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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겨자씨♡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영원..(빌 2 ; 13)
김주한 목사
영원한 현재
성도들에게 ‘영원’이라는 시간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막연히 ‘영원이 무엇일까!’, 단순히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C.S. Lewis>의 글이 생각났습니다.그것은 ‘영원한 현재’라는 말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계시지 않고 언제나 영원한 현재 속에 살아가신다는 말을 했는데, 문득 그 말이 사진과 동영상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졌습니다.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아감으로 동영상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그 동영상을 이루는 수많은 한 컷의 사진 속에 바로 지금 계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사진을 보면 우리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10살 개구쟁이 아이의 모습으로 그 사진 속에 있습니다. 사진 속에 그 아이는 카메라 앵글로 찍힌 사진 틀 속에 갇힌 채로 영원합니다.앳된 스무 살 청순한 사진도 흰 머리 희끗 해지는 마흔 즈음의 사진도 우리가 볼 때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과거의 모든 시간을 지금 이라고 하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한 장의 컷트로 가지고 계십니다. 인생을 오래사신 성도께서 평생을 뒤돌아보면서 필름이 돌아가듯이 펼쳐진다는 표현을 할 때가 있는데 하나님은 그 분이 경험한 과거의 모든 경험을 필름의 한 컷 한 컷으로..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정지된 시간
우린 또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땅엔 수많은 크리스천이 있는데 그들 수 억 명이 드리는 기도를 어떻게 한꺼번에 다 들으실 수 있나?’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들으신다 해도 워낙 바쁘시니까 대충 듣는 것은 아니신지?’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 일수록 이런 의문을 더 잘 갖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은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혹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의 나이라면 어릴 적에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TV만화 영화를 본 기억이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폴이 이상한 나라로 가려고 망치로 허공을 치면 거기에 문이 생기고 시간이 그대로 정지가 됩니다. 모든 상황이 다 동작 그만 상태가 됩니다.그러면 갑자기 삐삐라는 인형과 홀스타인 강아지가 말을 하고 주인공 폴과 함께 그 문 속으로 들어가서는 이상한 나라의 대마 왕 손아귀에 잡혀있는 ‘미나’라는 소녀를 구해내는 스토리입니다.주인공 폴이 이상한 나라에서 숱한 모험을 하고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하다못해 떨어지는 공도 이상한나라로 들어가기 전 그대로 허공에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 내가 드리는 기도에만 집중하실 때는 다른 모든 시간은 정지 상태로 두십니다. 그 모든 사람들의 기도 하나 하나를 하나님과 그만의 대화시간으로 진지하게 사용하십니다.그 시간에는 온 우주에 하나님과 기도하고 있는 그 만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더욱 몸과 마음에 흐트러짐 없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뒤에 일정이 바쁘니까 빨리 끝내라!’라는 식의 사람의 말이 하나님에겐 없습니다.
'차원'(dimension)
영원과 관련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면 사람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의 제약도 받습니다. 사람은 기껏해야 3차원이라는 공간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이상의 차원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차원'(dimension)을 이해하는 부분과 관련해서 좋은 일례가 있습니다.이를테면 차원이 일차원 속에서 사는 개미는 직선에 속한 세계 속에서만 살아갑니다. 넓이라고 하는 2차원의 면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눈앞으로 바퀴벌레가 지나갔습니다. 개미에게 있어선 지나 갔다기 보다는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바퀴벌레로서는 어디 빵부스러기 떨어진 것 없나(?) 하고 이리저리 휘집고 다닌 것에 불과한데도, 개미의 입장에서는 자기 눈앞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잠깐 자기 한계인 일차원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으니까요! 개미의 눈에 바퀴벌레의 세계는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기적의 세계인 2차원의 넓이(평면)라고 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마찬가지로 어느 날 바퀴벌레 앞에서 펄쩍펄쩍 공간을 뛰어다니는 메뚜기가 나타났습니다. 바퀴벌레는 아까 개미와 마찬가지로 공간이라고 하는 곳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넓이(평면)의 세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바퀴벌레 눈앞에 역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으니까요! 바퀴벌레에게 메뚜기는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신비로운 영적(?) 존재였습니다. 사람을 메뚜기에 비유하는 것이 좀 비약일 수 있겠지만, 사람도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4차원과 그 이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마가의 다락방 안에 짠~~하고 나타나셨습니다.문도 안 열고 벽을 그냥 통과해서 나타나신 겁니다. 같은 시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열 한 사도에게도 나타나시고, 시몬에게도 동시에 나타나셨습니다.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4차원과 그 이상의 세계에 계시다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3차원의 세계로 잠깐씩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사라지셨습니다.재미있는 것은 상위의 차원에서는 상식에 불과한 것도, 그 아래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벽을 뚫고 다니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다니시는 것은 그 차원에서는 상식입니다.그러나 3차원인 우리가 보았을 때는 기적입니다. 그러나 기적이 상식이 되는 날이 우리 앞에도 펼쳐 질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은 때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마치 개미(일차원직선의세계)가 바퀴벌레(이차원평면의세계)의 세상이 존재함을 부인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바퀴벌레가 메뚜기(삼차원공간의세계)의 세상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그 세계를 우리가 아직은 경험 할 수 없지만, 이제 천국에 가면 맛 볼 수 있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미 천사들과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기도합니다.
‘예지’銳智(미리아심)
다시 시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을 생각하면서 커다란 은혜를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지금 보고 계신다는 부분 이었습니다! 여기가 신비롭습니다! 욥기23:10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리고 시편139:16에서는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아십니다. 전지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예정론을 말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예지’銳智(미리아심)를 말하자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내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내가 기도할 내용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하신말씀입니다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기도할 것을 아시느니라!” 기도할 것을 아시는 주님은 또한 우리 기도의 응답이 되는 미래의 일을 지금 보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지금 내가 간절히 원하는 바를 바로 지금 보고 계신다고 하니까 힘이 솟았습니다! 막연한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내 소원을 한 장면, 한 장면으로 보고 계신다 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보고 계신 그 장면이 저의 시간이 되게 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 그 응답의 시간과 나의 현실의 시간이 하나로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또한 우리의 기도입니다.그 어느 인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인드콘트롤’해서 바라는 바를 머릿속에 자꾸 그리고 떠올리고 해서 그 바라는 것을 이루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신 나의 복된 미래를 실제로 나의 시간 속에서 나 또한 보자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 했을 때 이 말씀은 이미 우리의 바라는 바에 대한 실상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믿음을 정의할 때 ‘바라는 것’(미래)과 ‘실상’(현재)이 만난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 ‘바라는 실상’을 실제로 우리가 보게 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바라는 바를 실상으로 보려면 믿음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상당수는 그 마음에 가득한 의심이 있습니다. 의심은 하나님이 보고 계신 나의 복된 미래를 다 사라지게하고 지워버리는 지우개 역할을 합니다. 오늘도 저는 저의 복된 미래를 상상합니다. 복된 교회의 미래를 꿈 꿉니다. 그리고 그 상상은 내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보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시간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날이 속히 오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그리스도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빌2:13)”완전한 이해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흐릿하게나마 영원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읽는 설교" 시간과 공간 그리고 영원..
영원한 현재
성도들에게 ‘영원’이라는 시간이 무엇인지를 설명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막연히 ‘영원이 무엇일까!’, 단순히 ‘시간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하다가 <C.S. Lewis>의 글이 생각났습니다.그것은 ‘영원한 현재’라는 말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과거에도 미래에도 계시지 않고 언제나 영원한 현재 속에 살아가신다는 말을 했는데, 문득 그 말이 사진과 동영상이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 졌습니다. 사람은 흘러가는 시간 속에 살아감으로 동영상속에서 살아간다면, 하나님은 그 동영상을 이루는 수많은 한 컷의 사진 속에 바로 지금 계신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졌습니다. 우리가 어릴 때 사진을 보면 우리는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10살 개구쟁이 아이의 모습으로 그 사진 속에 있습니다. 사진 속에 그 아이는 카메라 앵글로 찍힌 사진 틀 속에 갇힌 채로 영원합니다.앳된 스무 살 청순한 사진도 흰 머리 희끗 해지는 마흔 즈음의 사진도 우리가 볼 때는 현재라는 시간 속에서 과거를 보는 것이지만, 하나님은 그 과거의 모든 시간을 지금 이라고 하는 현재의 시간 속에서 보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든 시간과 공간을 한 장의 컷트로 가지고 계십니다. 인생을 오래사신 성도께서 평생을 뒤돌아보면서 필름이 돌아가듯이 펼쳐진다는 표현을 할 때가 있는데 하나님은 그 분이 경험한 과거의 모든 경험을 필름의 한 컷 한 컷으로.. 그때가 아니라 지금이라는 시간 속에서 보신다는 것입니다.
정지된 시간
우린 또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땅엔 수많은 크리스천이 있는데 그들 수 억 명이 드리는 기도를 어떻게 한꺼번에 다 들으실 수 있나?’ 하는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들으신다 해도 워낙 바쁘시니까 대충 듣는 것은 아니신지?’ 마음이 순수한 어린이 일수록 이런 의문을 더 잘 갖습니다. 답은 간단합니다. 우리는 시간 속에 갇혀 있지만 하나님은 시간에 제약을 받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혹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의 나이라면 어릴 적에 <이상한 나라의 폴>이라는 TV만화 영화를 본 기억이 이해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폴이 이상한 나라로 가려고 망치로 허공을 치면 거기에 문이 생기고 시간이 그대로 정지가 됩니다. 모든 상황이 다 동작 그만 상태가 됩니다.그러면 갑자기 삐삐라는 인형과 홀스타인 강아지가 말을 하고 주인공 폴과 함께 그 문 속으로 들어가서는 이상한 나라의 대마 왕 손아귀에 잡혀있는 ‘미나’라는 소녀를 구해내는 스토리입니다.주인공 폴이 이상한 나라에서 숱한 모험을 하고 현실세계로 돌아오면 모든 것이 그대로입니다. 하다못해 떨어지는 공도 이상한나라로 들어가기 전 그대로 허공에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지금 내가 드리는 기도에만 집중하실 때는 다른 모든 시간은 정지 상태로 두십니다. 그 모든 사람들의 기도 하나 하나를 하나님과 그만의 대화시간으로 진지하게 사용하십니다.그 시간에는 온 우주에 하나님과 기도하고 있는 그 만이 있습니다! 이것을 알면 우리는 더욱 몸과 마음에 흐트러짐 없이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뒤에 일정이 바쁘니까 빨리 끝내라!’라는 식의 사람의 말이 하나님에겐 없습니다.
'차원'(dimension)
영원과 관련해서 조금 더 말씀드리면 사람은 시간뿐만 아니라 공간의 제약도 받습니다. 사람은 기껏해야 3차원이라는 공간속에서 살아갑니다. 그 이상의 차원은 경험할 수 없습니다. '차원'(dimension)을 이해하는 부분과 관련해서 좋은 일례가 있습니다.이를테면 차원이 일차원 속에서 사는 개미는 직선에 속한 세계 속에서만 살아갑니다. 넓이라고 하는 2차원의 면적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세계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 눈앞으로 바퀴벌레가 지나갔습니다. 개미에게 있어선 지나 갔다기 보다는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입니다. 바퀴벌레로서는 어디 빵부스러기 떨어진 것 없나(?) 하고 이리저리 휘집고 다닌 것에 불과한데도, 개미의 입장에서는 자기 눈앞에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잠깐 자기 한계인 일차원의 눈앞에 나타났다 사라졌으니까요! 개미의 눈에 바퀴벌레의 세계는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기적의 세계인 2차원의 넓이(평면)라고 하는 세계를 살아가는 존재였습니다.마찬가지로 어느 날 바퀴벌레 앞에서 펄쩍펄쩍 공간을 뛰어다니는 메뚜기가 나타났습니다. 바퀴벌레는 아까 개미와 마찬가지로 공간이라고 하는 곳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넓이(평면)의 세계 속에서만 살아가는 바퀴벌레 눈앞에 역시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잠깐 나타났다 사라졌으니까요! 바퀴벌레에게 메뚜기는 자신이 경험할 수 없는 세계를 살아가는 신비로운 영적(?) 존재였습니다. 사람을 메뚜기에 비유하는 것이 좀 비약일 수 있겠지만, 사람도 3차원의 세계를 벗어날 수 없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4차원과 그 이상의 세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이 모여 있는 마가의 다락방 안에 짠~~하고 나타나셨습니다. 문도 안 열고 벽을 그냥 통과해서 나타나신 겁니다. 같은 시간에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나타나시고, 열 한 사도에게도 나타나시고, 시몬에게도 동시에 나타나셨습니다.우리가 경험할 수 없는 4차원과 그 이상의 세계에 계시다가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3차원의 세계로 잠깐씩 보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사라지셨습니다.재미있는 것은 상위의 차원에서는 상식에 불과한 것도, 그 아래 차원에서 보았을 때는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의 몸이 벽을 뚫고 다니시고,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다니시는 것은 그 차원에서는 상식입니다.그러나 3차원인 우리가 보았을 때는 기적입니다. 그러나 기적이 상식이 되는 날이 우리 앞에도 펼쳐 질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몸을 입은 때입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존재하는 영적인 세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는 것은 마치 개미(일차원직선의세계)가 바퀴벌레(이차원평면의세계)의 세상이 존재함을 부인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바퀴벌레가 메뚜기(삼차원공간의세계)의 세상이 있음을 부인하는 것과도 같습니다.그 세계를 우리가 아직은 경험 할 수 없지만, 이제 천국에 가면 맛 볼 수 있게 될 줄을 믿습니다. 이미 천사들과 앞서간 믿음의 선진들이 경험하고 있는 세상이기도합니다.
‘예지’銳智(미리아심)
다시 시간으로 돌아오겠습니다. 사실 하나님의 시간인 영원을 생각하면서 커다란 은혜를 받은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과거뿐만 아니라 우리의 미래까지도 지금 보고 계신다는 부분 이었습니다! 여기가 신비롭습니다! 욥기23:10에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리고 시편139:16에서는 “내 형질이 이루어지기 전에 주의 눈이 보셨으며 나를 위하여 정한 날이 하루도 되기 전에 주의 책에 다 기록이 되었나이다”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은 우리의 미래를 아십니다. 전지하다는 것은 모든 것을 다 안다는 것입니다. 어려운 예정론을 말하자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분의 ‘예지’銳智(미리아심)를 말하자는 것입니다.하나님은 내가 기도하기 전에 이미 내가 기도할 내용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이 하신말씀입니다 “너희가 기도하기 전에 기도할 것을 아시느니라!” 기도할 것을 아시는 주님은 또한 우리 기도의 응답이 되는 미래의 일을 지금 보고 계십니다.하나님이 지금 내가 간절히 원하는 바를 바로 지금 보고 계신다고 하니까 힘이 솟았습니다! 막연한 바램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내 소원을 한 장면, 한 장면으로 보고 계신다 하니까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그래서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이 보고 계신 그 장면이 저의 시간이 되게 해 달라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신 그 응답의 시간과 나의 현실의 시간이 하나로 만나게 해달라는 기도가 또한 우리의 기도입니다.그 어느 인본주의자들이 말하는 것처럼 ‘마인드콘트롤’해서 바라는 바를 머릿속에 자꾸 그리고 떠올리고 해서 그 바라는 것을 이루자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이 지금 보고 계신 나의 복된 미래를 실제로 나의 시간 속에서 나 또한 보자는 것입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
히브리서의 말씀대로 하면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라 했을 때 이 말씀은 이미 우리의 바라는 바에 대한 실상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입니다.믿음을 정의할 때 ‘바라는 것’(미래)과 ‘실상’(현재)이 만난 것으로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시간과 우리의 시간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그러나 그 ‘바라는 실상’을 실제로 우리가 보게 되는 경우가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입니다. 바라는 바를 실상으로 보려면 믿음이라는 문을 열고 들어가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 중에 상당수는 그 마음에 가득한 의심이 있습니다. 의심은 하나님이 보고 계신 나의 복된 미래를 다 사라지게하고 지워버리는 지우개 역할을 합니다. 오늘도 저는 저의 복된 미래를 상상합니다.복된 교회의 미래를 꿈 꿉니다. 그리고 그 상상은 내게서 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 보고 계시는 것이라고 말씀드립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시간과 나의 시간이 만나는 날이 속히 오기를 오늘도 간절히 기도합니다! “너희 안에 행하시는 이는 그리스도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느니라!(빌2:13)” 완전한 이해가 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흐릿하게나마 영원을 생각하면서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조금은 도움이 될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