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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5-10
중심에 서있는 사람들
모세의 후계자로 그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에게 주신 하나님의 첫 번째 교훈은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여호수아서의 시작이고 끝입니다.
여호수아 23:6을 보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시작과 끝이 좌나 우로 치우치지 말라는 교훈으로 엮어져 있습니다. 제일 좋은 것은 중심을 잡고 서 있는 것입니다.
서커스에서 한평생 줄타기를 한사람이 은퇴하게 됐습니다. 기자가 그에게 물었습니다. "줄타기에서 떨어지지 않고 줄을 타는 비결이 무엇인가."라고 물었을 때 그는 "앞만 바라볼 것, 중심을 잡을 것, 절대로 나는 떨어지지 않는다는 신념을 가지는 것, 계속 연습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맨 처음 그가 시작한 일은 맨땅에 줄을 그어놓고 한쪽발로 그 줄 위를 걷는 중심훈련이었다고 합니다. 땅 위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는 사람은 공중에서 중심을 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왼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극좌라고 하고 오른쪽으로 치우치는 것을 극우라고 합니다. 신학이든 사상이든 극으로 치닫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제가 한평생 강조하고 노력해 나온 목회신학의 중심은 균형목회, 균영신학입니다.
신학이 극우 극좌로 나뉘어 대립하면 교회가 상처를 입게 됩니다. 사상이 극우와 극좌로 나뉘어 대립하면 국가가 흔들리고 백성이 상처를 입게 됩니다.
수구세력과 진보세력이 대립하고 구세대와 신세대가 대결하고 노와 사가 충돌하면 국가 경제와 민생이 상처를 입고 후진국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새 지도자로 부름 받은 여호수아에게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는 교훈을 주셨고 그 교훈을 따라 여호수아는 한평생 중심에 서서 흔들리지 않고 치우치지 않고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오늘도 국가 지도자가 갖춰야 할 리더십 가운데 중요한 것은 치우치지 않는 것입니다. 좌로 치우치면 좌는 손뼉을 치겠지만 우는 싫어합니다. 우로 치우치면 우는 쾌재를 부르겠지만 좌는 머리를 흔들 것입니다. 그래서 지도자는 한쪽 편으로 기울어지면 안 됩니다.
양쪽을 조율하고 통제하고 중심으로 이끌어 내는 조율사가 되어야 합니다.
신앙도 지나치게 신비에 빠지면 안 됩니다. 성경은 덮어놓고 음성을 듣는다든지 계시를 받으려고 한다든지 신비한 체험을 성경보다 더 소중히 여기는 행위는 신비주의입니다.
담임목사의 허락 없이 교회 안에서 아무에게나 안수기도를 한다든지 붙잡고 기도를 한다든지 예언을 해준다든지 하는 행위 역시 치우친 신앙인 것입니다. 일절 그런 일을 금하는 이유는 바른 신앙의 중심에 서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가하면 마치 신앙의 세계를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이성과 냉소로 대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리쳐 기도하고 기도로 병자가 고침 받고 기적이 이러나는 일들을 마치 푸닥거리로 취급하고 질 낮은 사람들의 어리석은 행위로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도 치우친 행위입니다.
신앙은 과학으로 해석하지 못합니다. 인체의 신비도 과학으로 다 해석하지 못합니다. 검정콩을 먹고 흰 쌀밥을 먹고 파란 야채를 먹었습니다. 그런데 피는 항상 빨간 색깔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인체의 신비입니다.
한평생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고 일하고 백성을 다스렸던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게 되었습니다. 23:1을 보면 "여호수아가 나이 많아 늙은지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백성들에게 자신이 받았던 하나님의 당부를 유언처럼 재확인해 주었습니다.
23:6을 보면 "그러므로 너희는 크게 힘써 모세의 율법책에 기록된 것을 다 지켜 행하라 그것을 떠나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백성에게 전한 교훈을 몇 가지로 나눠 살펴보겠습니다.
1. 우상을 섬기지 말라고 했습니다.
7절을 보면 "너희 중에 남아있는 이 나라들 중에 가지 말라. 그 신들의 이름을 부르지 말라 그것을 가리켜 맹세하지 말라"고 그것을 섬겨서 그것에게 절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가지 말라, 부르지 말라, 맹세하지 말라, 절하지 말라는 것은 적극적으로 우상을 배격하고 타협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열왕기상 11장을 보면 솔로몬 왕이 우상을 숭배하게 된 원인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솔로몬이 취한 후궁들이 있었는데 그 여자들이 우상을 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녀들 꼬임에 넘어가 우상을 숭배하게 되었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솔로몬 왕국이 분열되고 신하가 나라를 빼앗아 왕이 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열왕기 상 11:1을 보면 솔로몬이 바로의 의딸(애굽여인) 외에도 모압, 암몬, 에돔, 시돈 헷 여인들을 사랑했다고 했습니다. 모두가 다 우상섬기는 이방여인들입니다.
그녀들이 왕 주변을 맴돌며 우상숭배를 세뇌하고 조장했습니다.
그래서 열왕기상 11:10을 보면 "저가 여호와의 명령을 지키지 않았으므로" 11:11에서는 "내가 결단코 이 나라를 빼앗아 네 신복에게 주리라"고 했습니다.
아합왕 역시 이세벨이라는 이방여인과 결혼하고 그녀가 섬기는 바알을 숭배한 탓으로 왕조가 멸망하는 비운을 겪게 되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우상은 헛것입니다. 깎고 새기고 부어 만든 것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1:9을 보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사시고 참되신 하나님을 섬기라"고 했고 요한1서 5:21을 보면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서 멀리하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우상은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다고 여기고 그것들 때문에 하나님을 소홀히 한다면 바로 그것이 유상입니다. 그것이 권력일수도 있고 명예일수도 있고 인기일수도 있고 돈일수도 있고 사람일수도 있고 직장일수도 있고 사랑일수도 있습니다. 그것들을 하나님 다음으로 옮겨 놓아야 합니다.
2. 하나님과 친근하라고 했습니다.
8절을 보면 "오직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친근히 하기를 오늘날까지 행한 것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친한 사이를 친구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3:11을 보면 하나님과 모세가 친구를 대면하여 이야기 한 것처럼 얘기를 나눴다고 했고 이사야 41:8을 보면 "아브라함을 나의 벗이라"고 했습니다.
가까이 함께 하는 사람들일수록 사이가 좋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는 간격도 거리도 제한도 있으면 안 됩니다. 포도나무에 가지가 붙어있어야 수분과 영양을 공급받고 사는 것처럼 내가 하나님께 붙어있어야 죽지 않고 생명을 지키고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사도행전 11:23에서 "굳은 마음으로 주께 붙어있으라."고 했습니다.
주님은 이 사실을 요한복음 15:5에서 보다 더 심도 있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
15:4을 보면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있지 아니하면 절로 과실을 맺을 수 없음같이 너희도 내안에 있지 아니하면 그러하리라."고 했습니다. 주께 붙어 있으면 되고 붙어있지 않으면 되는게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어느 정도 친해야 합니까? 하나님께 붙어 있어야 합니다.
얼마동안 붙어 있어야 합니까? 영원히 영원히 붙어있어야 합니다.
부자관계, 부부관계, 형제관계, 친구관계는 영원한 관계가 아닙니다. 사별도 있을 수 있고 이별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는 떠나는 순간부터 메말라 죽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땅에 심은 나무는 10년 100년 가도 죽지 않습니다. 그러나 꺾어서 병에 꽂은 꽃은 일주일 넘기기가 어렵습니다.
하나님 떠나도 잠깐 동안은 잘 먹고 잘살고 행복한 것처럼 꾸미고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잠깐으로 끝납니다.
하나님을 가까이 합시다. 친근히 합시다. 하나님을 떠나지 맙시다. 하나님께 붙어 있습니다.
3.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11절을 보면 "그러므로 스스로 조심하여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고 했습니다. 왜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해야 합니까? 나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나를 살아하셔서 이 세상에 오셨고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그 사랑에 빚진 사람이기 때문에 사랑해야 합니다.
돈, 명예, 인기, 권력, 직장은 필요가치이며 상대가치입니다. 있으면 좋고 많으면 더 좋은 것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절대가치입니다. 하나님께는 죽고 사는 문제가 걸려 있습니다.
어느 날 전화를 받았습니다.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 여성의 전화였습니다. 대학 다닐 때 같은 과 남
자 친구와 교제를 시작했습니다. 그 남자는 홀어머니를 모신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인품이며 이상이 돋보여 사귀다가 정이 깊어졌습니다. 대학 다는 동안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그 남자 어머니를 도왔고 남자를 도왔습니다.
서로 사랑에 빠졌고 대학 졸업 후 결혼했고 남자는 계속 대학원에 진학해 공부를 계속 했고 여자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남편을 뒷바라지 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행복했습니다. 몸과 마음을 다해 죽도록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남자에게 딴 여자가 생긴 것입니다. 같은 대학원생과 눈이 맞아 바람이 났습니다. 죽도록 사랑한 남자가 배신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녀로서는 더 이상 살 의미도 가치도 없기 때문에 죽기로 작정했는데 마지막으로 목사님 말씀을 듣고 결행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는 것입니다.
그녀에게 들려준 제 대답은 "분하지도 않습니까? 원통하지도 않습니까? 그 남자가 죽어야지 왜 자매가 죽습니까? 죽을죄를 지은 건 그 남자가 아닙니까? 그 남자에게 수면제를 주던지 쥐약을 주든지 해야지 왜 자매가 죽습니까? 죽음은 지혜로운 선택이 아닙니다. 죽음은 바보들의 선택입니다. 이를 악물고 살아보십시오.
그리고 배신도 망덕도 없는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그분은 나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셨습니다. 나를 살리기 위해 피를 흘리셨습니다.
대충 이런 내용의 대답을 해줬습니다. 전화로 주고받은 대화였고 등록도 하지 않은 교인이어서 그 후 일은 알 길이 없습니다. 단 저는 그 날부터 한 달 동안 신문을 열심히 살폈습니다. 여인의 자살기사가 실렸나를 살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기사는 없었습니다.
"예수님 날 위해 죽으셨네 왜 날 사랑하나
갈보리 십자가 지시었네 왜 날사랑하나
예수님 갈보리 가야했나 왜 날 사랑하나"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사랑합시다.
사랑을 배반하지 맙시다.
결론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사랑하고 가까이 하고 하나님과 함께 살면 9절이 말씀합니다.
"너희를 당한 자가 하나도 없었느니라."
10절이 말씀합니다. "여호와 그가 너희를 위하여 싸우심이라"
23절이 말씀합니다. "너희 마음을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로 향하라"고.
우리가 좌나 우로 치우치지 않으려면 하나님을 중심에 모시고 하나님 중심에 서야 합니다.
극좌로 가도 안 되고 극우로 가도 안 됩니다. 하나님께로 가야 합니다.
왼쪽으로 가도 안되고 오른쪽으로 가도 안됩니다. 하나님 중심에 든든히 서야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양극화로 인해 긴장과 반목이 고조되고 있습니다. 이때 여기서 우리는 "아니다. 좌도 안된다 우도 안된다 우리는 하나님 중심이다"라고 선포해야합니다.
중심에 섭시다.
중심을 잡읍시다.
중심세력에 됩시다.
하나님 중심으로 뭉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