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연대는 조선 중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등을 지낸 월연 이태(月淵 李迨)가 1520년 추화산 동편 기슭, 밀양강과 단장천이 만나는 절벽 위에 지은 별서이다. 그는 한 해 전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면서 개혁을 주장하던 선비들이 무더기로 죽거나 파직당하는 화를 입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내려와 월연대와 쌍경당(雙鏡堂)을 짓고 은거했다. 정자는 임진왜란 때 모두 불에 타 없어졌으나 1757년 8대손인 월암 이지복이 쌍경당(雙鏡堂)을 중수하고, 1866년 이태의 11대손 이종술(李鍾述)이 월연대를 중수했다. 1956년에는 이태의 맏아들인 이원량(李元亮)을 추모하는 건물인 제헌(霽軒)을 새로 지었다. 월연정이 자리한 곳은 원래 월영사라는 절이 있던 곳으로, 이 근처를 월영연이라 불렀다. 밀양 월연대 일원은 월연정에서 바라 본 강변의 풍경이 빼어나며, 바위에 새겨진 글씨와 월연대 12경 등 다양한 문화경관적 요소를 지닌 명승지이다.
월연정은 1,700 평방미터의 대지에 크게 외원과 내원으로 구성되어 있고, 외원은 진입부, 주변부, 내원은 쌍경당, 월연대, 쌍청교로 구성되어 있다. 쌍경당은 임란 때 소실된 것을 1757년 중건한 건물로 쌍경당기에는 '아름다운 벼랑 아래 청담이 있고, 맑은 물은 거울과 같다. 달이 비치면 공간은 한 빛이요, 두 갈래의 거울이라 당의 이름을 쌍경당이라 하였다'고 유래를 밝혔다. 정면 5칸, 측면 2칸, 자연암반 위 기둥에 세웠으며, 2칸의 대청과 2칸의 방, 그리고 마지막 칸에는 전면 온돌, 후면에 부엌을 두어 사철 거주를 염두에 두고 지어진 홑처마 팔작건물이다. 기단은 거칠게 다음은 돌을 한 단으로 쌓은 외벌대이며, 그 위 막돌초석을 쏳고, 지붕은 이익공, 굴도리에 쇠서에는 만개한 연꽃을 초각하였다. 그 옆 제헌은 1956년 새로 여주 이씨 문중의 주도로 건립되었고, 이태의 아들 이름에서 건물 이름을 따왔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익공계 팔작집이다. 월연대 영역은 계곡을 건너 자리한 큰 자연암반위로 전체 공간 중 가장 높은 위치에 자리하고 있으며, 정면 측면 모두 3칸의 정방형 건물로 사방에 마루를 놓고 중앙에 온돌방을 두어 사방을 조망할 수 있다. 하지만, 월연대 주변으로 담장을 둘러 다소 폐쇄적인 인상을 주며, 초익공에 우물반자의 천장을 둬 차별화가 눈에 띄인다.
조선시대 정자가 대개 단독으로 지어진 데 비해 월연대 일원은 담양 소쇄원(瀟灑園, 명승 제40호)처럼 여러 건물이 집합적으로 들어선 독특한 양식을 보이는데, 계곡을 사이에 두고 오른쪽이 월연대, 왼쪽이 쌍경당 영역이고, ‘월연’과 ‘쌍경’은 달과 강물이 어우러지는 경관과 관련되어 붙여진 것으로, 쌍청교로 두 영역이 이어진다. 정자의 각 건물은 풍경이 뛰어난 자연 지형과 환경을 최대한 살리려는 조선 사대부들의 자연관, 전통 조경 양식을 보여준다. 이 일대의 아름다운 풍광을 ‘월연대 12경’이라 부른다. 한편 월연대는 가장 높은 언덕에 남향으로, 쌍경당은 중간 높이 지대에 동향으로, 제헌은 가장 낮은 곳에 남동향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처럼 각기 다른 지대에서 다른 방향으로 지어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