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적 가치와 인간적 향내
권대근
문학평론가
엘레노어 루스벨트는 ‘젊고 아름다운 사람은 자연의 우연한 산물이지만, 늙고 아름다운 사람은 하나의 예술 작품이다.’라고 했다. 삶은 자기를 표현함으로써 스스로를 변화시키고 스스로를 향상시킨다. 그런 고로 삶의 자기표현은 늙고서도 아름다울 수 있는 가장 뜻 깊은 삶의 창조다. 이 표현을 통해서 작가는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변화시키고 풍부하게 한다. 에세이포레 여름호의 수필에서 주축을 이루고 있는 특성은 인간적 향내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배제된 수필은 어디에도 존재할 수 없다. 수필은 인간학으로 인간을 향한 순수한 애정의 편린이기 때문이다. 바라보는 이와 대상 사이에 애정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대상은 온기와 냉기를 품는다. 무정물의 내면은 그것에 의미를 주는 인식을 중개로 해서 이루어진다. 수필을 수필답게 하는 것이 인간애라는 측면에서 이들 작품에 주목해 보는 것은 의미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수필의 인간적 향내는 이은희의 <헛꽃>, 최선미의 <찔레꽃>, 주인석의 <아까시아꽃>에서 꽃과 관련해서 드러나며, 이남희의 <옛집에 들다>에서는 토포필리아로 나타나며, 최이안의 <얼룩 지우기>에서는 성찰과 힐링의 의미로, 장미나의 <백자>에서는 모성원리로 비쳐진 바 있다. 가기천의 <이제 아들에게 묻다>는 ‘모르는 것이 있으면 비록 아랫사람에게 묻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야 하고, 자신보다 못한 사람에게도 기꺼이 물어볼 줄 알아야 한다는 불치하문’의 정신을 그려낸 수필이다. 수필은 체험을 문학적으로 또는 논리적으로 잘 표현했다고 해서 그 모습이 완성되고, 인생의 한 단면을 진통과 고뇌로 감싸 안았다고 해서 문학적 가치를 확보하게 되는 것은 아니다. 위에 열거한 수필에서와 같이 무엇보다도 진솔하게 자기의 심중을 수채화처럼 엷게 드러내어야 하는 것이다. 에세이포레 여름호 신작은 꽃, 토포필리아 그리고 모성원리라는 주제덕목 위에 수필의 본질적 특성에 부합하는 진솔한 자기고백이 녹아 있어서 인간의 향내를 내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작가의 숨결과 체취가 드러나기에 수필로서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는 것이다.
이은희의 <헛꽃>은 본질에 대한 성찰의 중요성을 수국이란 제재에 비유한 작품이다. 태종사의 도성 큰스님의 이야기를 구성적으로 배면에 깔아서 보이지 않는 존재의 본질을 볼 줄 알아야 한다는 주제의식이 존재론적으로 잘 형상화되어 있다. 작가의 심미적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라고 하겠다. 한 인간이 독립적 자아로 세계와 마주할 수 있을 때, 진정한 의미에서 비로소 한 사람의 인간이 탄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은희는 세계와의 접점에 위치해 있는 작가다. 그래서일까. 모든 경계선에는 항상 불꽃이 터지기 마련이듯 자아가 거대한 세계와 부딪치면서 일으키는 영혼의 스파크가 그녀에게서는 더욱 휘황하게 반짝인다. 수국축제가 벌어지는 태종사에 가서 작가가 보고자 하는 것은 화려한 수국이 아닌 마른 수국이다. 성난 비바람에도 끝내 흐트러지지 않고 끝끝내 꽃대를 세우는 헛꽃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고, 중생의 삶을 간과할 수 없어 스러지지도 못하고 서걱거리며 서 있는 수국에서 진리를 찾아 수행하는 구도의 참뜻을 발견, 존재론적으로 의미화하는 마무리수법이 돋보였다. 수국에 붉은 여운의 열반 이미지를 입히는, 이런 창작 과정에서의 철학적 깨달음으로 그녀는 늘 우리의 영혼이 새로움을 지향하도록 이끈다.
주인석의 <아까시아꽃>은 꽃의 향기를 제재로 사랑과 욕망을 이야기하는 수필이다. 꽃 향기로 사건과 감정까지도 기억해 내는 한 지인의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자신의 내면을 성찰하고 그림자의 인격화를 이루어낸 수필로서 형식적 측면에서 논리성과 연결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이 작품의 특성은 작중 인물이 아까시아 향기를 따라 걸으면서 숨겨둔 사랑과 플라토닉 러브를 자신의 의식 세계로 끄집어내어 살려내고 있다는 데 있다. 앤서니 엘리엇은 오늘의 자아가 형성되기까지 내가 걸어온 길을 되짚어 보고 표현하는 것이 수필이라고 하였다. 작가는 지인의 플라토닉 러브를 전개부까지 전달하고, 결말부에 가서는 ‘누구나 사랑에 눈을 떴다면, 감정에 최선을 다 하는 심장의 주인이 되라’고 충고한다. 자신의 연애관을 독자에게 일러바치는 용기가 신뢰감을 준다. 자신의 내면을 수필로 고백하는 동시에 자기 성찰을 함으로 이 수필은 자기실현에 기여한다. 자신의 내면을 정확하게 바라보고 진실되게 인식하여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인간성의 구현에도 기여하는 일이다. 수필에는 작중 인물의 감정만이 아니고 작가의 철학까지 실려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물의 사고 작용을 통해서 그가 사회의 가치관에 어떻게 순응하고, 어떻게 저항하였는가를 알 수 있다. 더욱이 우리는 작가의 감정 상태도 알 수 있다. 억압의 역사와 그 거처뿐만 아니라 그것의 과거와 현재, 인과관계까지 논리정연하게 서술하고 있으며, 마무리를 ‘심장의 주인이 되라’는 자신의 연애관으로 맺어, 짜임새 있는 구성을 취하고 있다.
이남희의 <옛집에 들다>는 제목만으로 보면 전통적인 향기로움이 전해져오는 한국적 수필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한 남자의 여인네 둘이 한 집에 기거하는 것이 예사로웠던 시절의 유적을 옛집을 통해서 그려내는 회고적 수필이다. 작가는 큰 마님댁과 소실댁을 가르는 돌담과 흙담벽에 나있는 벽돌 한 장 크기의 구멍에 대한 의미부여를 통해 옛집의 인생 환기적 가치를 찾는다. 행랑채 툇마루에서 막걸리 잔을 기울이는 촌로들의 풍경으로 발단을 여는 이 수필의 주는 감동은 ‘절문이근사’에서 온다. 작가는 옛집 속으로 직접 들어가서 융성했던 홍씨 가문의 역사와 대화하고 인생을 반추하기를 즐긴다. 수필이 문학일 수 있는 근접성은 바로 이런 과거와의 내통과 상상력에 있다. 누구에게나 시간의 흐름은 이러한 인식을 갖게 한다. 남편의 건강을 되찾아주기 위해 옛집에 기거하며 옛집이 주는 정감으로 불편을 이겨내었다는 스토리가 감동적으로 다가온다. 옛집에서 알싸하고 청량한 밤공기를 각별하게 즐긴다는 결말부의 멘트가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룻소의 유장한 분위기를 안겨준다.
수필의 본령은 인간구원에 있다. 허드슨의 정의처럼 득실거리는 사회의 군중 속에서 어떤 정념이나 어떤 미덕이나 어떤 악덕을 추출해 내어서 렌즈 밑에 정착시키고 그것을 멋대로 확대시키는 것이다. 제재의 다양성을 한 특성으로 하는 에세이포레 여름호 수필이 그려내는 세계는 주로 일상의 성찰에서 나는 인간적 향내다. 최이안의 <얼룩 지우기>는 ‘손을 씻으면 화도 씻긴다’는 연구결과가 창작의 실마리가 되었다. 눈에 보이는 세척 과정을 통해 육체 활동에 의한 성과를 내면 우울증 같은 정신적 질환이 호전될 수도 있다는 깨달음이 공감을 준다. 사람은 과학적 연구를 통해서 배우기도 하고, 그 가운데서 자신을 반성하기도 하고, 사람답게 사는 방법을 터득해 나가기도 한다. 자아인 ‘나’의 ‘얼룩’을 제재로 해서 철저히 탐색하고, 규명함으로써 그 ‘나’를 그려내고 ‘나’를 초월하여 자기 긍정을 매개로 해서 ‘나’를 새롭게 창조해 나가고자 하기 때문이다. ‘얼룩’이라는 내면의 그림자를 ‘세척’으로 치료할 수 있다는 믿음을 통해 건강하고 맑은 마음의 생성원리를 잘 구축하였다.
강미나의 <백자>는 아들이 실험실에서 가져온 쥐의 사육을 통해 모성원리의 위대함을 전해주는 수필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소중히 감싸 안으려는 모성의 인간적 면모와 함께 어미야 죽든지 말든지 제 어미 죽는 줄도 모르고, 죽을 거라 생각도 못하며 살아가는 쥐의 세계를 작가는 인간 세상에 적용시킨다. 수필이 자기 삶의 한 가운데 녹아 있는 삶을 재조명하고 그 가치를 선양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때, 모성원리를 화소로 하는 이 수필은 그 역할에 충분히 값하고 있다고 하겠다. 새끼나 자식은 누구나 무엇에 의지해 자기를 지탱해 나갈 수밖에 없는 나약한 존재다. 때문에 어떠한 방법과 수단으로든 자신의 가슴을 안온하게 감싸 줄 둥지가 필요했을 것이다. 그 둥지의 실체를 찾아 떠나는 수필의 길에는 혈육과 인연이 남긴 무수한 체취가 서려 있다. 인간의 정 끝에 묻어나는 그리움의 꽃을 피우고자 하는 것은 자신을 좀더 순수로, 향기로 감싸고 싶은 마음의 발로다. 모성의 향기보다 더 가치롭고 아름다운 것이 이 세상에 또 어디 있단 말인가.
최선미의 <찔레꽃>도 가부장제 속에서 헌신과 희생으로 자신을 바친 우리네 여인들의 애환을 드러내는 데 성공한 수필이다. 우리는 생활이라는 창을 통해 자기를 발견하고, 사회로 나와 직업을 가지면서 비로소 자아를 실현해간다. 고상한 취미와 이상을 가지고 산다고 해서 삶의 모습이 아름다워지는 것은 아니다. 삶은 고상함만 가지고 영위되는 것 또한 아니다. 중요한 것은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고, 나보다도 남을 위해 나를 낮추는 거룩한 인간의 본성을 작품 속에 용해시킴으로서 작가의 이상을 인간적 체취로 승화시켜 나가는 일이다. 일상을 윤기있는 터치로 그려낸 수필에서 새로운 감동을 발아시켜 내고자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일상성의 승화 여부는 작가가 인생의 가치나 의미에 대해 따뜻한 시선을 갖느냐 안 갖느냐에서 판가름 난다. 자식들과 그들의 자아를 실현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부모의 헌신적 삶보다도 더 가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이 수필은 친정 어머니의 이야기로 시작하면서 수필이 형식보다는 그 안에 담겨져 있는 내용을 얼마나 중시하는가를 말해 주고자 한다.
이들 작가가 꽃을 비롯하여 가족과의 인연 그리고 토포필리아를 화소로 수필을 썼다는 데 대한 의미는 크지 않을 수 없다. 문학의 본령은 인간구원에 있다고 하였다. 가족과 자연, 그리고 고향이 가슴 속에 존재하는 한, 그것은 싱싱한 가치를 지닐 수밖에 없다. 위기에 빠진 현대인 곁으로 가장 가까이 다가 설 수 있는 거리를 확보해 놓고 있는 이들 작가들은 그 역할, 즉 인간구원을 잘 해낼 수 있는 기본적 자질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특히 이은희, 주인석 작가가 객관적인 상관물을 통해 이미지를 창출한다는 것, 그러한 이미지가 특정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상징이나 암시로서의 기능을 한다는 것, 이런 기능들로 인해 심리 변화나 정서적 반응이 감각화되어 표출된다는 것 등의 확인을 통해서 평자는 에세이포레 여름호 수필들이 강한 미적 정서를 유발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인간적 향내로 그려진 육화된 삶의 정서화는 이들 작품에 공통적으로 드러나는 수법이라 하겠다. 이들 작가의 무르익은 문학적 향내가 에세이포레의 문학적 위상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