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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병석: 여호와이레의 축복. 창22:1-17
여호와이레란 말은 성경에서 창세기 22장 본문에만 나오는 말씀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준비하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여호와이레의 축복이란 하나님이 준비하신 축복이란 의미로 우리가 이 세상에서 누리는 모든 축복은 모두가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여호와이레’의 축복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이 ‘여호와이레’란 단어는 오늘날 시험을 참는 자들에게 주시는 축복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 오고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들으시는 여러분은 이 말씀을 듣는 자에게 주시고자 준비하신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아브라함처럼 여러분의 가정과 생활 가운데 나타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1. 아브라함이 당한 시험
여호와이레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고향 땅을 등지고 가나안으로 나온 이래, 많은 고난과 시련의 생애를 살아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이삭을 통해 마지막으로 주신 쓰라린 시험을 통해서 자신이 섬기는 하나님이야말로 당신이 준비하신 대로 자신을 인도해 오신 사실을 깨닫게 되어 그 하나님을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으로 믿고 그의 인생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의뢰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아브라함이 왜 ‘여호와이레’란 말을 사용하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하루는 아브라함의 신앙에 큰 위기가 왔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명령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태어난 그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으로 데리고 올라가 그곳에서 하나님께 번제 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번제물이란 짐승을 잡아서 불로 살라, 하나님께 드리는 화목제물을 말합니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의 아들 이삭을 짐승처럼 죽여 하나님께 번제물로 드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아브라함은 얼마나 놀랐으며 얼마나 큰 실의와 절망에 잠겼을 것입니까?
아브라함은 이제 둘 중에 한 가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자기 아들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던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을 묵살하고 불순종하던가 어느 것인가를 선택해야 했습니다. 만약 여러분들에게 이 같은 시험이 왔다면 여러분은 어떤 길을 선택하실 것입니까? 누구든 두 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는 없습니다. 두 가지 중 어느 것 하나만을 취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런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에게도 종종 찾아오는 시험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와서 제일 먼저 부닥치는 문제는 세상이냐 하나님이냐 하는 선택문제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을 향하여 달려가지만 우리의 몸은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의 사슬에 메인바 되어 좀처럼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이 문제에서 실패하는 사람은 결국 신앙이 성장하지 못하고 어린아이 같은 신앙상태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다음에 또 우리에게 닥쳐오는 시험은 하나님이냐, 재물이냐 하는 문제입니다. 돈은 늘 우리들 마음속에서 우리의 생활과 우리의 사고와 우리의 환경과 우리의 생애를 온통 자기 다음대로 휘두르는 폭군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보훈에서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인간이 물질에 얼마나 약한 존재인가를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다음에 우리에게 이 모든 것들보다 더 어려운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이냐 자녀냐 하는 문제일 것입니다. 우리들 가정에서 대개의 경우, 그 자녀들이 우상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우상이란 말은 하나님보다 더 중히 여기는 존재를 가리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 중에 하나님을 택할 것이냐 아니면 자녀를 택할 것인가의 심각한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 여러분은 과연 어느 쪽을 택할 것입니까? 아마도 눈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보다 눈앞에서 재롱을 피우거나 대견스럽게 공부를 하고 있는 내 자식들을 더 중히 여길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나 자식이나 형제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 제자가 될 수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에게 이 자녀에 대한 시험이 찾아온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백 살에 낳은 외아들 이삭에 대한 사랑이 아브라함에게 있어 얼마나 끔찍했을 것입니까? 그런데 다른 것도 아닌 그 아들을 모리아 산으로 데려가 그곳에서 하나님께 번제물로 바치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러한 시험에서 분명한 자신의 태도를 밝혀야 했습니다. 다른 이유란 소용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아들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면 행동으로 보여야 했습니다.
그 다음날 아브라함은 이삭을 데리고 아들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게 하고 자신은 아들을 죽일 칼과 그를 불태울 불을 손에 들고 사흘 길의 모리야 산으로 올라간 것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이 지시하신 곳에 이르렀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을 쌓고 나무를 벌려놓고 아들을 결박하여 그 나무 단위에 올려놓은 후, 아들을 죽이려고 칼을 높이 들었습니다. 짐승을 먼저 죽인 후 불로 태워야 하기 때문에 이삭을 죽인 후, 불로 태우려고 한 것입니다.
바로 이 때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이 아브라함에게 들려 왔습니다.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고 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 이삭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한다는 증거를 순종으로 하나님께 보인 것입니다. 이 때 아브라함의 믿음이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습니다.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아노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선언을 들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삭대신 하나님께서 미리 준비하신 산양으로 수풀에 걸리게 하시고 그 수양을 이삭대신 번제물로 받으시므로 하나님이 준비하셨다는 ‘여호와 이레’란 말이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입으로 아멘 한다고 그것이 그대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다짐하고 맹세한다고 하나님께 인정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시험을 통해서 우리가 그 시험에 합격해야 비로소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께 합격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믿음을 성장시키시기 위해, 어떤 때는 우리에게 약속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시험이라는 달갑지 않은 손님을 보내실 때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이 시험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한 발작씩 앞으로 나가게 되며 우리의 믿음이 성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야고보 사도는 ‘너희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했습니다.
우리에게 어떤 시험이 오든지 그 시험을 하나님께 결부시켜 하나님 앞에 올바로 설 수만 있다면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오히려 큰 축복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아무런 시험이 없이도 믿음이 좋아질 수 있다고 주장하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아브라함은 이 시험을 치른 후, 하나님의 크나큰 축복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하여 네 아들 네 독자라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과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라’고 하신 것입니다. 이처럼 아브라함은 그의 오랜 체험적인 신앙생활을 통해서, 준비하시는 하나님 곧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을 믿었으며 그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2. 여호와이레의 축복은 누가 받을 수 있는가?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누구에게나 예비된 것이 아닙니다. 롯은 아브라함의 조카요 아브라함과 함께 고향에서 떠나 왔고 아브라함과 생애를 같이 해 왔지만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여호와 이레의 축복이 없었습니다.
(1)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하나님의 언약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해 놓으신 축복 가운데 가장 위대하고 바람직한 축복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구원의 축복입니다. 우리로 예수를 믿게 하여 구원을 받게 하고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주신 축복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으뜸가는 축복입니다. 그러면 누가 예수를 믿어 구원의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까? 이에 대하여 바울은 엡1:3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곧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시고 우리를 예정하셨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게 된 일도, 우리가 예수를 믿고 구원을 받은 일도, 이미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을 주시려고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셨기 때문임을 밝혀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이 택하시고 예정하신 그의 백성들에게만 여호와이레의 축복이 해당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엔 고통을 당하는 사람들도 많고 환난을 당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겪는 그 고통이나 환난이 모두 그들의 인생에 유익함을 주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택하신 백성들에게만이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을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2) 여호와이레의 축복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사람들이 받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여호와이레로 그 아들 대신 수풀에 걸린 수양을 제물로 드릴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믿음에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번제물로 드리기 위해 모리아 산으로 올라갈 때 아브라함은 어떤 생각에 잠겨 있었겠습니까? 이 내 아들은 이제 죽는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 내가 의뢰하는 하나님은 나를 버리셨다. 이렇게 생각했을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아브라함은 만약 자기가 이삭을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려도 하나님께서 그 죽은 아들을 살려 내실 줄로 믿은 것입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은 어떻게 이런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까?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일찍 아브라함에게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고 약속해 주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은 만약 이삭을 제물로 받으신 후, 그를 죽게 하신다면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한 그의 말씀을 스스로 저버린 것이 되고 말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결코 하나님은 그런 분이 아니심을 믿었기 때문에 이 믿음을 가지고 모리아 산에 올라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삭을 번제로 받으셔도 반드시 그 이삭을 다시 살려주실 것이란 믿음이 아브라함의 마음속에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처럼 과연 하나님은 이삭을 죽게 하지 아니하시고 수풀에 결린 수양을 이삭 대신 주심으로 아브라함으로 여호와이레의 하나님이란 칭호를 들으신 것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신앙
나는 언제인가 고속버스 터미널 쪽으로 가느라고 3호선 전철을 탄 적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랜만에 전철을 타보니 차선의 변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나는 아무거나 타고 동대역에서 내려 옥수가 아니라 수서쪽으로 가는 전철을 가라 탔습니다. 그런데 전철을 타는 오른 편 벽에 감명 깊은 글이 붙어 있는 것을 읽게 되었습니다. 그 글은 유명한 어느 세계적인 조각가의 이야기였습니다. 그 내용인즉 그가 평생의 명작을 만들려는 의욕으로 작업을 하다가 완성을 보지 못한 채 어느 날 사고로 그의 오른손이 잘려져 나가는 불행한 일을 당했습니다. 그는 한동안 슬퍼도 하고 절망과 비탄에 빠지기도 했지만 결국 그는 남은 왼손으로 그 대작을 완성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조각의 제목을 ‘그럼에도 불구하고’란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조각가는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오른손이 잘려져 나갔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더 멋진 조각을 이루게 해 주셨다고 믿은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우리의 생애 동안에 여러 가지 불행한 일을 당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들로 그 불행을 딛고 일어서게 하시며 더욱 큰일을 이루게 하시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살아온 지난날을 돌이켜 바라보고 내 자신을 스스로 살펴 볼 때 나란 존재는 도저히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존재임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수도 없으며 더군다나 하나님의 종의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주의 일을 할 수 있는 위인이 아님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이미 창세전에 나를 예정하시고 오늘에 이르기까지 인도해 주신 사실은 너무나도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란 말이 너무나도 많이 나오게 됩니다. 그만치 우리의 생애는 하나님 앞에 합당치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나를 사랑하셨고 나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사랑하시는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우리에게 이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이 살아 있는 한, 우리의 어려움과 시련은 오히려 우리에게 큰 유익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4.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
여호와 이레의 축복은 하나님께서 내 인생의 모든 일에 간섭하심으로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주신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에게 나타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우리의 한 평생에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일어납니다. 그 가운데는 생각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일, 고통스러운 일들도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오히려 우리의 생애에 우리에게 선을 이루러주시는 요소가 된다고 하신 말씀은 우리의 생애에 얼마나 큰 위로를 주며 얼마나 감격스러운 일입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들 앞에 어려운 시련이 왔다고 해도 그 일로 절대로 절망할 것이 아니라 그 일이 자신의 생애에 오히려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방법이 된다고 하는 말씀을 믿고 하나님을 의뢰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생활을 한다면 놀라운 축복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우리의 일생동안 우리의 인생길에 이미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까라놓고 우리의 길을 인도하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고 어떤 시험이 와도 어떤 환난이 와도 어떤 어려움이 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바라보시고 믿음으로 인내하시므로 아브라함처럼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으시는 성도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때로 아브라함에게 찾아온 이삭의 시험처럼 절망적이고 마음이 아픈 시험이 올는지 모릅니다. 우리에게 이 같은 시험이 왔을 때, 여러분이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기를 원하신다면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믿고 그의 약속을 기다리며 그의 손에서 나오시는 선하신 축복의 열매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결론 : 여러분,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것을 미리 준비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써야 할 것, 받아야 할 것 등을 이미 다 준비해 놓으시고 우리에게 이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지금 그 어떤 어려운 시련과 안타까운 환경에서 살아가고 있다 해도 그 일로 하나님이 여러분 곁을 떠나실 분이 결코 아니십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내 뜻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할 것이라고 야곱에게 말씀하신 그 하나님께서 지금 여러분의 인생의 키를 잡으시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아브라함의 믿음으로 여러분을 위해 여호와이레로 예비해 두신 하나님의 한량없는 은혜와 축복을 받아 누릴 수 있는 그리스도인이 되실 수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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