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 6월 사돈과의 양평 여행 때 약속하였다. 가을에 삼척으로 바다를 보러 가자고 했다. 사돈하고 함께 여행을 간다니까 주변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왜 하필이면 그렇게 어려운 사돈하고 가느냐고. 말을 함부로 할 수가 있나 행동을 마음대로 할 수가 있나. 여행의 자유로움이 상실된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사돈하고 여행을 다녀왔다는 사람을 나도 아직 보지 못하였다. 우리는 왜 가능할까 생각해보니 가능한 게 당연했다.
사위와 딸이 하도 알콩달콩 지내고 있어 그 달달한 여운이 양가 부모들에게까지 전해져서이고. 언니와 오빠가 여럿인 내가 사돈을 사돈이라 여기지 않고 감히 언니 오빠 같다고 여겨서이고. 사돈이 오빠와 언니처럼 다정해서이고. 사위와 딸이 효자효녀라서이고. 그중 최고의 이유는 딸아이 뱃속에 손자 반반이가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어서다. 모나지 않게 평범하게 살아온 세월이 엇비슷하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세상만사 그러려니 그럴 수 있지 라며 너그러워진 나이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동해휴게소에서 만나기로 했다. 사위는 광명으로 이른 새벽에 달려가 부모님을 모시고 왔다. 배가 남산만해진 딸아이를 데리고 우리도 출발했다. 여행은 인생살이 중 솜털처럼 가장 가벼운 몸짓이다. 바람결 민들레 홀씨처럼 창공을 향해 나풀나풀 떠오르는 기분이기 때문이다.
동해 휴게소는 동해바다를 한눈에 훤히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다. 그곳에 들어서면 감탄사와 동시에 동해바다처럼 드넓어진다. 가슴이 뻥 뚫린다는 말이 맞다. 바다도 보고 맛있는 점심도 먹고 일석이조다. 6월에 사돈을 뵈었으니 6개월만이다. 바깥사돈은 퍼머머리를 휘날리며 여전히 연예인 같으시고 안사돈은 아래위 베이지색옷으로 세련된 옷차림이시다. 반가워하시는 표정이 내 언니와 오빠다. 비빔밥과 순두부와 육개장과 돈가스로 점심을 맛있게 먹었다.
케이블카를 타러 삼척 용화역으로 향했다. 25인승 빨간색 캐빈 두 대가 용화역과 장호역을 오간다. 용화역에서 출발하여 바다를 가로질러 장호역까지 874m 5분 거리다. 경로 우대로 3000원 할인해서 7000원을 냈다. 단순한 나는 돈을 조금 낸다는 사실에 좋아했는데, 바깥사돈은 말씀하셨다. 3000원 되돌려주면 50대로 혹 바꿔주나? 도발적 발상이시다. 바꿀 수 있다면 좋겠다.
케이블카 바닥은 강화유리로 바다와 바위가 훤히 보인다. 십여 년 전 미서부 여행 때 라스베가스 110층 건물 옥상에서 강화유리로 된 바닥을 처음 걸었을 때 그 아찔함은 아니지만, 맑은 바다속과 물고기를 바라보는, 자연과 호흡하는 소박한 느낌은 좋았다. 우리는 사돈끼리 여행 왔어요 봄과 가을로 다니지요. 우리 며느리는 아이를 가졌지요. 안사돈이 큰소리로 자랑을 하셨다. 자랑할만 하지 않은가. 뒤쪽 나이든 여자 승객들이 신기하고 부러운 눈길로 웅성거리며 우리를 쳐다보았다. 참 좋아보이네요 축하합니다. 오랜만에 소심한 내가 우쭐해져서 인사했다. 고맙습니다.
검봉산에 설치된 장호원역에 도착. 소나무가 울창하고 데크가 잘 되어있어 걷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내려가기는 쉬운데 계단 경사가 심해서 어찌 올라올까 내심 걱정이었는데 다행히 케이블카가 우뚝 서 있다. 중간중간 바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전망대가 있다. 바다와 소나무를 배경으로 여섯 명이 가까이 붙어서서 단체 사진을 셀카로 찍었다. 환하고 행복한 순간이 포착되었다.
바깥사돈은 등대 가까이 가고 싶어하셨다. 날씨는 계절에 맞지 않게 후덥지근하여 땀으로 옷이 젖는데 그곳으로 가는 길은 햇볕이 쨍쨍 내리쪼였다. 누구도 그곳으로 걸어가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바깥사돈이 말씀하셨다. 햇볕이 뭐가 무서워요 이 좋은 햇볕을 많이 쪼여야지. 혼자서 그 뜨거운 시멘트 길을 씩씩하게 걸어갔다가 오셨다.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고 직진하는 용감한 전사 기질이다. 5대 독자로 무엇이든 앞장서서 살아오신 분이다.
숙소로 갔다. 사위는 부모님을 모시고, 딸아이는 우리 차에 탔으므로 잠시 떨어져 있었다고 사위와 딸이 얼싸안는 것이었다. 얼마나 사랑스러운가. 그 사랑스러움을 나도 흉내내고 싶었나보다. 너네만 반가운 줄 아니 우리도 반가워! 우리도 할 줄 알아. 나는 안사돈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웃음 보따리가 스르륵 풀어지고 웃음이 와르르 쏟아져 내렸다. 함께라는 것은 행복이다.
전망이 좋은 방이 없다더니 방 둘 다 바다가 사선으로 보이는 방으로 배정이 되었다. 그만하면 대만족. 딸아이가 임산부이므로 되도록 편하게 해 주기 위해 딸네와 우리가 같은 방으로 정했다. 사돈네는 두 분이서 지낼 수 있는 다른 방으로 정했다. 오후가 되니 8개월에 접어든 딸아이의 배가 딴딴했다. 임산부에게는 이번 여행이 무리였나보다.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일단 쉬자. 쉬자.
저녁밥을 먹으러 가는 길. 파도가 철썩이는 바다를 끼고 모래사장을 걸었다. 마침 그 옆에서 국화전시회가 열리는 중이었다. 국화꽃도 다양하지만 국화꽃으로 기린이며 토끼며 각종 동물들뿐만 아니라 물고기와 용까지 만들어놓았다. 봄부터 가을까지 국화를 어루만지고 들여다본, 누군가의 부단한 수고의 결과물이다. 감탄과 박수를 보냈다.
노란국화꽃으로 커다란 화관을 만들고 그 주변은 보랏빛꽃으로 장식한 그곳에 의자가 놓여있었다. 앉아서 사진을 찍기에 안성맞춤이 아닌가. 안사돈과 양손을 부여잡고 활짝 웃으며 사진을 찍었다. 사돈이 아니고 친구이며 언니다. 기자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정치인들도 이만한 화합을 보여주지는 못할 것이다.
저녁밥은 예약을 해 두었으므로 바로 안내되었다. 싱싱한 회는 물론이고 생선구이가 일품이었다. 감자떡이며 장조림이며 밑반찬이 풍성했다. 안사돈과 나는 마주앉아 생선구이에 코를 박고 정신없이 먹었다. 남자들은 회를 곁들여 술을 마셨다. 바깥사돈은 안주를 반대 쪽으로 밀어주면서 술만 드셨다. 그럼에도 실수 없이 어찌나 말씀을 유창하게 잘 하시던지 우리는 듣고 웃느라 바빴다.
손자 반반이를 위한 시를 써 오셔서 낭송을 하셨다. 낭만적이시다. 몸 건강하고 맘 선량하면 그 뿐. 손자에게 바라는 이 담백하고 욕심 없는 글에서 인생길을 오래 걸어온 할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이 듬뿍 묻어난다. 감동이다. 바깥사돈의 말씀을 경청하면서 고개를 끄떡이고 박수를 쳐 주는 남편의 얼굴에는 편안함과 행복감이 감돌았다. 요즈음 술을 끊은 탓에 말수가 줄었으나 젊어서는 술에 취하면 바깥사돈 못지않게 청산유수로 말 꼬리를 늘이던 사람이었다.
아빠가 된다는 게 처음에는 부담이 좀 되었지요. 아빠 노릇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도 되었구요. 그러다가 반반이의 심장소리를 듣고 하루하루 커가는 모습을 영상으로 보면서 아빠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커졌어요. 일도 더 열심히 하게 되고 열심히 하다보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거예요. 사위가 말했다.
박수! 그렇게 말하는 사위가 기특하여 내가 박수를 치며 소리를 질렀다.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딸아이가 최고로 열렬하게 큰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홍길을 존경하고 사랑하고 배려하는 다움이지. 안사돈이 딸아이를 칭찬하셨다. 모두 딸아이를 향해 칭찬의 박수를 보냈다. 자식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아버지와 어머니가 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는 일, 눈물겨운 기쁨이다.
바닷물이 하얗게 밀려왔다 밀려가는 밤바다 모래사장을 거닐며 숙소로 돌아왔다. 사위는 술을 더 드시고 싶어하는 아버지를 위해 맥주를 사서 아버지의 방으로 올라갔다. 딸네 부부와 우리는 2층 사돈네는 7층이다. 삼척 쏠비치에는 산토리니 광장이 있는데, 주변 건물이 이탈리아의 산토리니처럼 단순하면서 백색이다. 밤에 촬영하면 멋진 사진이 나온다. 인터넷으로 안사돈이 그곳을 보시고는 꼭 밤에 가보고 싶으셨단다. 사위는 어머니를 모시고 올라가 사진을 찍어드렸다.
아침이 되자 사위는 부모님 방으로 올라가서 라면을 함께 끓여 먹었다. 과하게 술을 드신 아버지를 위해서다. 카페에 모시고 가서 차와 케잌을 대접하였다. 바닷가를 산책하였다. 그것뿐이랴. 어제는 바깥사돈이 등대를 보신다고 혼자 가셨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오시지를 않자, 사위가 아버지를 찾아 산을 뛰어 내려가기도 했다. 부모님을 향한 마음이야 누구나 있을 수 있지만,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위의 부모 사랑에 감탄하게 된다. 열 아들 부럽지 않은 아들이다.
작년에도 이곳에 왔던 남편과 나는 느긋하게 딸아이와 누룽지를 끓여 먹었다. 배가 남산만한 딸아이는 자고 싶다고 했다. 어제 무리였나보다. 그 틈에 우리는 국화전시회를 보며 바닷가를 잠시 걸었다. 흔들거리는 그네 의자에 앉아 함께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간간이 불어와 얼굴을 간지럽혔다. 바다를 바라보며 연인처럼 기대고 있는 뒷모습을 하트꽃 아래서 찍었다. 아름다운 시간이다. 감사한 시간이다.
아쉬움이라면, 앞장서서 종달새처럼 지저귀며 부지런히 안내하고 사진을 찍어주었을 딸아이가 방에서 쉬고 있는 것이다. 마음이 쓰여 되도록 빨리 숙소로 돌아오니, 딸아이가 잠이 안 온다며 소파에 누워있다. 쓸쓸해 보인다. 함께 있지 않은게 미안했다.
잠이 안 오네 단단해졌던 배가 부드러워졌어요 반반이가 막 움직이네 어제는 안 움직여서 걱정했는데. 딸아이가 배시시 웃는데 안쓰럽다. 측은하다. 어머니가 되는 일은 자신을 조금씩 뒤쪽으로 밀어내야 하는 일, 그래서 어머니들은 딸이 아이를 낳으면 눈물을 흘리는가보다. 그 마음을 이제야 온전히 알겠다.
오오! 이 장면을 어찌 잊으랴. 사위와 딸이 잘 자도록 하기 위해 나는 깨어난채로 방에 누워있었다. 딸아이가 빼꼼히 문을 열더니 엄마 해가 떠오르고 있어요. 어서 나와봐요. 말했다. 오오! 바다와 하늘을 주홍빛으로 물들이며 해가 솟아오르고 있었다. 축복이었다. 기도했다. 산모와 아기가 건강하게 해 주십시오.
나중에 알았는데, 안사돈은 일부러 해돋이 시간을 알아두었다가 일찍 일어나 밖으로 나가 해돋이를 보셨단다. 직접 찍은 사진을 보았다. 내가 본 해돋이보다 좀 더 이른 원초적 해돋이였다. 둥근 해 주변은 온통 빨간빛이고 바다는 검은빛에 가까운 갈색톤으로 두 빛깔의 조화가 장엄했다. 저절로 손을 모아 기도를 드리고 싶어질만큼 매혹적인 경건함이다. 손자 반반이를 위해 기도 하셨단다. 지혜로운 사람으로 크게 하소서! 배려심 많은 사람으로 크게 하소서!
점심은 안사돈이 미리 인터넷으로 보아둔 전복 뚝배기 해물탕집으로 갔다. 구수하다며 바깥사돈과 사위는 뚝배기 가득한 국물을 한 방울도 남기지 않았다. 해장국이네 해장국. 전복 순두부도 맛있었다. 사위가 음식값을 지불했다. 이 정도는 저희가 내야지요 오! 어쩐지 더 맛있구나. 안사돈과 내가 합창을 했다.
헤어져야 할 시간이다. 안사돈은 사과를 한 봉지 우리에게 주셨다. 딸네부부 것도 준비하셨단다. 비싸서 못 사 먹었는데, 이 비싼 사과를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언니에게 하듯 나는 어리광 섞인 인사를 했다. 남편은 직접 담근 매실주와 매실엑기스를 드렸다. 술을 좋아하시는 바깥사돈이 빙긋이 웃으셨다. 비싸고 좋은 것을 받거나 주는 것만이 기쁜 일은 아니다. 소소하지만 마음이 담긴 것을 주는 일이, 받는 일이, 진정한 기쁨이요 행복일 것이다.
하늘은 맑고 바다는 잔잔했다. 추울 것으로 예상했던 날씨는 오히려 더웠다. 배가 부른 딸아이는 배가 단단해지는 피곤함을 내게만 말했다. 퍼머머리를 멋지게 휘날리는 바깥사돈은 너그럽고 여유로운 웃음으로 분위기를 압도했다. 며칠 전 넘어질 뻔하여 손과 다리에 문제가 있는 안사돈은 나중에서야 통증을 말씀하셨다. 새벽부터 부모님 곁과 아내 곁을 열심히 오간 사위는 건강하고 든든한 얼굴이었다. 운전하느라 힘들었을 남편도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건강을 되찾은 나는 모든 순간순간에 감사했다. 함께라서 더욱 감사하고 소중한 여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