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사 명장면] 37. 일본불교와 단가제도
反기독교 정책 협력 대가로 死者의례 ‘독점’
대부분의 일본 가정은 불교사원에 소속돼 자신이 속한 사찰에 죽음에 관한 의례를 일임한다. 사진은 와카야마현 고카와지(粉河寺)에 마련된 납골묘의 모습. 불교신문 자료사진
한국과 일본은 지리적으로 가깝고, 사람들의 생김새가 유사하지만, 실은 풍속, 사유방식, 가치관 등에 있어서는 판이하게 다른 측면이 많다. 그 중의 하나가 죽음에 관련되는 습속이다.
일본인의 대부분은 불교를 통해 저 세상으로의 여행을 떠난다. 현재에도 거의 95% 이상의 가정이 장례 및 조상제사의 의례를 불교식으로 거행하고, 불교적 사고방식에 따라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있다. 신도(神道)의 나라로 알려진 일본은 실은 죽음에 관해서는 철저하게 불교의 나라이다.
이러한 사자(死者)에 관련된 불교적 제반 의례와 직접 관련이 있는 것이 17세기 중반 이후 정착되어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소위 단가제도(檀家制度)라 일컫는 관례이다. 일본의 거의 모든 가정은 불교사원에 소속되어, 자신이 속한 불교사원에 죽음에 관련된 의례를 일임하고 있다. 사자의례를 중심으로 맺어진 불교사원과 가정(혹은 개인) 사이의 대를 이어가는 지속적 관계가 바로 단가제도이다.
16세기 선교사들 밀려와 기독교 전파 ‘위세’
幕府서 불교 이용 말살책…사찰도 적극호응
일본에서 유교가 죽음에 관련된 의례를 담당했던 적은 전 역사를 통하여 전무했다. 때문에 한국 전통사회의 유교적 가치관으로 일본의 죽음에 관련된 문화를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은 처음부터 무모한 시도에 불과하다. 조선의 예송논쟁은 일본인에게 있어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이상한 논쟁일 뿐이다.
일본 전역의 거의 모든 사찰은 경내에 납골묘를 갖추고 있다. 나가노시(長野市) 센꼬지(善光寺)를 참배하는 신도들의 모습.
그렇다면 일본에서는 언제부터 불교가 죽음의 문제를 담당하기 시작했는가. 간단하게 말한다면, 17세기 중반부터이다. 그 이전까지 일반 서민들은 사자의례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죽음은 오염을 초래하는 공포의 대상으로 믿어져, 대부분의 평민들은 시신(屍身)을 숲에 갖다 버리는 식으로 장례를 간단히 처리했다. 하지만, 천황가는 불교식의 장례를 엄수했다.
일본인 모두가 불교식 장례 및 조상제사를 따르게 된 데에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역사적 전기가 있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전래였다. 16세기 중반부터 밀려오기 시작한 유럽의 가톨릭 선교사들은 일본인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는데 큰 성과를 올렸다. 지방의 영주들은 유럽의 신식무기를 구입하고 무역이익을 얻기 위해 선교사들의 활동을 지원하고, 스스로 기독교로 개종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의 전래로부터 50년이 지나기도 전에, 일본은 소위 ‘기독교의 세기’를 구가하게 되었다.
조선에서는 임진란이 끝나고 전후 복구가 한창이던 시절인 17세기 초, 일본의 전 인구의 20% 가량은 기독교 신자로 변해있었다. 전국적 통계조사가 불가능했던 시절, 이러한 수치는 가설에 불과하지만, 그 정도로 기독교의 위세가 강했다. 신도, 불교와 더불어 일본은 기독교의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기독교의 위세는 오래가지 못하였다. 기독교에 먼저 철퇴를 가한 것은 조선을 침략했던 히데요시였다. 16세기말 그는 선교사 추방령을 내렸던 것이다. 그 이유는 선교사들이 혹세무민하여 순진한 사람들을 기독교로 개종시키고, 일본 고유의 전통종교인 신도신사(神道神社) 및 불교사원을 파괴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 덧붙여 히데요시는 일본은 신국(神國) 즉 ‘신들의 나라’라고 선언했다.
1600년에 토쿠가와 이에야스가 새로운 정권을 세우면서, 일본은 소위 근세로 이행하게 되었다. 이에야스는 무역 등의 이점 때문에 처음에는 기독교에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호의적 태도도 잠시, 정치적 이유에서 기독교 탄압으로 급선회를 한 이에야스는 급기야 반기독교 정책을 토쿠가와 정권의 국시로 못 박았다.
이에야스의 뒤를 이은 정권담당자들은 철저한 기독교 탄압에 총력을 기울였다. 전 인구의 20%에 가까운 사람들이 기독교인이 된 상황에서, 중앙정부의 명령 하나로 기독교를 하루아침에 뿌리 뽑는다는 것은 그러나 지난한 일이었다. 탄압에 저항하면서, 죽음으로 맞서거나 처형된 외국 선교사 및 일반 기독교 신자들은 엄청난 수에 이르렀다. 특정 종교의 말살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기독교 탄압에 있어 국가가 갖고 있었던 근본적 한계는 중앙정부의 행정력이 전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지방분권의 체제에서 중앙정부, 즉 바쿠후(幕府)가 직접 다스리는 지역은 전 국토의 사분의 일에 불과했고, 그 나머지는 지방영주들이 자치권을 쥐고 있었다. 지방영주들에게 기독교 탄압을 강요할 수 있어도, 그 시행을 철저히 감독하고 확인할 수는 없는 것이 연합적 정치체제인 일본의 근세정권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안한 것이 불교사원을 통한 기독교 말살책이었다. 16세기에 후반을 지나면서 불교의 각 종파는 급격한 세력확장을 거듭했고, 17세기에 이르면, 일본 전역의 구석구석에 불교사원이 없는 곳이 없었다. 불교승려들을 기독교 말살의 행정도구로 이용하는 전략이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점차 정비되어 갔다. 이는 직접 손에 피를 묻히지 않으면서 기독교를 없애는 알 먹고 꿩 먹는 득책이었다.
기독교 탄압에 불교를 동원하는 전략은 나름의 사상적 정당성도 있었다. 기독교 탄압의 이유가 ‘신들의 나라’인 신국 일본을 외래 종교로부터 보호하는 일이었고, 신국 일본의 정신적 대들보는 신도와 더불어 불교였기 때문이었다. 신국 일본에 있어 신도와 불교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았다. 그러나 당시 신도 신사의 대부분이 불교승려가 장악하여 관리하고 있는 상황에서, 신도의 종교조직을 동원하기에는 제도적으로 무리였다. 자연히 불교사원과 승려들을 동원하게 되었다.
반기독교 정책을 통한 주민의 통제라는 막강한 반대급부를 부여받은 불교사원은 정부의 방침에 적극 호응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가시와 같은 기독교인데, 앞장서서 이의 추종자들을 뿌리채 뽑아달라니 하늘이 내려준 선물이 아닐 수 없었다. 이렇게 하여 국가의 법으로 정비되어 간 것이 모든 주민의 종교 신분을 체크하는 사청제도(寺請制度)였다. 사청제도는 1660년대에 이르기까지 전국규모로 정비되어 철저히 시행되었다. 사청제도가 공식적으로 폐지된 것은 19세기 중후반 메이지 정부가 들어선 이후이다.
그러면 사청제도란 무엇인가? 사청제도는 모든 주민이 특정의 불교사원에 소속되어 있음을 전제로, 그 사원의 주지로부터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님을 매년 문서로 확인받는 제도이다. 이렇게 하여 자신은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자신이 속한 절의 주지로부터 발급받은 각 개인은 이를 자신이 속한 행정기관에 제출해야 했다. 그리고 지방 행정기관은 이들 증명서들에 기초하여 기독교인이 전무하다는 내용의 주민대장을 만들고 상급기관에 제출 보고해야 했다.
불교사원의 주지로부터 자신이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증명서를 발급받지 못하는 주민은 기독교인으로 분류되어 사형이라는 처벌을 받았다. 때문에 절로부터 종교신분 증명서를 발급받지 못한다는 것은 스스로 삶을 포기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1660년대부터 전국적으로 그것도 매년 철저히 실시된 이러한 사청제도는 200년 이상 국가의 법률로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사찰서 非기독교인 확인 못받은 주민 ‘사형’
사자의례 집행 독점 ‘보상’…관습으로 정착
그러나 불교사원의 기독교 관련 행정업무에 대해 국가가 무슨 보상을 해준 것은 아니었다. 직접 보상 대신, 국가는 불교사원들이 스스로 보상을 챙기도록 허용했다. 여기에서 생긴 것이 단가제도라는 불교사원이 스스로 만든 보상의 길이었다. 단가제도가 국가의 법으로 규정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러한 제도에 대해 국가의 공권력은 묵인을 하였고,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이는 하나의 관습으로 깊이 뿌리를 내리고 정착되어 갔던 것이다.
단가제도 혹은 사단제(寺檀制)로 불린 이러한 관습은 무엇을 지칭하는가? 한마디로 불교사원이 자신에게 소속된 자의 죽음 및 사후의 운명에 관련되는 모든 종교적 의례의 집행권을 영구적으로 독점하는 제도를 지칭하는 것으로, 이러한 독점권에 대해 각 개인은 이의 없이 순종해야만 했다. 죽음에 관한 의례집행권의 독점, 여기에 바로 경제적 보상의 길이 있었다. 죽음에 관련된 장례식, 그리고 사후 거행되는 조상숭배의례를 위시한 각종 제사의례는 일정한 경제적 대가의 지불을 전제로 했다. 몇 십 가구의 소속 신도를 거느리기만 하면 사원은 경제적 어려움 없이 운영이 가능했다.
소속 신도들로부터 수입을 올리기 위해 각 불교사원은 죽음에 관련된 의례를 여러 가지 명목으로 늘리고 정례화하는 한편, 죽음과 직접 관련 없는 분야에까지 종교 사업을 확장하여갔다. 불교사원이 요구하는 사항을 거절할 경우, 소속 신도는 기독교인이 아니라는 신분증명의 발급을 거절당할 수 있었고, 만약 거부되는 사태가 야기된다면 그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로 전개될 수 있었다.
이러한 기독교 탄압의 장구한 세월을 살면서 일본인은 자연 죽음에 관련된 종교적 문제를 불교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를 또한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이에 맞추어 불교승려들도 나름대로 종교서비스의 내용을 개선하고 다양한 불교적 가르침을 펼쳐나갔다. 400년 가깝게 지속된 단가제도의 관습은 부동의 전통으로 자리 잡고, 근대의 격동 속에서도 연면히 이어져, 오늘날에도 일본인의 죽음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다.
허 남 린 / 캐나다 브리티시 콜럼비아대학 교수
[출처 : 불교신문]
☞'불교사 명장면' 목차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