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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5월 말 무명릿지 등반에 이어 다시 금정산을 찾는다.
산성고개에서 출발하여 동문을 거쳐 성곽을 따라 가 북문을 지나 고당봉을 오르고 장군봉과 금샘도 둘러보는 그야말로 산책에 가까운 힐링 산행이 되겠다.
금정산은 부산의 진산으로 주봉인 고당봉을 중심으로 북으로 장군봉, 남으로 상계봉으로 길게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이에 원효봉, 의상봉, 대륙봉, 파류봉 등의 많은 봉우리와 나비바위, 부채바위 등 천구만별의 기암괴석으로 되어 있는 명산이다. 동쪽으로 금정구, 서쪽으로 북구, 남쪽으로 동래구, 북쪽으로 양산시와 경계를 이루고 있으며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적 제215호 금정산성(18,845m)이 능선을 따라 축성되어 있다.
금정산의 유래는 '산마루에 우물이 있어 한 마리 금빛나는 물고기가 오색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우물 속에 놀았다.' 하여 산이름을 금정산(金井山)이라 전하고 있다.
천 마리의 거북과 만 마리의 자라가 뒤덮고 있다 하여 천구만별(千龜萬鼈)이라고 불리는 금정산에는 등산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범어3기, 금정8경 등 천혜의 자연경관과 신라시대(678년)네 창건된 고찰 범어사가 자리하고 있고, 등나무군락(천연기념물 제176)과 함께 부산의 역사와 문화, 민속이 살아 숨쉬는 관광명소로 시민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산성고개에서 내려 우측으로 올라 성곽을 따라 좌측으로 넘어간다.
금정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고 난 후인 1703년(숙종 29)에 국방을 튼튼히 하고 바다를 지킬 목적으로 금정산에 돌로 쌓은 산성으로 성벽의 길이는 18,845m, 성벽높이 1.5~3m, 총면적은 약8.2㎢에 이르는 국내 산성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큰 산성이다. 처음 산성을 쌓은 시기는 문헌상으로 확실하지 않으나, 남해안과 낙동강 하류에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다는 사실로 미루어 신라시대부터 성이 있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리고 1667년(현종 8년) 통제사 이지형이 왕에게 금정산성을 고칠 것을 건의하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03년 이전에 산성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현존하는 산성의 기초는 1703년(숙종29년)에 경상감사 조태동의 건의로 동래부사 박태항이 성을 쌓았고 1707년 동래부사 한배하가 중성을 새로 쌓았으며 1808년(순조8년) 동래부사 오한원이 무너지고 없어진 성을 고쳐 쌓았다.
산성의 보수정비는 사적으로 지정된 이후인 1972년부터 복원을 하여 금정산성 정비계획에 의거 연차적 지속적으로 보수 정비하고 있다.
금정산성은 바다로 침입하는 외적에 대비하기 편리한 낙동강 하구와 동래지방이 내려다 보이는 요충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후기 부산지방의 국방상 중요성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유적이다.
금정산은 육산으로 보이지만 곳곳에 기암괴석이 자리잡고 있다.
동문.
금정산 주능선의 해발 415m의 고개에 위치하고 있으며 전망이 아주 뛰어나고, 주민들이 가장 근접하기 쉬워 금정산성의 으뜸 관문으로 자리하고 있다. <금정산성 부설비>의 기록에 의하면'"1807년(순조7년) 늦가을에 토목공사를 일으켜 한달만에 동문이 완성되었다'고 한다. 동문은 홍예식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단층문루이며 문폭은 300cm, 홍예의 높이는 340cm이다.
동래부사 정현덕(1867~1874)이 동문과 서문의 재건에 힘을 쓰고 있을 때의 이야기가 있다. 그는 두 성문을 아주 완벽하게 세우기 위해 이름난 석공을 수소문한 끝에 사제지간인 두 석공을 찾아 스승에게는 동문을, 제자에게는 서문을 짓게 하였다. 동문을 맡은 스승은 야욕과 욕심이 많아 웅대하게만 짓고자 하였으나 서문을 맡은 제자는 기술이 앞서 정교한 아름다움을 살려 스승보다 먼저 짓게 되었다고 한다. 스승은 제자의 뛰어난 기술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그 당시 사람들은 그 스승을 미워하고 제자의 기술을 칭송하였다. 그러나 이들 사제는 동문과 서문 공사가 끝난 뒤에는 힘을 합쳐 밀양 영남루 공사를 하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철 모르는 진달래는 억새밭 속에서 아름다움을 뽐내려 하나 주위는 쓸쓸하기만 한데...
나비바위가 보인다.
부산 금정구 방면.
살짝 당겨본 나비바위.
나비바위를 지난다.
제3망루에 도착.
제3망루.
금정산성 제3망루는 동문 북쪽 약 1km지점에 암반이 솟아 오른 절벽 위에 절묘하게 얹혀 있듯이 자리하고 있다. 이 망루는 금정산의 유명한 나비바위와 부채바위 주변의 천구만별(천마리의 거북과 만 마리의 자라)의 모습을 한 바위와 어울려 그 아름다운 자연경관의 찬탄을 자아낸다. 제3망루는 능선 동쪽으로 돌출되게 이어진 암반 사이 경사 면에 축대를 쌓고 정면 2칸과 측면 1칸의 맞배식 망루이다. 망루의 서쪽 10여m 전방 바위면에는 '번위돈(蕃威墩)'이라는 음각명이 새겨져 있어 돈대(성안 높직한 평지에 높게 축조한 포대)였음을 말해 주고 있다.
해운대 앞바다와 마린시티도 당겨보고.
의상봉과 무명릿지.
계속 성곽을 따라가는데 바닥도 푹신하니 걷기에 그만이다. 날씨도 좋아 그야말로 힐링 산행.
돌아본 나비바위.
좌측 제4망루가 보이고 의상봉과 무명바위도 가까워졌다.
동자바위.
자연이 만든 성곽 : 토르
금정산성의 성곽을 따라 걷다보면 불쑥 솟아있거나 누군가가 돌탑을 쌓아 놓은 것 같은 바위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이 암석들은 풍화에 의해 형성된 토르(Tor)라고 하는데 '똑 바로 서 있는 돌탑'이라는 뜻으로 영국 콘웰 지방의 지방어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암석이 땅 위에 드러나기 전 지하에 있을 때 암석의 빈틈을 따라 차별적인 풍화와 침식이 일어나게 되었고, 이 암석이 지표에 드러나면 풍화되어 부스러진 부분이 없어지고 남은 암석 덩어리가 기반암(bed rock)과 연결되어 돌탑처럼 보이는 지형이다. 인간이 만든 성벽과 대자연이 만든 성곽이 조화롭게 어울리고 있는 금정산이다.
제4망루에 도착했다.
몇 번 올라보았기에 그냥 지나간다.
의상봉 위에 산객이 앉아 있다.
의상봉에서 돌아본 성곽. 산성을 따라 상계봉과 파리봉이 늘어서 있고 우측으로 낙동강도 보인다.
의상봉에서 바라 본 해운대 앞 바다와 마린시티.
무명바위.
작년에 저곳을 오른 적이 있다.
의상봉에서.
의상봉(義湘峰 620m)은 금정산성 제4망루가 있는 위쪽의 봉우리로서 동해의 망망대해를 한 눈에 바라보는 망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봉우리이다. 늠름하고 고고한 자태로 웅크린 호랑이가 동해를 바라보며 부산을 지키는 지혜로운 모습이다.
전설에 따르면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을 하려고 하는데 갑자기 금정산 산신령 호랑이가 타나나 승천을 저지하기 위해 한참 격렬한 몸싸움을 하게 되었다. 마침내 무승부가 되어 두 봉우리로 변해 위쪽에는 용을 저지하는 형상의 호봉이 되고 아래쪽에는 용을 닮은 용봉이 되었다. 이 두 봉우리를 합쳐 용호봉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1970년대 산악인들이 의상봉이라 명명하여 오늘에도 부르고 있다.
돌아본 무명바위.
고당봉을 향해 간다.
앞은 원효봉. 뒤 중앙이 고당봉이다.
원효봉.
금정산 동쪽 가장 높은 봉우리로 먼서 어둠을 헤치고 동해에 떠오르는 햇빛을 받아 갓 피어난 매화처럼 화려한 자태의 빛깔로 수놓아 '으뜸의 새벽' 원효봉(元曉峰, 687m)이라 불렀다. 금정산성 제4망루 위쪽에 자리잡고 있어 동해 망망대해를 한 눈에 바라보는 전망대 역할을 하고 있는 봉우리다. 김유신장군이 원효봉에서 낭도들을 훈련시킬 때 바위에서 부동자세로 오래 서 있어, 선 채로 소변을 보았는데 어느 낭도가 그 자리에 소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이 땅딸보 소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비바람을 이겨내고 그 푸르름을 뽐내고 있어 사람들은 '김유신 솔바위'라고 불렀다고 전해져 오고 있으나 현재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고 한다.
고당봉.
좌측 바위 밑에 미륵사와 미륵암이 보인다.
북문에 도착.
북문.
범어사에서 서편으로 1.6km, 고당봉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린 주능선이 원효봉을 향해 다시 치켜오르는 자리에 있다. 금정산성의 4문 가운데 북문이 가장 투박하고 거칠다. 이 성문에는 아치형의 장식도 없고 규모도 다른 성문보다 작다. 육축 상부에는 정면 1칸, 측면 1칸으로 익공계 우진각지붕 단층문루이며, 성문의 폭은 정면 250cm이고 측면은 350cm이다. 성문 광장 세심정 일대는 원효대사께서 화엄경을 설파한 곳이라 '화엄벌'이라 하였으며 이곳은 금정산성 방어를 위한 범어사, 국청사, 해월사 등의 스님을 훈련시켜 승병 양성을 한 승병 훈련장이었다. 일제 강점기에는 범어사 3월 만세운동 거사를 위해 기미독립선언서와 독립운동 관계 서류를 가지고 경부선 물금역에서 내려 금정산 고당봉을 넘어 청련암으로 온 통로도 북문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세심정에서 물 한잔으로 마음을 씻어내고.
고당봉 정상에 서 있던 원래의 정상석.
1994년 12월 23일 금정산 고당봉 정상에 건립하여 사랑을 받아 왔으나 2016년 8월 1일 천둥 번개를 동반한 집중호우 시 낙뢰로 파손되어 이곳에 옮겨 보관 중이라고 한다.
본격적인 오름이 시작되는 데 거의가 암릉이다.
고당샘.
금정산 고당봉 정상 아래 바위 틈에서 솟아나는 샘이다. 샘물은 흐르고 흘러 북문 인근에서 양 갈래로 나뉜다. 큰 갈래는 범어사를 지나 온천천을 이루고, 작은 갈래는 북문 습지를 채우고 대천천으로 흘러드니 온천천, 대천천의 발원지이자 부산시민 삶의 원천이다.
금샘부터 먼저 들릉 후 고당봉으로 오를 것이다.
금샘으로 가는 도중에 만난 기암.
낙옆이 푹신하게 깔린 길이 걷기에 아주 좋다.
금샘 앞 도착.
앞의 암릉을 넘어가면 그 너머에 있다.
금샘.
부산광역시 지정 기념물인 금샘은 백악기 말기인 8천만 년 전부터 형성된 화강암 바위로, 오랜 세월 동안 풍화 작용과 기후 변화를 거치면서 만들어진 풍화혈 가운데 하나인 나마이다. '세종실록지리지'와 '동국여지승람'에서는 "금정산 서북 산정에 바위샘이 있는데, 바위 위에 난 샘은 둘레가 10자(약 3m) 남짓하며 깊이는 7치(약 21cm)쯤 된다. 금빛 나는 물고기가 오색 구름을 타고 내려와 그곳에서 헤엄치고 놀았다고 하여 금샘이라는 이름이 생겨났다."고 기록하여 금샘의 유래를 전하고 있다. 이와 같은 유래와 생김새, 위치 등으로 오래 전부터 금샘은 생명의 원천, 창조의 모태인 다산을 기원하는 성스러운 장소로 여겨졌으며, 가뭄이 들면 기우제를 지내기도 하였다.
고당봉 동쪽에 자리 잡은 바위 무리의 동남단쪽에 화강암이 돌출해 있는데 그 꼭대기에 있는 절묘한 우물을 금샘이라 한다. 이 우물은 하트 모양으로, 바위의 절리(수직 균열) 방향과 같이 남북으로 긴 모양이다. 화강암 속에 있던 다른 암석이 화강암을 빠져나간 뒤 빗물의 작용으로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범어사에는 "금샘에 물이 마르면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기근을 면치 못한다."라는 말이 전하고 있어, 가뭄이 오면 금샘을 먼저 살펴보고 금샘 아래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한다. 금샘은 사방이 확 트여 경치가 맑고 아름다운 곳에 있으며, 그 둘레의 곡선미와 금빛 물결이 만들어 내는 광경은 불심의 오묘한 영험으로 조물주가 빚어 낸 예술품임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금샘은 범어사 대웅전과 대각선 상에 있어 하늘과 통하는 지심의 혈맥이며 이 샘의 물은 생명의 정화수이다. 호국의 정기가 서린 자연 에너지가 충만한 성소(聖所)로 불심을 받드는 곳이라 할 수 있다. 이곳에 있는 금빛 물고기는 부처님의 자비로움을 보여주는 상징이다.
금샘 주변의 암릉.
금정산의 금샘은 솟아 있는 바위 위 웅덩이에 물이 고여 있는 모습을 하고 있다. 소박한 석공이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이 웅덩이는 풍화혈 중 하나인 나마(Gnamma)라고 한다. 풍화혈은 암석의 작은 틈이나 오목한 곳에 빗물이 고이거나 그늘지면서 그 부분이 계속하여 풍화되어 커지며 생성되거나 혹은 물을 많이 함유한 토양이 암석과 함께 오래 지하에 있다가 지표로 드러나 차별적으로 침식되어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 중 바위의 표면에 만들어진 것을 나마라고 하며 보통 화강암에서 많이 형성된다. 나마의 어원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인 아보리진의 언어로서 '구멍'을 뜻한다.
금샘에서 되돌아나와 고당봉으로 향한다. 중앙 나뭇가지 옆으로 정상이 보인다.
갑오봉을 거쳐 장군봉으로 이어지는 능선이 뒤로 보인다.
낙동강과 좌측 신어산.
회전계단을 오르면 바로 정상.
고당봉(姑堂峰801.5m).
해동에서 제일인 부산의 진산, 금정산을 빼고는 부산을 생각할 수 없고, 고당봉이 없는 금정산은 말할 수가 없다.
금정산성 북문에서 고당봉을 바라보고 있으면 봉긋한 연꽃송이처럼 보이는 봉머리가 걸려 있던 흰 구름이 흘러가면서 하늘문이 열리는 듯하다. 햇빛이 쨍쨍한 날에는 구름이 계속해서 모이고 흩어지기에 경치 역시 계속해서 변한다. 방금까지 보이던 까마득한 골짜기에 문득 안개 구름이 불끈 솟아올라 어느새 골짜기를 덮고, 다시 고당봉까지 싸고돌면, 마치 바닷속에 떠 있던 섬이 흰 파도가 몰아치면 사라져 버리는 것처럼 그만 하늘, 땅, 바다를 가리지 못하게 된다. 어느 새 구름이 흩어지면 다시 산의 정상이 드러나 보이고 짙은 안개 속에 파묻혔던 골짜기도 드러나 보이는 이 기상천외한 자연의 조화는 금정산의 자랑거리이다. 금정산의 주봉인 고당봉에 이처럼 흰 구름이 걸려 있을 때에는 마치 천상의 세상을 연상케 한다는 뜻에서 이 광경을 '고당귀운(姑堂歸雲)'의 비경이라 한다.
인증객들이 많아 한쪽에서 한 장.
정상 뒤 암봉.
좌측 낙동강 하구로 이어지고, 건너편에 신어산.
고당봉에서 바라본 북문 방향.
고당봉에서 내려와 장군봉으로 향하려 했으나 왕복 5km가 넘는 데다 봉우리도 몇 개 넘어야 되는 터라 하산 시간을 맞출 수 없을 거로 생각하고 무심코 범어사로 방향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이것이 결과적으로 큰 착각이었음을 나중에 알았으니!
범어사 방향으로 한동안 내려서니 미륵불 갈림길이 나타나 다시 찾아 올라간다.
능선에 올라선 후 다시 미륵불을 뵙기 위해 내려선다.
처음부터 장군봉 방향으로 가다가 바로 내려섰으면 한결 편하고 시간도 절약할 수 있었을 것을 거꾸로 내려가다 다시 돌아 올라왔으니 사서 고생을 한 셈이 되었다.
가산리 마애여래입상.
경남 유형문화재 제49호인 가산리 마애여래입상은 금정산 정상 부근 화강암 절벽 위에 새긴 거대한 마애불이다. 머리 위에는 상투를 올린 듯한 육계가 솟아 있으며 귀는 어깨 위까지 늘어져 있다. 얼굴은 네모졌는데 활 모양의 눈썹과 가늘게 감은 눈, 콧방울이 불거진 큰 코, 꾹 다문 입 등은 토속적인 느낌을 주고 있다. 신체는 어깨가 벌어지고 각이 져서 건장해 보이며, 목에는 얕게 삼도가 표현되었다. 법의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이나 가슴 아랫부분은 선각이 마멸되어 정확한 형태는 알 수 없고 오른손은 어깨 부근까지 올렸으며 왼손은 내린 듯하다. 토속적인 얼굴 표현과 얕은 선각으로 표현된 조각 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다시 능선으로 올라가 장군봉으로 가기 위해 서둘렀으나 도저히 시간이 맞지 않을 것 같아 그냥 범어사로 내려간다.
나중에 알고보니 삼거리에서 장군봉으고 가서 정상에 들른 후 바로 범어사로 내려가는 길이 있었는데 그걸 모르고 다시 돌아와서 내려간다고 생각하는 바람에 착오가 생긴 것이었다. 처음부터 장군봉으로 바로 진행했으면 충분히 시간에 맞출 수가 있었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미 지난 일인데...
범어사로 내려가는데 아직 제법 괜찮은 단풍들이 늦가을을 붙잡고 아름다움을 자랑하고 있었다.
청련암에 잠시 들렀다가,
범어사로 내려왔다.
경내에 들어서니 엄청난 은행나무가 눈을 사로잡고...
경내를 둘러보고 주차장으로 향한다.
범어사(梵魚寺).
금정총림 범어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4교구 본사로서 10개의 산 내 암자와 2백여 개의 산 외 말사로 이루어진 영남 3대 사찰 중 하나이다. 신라 문무왕 18년(678년) 의상대사의 화엄십찰 중 하나이며 화엄경의 이상향인 화장세계 구현과 왜구를 막는 호국 사찰로 창건되어졌다. 흥덕왕 10년(835년)에 크게 중창되었으며, 조선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으로 전소된 것을 묘전화상과 그 문도들에 의해 복구되었다. 숙종 29년(1703년) 금정산성 축조 후 승군사령부로서 성곽 수비를 맡는 등 지역방위체제의 일익을 맡았다. 구 한말에는 선풍 진작을 통한 민족불교운동의 구심점으로서 선찰대본산이 되었고, 1919년 3.1 독립만세운동 때는 범어사 학림의거를 주도하는 등 항일운동을 펼쳤다. 1950년대는 동산 대종사가 주도한 불교 정화운동의 중심지로서 한국 근대 불교사에 큰 족적을 남기는 등 수많은 고승들을 배출하면서 오늘의 종합 수행 도량인 총림으로 발전해 왔다.
도상거리13.5km, 4시간 30분 소요.
워낙 쉬운 코스에 느긋하게 진행하였으니 시간은 큰 의미가 없을 듯.늦가을치고는 무척 포근한 날씨에 하늘도 제법 맑아서 꽤 편안한 힐링산행이 되었다.
하산 후 부산에 거주하는 절친을 만나 함께한 맥주 한 잔도 좋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