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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1)(마6:25-34)
이 땅에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염려가 없는 사람이 없습니다. 가난한 자와 부자, 누가 더 염려가 많겠습니까? 가난한 자일 것 같지만 부자가 더 염려가 많습니다. 뭔가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염려는 더 커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은 이러한 염려를 하나님께 다 맡기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을 경영하시는 분이 바로 우리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러한 염려를 하지 말라고 명령하십니다. (눅21:34)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진다" 염려로 "둔하여진다"는 말은 '감각을 잃어버린다'는 뜻이 있습니다. 영적으로 감각을 상실하고 무력하게 되는 것은 너무나 무서운 일입니다. 염려하면 우리 영혼의 기능이 마비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염려가 지나치면 영적으로 무감각해질 뿐만 아니라 심한 무력감에 빠지게 됩니다.
신앙경력이 깊고, 제아무리 교회봉사를 열심히 한다고 할지라도 늘 염려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영적 무기력증에 걸린 불행한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럼데도 불구하고 염려와 걱정 근심이 거대한 파도처럼 밀려올 때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 오늘 이 말씀, 염려하지 말라는 예수님의 강력한 명령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지난 번에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좀 먹게 하는 물질의 유혹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은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고 하늘에 쌓아 두어 하늘부자가 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뿐 만 아니라 하나님과 재물은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물질과 함께 우리의 신앙을 좀 먹는 것이 있는 데 그것이 바로 염려입니다.
물질이 외적으로 우리가 경계해야 할 대상이라면 염려는 내적으로 경계해야 할 대상입니다. 염려란 일반적으로 근심과 걱정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우리 모두가 염려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마 한 가지 이상씩은 염려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뿐 만 아니라 매사를 걱정 근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생활의 일부분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오늘 참석하신 여러분들 가운데 염려가 하나도 없는 분 계십니까? 아마 누구나 한 가지 이상씩은 염려를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매사를 걱정 근심하며 살아가는 것이 우리 생활의 일부분처럼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염려란 아무 것에도 쓸데없는 비생산적인 것입니다.
어니 J 젤린스키의 '느리게 사는 즐거움' 이란 책이 있습니다. 거기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우리가 하는 걱정거리의 40%는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에 대한 것이고, 30%는 이미 일어난 사건들이고, 22%는 사소한 사건들이며, 4%는 우리가 바꿀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것들이다. 겨우 나머지 4%만이 우리가 대처할 수 있는 진짜 문제이다. 즉, 96%의 걱정거리가 쓸데없는 것이다."
쓸데없는 염려가 우리의 생각을 지배하면서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처럼 많은 부분이 잘못된 염려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라도 더할 수 있느냐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염려, 그것은 믿음의 반대되는 것이며 마귀가 우리의 믿음을 좀먹게 하는 방편으로 사용하는 무기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평생 염려의 노예가 되어서 근심과 걱정 속에 파묻혀 살아가고 있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본문 25절,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에는 중요한 뜻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째는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되는 중요한 것이지만 그것이 우리 인생의 목적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먹고 마시고 입는 것을 중요하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예수님도 부인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하루 필요한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신 후 사단에게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을 당하실 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의 육체는 떡이 필요하지만 사람의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즉 떡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가지고 영을 만족시킬 수 없다는 뜻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먹고 마시고 입는 문제가 굉장히 중요한 문제가 되어 살아가고 있습니다. 머리로는 그것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으면서도 말입니다. 그래서 먹기 위해 사느냐, 또 입는 것이 인생의 목표냐고 물으면 절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그러나 실제는 그러한 것에 우리의 관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집에서 살고, 어떤 차를 타고, 무슨 상표의 옷을 입고 있느냐에 따라 자기의 신분과 위치가 결정된다고 생각하여 본의 아니게 자꾸 그것을 추구해가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좀 더 높은 지위 더 많은 소유를 위해 아귀다툼까지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에게는 그것만이 너의 성공한 표식이다'. '그것이 행복한 표식이다'. '그것만이 네가 추구해야 할 인생의 참된 가치이다'라고 계속 설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단계에 이르면 필연코 따르는 결과가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염려입니다. 물질을 추구하면 근심과 걱정이 쌓일 수 밖에 없습니다. 세상을 가까이 하면 하나님은 멀어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우리의 신앙은 한마디로 완전히 불신앙의 상태로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모든 것이 자기 능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이전에는 교회에 안 나가면 벌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돈 버느라고 교회에 안 나가 보았지만 벌도 안 받고 장사도 잘됩니다.
그래서 교회는 가끔 인사차 나오고 하나님도 이 모든 것을 다 이해해 주실 것이라고 자위합니다. "하나님, 이 사업을 잘해서 돈 번 후에 교회에 잘 나가겠습니다. 지금은 주일 날 사업상 술도 마셔야 하고 장사도 해야 하고 할 일이 너무나 많으니까 하나님 섬기는 것은 잠깐 쉬고 돈 많이 번 다음에 그것으로 헌금하겠습니다"라는 식으로 자기를 변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면 결과적으로 하나님에 대해 오만불손하게 되고 교만해지게 됩니다. 이제 돈만 가지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느끼며 신앙도 돈만 가지면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어느 순간에 돌이킬 수 없는 치명적인, 결정적인 매를 맞게 됩니다. 그때는 울어도 소용없고, 애써도 소용없고, 사람을 찾아 다녀도 소용없는 비참한 지경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괜찮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진노를 쌓고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그 진노가 어느 순간에 자기에게 임할 것을 예측하지 못한 채 미련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세상과 물질과 염려 속에 빠져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 주셨습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그리고 두번째는 25절 말씀에 염려하지 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염려하지 말라", 명령문입니다. 주님의 명령입니다. 염려해도 되도 안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하지 말라는 강한 명령입니다. 이 말은 결국 우리에게 다가온 모든 문제를 주님이 책임져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우리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계시고 돌보아 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염려하지 말라는 말이 얼마나 중요하였든지 예수님은 본문의 여러 곳에서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25절에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27절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28절에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31절에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34절에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염려란 독과 같습니다. 독이 몸에 퍼질 때는 갑자기 퍼져서 죽는 것이 아닙니다. 서서히 퍼지지만 결국에는 꼼짝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 염려란 끊을 수 없이 계속 빠져 들어가는 마약과도 같습니다. 그러므로 재물의 유혹에 빠지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염려의 노예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잠언 12:25에 "근심이 사람의 마음에 있으면 그것으로 번뇌하게 되나"라고 하였습니다. 잠못 이루는 밤이 있습니까? 쓸데없는 잡념의 노예가 되어서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물밀듯이 뇌리를 싸고 도는 염려를 끊어야 합니다.
마귀를 내쫓듯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근심 걱정을 내쫓아야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자연히 물러가지 않으므로 성령님의 도움으로 그 근원들을 잘라 버려야 합니다. 염려에 대한 해결책으로 성경은 두 가지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1)하나님을 믿으라. 요한복음 14:1에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인간의 죄의 속성 중의 하나는 염려입니다. 근심 걱정을 해야 사는 의미가 있는 것처럼 느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어두움 속에만 있어서 태양의 즐거움을 맛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2)하나님께 기도하라. (벧전 5: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빌립보서에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해주십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문제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불신앙 때문에 염려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죽을병이 들었다든지. 먹을 것이 없다든지, 사회에서 버림을 받았다든지, 감옥에 있다든지 하는 환경적인 요인 때문에 염려하는 것이 아니라 염려의 본질은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불신앙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계시면,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시면 어떤 환경에서도 염려하지 않게 됩니다. 어떤 위기 앞에서도 불안과 공포에 떨지 않게 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와 날마다 함께 살았기 때문에 감옥에 들어가 있으면서도 사람들에게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고 말할 수 있었습니다. 또 사도행전 27장에 보면 사도 바울은 로마로 향하는 배를 타고 가다가 유라굴로 광풍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물에 빠져 죽게 되는 상태에 이르렀는데도 그는 너무나 태평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에게 "형제들이여 안심하소서 나는 여러분들이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압니다. 어젯밤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오셔셔 우리를 구원해 주신다고 말씀하셨으니 안심하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심한 풍랑을 만나 죽게 된 현실 가운데서도 그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믿고 염려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안심과 평안이 있느냐 하는 것은 우리에게 지금 하나님이 계신가 안 계신가로 결정되는 것입니다. 염려는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고 자기의 지식이나 경험을 의지할 때 생기므로 예수님께서는 염려하지 말라고 하시며 30절에서 결론적으로 "믿음이 적은 자들아"라고 통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염려는 믿음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믿음이 적으면 염려가 그 마음을 차지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할 때 염려가 우리 맘에서 사라질줄 믿습니다.
또 염려해서 안되는 이유를 26절에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은 하늘에 나는 수만 마리의 새들 중 한 마리의 새에 대해서 까지도 하나님이 먹이시고 입히시는데 하물며 인간인 우리를 왜 책임져 주시지 않겠느냐는 뜻입니다.
새는 사람처럼 씨를 뿌리고 거름을 주는 등 농사를 짓는 법이 없습니다. 그저 자유롭게 날아다니지만 하나님은 우주만물에 가득 찬 자연의 풍성함을 통해 그들을 기르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너희는 한 마리의 새보다 더 귀한 존재가 아니냐"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한 가지 유의할 것은 새가 날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먹이가 입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새는 스스로 날아다녀야 하고 먹이를 자기가 집어먹어야 사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인간에게 두뇌, 건강, 의욕. 꿈 등 일할 수 있는 여건을 주셔서 그것을 가지고 먹고 살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방법은 절대로 불로소득이나 게으른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비유가 28절에 있습니다.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하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만 하시고 그냥 버려 두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관리하시고 간섭하십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고 머리털 하나까지 세시는 섬세한 사랑으로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간섭하시는 것입니다. 들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를 보십시오.
누가 그 백합화 하나를 위하여 거름을 주고 길쌈을 맵니까? 하나님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들꽃 하나를 위해서도 사시사철 때에 따라 색깔을 입히시고 모양을 만드십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으면 그 자녀에 대해 계획을 세웁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우리가 신앙을 갖게 된 때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형상을 닮을 때까지 단계적으로 우리에 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결혼에도 굉장히 관심이 많으십니다.
또 자녀들의 대학입시에도 관심이 많으십니다. 부모보다도 오히려 더 관심이 많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의 생애에 복된 길을 예비해 주셨습니다. 단 한 가지 우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만 한다면 그 길로 우리를 인도하도록 계획되어져 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사실들을 설명하시면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들에 핀 한 송이의 백합화의 영광을 이 지상에서 한 인간이 가질 수 있었던 가장 큰 영광인 솔로몬의 영광과 비교하고 계십니다.
솔로몬은 세상의 모든 지혜와 부와 명예와 권세를 가졌던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백합화 한 송이보다 못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29절,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예수님은 이어진 30절에서 결론을 내려 주고 계십니다.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꽃 한 송이가 솔로몬의 그 큰 영광보다 더 귀한데 너희가 그 꽃보다 못하겠느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그런데 어째서 너는 염려하느냐? 하나님이 너의 인생을 비극으로 마치게 할 것 같으냐?'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한 송이의 들꽃보다, 한 마리의 새보다 천사보다도 더 귀한 존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요 천사도 흠모할 만한 일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찌 하나님이 우리를 돌보지 않으시겠습니까?
돌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우리의 불신앙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이 내 인생을 챙겨 주지 않을지 모르니까 내가 내 인생을 챙기자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바벨탑 사고입니다. 하나님이 보호해 준다는 생각이 없기 때문에 내가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계속해서 성을 쌓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로마서 8:32에 우리에 대한 하나님의 관심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 그의 길을 찾는 자에게는 하나님이 반드시 은혜를 베풀어 주십니다. 야고보서1:5에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안 믿는 것은 아닌데 생활을 보면 너무나 문제가 안 풀리는 때가 있습니다. 꼬이고, 또 꼬이며 어려운 일이 자꾸 겹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약속해 주셨다면 왜 이렇게 되어야 하는가? 왜 내 인생이 이렇게 비참하게 되었는가? 왜 내 인생은 염려로 가득 차 있는가?'라는 질문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얻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심이 없어서 우리를 돌보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이유는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은 생각지도 않고 하나님이 자기를 도와주지 않는 것만을 불평합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신뢰해 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않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응답이 없어 내일이면 죽을 것만 같아도 믿는 것이 믿음입니다.
여리고성을 여섯 번 돌 때까지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일곱번째 돌 때 성이 무너졌습니다. 엘리야가 무릎꿇고 여섯 번 기도할 때까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습니다. 그것이 믿음의 현장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믿음으로 일곱번째 기도하였을 때 저쪽 동편에서 손바닥만한 구름이 떠오른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나아만 장군이 문둥병에 걸려서 엘리사가 요단강 물에 들어가서 일곱 번 목욕하라고 하였을 때 여섯 번까지 들어가도 아무 변화가 없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은 불안하고 염려하고 두려워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이 믿음의 현실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일곱번째 들어갔을 때 약속대로 하나님은 응답해 주셨습니다. 믿음은 기적을 일으킵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고 신뢰하지 않는 것입니다.
문제가 안 풀리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교회도 열심히 나오고, 새벽기도도 하고, 금요기도도 하는데 응답이 안되는 이유는 죄가 하나님과 우리사이를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9장 1,2절.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치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내었고 너희 죄가 그 얼굴을 가리워서 너희를 듣지 않으시게 함이니".
산상수훈의 팔복에도 보면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하나님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안 보이는 것은 우리가 더럽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안 보인다고 불평하지 말고 깨끗하게 우리의 영혼과 양심을 청소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느껴지고 보여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말씀대로 염려를 포기하시지 않겠습니까? 27절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고 하였습니다. 염려해서 키가 자란다면 염려하십시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염려는 우리 마음속에 있는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지 못한 불신앙입니다. 모든 염려를 주께 맡기십시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해 주셨습니다. "염려하지 말라!"이는 오늘 저와 여러분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엄중하신 명령입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믿고 하나님께 내어 맡기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