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A “바지 속 90만 달러 내놔”…김형욱 ‘박정희 약점’ 불었다 (45)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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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은 권세를 부렸던 김형욱은 1969년 10월 중앙정보부장에서 해임됐다. 그의 월권에 대한 비판이 사방에서 쏟아지자 박정희 대통령도 그를 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 뒤 전국구 국회의원(8대)을 한 차례 시켜줬지만 그의 마음은 비뚤어질 대로 비뚤어졌다. 73년 4월 명예 박사학위를 받는다는 명분으로 대만에 건너간 김형욱은 바로 미국으로 도망갔다.
그는 정권의 압박 때문에 망명(亡命)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이 아니다. 김형욱은 정보부장 시절 해외로 많은 재산을 빼돌렸다. 그 돈이 쌓여서 이제 밖에 나가도 편안하게 살 수 있겠다 싶어지자 미국으로 달아나버린 것이다.
그가 해외로 빼돌린 돈은 엄청났다. 정확한 액수는 모르지만 아마 수천만 달러는 되지 않을까 싶다. 김형욱이 돈을 해외로 밀반출하는 데는 유명 여배우가 가담했다.
정보부장에 있으면서 이곳저곳에서 수탈한 달러를 그 여배우가 여러 차례 나눠서 홍콩으로 운반했다. 홍콩 공항에 상주하던 한국 정보부 요원들이 도와줘서 세관의 조사를 받지 않고 비행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그 돈은 홍콩을 거쳐 스위스에 있는 김형욱의 비밀계좌로 옮겨졌다.
김형욱 전 중정 부장이 1977년 6월(왼쪽·오른쪽)과 10월(가운데) 미국 하원 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출석해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다. 73년 미국 망명 4년 만에 공개적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가장 두려워하는 개인은 김대중이었고 가장 두려워하는 집단은 미국 국회”라고 주장했다. 그가 막대한 재산을 해외로 빼돌렸다는 사실도 위원회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중앙포토
김형욱은 뉴욕 근교 뉴저지주 알파인의 고급 주택가 저택에서 살았다. 억만장자들이 모여 산다는 미국 최고의 부촌(富村)이다. 그곳에서 조용히 살았으면 괜찮았을 텐데 거기서도 제 성격이 나왔다. 자신이 마치 대한민국을 움직이던 사람이고, 대단한 정보를 가진 것처럼 미국에서 행세했다.
“나를 건드리면 박정희 대통령이 상당히 상처를 받을 거다”라며 큰소리를 치고 다녔다.
음악의 경부고속도로 깔았다, 세종문화회관 속 ‘JP의 악기’ (46)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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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중앙정보부장으로 분주하던 1961년 12월 나는 관현악단 40명, 합창단 35명으로 구성된 국내 최초의 종합음악예술단체인 ‘예그린악단’을 만들었다.
나라를 재건(再建)하는 데 정치·경제도 중요하지만 정신문화의 정수(精髓)인 문화예술이 뒷받침돼 줘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우리가 산업화와 경제 발전을 추구하는 까닭도 종국엔 그 바탕 위에서 학문과 과학기술을 진흥시키고 예술의 꽃을 피워 국민 삶의 질을 풍요하게 하려는 데 있다.
육군 중령 시절이던 1959년 김종필(JP) 전 총리가 당시 청파동 자택에서 누운 자세로 딸 예리(8)와 함께 아코디언 연주를 즐기고 있다. JP는 베이스버튼을, 예리는 건반을 누르고 있다.
1951~52년 6개월간 미국 보병학교 유학 시절의 경험도 예그린 창단을 자극했다. 뉴욕 록펠러센터의 라디오시티 뮤직홀에서 봤던 악단의 모습은 아주 화려했다.
당시 조국 강토는 전쟁의 포연(砲煙)으로 뒤덮였지만 ‘우리도 언젠가 이런 거 하나쯤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