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이 한국의 6·25전쟁에 개입한 명분은,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지키는 것이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키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이른바 '항미원조(抗美援朝), 보가위국
(保家爲國)'이다.
중국 측이 1990년대 이후에 밝힌 바로는, 1950년 10월 하순부터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때까지 중국은 보병 25개 군단(79개 사단)을 비롯하여 기타 40개 사단 이상(12개
공군사단, 16개 포병사단, 10개 철도공병사단, 10개 전차연대, 일부 공안부대), 도합
2 백수 십만에서 3백만에 이르는 병력이 한국전쟁에서 싸웠다. 병력 투입이 최고조에 이른
때는 정전회담 막바지인 1953년 4월부터 7월까지로, 일시에 130만 명이 넘는 병력이
한반도에 투입되었다."
유엔군 대 중공군의 전투는 '장비 대 인력의 싸움' 성격으로 진행됐다. 중공군은 화력 부족을
병력으로 때우는 방식의 전투를 벌였다. 중공군은 처음부터 미군에 대해서는 6 대 1, 한국군에
대해서는 3 대 1의 병력 우세를 확보한 후 싸움에 돌입한다는 지침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미군이나 한국군은 중공군과 전투를 벌이면 6배, 3배의 대병력을 상대해야 했다." 이른바
인해전술(人海戰術)이다.
중공군이 한국에서 쓴 인해전술은, 앞선 제2차 국공내전國共內戰 과정에서 투항해 온
장제스의 국민당병력을 소모시키기 위한 고도의 전술이었다. 마오쩌둥은 국공내전 때
200만 명에 달하는 장제스 군대를 항복군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들은 단지 생존을 위해
투항한 것이므로 언제 어느 순간에 또 다시 공산당에게 총부리를 돌릴지 모르는 위험한
존재들이었다. 마오쩌둥은 이들을 한국전에 동원해 인해전술에 사용했다. 유엔군과 국군을
상대로 승리하면 좋고, 승리하지 못해도 이들을 자연스럽게 소모할 수 있는 6·25전쟁 개입은
마오쩌둥에게는 더없이 좋은 기회였다. 6·25 때 중공군 포로 신문을 담당한 이정식은 포로가 된
중공군의 90%가 예전 장제스 군대 병사들이었다고 한다.
- 강규형, 김용삼, 남정욱, 정경희, 주익종 공저, ‘6ㆍ25’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