확인할 생각을 안 할 테니까."
"그런데 박 위원이 눈치를 챈 것 같습니다."
짧은 침묵.
"그건 내가 처리한다."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강민재는 천천히 모니터에서 눈을 떼었다. 박지수가 조용히 물었다.
"체포 영장 신청하실 겁니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창밖을 보았다. 서울의 밤이 깊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법의 이름으로, 누군가는 국가의 이름으로 거짓말을 했다. 그리고 한 사람이 죽었다.
그는 천천히 수첩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한 줄을 적었다.
책임 없는 언행은 갈등을 낳고, 갈등은 반드시 누군가의 희생을 요구한다.
다음 날 새벽 5시.
윤태경의 아파트 앞에 강민재와 수사팀이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캐리어를 끌고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있었다.
강민재가 앞을 막아섰다.
"윤태경 씨, 박세준 씨 살해 교사 및 국가기밀 조작 혐의로 체포합니다."
윤태경은 멈추었다. 천천히 고개를 들어 강민재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놀라움도, 분노도 없었다. 다만 오래된 피로만이 가득했다.
"형사님."
그가 낮게 말했다.
"이 나라에서 진짜 기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핵시설 좌표가 아닙니다. 누가 그 정보를 이용해 무엇을 얻으려 했는지, 그겁니다."
강민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수갑이 채워지는 소리가 지하 주차장을 울렸다.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서, 강민재는 생각했다.
제도가 현실을 담지 못하고, 발언이 국가의 무게를 잊을 때. 그 틈새에서 자라나는 것은 갈등만이 아니다. 때로는 죽음도 자란다.
그는 외투 깃을 세우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동쪽 하늘이 희붐하게 밝아오고 있었다.
사건은 조용히 마무리되었다.
윤태경은 구속 기소되었고, 최현우는 증거 인멸 혐의로 불구속 기소되었다. 정동영 장관은 국회에서 해명 발언을 했지만, 그 말이 진심인지 변명인지를 판단하는 것은 국민의 몫이었다.
미국 측과의 정보 공유는 여전히 제한된 상태였다.
노란봉투법을 둘러싼 노사 갈등은 해소되지 않은 채 겨울을 맞이하고 있었다.
강민재는 퇴근길에 한강변을 걸었다. 박세준이 발견된 벤치 앞에 멈추었다. 아무것도 없었다. 빗물도, 서류 봉투도, 이제는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그는 주머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냈다.
국가안보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 — 박세준
당신은 진실을 지키려 했습니다. 그 무게를 혼자 견디다 여기까지 왔군요.
그는 명함을 천천히 강물 위에 띄웠다.
명함은 흔들리다가,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