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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채 나는 얼굴
34: 29-35
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30. 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31. 모세가 그들을 부르니 아론과 회중의 모든 어른이 모세에게로 오고 모세가 그들과 말하니
32. 그 후에야 온 이스라엘 자손이 가까이 오는지라 모세가 여호와께서 시내산에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다 그들에게 명하고
33. 그들에게 말하기를 마치고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34. 그러나 모세가 여호와 앞에 들어가서 함께 말씀할 때에는 나오기까지 수건을 벗고 있다가 나와서는 그 명하신 일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며
35.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의 얼굴의 광채를 보는 고로 모세가 여호와께 말씀하러 들어가기까지 다시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웠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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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 발작은 "사람의 얼굴은 하나의 풍경이다. 한 권의 책이다. 용모는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A. 프레보는 "남자의 얼굴은 자연의 작품, 여자의 얼굴은 예술 작품"이라고 했습니다. 미국의 16대 대통령을 지냈던 아브라함 링컨은 "40을 지낸 사람은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저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의 얼굴을 책임질 수 있습니까?
아마도 여러분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오시기 전에 거울을 여러 번 들여다보았을 것입니다. 어땠습니까? 여러분의 얼굴은 광채가 나는 얼굴이었습니까? 기미 잡티 때문에 짜증나는 얼굴이었습니까?
오늘 본문을 보면 모세가 시내산에 두 번째 올라갔다가 하산하는 장면이 나타납니다. 그런데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고 있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은 한마디로 “광채 나는 얼굴”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났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로마에 가면 성 베드로 성당이 있습니다. 그곳에 유명한 조각가였던 미켈란젤로가 조각한 모세의 상이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1515년에 오늘 본문을 주제로 하여 235cm의 “모세상”을 조각했습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모세의 머리에 뿔이 있다는 것입니다. 미켈란젤로는 왜 모세상을 조각하면서 머리에 뿔이 있다고 생각했을 까요? 그것은 그가 읽은 라틴어로 된 벌게이트 역본 때문이었습니다. 벌게이트 역본을 비롯하여 몇 몇 역본들은 ‘광채가 나다.’라는 말을 뿔이 달린 모세로 번역을 하였습니다. “빛이 나다.”(히, 카란)라는 동사와 “뿔”(히, 케렌)이라는 명사의 어근이 같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오늘 본문을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얼굴이 빛이 나다.” 또는 “얼굴에 광채가 나다.”라는 번역이 더 조화를 이루는 것을 봅니다.
1.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나는 이유를 살펴봅시다.
1)하나님과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출 34:28 모세가 여호와와 함께 사십일 사십 야를 거기 있으면서 떡도 먹지 아니하였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였으며 여호와께서는 언약의 말씀 곧 십계를 그 판들에 기록하셨더라.
모세는 이미 사십일 사십 야를 하나님과 함께 있었습니다. 그런데 금송아지 사건으로 말미암아 모세가 급히 하산을 하였다가 다시 율법을 받기 위하여 시내산에 올라와 역시 사십일 사십 야를 시내산에 머물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함께 한 시간이 팔십일 팔십 야였습니다. 그것도 떡도 먹지 아니하고 물도 마시지 아니하면서 지낸 것입니다.
요즘으로 말하면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한 것입니다. 그것도 보통 금식입니까? 떡은 물론이거니와 물도 마시지 않았으니 절대금식입니다. 요즘도 40일 금식기도를 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대부분은 물은 마시면서 금식합니다. 절대금식은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예수님께서도 세례를 받으신 후에 성령에 이끌리어 광야로 가셔서 40주야를 금식하셨습니다. 모세와 같이 절대 금식을 하신 것입니다.
조다난 에드워드 목사님은 일주일 동안 금식을 한 후에 성도들에게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그 얼굴에 나타나는 영감 때문에 많은 교인들이 감동을 받고 눈물을 흘리며 은혜 받는 역사가 있었다고 합니다.
금식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금식하는 시간은 어떤 일 때문에 바쁘게 뛰는 시간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나님과만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세상의 모든 근심, 걱정, 염려를 주님께 맡기고 오로지 주님과 교제하는 시간이 금식하는 시간입니다. 음식을 굶는 것이 큰 것이 아닙니다. 금식하는 동안에 주님과 나누는 영적인 교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중요한 시간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은 광채가 나십니까?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과 마귀가 함께 하는 사람은 얼굴이 다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느낄 수 있습니까?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은 그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람들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분명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얼굴은 다릅니다. 광채가 납니다. 그러나 마귀가 함께 하는 얼굴은 살기가 납니다. 어둡습니다.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모세가 누구 때문에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났다고요. “여호와” 하나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은 얼굴이 다릅니다.
창 39:2“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창 39:3 그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케 하심을 보았더라.“
2)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출 34:29 “모세가 그 증거의 두 판을 자기 손에 들고 시내산에서 내려오니 그 산에서 내려올 때에 모세는 자기가 여호와와 말씀하였음을 인하여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나나 깨닫지 못하였더라.”
이것은 하나님과 모세 사이에 대화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이루어지는 대화가 무엇입니까? 바로 기도입니다.
여러분은 변화산의 사건을 잘 기억하실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올라가신 목적이 무엇입니까? 제자들에게 어떤 신비스러운 모습을 보여 주시기 위한 목적이었습니까? 누가복음 9장을 보십시다.
눅 9:28 “이 말씀을 하신 후 팔일쯤 되어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과 야고보를 데리시고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사
눅 9:29 기도하실 때에 용모가 변화되고 그 옷이 희어져 광채가 나더라“.
예수님이 뭐 하러 산에 올라가셨습니까? 기도하시러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주님의 용모가 언제 변화되었습니까? 기도하실 때 용모가 변화 되고 그 옷까지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모세는 얼굴 꺼풀만 광채가 났지만 우리 주님은 옷에서까지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 옛말에도 “어진 이는 사흘만 보지 않다가 다시 만나도 그 모습이 달라져 있어 눈을 비비고 새롭게 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는 스스로를 부지런히 갈고 닦는 사람은 그 모습이 날로 아름다워진다는 것인데, 하물며 하나님을 만나 뵙고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는 사람의 모습이 어찌 빛나지 않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떤 사람과 대화를 나누십니까? 그 만나는 사람을 통해서 엄청난 영향을 받게 됩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상대방의 영향력이 흘러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대화하는 상대를 잘 골라야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하나님과 오랜 친교를 나눈 뒤에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권위와위엄의 표시로서 얼굴 꺼풀에 광채가 난 것입니다.
3)말씀을 회복했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첫 번째 돌 판을 받아서 가지고 하산 할 때도 역시 같은 영광의 광채를 소유하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하산하면서 돌 판을 던져 깨뜨리면서 그 영광의 광채를 상실한 것입니다. 모세는 그토록 쉽게 타락의 길로 들어선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해서 엄청난 실망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대노하였습니다.
출 32:19 “진에 가까이 이르러 송아지와 그 춤추는 것을 보고 대노하여 손에서 그 판들을 산 아래로 던져 깨 뜨리니라.”
분노는 얼굴의 광채가 사라지게 합니다. 40주야 하나님과 함께하면서 은혜를 듬뿍 받은 모세였습니다. 분명 그의 얼굴에는 광채로 빛났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분노하는 순간 그 얼굴의 광채는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중요한 사실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은혜 받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말이 40일이지 40일 동안 떡도 먹지 않고 물도 마시지 않으면서 하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이 쉬운 일입니까?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은혜 받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쏟는 것은 일순간입니다.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를 잠재우지 못하면 순식간에 받은 은혜를 쏟아버립니다. 힘들게 은혜 받았는데 그 은혜를 너무나도 허망하게 상실하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자신도 그것을 압니다. 은혜를 회복하는 길이 얼마나 험하고 힘들다는 것을 불 보듯이 뻔히 압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인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여 은혜를 상실하고 맙니다. 우리 성도들은 그것을 조심해야 합니다. 특히 다혈질적인 성품의 소유자들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래서 인내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항상 은혜를 간직하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모세 같은 사람도 은혜를 쏟아버리지 않았습니까? 모세가 다시금 은혜를 회복하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습니까? 역시 처음과 똑같은 기간을 보내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40주 40 야를 절대 금식하며 하나님과 함께 하면서 회개하고 다시금 말씀을 회복 할 때 모세의 얼굴은 영광의 광채로 가득하게 된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영광의 광채를 소유하고 계십니까? 아니면 그 영광의 광채를 상실하셨습니까? 소유하신 분은 더욱 말씀을 의지하는 삶을 사십시오. 만일 상실한 분이 계신다면 ‘죽으면 죽으리이다.’ 라는 각오로 말씀을 회복해야 할 것입니다. 그럴 때 모세의 얼굴에 빛났던 영광의 광채가 여러분의 얼굴에도 빛나게 될 줄로 믿습니다.
2.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광채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1)모세의 직분에 영광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 앞으로 돌아오게 하는 일은 모세 자신에게도 말할 수 없는 축복이요 만족이었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극히 영광스럽게 생각하시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직분을 영광스럽게 하기 위하여 그의 얼굴에 광채가 있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하나님의 언약의 백성이 되게 하는 일은 지극히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얼굴에서 빛이 나도록 하셔서 모든 백성들이 모세의 말에 복종하게 하신 것입니다.
율법에는 권세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율법은 모든 인류를 구속하는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율법을 무시하고 살 수 없습니다. 모든 인간들이 복종해야 할 영광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또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습니다. 반드시 복종해야 하고 존중되어야 할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정죄하는 율법의 직분이 그토록 영광스럽다면 사람을 살리는 복음의 직분은 얼마나 영광스러운 것입니까?
고후 3:7“ 돌에 써서 새긴 죽게 하는 의문의 직분도 영광이 있어 이스라엘 자손들이 모세의 얼굴의 없어질 영광을 인하여 그 얼굴을 주목하지 못하였거든
고후 3:8 하물며 영의 직분이 더욱 영광이 있지 아니하겠느냐
고후 3:9 정죄의 직분도 영광이 있은즉 의의 직분은 영광이 더욱 넘치리라“
이스라엘 자손들이 다시는 율법을 무시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치 못하도록 하나님께서는 모세의 얼굴에 영광을 더하셔서 그의 말씀의 권위를 높이셨습니다. 이 모세의 율법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영광스러운 것이 복음입니다. 믿습니까? 그러므로 복음을 맡은 우리는 모세가 가졌던 것보다 훨씬 큰 권위를 가져야 합니다. 그러므로 당당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날 복음의 사역자의 얼굴에 직접적으로 광채가 있게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복음의 광채를 있는 그대로 드러낸다면 그 누구도 복음을 듣지도 보지도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그 광채를 숨기신 것입니다. 그러나 복음에는 반드시 역사가 나타납니다. 사탄의 세력이 무력화 되고 죄 가운데 빠져 있던 자들이 그 악한 습관과 의식에서 해방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변화가 있습니다. 그것이 복음의 영광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입니다.
2)모세의 얼굴에 광채가 난 것은 영화로운 몸으로 변하게 될 것을 보여 준 것입니다.
모세가 하나님과 함께 하며 그분과 말씀을 나누고 그분이 주신 말씀을 회복하여 다시 이스라엘로 하여금 언약의 백성이 되도록 하는 직분을 감당하라고 광채를 주셨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함께 대화하는 가운데 그의 영광이 그의 얼굴에 전해져서 그도 하나님의 영광을 얼굴에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영광은 우리가 궁극적으로 소유하게 될 구원의 최종적인 목적입니다. 우리 구원의 목표는 단지 성품이 변화되어 착하고 의롭게 사는 것만이 전부가 아닙니다. 우리 몸의 부활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몸의 구속입니다. 우리의 몸이 새로워지는 것이 구원의 최종적인 열매입니다. 지금처럼 병들고 약한 몸이 아닙니다. 날이 갈수록 늙어지고 쇠약해지는 몸이 아닙니다.
모세는 얼굴 꺼풀에서 광채가 났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의 온몸이 변화된 것은 아니라는 말입니다. 단지 하나님과 영광의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그 영광의 광채가 일시적으로 그의 얼굴에 전해진 것일 뿐입니다. 그의 얼굴의 광채는 점점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변화산에서 예수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용모가 변하며 심지어는 옷까지도 희어져 광채가 났습니다. 우리는 모세처럼 얼굴 꺼풀에 나는 영광만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온몸에서 영광의 광채가 빛나는 주님을 닮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주여 우리가 여기가 있는 것이 좋사오니”라고 외쳤던 것은 엉뚱한 외침이 아닙니다. 우리는 바로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지금은 희미하지만 그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입니다. 왜 그렇게 됩니까?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그날을 바라보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지금은 비록 병들고 아프고 괴로움이 심하지만 우리가 그 나라에 이르게 되면 변화산에서 광채가 났던 예수님처럼 영광스러운 몸으로 변하게 될 줄로 믿습니다.
3)하나님과 함께 하는 사람의 복된 모습을 보여 준 것입니다.
출 34:30“아론과 온 이스라엘 자손이 모세를 볼 때에 모세의 얼굴 꺼풀에 광채 남을 보고 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더니”
모세의 얼굴에서 광채가 남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에게 가까이 하기를 두려워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론조차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위대해서라기보다도 하나님께서 그에게 광채를 주어서 하나님의 위엄이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의 종에게 주신 두려움이기도 합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할 때만 수건을 벗고 말씀선포가 끝나면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리었습니다. 그것은 두려워하는 이스라엘을 배려하려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지도자는 자신의 표정을 그대로 다 드러내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교훈 받습니다. 작은 일에도 지도자의 표정이 어두우면 대중에게 큰 불안을 주게 되고 큰 어려움이 있어도 자도자의 얼굴에 자신감이 있으면 그 얼굴을 보는 사람들은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참된 기쁨과 자신감은 일부러 만들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모세는 자신도 얼굴에서 광채가 나는 것을 몰랐습니다. 백성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보고 알았습니다. 그래서 수건을 썼습니다.
모세는 하나님 앞에서는 이런 수건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모세가 가장 자연스러운 때는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있을 때였습니다. 그러면 수건이 필요한 자는 누구였습니까? 모세에게 수건이 필요했습니까? 아니면 이스라엘 자손에게 수건이 필요했습니까? 수건이 필요한 자들은 모세가 아니라 이스라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수건이 필요했다는 것은 아직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영광이 어색하고 두려운 것이며 자연스럽지 않다는 뜻입니다. 왜 그들이 모세의 얼굴에서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반가워하지 않고 어색하고 두렵게 느꼈을 까요? 아직도 그들의 양심이 죄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양심이 억눌려 있으면 하나님의 영광이 어색하고 자연스럽지 않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의 영광이 편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갔을 때 모든 것이 자연스럽고 걸리는 것이 없었습니다. 수건은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어색했고 불편했습니다. 그래서 모세의 얼굴에 수건을 덮어 씌워야 마음이 편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 교인들 가운데 아직도 말씀을 읽으면서 그 얼굴에 수건이 벗겨지지 않는 자들이 있다고 답답해하고 있습니다. 이 말은 구약 성경을 읽으면서 그 말씀 속에 빛나고 있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전혀 알지 못하고 여전히 자기 방식에 매여 있다는 것입니다.
고후 3:15“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
고후 3:16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
고후 3:17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 함이 있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것은 자유 함입니다. 여러분은 말씀을 대할 때 무엇을 느낍니까?
오늘 우리들의 수건은 율법의 수건이 아닙니다. 이 세상 욕심의 수건입니다. 그것이 씌워져 있는 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의 맛을 알 수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에게로 온전히 돌아올 때 그의 얼굴을 가리고 있던 수건이 벗겨지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세상의 욕심을 버리기 전까지는 그에게 하나님의 영광은 거리가 멉니다. 어색하고 불편한 것이 됩니다.
고후 3:18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세상의 수건을 벗어야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을 닮아가게 됩니다. 모세가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여 애굽의 영광을 버리고 주님과 대화했을 때 그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비취게 되었던 것처럼 말입니다.
사랑하시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얼굴에서는 어떤 광채가 빛나고 있습니까? 모세처럼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는 광채를 소유하셨습니까? 율법을 전수한 모세도 얼굴에 광채가 빛났는데 하물며 복음을 전하는 의의 직분을 소유하는 우리들을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얼굴은 마음의 거울입니다. 마음에 하나님을 모신 사람들은 하나님의 영광이 얼굴로 나타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마귀와 함께 하는 사람은 마귀의 형상을 하게 됩니다. 우리들의 얼굴은 하나님을 반사하는 거울임을 기억하고 얼굴과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우리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