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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2월 10일(금) 새벽설교 마태복음 14:1~12 '세례요한의 죽음' 새찬송가 336장 환난과 핍박 중에도
오늘은 마태복음 14:1~12 말씀을 중심으로 ‘세례요한의 죽음’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을 간단히 살펴보면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세례 요한이 다시 살아나 그런 권능을 행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전에 자신의 생일 연회에서 헤롯은 자기 아내 헤로디아와 그의 딸의 꾀에 넘어가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 죽였습니다. 그뒤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그 시체를 장사하고 예수께 가서 이 일을 아룁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죽음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성도의 삶의 특징에 대해서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첫째 성도의 삶의 특징은 예수의 소문을 듣고 믿음으로 반응합니다(1,2절). 예수의 소문이 들려질 때 사람들에게는 두 가지 반응이 나타납니다. 한 부류의 사람은 ‘의심’하는 부류입니다. 비록 예수님에 관한 복음이 전해져도 그 복음을 믿지 않고 의심하고 회의를 품거나 혹은 배척하는 반응입니다. 또한 부류는 믿음으로 반응하는 부류입니다. 믿음으로 보이는 반응도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반신반의한 믿음이고, 또 다른 하나는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믿음의 반응입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은 자신이 죽인 세례 요한이 죽었다가 다시 살아나서 그 능력이 예수님 속에서 역사하는 줄로 생각했습니다. 이러한 생각의 바탕에는 ‘의인은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는 개념이 악한 헤롯의 마음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헤롯은 방탕한 삶을 살며 세례요한을 죽인 것으로 인한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죄책감과 불안함이 바로 음란하고 패역한 세대의 특징입니다. 군중들은 소문에 민감합니다. 자기가 판단하기보다는 소문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 본문의 헤롯이 그랬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소문이 부정적이라거나 무의미하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좋은 소문이면 많이 알려질수록 좋습니다. 교회가 생명의 신비를 담고 있다는 소문이 이 세상에 퍼지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예수의 소문 때문에 예수의 복음을 믿음으로 받아들이고, 예수님 안으로, 복음 안으로,교회 안으로, 생명 안으로 들어올 수 있다면 그 사람을 복받은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나는 예수의 소문을 듣고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습니까?
둘째 성도의 삶의 특징은 주님께 충성된자로 살아간다는 것입니다(3~9절). 세례요한은 헤롯왕이 자신의 동생 헤로디아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고 하면서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 없이 사는 헤롯을 담대하게 꾸짖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맡은자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충성입니다. 충성은 곧 신실함입니다. 신실한 사람은 믿음의 사람입니다. 그는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성실하게 일합니다. 역사적으로 ‘충성’이란 표현은 나라를 위해서, 왕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치기 까지 복종함을 의미합니다. 성경에서도 착하고 충성된 종과 악하고 게으른 종이 나옵니다. 악하고 게으른 종은 주인이 자신들에게 말한 내용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자기 나름대로 생각했습니다. 의사소통 능력의 부재입니다. 그러나 착하고 충성된 종은 사명을 받은 후에 이리저리 손익계산을 해보면서 생각하거나 의심하거나 불평하거나 일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사명을 받아 기쁘게 순종하며 최선을 다하고 애쓰는 자입니다. 세례요한이 사람을 두려워했다면 헤롯을 책망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세례요한은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헤롯은 자신의 잘못을 책망하는 세례요한의 말을 듣고 회개하기는 커녕 오히려 세례 요한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의 충성된 사람은 먼저 자신의 죄와 허물이 드러날 때 먼저 내 죄를 회개하고 삶으로 본이 보일 뿐 아니라 세례요한처럼 불의를 보고 타협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적용) 나는 세례요한처럼 주님께 충성하는 자입니까? 헤롯처럼 남을 죽이는 자입니까?
셋째로, 성도의 삶의 특징은 죽음의 순간까지 주께 맡기는 자입니다. 신앙생활은 하나님께 맡기는 생활입니다. 즉 삶의 전부를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이 기독교인입니다. 하나님께 맡기는 사람은 하나님 중심으로, 하나님을 우선 순위로 살아가는 삶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맡긴다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만왕의 왕으로 모시고 하나님의 신실한 종으로써 살아가는 것입니다. 본문의 헤롯은 세례요한의 목을 베어 소반에 얹어 달라고 한 헤로디아의 어린 딸의 요구에 대해서 자신의 권세를 보존하려고 그 소녀의 요구대로 해주었습니다. 반면에 세례요한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 했지만, 예수께 아뢰어졌기 때문에 그의 죽음은 아름답고 숭고한 죽음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성도는 죽음의 순간까지도 주님께 나의 생명을 맡겨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마지막 순간에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께서 죽음의 최후까지도 하나님의 아들로, 아버지의 뜻을 따라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셨을 뿐 아니라, 당신의 영혼까지도 아버지께 맡기는 철저한 헌신과 순종을 의미합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없이 찾아옵니다. 히 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러나 세례요한의 죽음과 같이 믿음 있는 자의 죽음은 예수께 아뢰어져서 하나님의 영광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성도의 죽음조차 귀하게 보십니다(시 116:15). 나는 어떤 죽음을 맞이하기를 원하십니까? 바라기는 믿음있는 자의 죽음이 되시고, 주님께 내 영혼을 맡기시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양호실까지 전력질주’라는 제목의 큐티인 간증입니다. 저는 중학교 1학년인 딸아이를 키우는 미혼부입니다. 딸은 갓난아기일 때부터 부모의 품이 아닌 여러 친척집을 전전하며 자랐습니다. 미혼부인 제가 일과 연애에 빠져 늘 부재중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시 저는 세례 요한을 죽이려하는 헤롯왕처럼, 칼의 춤을 추는 헤로디아의 딸처럼 자기만족과 행복을 좇아 아이가 병들어가는 줄도 모른채 살았습니다. 아이가 초등학생이 되어서야 저는 교회에 출석하여 양육을 받으며 지난날을 회개하고 부모 역할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4년이 지난 어느 날, 저는 평소처럼 딸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 일을 끝낸 뒤 집에서 쉬고 있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딸 아이 학교선생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양호실인데, 학교로 빨리 와달라고 하는 전화였습니다. 급하게 뛰어가면서도 딸을 지켜주실 것을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양호실로 들어가자 얼굴이 하얗게 질려 침대에 누워있는 딸을 보게 되었습니다 양호선생님은 아이가 혈압측정도 안되고,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119에 연락을 해놓은 상태라고 했습니다. 구급차를 타고 병원에 가서 여러 검사와 치료를 받았는데, 그 병명은 ‘발작성 심실상성 빈맥’이었습니다. 의사는 같은 증상이 또 반복될 수 있으니 내시경으로 심장의 불필요한 신호선을 차단하는 시술을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딸은 곧바로 입원해 시술을 받고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하게도 하나님은 제가 딸에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주셔서 위급한 상황에 바로 학교로 달려가 딸의 손을 잡아주고 응급실에서도 말씀으로 그 날의 일을 설명해 줄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하셨습니다.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올려주는 것 같은 분별없는 헤롯의 삶에서 모든 문제를 주님께 맡기고 아뢰는 삶으로 저를 변화시켜주시고 인도해주신 하나님께 감사와 찬양을 올려드립니다. 적용1) 공동체에서 아픈 자녀들에 관한 기도제목을 볼 때 양호실로 전력질주 했을 때의 심정으로 중보하겠습니다. 적용2) 딸이 큐티하지 않을 때 화내지 않고 시간을 내서 같이 하겠습니다.
오늘 ‘세례요한의 죽음’이란 제목으로 성도의 삶의 특징을 살펴보았는데, 오늘 기도하실 때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의심이 아니라 믿음의 반응을 보이게 하시고, 헤롯처럼 남을 죽이는 자가 아니라 세례요한 처럼 주님께 충성된 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고, 삶의 모든 순간을 주님께 맡기는 성도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주님,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의심과 두려워하지 말고 세례요한처럼 사명자의 길을 담대히 갈 수 있도록 두려움의 문제에서 저를 건져주시고, 충성된 자의 모습으로 죽음을 잘 준비하고 갈 수 있도록 인도하옵소서.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