젠트리피케이션을 본격적으로 다룬 국내 최초의 책!
뉴욕의 젠트리피케이션을 통해 우리의 현실을 돌아본다!
출판사 리뷰/
현대 도시를 배회하는 유령, 젠트리피케이션
“도심의 한적했던 동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의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낡은 집들을 허문 자리에 새 건물이 들어서고, 멋진 상점과 카페들이 연이어 들어선다. 집값과 임대료가 훌쩍 뛰어오른다. 옛날부터 그 동네에 살아왔던 사람들, 오래된 가게들이 밀려난다.”
지금도 홍대, 성수동, 이태원, 서촌, 가로수길 등 소위 ‘요즘 뜨는 동네’들을 무대로 벌어지는 이런 일들을 뭉뚱그려 우리는 ‘젠트리피케이션’이라고 부른다. 주로 건물주의 갑질 논란과 엮여 하루가 멀다 하고 신문과 방송에 등장하는 용어지만, 많은 사람들에게는 여전히 낯선 단어이고 깊이 있는 논의가 이뤄진 지도 그리 오래지 않았다. ‘도심에 사람들이 몰리면서 개발이 가속되고 임대료가 오르면서 원주민이 바깥으로 내몰리는 현상’이라는 용어에 대한 사전적 정의만으로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없다.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은 우리보다 수십 년 앞선 시기부터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은 뉴욕에 대한 이야기다. 이 책의 지은이 DW 깁슨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돈이 흘러드는 도시인 뉴욕, 그곳에 거주하는 수십 명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젠트리피케이션의 생생한 현장을 포착해냈다. 그의 인터뷰 대상은 부동산업자, 건물주, 쫓겨날 위기에 처한 세입자, 전 은행장, 거리예술가, 시민단체 활동가, 건축가 등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들려줄 다양한 인물들을 망라한다.
다른 듯 닮은 도시, 뉴욕과 서울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의 무대는 뉴욕, 그중에서도 맨해튼 일부 지역과 브루클린이다. 20여 년 전만 해도 소득이 낮은 유색 인종과 이민자들의 주거 지역이었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으면서 소위 ‘쿨한’ 동네가 되어가고 있는 곳들이다. 그런데 지구 반대편에 있는 이 도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이, 지금 우리나라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과 너무나 비슷하다.
“이 동네엔 자기 성공의 희생양이 되는 사람들이 많아요. 성공한 사람이 많을수록 동네가 더 뜨니까요. (로어이스트사이드)는 임대료가 계속해서 올라서 더 이상 저렴한 곳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는 (부시윅)에 작은 갤러리들이 생기고 있죠. … 임대료가 터무니없이 비싸져서 아예 (뉴욕)을 떠나버리기 전까지, 예술가들은 얼마나 더 변두리를 전전해야 할까요?” - 144쪽에서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의 11장에 등장하는 한 미술품 중개인의 말이다. 괄호 안의 지명만 빼놓고 읽으면, 홍대에 있던 예술가들이 임대료를 견디기 못하고 성수동이나 문래동 쪽으로 옮겨간 사정과 다를 게 없다. 이외에도 다양한 사례들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 세계화에 직면한 세계의 대도시들은 인근 지역의 다른 도시보다는 서로를 더 닮아가고 있다는, 이 책의 26장에 등장하는 뉴욕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앤드루 로스의 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대도시들은 공통점을 훨씬 더 많이 갖게 됐어요. 글로벌 도시는 특히 더하고요. 지금 뉴욕은 필라델피아보다는 상하이나 런던과 더 비슷해요.” - 본문 337쪽
그런가 하면, 14장과 15장에는 뉴욕의 하이라인 프로젝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도심을 지나는 낡은 고가철도를 공원으로 만든 이 프로젝트는 그동안 도시재생의 대표적인 사례로 알려져 왔다. 서울특별시 역시 이를 벤치마킹하여 서울역 고가도로를 공원화하는 서울역7017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연남동, 서교동 일대의 경의선 철도는 이미 공원화 작업이 마무리되어 새로운 명소로 각광받고 있다. 하지만 이 책에서는 하이라인 프로젝트가 인근 지역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을 부추겼음을 지적한다. 공원이 생기면서 주변 건물들의 가치가 그 즉시 훌쩍 올랐으며, 개발 과정에서 지역사회와의 연결을 고려하지 않은 결과 하이라인은 결국 관광객들 혹은 주변에 새로 생긴 고급스러운 아파트와 로프트의 주민들만을 위한 곳이 되어버렸다는 것이다. 서울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나지는 않을지 유심히 지켜보게 만드는 대목이다.
“개발업자들은 하이라인을 얕봤어요. 하지만 이제 하이라인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은 센트럴파크 옆에 있는 건물이나 마찬가지예요. 건물 가치가 즉시 50퍼센트가량 올랐어요. 흥미진진한 일이 벌어진 거죠. 첼시의 지역사회뿐만 아니라 부동산 개발업자들에게도요.” - 193쪽에서
부동산 자본의 도시 점령인가, 낙후된 지역의 활성화인가
젠트리피케이션은 누군가에게는 낙후된 지역을 개발하는 긍정적인 일이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정든 삶의 터전을 떠나게 만드는 자본과 권력의 횡포다.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에는 그 양면성이 잘 드러나 있다.
브루클린에서 자란 토박이 부동산업자는 이 동네가 개발되는 게 싫으면 그냥 떠나면 되는 것 아니냐고 말한다. 하지만 집주인의 횡포에 직면한 세입자들에게는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자기를 도와줄 이들은 대체 어디에 있냐고 하소연한다. 뉴욕을 휩쓸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이 자연스러운 변화라며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고, 자기가 사는 동네에는 지역 주민들을 위한 가게보다 관광객들을 위한 가게가 먼저 생기고 있다며 우려를 표하는 이가 있다. 건축가라는 같은 직업을 가진 이들도 누구는 자기가 멋지게 보수한 건물이 도시를 더 활기 넘치는 곳으로 만들었다며 자랑스레 말하고, 누구는 자기가 설계에 참여한 건물이 지역 주민들에게는 젠트리피케이션의 조짐으로 비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한다.
“사람들이 “그렇게 하면 동네의 원래 색깔이 사라져요”라고 말하는 걸 들으면 저는 “그게 나쁩니까?”라고 되물어요. 그건 발전하는 과정이에요. 살아 움직이는 거죠. 아닌가요? 언어랑 같은 거예요. 언어는 변하고, 언어를 사용하는 방식도 변하죠. 땅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 71쪽에서
“첼시의 9번 애비뉴를 예로 들어보면, 원래 거기에는 철물점과 신발 가게들이 있었어요. 하지만 지금은 부티크와 화려한 소규모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죠. 우리 동네는 항상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어요. 동네 이웃은 거의 만날 수가 없다고요. 관광객 틈바구니에서 완전히 사라져버렸거든요.” - 192쪽
각 장의 인터뷰이들은 이렇게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듯, 있는 듯 서로 연결되어 있다. 이런 식으로 엇갈리는 입장들이 씨줄과 날줄처럼 엮여 뉴욕의 젠트리피케이션이라는 거대한 현상을 보여주는 그림을 완성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은 그저 상가 임대료의 문제가 아니다
그간 젠트리피케이션에 대한 우리나라의 논의는 주로 건물주와 세입자의 대립, 그중에서도 자영업자들의 점포 임대료 문제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하지만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은 젠트리피케이션이 그보다 더 복잡하고, 쉽게 손대기 어려운 문제임을 보여준다.
16장에 등장하는 투생 워샘은 집주인과 소송에 휘말려 있다. 임의로 집을 고쳤다는 이유(몇 년 전에 찬장을 새로 달았다)로 뉴욕 시의 임대료 규제 정책의 보호를 받지 못하게 되었고, 집주인은 그를 내쫓은 뒤 새로운 세입자를 들여 더 높은 임대료를 받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의외로 뉴욕은 우리나라와 견주어도 세입자를 보호하는 규제와 법이 매우 잘 마련된 도시이다. 뉴욕시주택공사가 관리하는 공공주택이 18만 세대에 이르고, 일정한 조건을 갖춘 세입자를 상대로는 집주인이 임대료를 시에서 정한 비율 이상으로 올릴 수 없다.) 하지만 그를 오랫동안 살아온 집에서 내모는 것은 집주인의 횡포만이 아니다. 바뀌어가는 주변의 이웃들, 단절되어가는 인간관계가 한몫 거들고 있다. 같은 일로 곤경을 겪고 있는 다른 세입자들을 모아 힘을 합치려 해도, 새로 이사 온 이웃들은 그런 일에 부정적인 무관심으로 대응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의 진행이 지역사회의 문화, 공동체의 유대와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문제임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투생은 쫓겨난다는 것이 꼭 물리적 공간에서 쫓겨나는 것만 뜻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자신의 아파트에서 아직 버티고 있긴 하지만, 투생은 앞집에 살고 있는 이웃과 단절되어 있다. 깔개를 종이 봉투에 잘 포장해서 선물했는데도 말이다. 투생이 이 동네에서 쫓겨나고 있다는 현실은 상징적이고 포착하기가 힘들며 통계학자들의 그래프에서도 빠져 있다. 조금씩, 조금씩, 투생은 자신이 살아온 건물 안의 사회에서 단절되어간다.” - 208쪽에서
23장의 노엘리라 칼레로가 직면한 현실은 더 참혹하다. 집을 고치겠다는 명분으로 그녀가 살던 집의 화장실과 부엌, 벽을 모두 부숴놓고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건물주에 맞서 소송을 진행하고 있지만, 질질 끄는 재판 탓에 고통을 겪고 있다. 뉴욕 시의 규제 탓에 임의로 임대료를 올리거나 세입자를 내쫓을 수 없으니, 온갖 수단을 동원해 세입자가 제풀에 꺾여 집을 떠나게 만드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시 급격히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곳들을 중심으로 지방자치단체가 각종 조례를 마련하는 등 제도적인 차원의 대응에 나서고 있지만, 그런 식의 대처만으로는 문제를 해결하기 힘들 것임을 예견하게 한다.
“주택법원은 정말 끔찍한 곳이에요. 느리고 무력해요. 제가 보기에 주택법원은 건물주나 돈 많은 사람 편이에요. 나머지 사람들은 안중에도 없어요. 돈이 없는 사람들보다는 돈이 많은 사람들을 도와주려고 하는 것 같아요. 세입자를 도와주고 보호하는 법들은 엄청 많은데, 법원이 법 집행을 안 해요.” - 308쪽에서
이처럼 《뜨는 동네의 딜레마, 젠트리피케이션》은 이제 막 시작된 우리나라의 젠트리피케이션 논의에 풍부한 참고 사례를 제공하는 한편, 지금 우리는 미처 생각하지 못하는 이면들을 깨우쳐주는 책이 될 것이다.
도시를 살아 있게 하는 건 돈이 아니라 사람이다
지은이는 이 책에서 섣불리 “젠트리피케이션은 이런 것이고, 이렇게 해결해야 한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보고 내린 결론은 단호하다. 동네를 개발해서 차익을 누리려 하는 개발업자든, 그 동네에서 여러 세대에 걸쳐 살아온 토박이든 대부분 토지를 돈으로 사고팔 수 있는 상품이자 재산으로 보고 있으며, 그 프레임 안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란 문제에 접근하고 있다는 것이다. ‘토지를 소유한 상류층’이라는 뜻의 단어인 젠트리(gentry)에 어원을 두고 있는 젠트리피케이션(gentrification)이라는 용어가 이후 등장한 ‘브라운스토너비아(brownstoneurbia)’, ‘트렌디피케이션(trendification)’ 등 같은 현상을 가리키는 다른 용어보다 많이 사용되는 이유도 그 때문이라는 지적에서는 통찰력이 느껴진다. 책의 첫머리에서 지적하고 있듯, 젠트리피케이션은 도시로 흘러드는 자본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갖고 있다. 하지만 그런 경향이 강해져 건물(혹은 토지)을 소유한 사람과 그 동네에서 사는 사람들 간의 괴리가 심해질수록 공동체는 더 약화되고, 그곳에 살던 사람들의 다양성과 활기 또한 떨어지게 되며, 그러면 결국 도시는 활기를 잃고 쇠락하기 마련이라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촌, 압구정로데오 등 계속되는 지가 상승 끝에 도리어 퇴락하고 만 번화가들을 그다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자본이 주도하는 개발, 재산 가치의 극대화에만 몰두하는 행위가 도리어 독이 될 수 있음을, 도시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결국 자본이 아니라 도시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 간의 상호작용임을 상기시키는 이 책의 결론이 더 묵직하게 다가오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