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쓰는 거제 현대사 100선> 두 번째 이야기
국내에서 처음 고등어잡이 건착망(두릿그물의 한 종류)이 시작된 장승포. 거제도에서 전깃불이 처음 들어온 장승포. 그 외에도 방파제나 우편소, 근대적 식당, 여관, 극장, 다방, 유흥시설까지 장승포는 거제시에서 ‘최초’라는 명사를 붙일 수 있는 남다른 마을이다. 이 마을은 예전과 달리 좁아진 항구와 듬성듬성 하늘로 치솟고 있는 고층 건물이 늘어나고 있지만 거제 문화의 중심지 혹은 근대의 시작점이라고 불렸다. 지난번 구조라에서 이어서 장승포는 한국사나 지역사에서 어떤 마을이었을지 역사 속에서 찾아보고자 한다.
▲ 1920년대 장승포항 전경. 일본인 어촌 건설 이후 장승포항은 일본인 어선과 조선인 어업노동자들이 넘쳐 났다.
왜, ‘경계의 마을’인가?
중세시대 장승포는 ‘장승이 선 큰 마을’이라는 의미에서 장승거리(長承巨里)라고 불렀다. 이 마을은 거제도 동쪽에 위치한 항구마을인데 가까이 일운면 소재 지심도가 있고 더 멀리 쓰시마(對馬島)를 볼 수 있다.
더 살펴보면 지리적 위치에서 장승포는 일본 쓰시마와 인접한 국경의 마을이다. 쓰시마는 중세 때 고려의 정치적 지배를 받던 곳이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쓰시마는 조선에 조공을 바치는 대외 물류지로 탈바꿈한다. 임진왜란 전후 쓰시마는 일본국의 압력과 지배에서 자유롭지 못해 조선과 마찰을 빚었다. 그러나 17세 이후 쓰시마는 조선과의 선린우호 관계를 회복하자 거제부 지세포, 장승포를 거쳐 부산 왜관까지 조공을 운반했다. 새로운 외교관계가 마련된 것이다.
이후 개항기에 접어들면서 조선은 일본과의 불평등 혹은 원촌 무효의 강제조약을 맺었다. 그 시기 장승포는 원하지 않는 정치적, 문화적 변화에 직면했다. 이때 장승포 사람들은 예로부터 지켜 온 풍습·문화와 일본 근대문화를 함께 경험한다. 이 경험은 새로운 문화의 충돌과 경계의 모호함을 동시에 가져다 주었다.
첫 번째 문화의 충돌은 그 이전 경험할 수 없었던 신기술과 문명이었다. 기존 자신들이 살고 있는 터전에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일본어민)을 대면하는 것이다. 두 번째 경계의 모호함은 새로운 문화와 외세의 침입(일제의 대륙침략)에서 나타나는 혼란이다. 장승포 사람들은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기존의 사회·문화를 유지하면서 새로운 틀에 적응할 수도 없는 경계인이었다.
▲ 1920년대 일본인 어선. 조선인들은 어업면허와 일본식 어선 구입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야 했다.
식민지 어촌의 뿌리
“나는 장승포 바다에서 작은 목선을 이용해 고기를 잡아 살 수 있었다. 어느 날 일본어민들이 발동선을 끌고 와서 건착망을 이용해 더 많은 고기를 잡았다. 그들은 장승포 어시장에서 고등어를 내다 팔거나 일본에 가져갔다. 나도 목선에 발동기를 부착하고 건착망을 이용하려 했지만 다음의 조건이 필요했다. 첫째, 기존의 어업면허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면허를 받아야 한다. 둘째, 일본식 발동선에만 가능하다. 셋째, 막대한 자본금과 새로운 어업기술을 배워한다는 점이다. 또한 고등어 건착망에서 일할 수십 명의 값싼 노동력이 필요하다.”
장승포 김혁수는 1912년 조선총독부와 통영군으로부터 위의 답변을 듣고 고기잡이를 포기했다. 그는 장승포의 일본인 고등어 건착망 어선에서 값싼 노동자가 되고 말았다. 왜 김혁수와 같은 사람들이 생겨나게 되었을까. 다시 개항기 장승포가 어떤 모습인지 살펴보자.
일찍부터 일본 내 어민들은 장승포 근해에서 고기잡이에 나섰다. 주요 일본 어민들은 1885년 후쿠오카 하카다(博多)의 치쿠호(筑豊) 수산조합 4,828명이 4,000엔 적립금과 4,300원 부·현(府縣) 보조비를 받아서 계절마다 왔다. 1888년 가가와(香川)현 어부의 삼치 어업, 1899년 후쿠오카 지쿠조(築上)군 우노시마(宇島)의 도요타(豊田) 수산조합 소속 조합원 1,641명이 보조비 1,888엔을 받아 왔으며, 같은 시기 히로시마 어민이 멸치 어선 23척을 이끌고 매년 7월에서 11월까지 장승포 근해에서 후리그물을 이용해 고기를 잡았다.
일본 어선은 1904년 보통 약 120∼150척에서 1905년 324척으로, 1906년 402척까지 늘어났다. 이들 어민들은 한 계절에 마른 멸치 86,250kg을 잡아 올렸다. 이처럼 장승포에는 계절마다 일본어민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지금과 달리 엄청난 어선들이 장승포항과 외항에 가득했다고 한다.
이들 어선단들은 조·일 정부의 어업조약 발효와 각 부·현의 지원금을 받아 자유롭게 장승포 근해에서 마구잡이식 고기잡이에 나섰다. 나아가 일본어민은 1904년 11월 7일 일정부에 수산조합 설립과 정주할 수 있는 어촌을 건설할 수 있도록 요청했다. 그 결과 일제는 같은 해 12월 1일 지금의 장승포 1구 신부월드 일대에 조선해수산조합 조합장 이리사 세이세이(入佐淸靜)의 성을 따서 ‘이리사무라(入佐村)을 건설했다.
이리사는 1902년 5월 도쿄에서 각 부현의 어업자들을 소집해 조선해통어조합연합회를 결성하고, 8월 27일 부산상업회의소에서 조선해수산조합이라고 명칭을 변경함과 동시에 회장으로 당선된 인물이다. 이리사는 “애당초 장승포촌이라고 붙이려고 했으나 울산 장생포와 유사해 내 성을 따서 명명했다”라고 말한다. 실제 대한제국 시대 황성신문이나 대한매일신보에는 장승포와 울산 장생포를 혼동해서 사용했다.
▲ 조선인 어업노동자. 1920년대 장승포 일본인 어선단에는 조선인 어업노동자가 약 10∼20명까지 고용되어 있었다. 물론 노동자들은 저임금과 형편없는 대우를 받았다.
장승포 안에 일본어촌
이리사는 왜 장승포 항에 일본인 어촌을 선택했을까. 그는 장승포의 입지 조건에 대하여 “수심이 대단히 깊다. 3면이 산으로 둘러져 쌓여 있고 동쪽 끝의 짧은 해안선을 이루고 있지만 대부분 약간 경사면에 논밭이 있다. 북동쪽의 산맥이 해안까지 이어져 아주 좋고 아름다운 곳이다”라며 ‘천혜의 항구’라고 극찬했다. 이리사무라와 유사한 일본인 어촌은 경남에서 40곳에 이르렀다. 그 가운데 장승포 일본인 어촌은 일제의 적극적인 지원과 ‘식민지 어촌 경영의 모델’이라는 매우 중요성을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이리사무라는 일제 식민지 사회·문화 정책 전파의 실험 무대였다. 조선해수산조합은 장승포에서 일제의 식민지 정책 홍보와 경제적 타산까지 고려해 막대한 자금을 투자한 셈이다. 조합은 토지 약 2,000평, 황무지 약 50,000평, 주택 건축비 55가구(건평 275평), 화장실 10평, 사무소 매점 28평, 창고 20평, 제조소 19평, 해안 매립비 등을 포함해 3,405원80전을 투자했다.
첫 이주자는 1904년 12월 구조라와 지세포에 거주하는 일본인과 부산에서 건너온 대구잡이 어부, 나가사키 출신 부부와 고용노동자(가족 포함) 등 4가구 총 19명이었다. 이리사무라는 1905년 8월 20일 태풍으로 33가구 유실과 인명 피해를 입자 첫 위기를 맞았다.
그 이후 이 어촌은 1908년 말 전체 호수 70호 인구 359명(남 176명, 여 183명)까지 늘어나는 ‘폭풍 성장’을 맞았다. 또한 1915년에 후쿠오카 현 17호, 토요타 수산조합원 48호, 나가사키 원양어업단원 11호, 가시이 구미(香推組, 능포·남해·부산 등지 대규모 어장을 소유한 가시이겐타로 소속의 업체) 어업사무소 5동, 시모노세키 니시무네 구미 근거지용 주택 12호, 시마네 수산조합원 8호 등 전체 145호 619명이 장승포에 거주하고 있었다.
▲ 이리사무라 일본인회. 이리사무라는 일제 식민지 정책과 문화홍보에 나섰다.
문화 충돌과 경계
장승포 조선인들은 이리사무라의 형성에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앞의 김혁수나 기존 터전에 살던 사람들은 장승포 3, 4구로 밀려 나고 아양 등지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특히 장승포 사람들은 일본인 고등어 건착망에서 어업노동자가 되었다. 일례로 1923년 4월 26∼28일 사이 바다에서 조업 중 사망한 사람 120명 중 장승포 거주 또는 거제 출신 노동자가 108명이었다. 이전부터 소작농이거나 소규모 어선을 이용해 하루살이처럼 살던 일부 장승포 사람들은 일본어선단의 값싼 노동력에 흡수되고 있었다.
이리사무사 형성 이후 장승포에 생겨난 주민 통제기구와 시설은 이리사무라 우편소(1904. 12. 1), 이리사심상고등소학교(1906. 1. 12), 조선수산조합 이리사무라 출장소(1908. 1. 25), 세관감시서(1908. 4. 1), 장승포 헌병파견소(1914. 3. 1), 콘비라신사(훗날 장승포신사), 본파 본원사 장승포출장소 및 일본 불교 각 파, 거제해운상회의 장승포-부산간 정기여객선, 조선우편선(시모노세키까지 운행) 등이다. 또한 사이토 조선소, 여관, 토목건축업자, 잡화상점, 과제제조 판매점, 그물 및 어업도구 판매점, 요리점, 요정 및 유곽, 당구장 등이 등장했다.
여기에 주민들의 일상생활과 밀접하고 일본식 문화가 제일 잘 나타난 일본 가정식 요리점 오이시(大石)정과 기모노를 입고 샤미센을 연주하는 기생(게이샤)들을 볼 수 있는 신월(新月)·구로키(黑木) 요리점, 유곽 5곳이 있었다. 일본 유곽 개업 직후 조선인 유족 2곳이 문을 열었다.
장승포 일본인들은 매년 마쓰리(축제)에서 가장행렬, 일본의 전통놀이와 유흥 문화까지 선보였다. 이리사무라 일본인들은 고등어, 멸치잡이에서 쌓은 부를 이용해 식민지 정치기구(도회·면협의회)의 의원과 경제단체(금융조합·어업조합)의 간부가 되어 지방 유력자로서 이름을 알렸다.
이들의 성장을 지켜보던 장승포 사람들 일부는 달라진 제도와 틀에 참여하는 적극 협력자가 나타나게 되었다. 하지만 대다수 사람들은 기존 문화와 식민지 문명의 경계에서 적응하려는 경계인들이었다. 이리사무라의 발전이 거듭되자 상수도, 목욕탕, 전기회사, 전신전화 등 각종 시설물들이 추가로 설치되었다. 하지만 문화의 경계선 다수 장승포 사람들은 일본인 회사에 값비싼 요금을 납부하거나 그 혜택을 받지도 못했다.
부산과 쓰시마와 멀지 않은 지리적 여건은 장승포가 일본식 근대화를 겪게 되는 기본 요건이었다. 일제강점기 장승포는 일찍부터 부산의 일본 문화와 자본시장을 경험하고 일본 본토에서 쓰시마로 거쳐 온 또 다른 문화를 체험한 곳이다. 언제나 장승포 사람들은 조상대대로 전승되어 온 우리 문화와 식민지 문화라는 경계에서 희로애락을 겪어왔다.
▲ 이리사무라 축제. 대다수 장승포 사람들은 일본인의 축제에서 가장행렬 장면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 가장행렬은 1960,70년대 거제 사람들에게 그대로 이어졌다고 하겠다. 사진의 뒤 배경이 본파 본원사 출장소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