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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履歷) 이재영(李再榮) 1567년∼1623년, 조선의 문신. 증조부 휘 귀손(龜孫), 조부 휘 순증(順曾), 이조판서 부 휘 선(選) 할아버지의 아들로,1615년(광해군 7년) 알성시 을과에 1등으로 급제하셨다. <국조 문과 방목> 이재영(李再榮) 광해군(光海君)7년(1615년), 알성시(謁聖試) 을과1(乙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여인(汝仁) 호(號) 본관(本貫) 영천(永川)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이선(李選) 생부(生父) 조부(祖父) 이순증(李順曾) 증조부(曾祖父) 이귀손(李龜孫)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자(子) 이문한(李文漢)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전력(前歷) 학관(學官) 품계(品階)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官職) 군수&(郡守&) 이재영(李再榮) 선조(宣祖)32년(1599년), 정시(庭試) 갑과1(甲科1) >>>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호(號) 본관(本貫) 미상(未詳)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 가족사항 부(父) 생부(生父) 조부(祖父) 증조부(曾祖父)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 이력 및 기타 소과(小科) 특별시(特別試) 을묘1615알성시방$(乙卯1615謁聖試榜$) 전력(前歷) 사과(司果) 품계(品階) 관직(官職) . ■月汀先生集卷之六 碑銘 ■월정선생집권지육 비명 慶州府尹李公墓碣銘 경주부윤이공묘갈명 府尹李公旣卒之明年。長君判書居守松都。將行謂余曰。亡弟葬矣。而墓道未克 부윤이공기졸지명년。장군판서거수송도。장행위여왈。망제장의。이묘도미극 表石具矣。願籍子之一言以重。旣而公之家。又申判書之命。余雖於公後生乎。 표석구의。원적자지일언이중。기이공지가。우신판서지명。여수어공후생호。 獲習伯仲間也久。義有不得終辭者。按狀公諱選。字季膺。其先永川著姓。有 획습백중간야구。의유부득종사자。안상공휘선。자계응。기선영천저성。유 諱釋之。見麗?將訖。以寶文閣提學。棄官退隱于龍仁縣之南谷。遂號之南谷先 휘석지。견려?장흘。이보문각제학。기관퇴은우룡인현지남곡。수호지남곡선 生。牧隱李文靖有詩若序艶稱之。卽公七世祖也。三傳而爲右司諫大夫宗儉。 생。목은이문정유시약서염칭지。즉공칠세조야。삼전이위우사간대부종검。 寔公高祖。曾祖藍浦縣監仲浩。贈承政院左承旨。祖考繕工奉事龜孫。贈戶曹 식공고조。증조람포현감중호。증승정원좌승지。조고선공봉사구손。증호조 參判。顯考順曾。以儀曹郞出守益山郡。後贈吏曹判書。?贈貞夫人善山金氏。 참판。현고순증。이의조랑출수익산군。후증이조판서。?증정부인선산김씨。 孝長之女。以嘉靖壬午歲十一月癸丑生公。公少礪博士業。中己酉生員。遂擢乙 효장지녀。이가정임오세십일월계축생공。공소려박사업。중기유생원。수탁을 卯文科。被揀承文院。薦補藝文檢閱。以銀臺注書。轉春坊說書。陞遷春夏二官 묘문과。피간승문원。천보예문검열。이은대주서。전춘방설서。승천춘하이관 佐郞。自是名位日起。四入諫垣爲正言獻納。一秉風憲爲持平。其初陞獻納則特 좌랑。자시명위일기。사입간원위정언헌납。일병풍헌위지평。기초승헌납칙특 命也。於春坊又除司書文學。選入玉堂。三拜修撰。一拜校理。自校理引疾乞外 명야。어춘방우제사서문학。선입옥당。삼배수찬。일배교리。자교리인질걸외 。得博川郡。是後知府者再。昌原, 順天。出牧者再。晉州尙州。其爲尙州也。 。득박천군。시후지부자재。창원, 순천。출목자재。진주상주。기위상주야。 以高第褒加通政階。移牧公州。又尹慶州府。入爲掌?院判決事。訟師得所平亭 이고제포가통정계。이목공주。우윤경주부。입위장?원판결사。송사득소평정 。前後凡五拜是職。遞授僉知中樞。又牧忠州。歷度支參議。以五衛將。萬曆丙 。전후범오배시직。체수첨지중추。우목충주。역도지참의。이오위장。만력병 戌十一月丁巳病?卒。得年六十有五。事聞。賜賻又遣禮官賜祭。卜以丁亥二月 술십일월정사병?졸。득년육십유오。사문。사부우견례관사제。복이정해이월 庚申。葬于楊州神穴里坤坐之原。從先兆也。公不逮事二親。奉先備至。與判書 경신。장우양주신혈리곤좌지원。종선조야。공부체사이친。봉선비지。여판서 公友愛尤篤。被服食飮同之者五十年如一日。毋論里?所起敬。卽薦紳大夫。稔 공우애우독。피복식음동지자오십년여일일。무론리?소기경。즉천신대부。임 聞而樂道之者。此其實行云。?歷多會府。?席其民而植培之。婁以治辦稱。或至 문이악도지자。차기실행운。?역다회부。?석기민이식배지。누이치판칭。혹지 樹碑以揭遺愛云。內子貞夫人李氏。系出完山部將李萱之女。有女操而不育。萬 수비이게유애운。내자정부인이씨。계출완산부장이훤지녀。유녀조이부육。만 曆己卯。先公逝。?酉坐之原。與公兆相望。側室有丈夫子二人。貴榮, 再榮。 역기묘。선공서。?유좌지원。여공조상망。측실유장부자이인。귀영, 재영。 女子三人。長適禹誡臣次適宗室德純令鏡忠。其次在室。判書諱?。方以治行嗣 여자삼인。장적우계신차적종실덕순령경충。기차재실。판서휘?。방이치행사 響。次公少卿云。銘曰。昔在南谷。勇退全名。高風激世。始顯終貞。遙遙華胄 향。차공소경운。명왈。석재남곡。용퇴전명。고풍격세。시현종정。요요화주 。僅傳一經。益山承之。官?德?。公趾其美。?弟竝榮。連枝雙璧。金馬蜚英。 。근전일경。익산승지。관?덕?。공지기미。?제병영。연지쌍벽。김마비영。 靑雲少却。墨綬流聲。?書增秩。嘉乃治平。故都大尹。班視亞卿。預議民部。 청운소각。묵수류성。?서증질。가내치평。고도대윤。반시아경。예의민부。 宦以時成。荊花告?。忽焉九京。屬辭最迹。無或改評。永言勸悌。來者所程。 환이시성。형화고?。홀언구경。속사최적。무혹개평。영언권제。내자소정。 惟楊故里。玄宅是營。樂石?然。勿?勿傾。 유양고리。현댁시영。악석?연。물?물경。 ■윤근수 [尹根壽 1537년(중종 32)∼1616년(광해군 8)] 조선 중기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본관은 해평(海平). 김덕수(金德秀)·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가 되었고, 그 뒤 승정원주서·연천현감 등을 지냈다. 1562년 부수찬으로서 기묘사화로 죽은 조광조(趙光祖)의 신원을 상소하였다가 과천현감으로 좌천되었다. 1563년 행신(幸臣) 이량(李樑)이 자신의 아들 이정빈(李廷賓)을 이조좌랑에 천거한 것을 형 윤두수(尹斗壽)가 박소립(朴素立) 등과 반대한 사건의 영향을 받아 파직되었다.
3. ■조선조방목(문과)에 기록된 사항 이재영(李再榮) 광해군(光海君) 7년 (을묘, 1615년), 알성시(謁聖試) 을과1(乙科1) 인적사항 생년(生年) 자(字) 여인(汝仁) 호(號) 본관(本貫) 영천(永川) 거주지(居住地) 미상(未詳) 諡號, 封號 가족사항 부(父) 이선(李選) 생부(生父) 조부(祖父) 이순증(李順曾) 증조부(曾祖父) 이귀손(李龜孫) 외조부(外祖父) 처부(妻父) 자(子) 이문한(李文漢) 이력 및 기타사항 소과(小科) 다른문과합격 전력(前歷) 학관(學官) 품계(品階) 통정대부(通政大夫) 관직(官職) 군수(郡守) 신분(身分) 서(庶)
4. ■연려실기술별집 제9권 관직전고(官職典故) 과거 3 등과총목(登科摠目) 32년 기해 3월 정시에서 참두(斬頭) 대거(對擧)이재영(李再榮) 등 10명을 뽑았다. 표(表)의 시제 : 당 나라 이필(李泌)이 봉래원(蓬萊院)을 지으라는 명령에 감사하다.
5. ■성소부부고 제1권 시부 1 - 막부잡록(幕府雜錄) 여인(汝仁)과 함께 짓다 여인(汝仁)은 이재영(李再榮)의 자(字). 부윤(府尹) 선(選)의 서자로 괴제(魁第)로 발탁되었으나 삭과(削科)되었다. 두 번이나 망연히 교거(僑居)를 들르니/重訪僑居意?然 주렴친 뒤채에서 연기처럼 흩어지네/後堂簾?散如煙 재정(才情)이 대단타고 절찬받던 인물인데/蘇郞絶歎才情甚 무슨 일로 풍류가 옛날보다 줄었는지/底事風流減舊年
6. ■성소부부고 제18권 문부 15(文部十五) - 기행 상(紀行上) 병오기행(丙午紀行) 을사년(선조 38, 1605년) 겨울 명(明) 나라 황제의 장손이 탄생하였다. 황제는 한림수찬(翰林修撰) 주지번(朱之蕃)과 형과도급사(刑科都給事) 양유년(梁有年)을 파견하여 조서를 받들고 오게 하였다. 나는 그때 요산(遼山)의 직을 그만두고 서울집에 있었는데 원접사 유공근(柳公根)이 상께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다. 병오년(선조 39, 1606년) 정월 초6일에 의흥위 대호군(義興衛大護軍) 직(職)을 제수받았다. 이달 21일 조정에 하직 인사를 하였다. 동료(同僚) 필선(弼善) 이지완(李志完)은 어머니를 뵈러 성천(成川)에 가서 아직 돌아오지 않아 나와 전적(典籍) 조희일(趙希逸)만이 따랐다. 김남창(金南窓)은 제술(製述)로, 진사(進士) 백진남(白振南)은 서자(書字)로 함께 따르고, 통역관 표헌(表憲)·이해룡(李海龍)·박인상(朴仁祥)·진예남(秦禮男)·이운상(李雲祥)·신계도(申繼燾)와 이문학관(吏文學官) 이재영(李再榮)·양만세(楊萬世)와 사자관(寫字官) 이해룡(李海龍)·송효남(宋孝男)과 화원(?員) 이정(李楨), 서원(書員) 이자관(李自寬)이 따랐다. 이날 뒤따라와 베푼 송별연이 번거로워 겨우 연서(延曙)까지 가서 묵었다. 나는 여인(汝仁)과 함께 묵었다. 22일 벽제에서 점심을 먹었다. 고양 군수(高陽郡守) 김흡(金洽)이 찾아와서 인사하였다. 저물녘에 파주에 도착하여 이(李)와 송(宋) 두 사람과 함께 묵었다. 23일 오목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개성부에 도착하였다. 개성 유수(開城留守) 홍간옹(洪艮翁 간옹은 홍가신(洪可臣)의 호)이 방문왔다. 24일 금교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평산에 이르니 관찰사(觀察使) 심열(沈悅)이 찾아왔다. 25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었다. 수안군수(遂安郡守) 이경천(李慶千)이 찾아와 인사하였다. 용천에서 묵었다. 재령군수(載寧郡守) 유희발(柳希發)과 소강 첨사(所江僉使) 민인길(閔仁佶), 강령현감(康翎縣監) 조호룡(曺浩龍) 등이 만호(萬戶) 심눌(沈訥)의 소개로 함께 와서 인사하였다. 26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동선에서 묵었다. 27일 소선령(笑仙嶺)으로 해서 황주에 도착했다. 저녁에 심방백(沈方伯 심열을 가리킴)과 목사 박열지(朴說之 열지는 박동열(朴東說)의 자)·이숙(怡叔 조희일(趙希逸)의 자)·여인(汝仁)과 함께 이야기했다. 정상조(鄭象祖)가 인사하러 찾아와 송(宋)·이(李) 등과 함께 묵었다. 밤중에 학랑(鶴娘)이 휘장을 걷으며 들어왔다. 나는 알아 차리고 정(정상조)에게 임고(臨皐)의 밑을 지나 내게 인사하며 적벽(赤壁)에서의 노님이 즐거웠느냐고 묻더라고 하자 세 사람이 껄걸 웃어대니 달아나 버렸다. 28일 사(使)는 조카와 읍에서 만나기로 하여 중화에 머물렀다. 이숙은 나와 함께 먼저 평양에 도착하였다. 서윤(庶尹) 박엽 숙야(朴燁叔夜 숙야는 자)가 구름무늬로 장식한 선방(仙舫 : 놀잇배)에 춤추는 기녀들을 싣고 잔치를 베풀었다. 내가 관서(關西) 지방을 아홉 번이나 왕래하였으나, 이번 잔치가 가장 성대하였다. 기생 향란(香蘭)은 내 형님께서 돌봐주던 자이다. 노래 잘하고 우스개 소리를 잘하므로 백가관서곡(白家關西曲)을 부르게 했다. 방백 박자룡(朴子龍)이 중화에서 돌아와 함께 배타고 놀았다. 성 위에 횃불을 밝혀 놓으니 여장(女墻 : 성가퀴)이 대낮같이 밝았다. 이고(二鼓)에 가마를 타고 들어오니 숙야가 나를 자기 처소에 들게 하였다. 내가 예전에 돌봐주던 기생 춘랑(春娘)이 기적(妓籍)에서 빠진 지 오래되었는데 서울에서 온 지 두어달이 되었다 한다. 숙야가 굳이 밀어 내었다.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에 옷매무새도 어지러워 병이 심한 듯하므로 내가 만류하였다. 그믐날 이숙(怡叔)이 먼저 왔다. 2월 4일 사(使)가 비로소 도착하였다. 5일 동지사(冬至使)가 이상신(李尙信)·정협(鄭協)과 서장관(書狀官) 유시행(柳時行)이 평양부에 당도하였다. 저녁에 양오(養吾 이지완(李志完)의 자)가 성천에서 왔다. 6일 평양부에서 큰 잔치를 베풀었다. 7일 서경(西京)을 출발하여 순안에 도착하였다. 숙야도 도차(都差 차사원(差使員)의 우두머리)로 따라 왔다. 밤에 숙야·여인(汝仁)과 함께 서상(西廂)에 묵었다. 성천 부사 이거용(李巨容)이 술자리를 성대하게 차려놓고 노래시키기를 청하여 허락하였더니 기생 넷이 들어와 인사를 하는데, 그 중 한명은 생김새가 매우 곱지 않았다. 내가, "저 아이는 분명 노래를 잘할 것이다."하니, 여인(汝仁)이 "어떻게 아는가?"하기에, 내가, "재주가 없으면 어떻게 이 자리에 낄 수 있겠는가?" 하였더니, 방 안에 있던 사람들이 한바탕 웃었다. 그 기녀는 과연 노래를 잘하였다. 발성이 맑고도 웅장하여 패서(浿西 평안도)에서 제일이겠는데 곡조에 맞지 않는 것이 흠이었다. 이날 밤 백패(白牌)는 대감생(戴監生)과 재등황(齋謄黃)이 온다고 보고하였다 한다. 7. ■성소부부고 제19권 문부 16(文部 十六) - 기행 하 紀行下 기유서행기(己酉西行紀) 무신년(선조 41, 1608년)에 나는 공산(公山)에서 부안(扶安)으로 돌아와 오래 머무를 계획을 하였다. 그러나 일이 있어 북쪽으로 여행하여 서울에 이르러 형님을 찾아 뵈었는데 얼마 안 있다가 승문원 판교(承文院判校)에 임명되었고 사은사 서장관(謝恩使書狀官)이 되었다. 2월 초하루에 유태감(劉太監) 원접사(遠接使) 이공 상의(李公商毅)가 나를 종사관(從事官)으로 천거하니 주상께서 서장관을 바꾸어 종사관으로 이공을 따라 가라 명하셨다. 이달 15일 조정을 물러나 동료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 유숙 연숙(柳潚淵叔 연숙은 자)과 대역(大譯) 표헌(表憲)·정득(鄭得), 역관(譯官) 김성남(金聖男)·이언겸(李彦謙), 한리학관(漢吏學官) 이재영(李再榮), 사자관(寫字官) 송효남(宋孝男), 화원(?員) 이징(李澄)이 동행하였다. 저녁에 벽제(碧蹄)에서 묵었다. 사(使 원접사)는 성묘하느라 오지 않았다. 16일 마산(馬山)에 도착하였다. 저물녘에야 사가 도착하였다. 18일 낮에 오목참(梧木站)에서 쉬고 저물녘에 개성에 도착하였다. 19일 눈을 무릅쓰고 금교(金郊)까지 가서 쉬고 어두워서야 평산부(平山府)에 들어갔다. 20일 안성참(安城站)에서 점심을 먹었다. 참이 총수산(蔥秀山)으로 옮겨졌는데 객사(客舍)를 새로 지어 매우 깨끗하고 널찍하였다. 용천관(龍泉館)에서 묵었다. 21일 눈을 무릎쓰고 앞서 검수역(劍水驛)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사(使)가 뒤쫓아 왔다. 22일 봉산(鳳山)에 가서 묵었다. 23일 황주에 도착하였다. 24일 그대로 머물렀다. 25일 중화에 가서 묵었다. 26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배에서 성 위를 보니 단청한 누각이 보였다. 물어 보니 새로 지은 연광정(練光亭)이라 했다. 평양부(平壤府)에 들어가 서상(西廂)에서 묵었다. 나와 동갑인 이방백(李方伯)이 찾아와 사신의 일행이 지나는 도내(道內)의 연변에서 접대할 계획을 완벽하게 하여 역참에 나오지 않을 일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서로 의견이 맞지 않자 사(使)가 감영의 예방(禮房)을 가두라고 명령하니 방백은 불쾌하여 돌아갔다. 27일 그대로 머물렀다. 연광정에 올라갔다. 경치가 매우 아름다웠다. 내가 여인(汝仁 : 이재영(李再榮)의 자)에게, "이제야 비로소 패서객(浿西客)이 되었구나." 하니, 여인(汝仁)은, "술 권할 여자가 없는 게 흠이구먼."하였다. 나는 눈을 흘겨주고 웃은 다음 돌아왔다. 28일 그대로 머물렀다. 방백을 찾아가 조용히 이야기하다가 밤중에야 돌아왔다. 29일 그대로 머물렀다. 송효남(宋孝男)에게 술과 안주를 들려 나옹(懶翁)주D-001 화가의 무덤에 올리게 하니 여인이 시를 지어 애도하므로, 나도 이어 이 시에 화답하였다. 3월 1일 그대로 머물렀다. 사(使)를 모시고 정전(井田)과 기자정(箕子井)에 가 보았다. 2일 그대로 머물렀다. 오늘은 방백 어머님의 생신이다. 나는 당(堂)에 올라가 잔을 드리고 시 두 수를 지어 축하하니, 최동고(崔東皐 동고는 최립의 호)가 이에 화답하였다. 3일 평양을 떠나 순안(順安)에서 묵었다. 4일 숙천(肅川)에 도착하였다. 도착하기도 전에 부민(府民) 상하 남녀가 길을 막으며 부사(府使) 윤삼빙(尹三聘)의 유임을 호소하였다. 사는 나와 연숙을 불러 백성의 뜻을 막을 수 없다는 것으로 그의 거류(去留)에 대해 계품(啓稟)할 것을 의논하였다. 5일 안주(安州)에 도착하였다. 6일 그대로 머물렀다. 7일 가산(嘉山)에 당도하였다. 8일 납청정(納淸亭)에서 잠깐 쉬고 저물녘에 정주(定州)에 도착하였다. 9일 머물렀다. 동지사(冬至使) 신설(申渫)·윤양(尹暘)과 서장관 최현(崔晛)이 중국 황제의 칙서를 가지고 왔으므로 사(使) 이하는 교외에 나가 마중하였다. 관(館)에 이르러 사는 서장관을 만나 보았다. 10일 동지사 일행과 이별하고 떠나 운흥(雲興)에서 점심을 먹고 저녁에 선천(宣川)에 당도하였다. 홍로(洪老)가 와서 인사하였다. 11일 차연(車輦)에 도착하였다. 병사(兵使) 유형(柳珩)이 찾아와 인사하고 조용히 시를 구하였다. 여인(汝仁)이 칠언율(七言律) 30운(韻)을 지어 주었고 나도 이에 차운(次韻)하였다. 12일 양책(良策)에서 묵었다. 13일 그대로 머물렀다. 14일 소관(所串)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의주(義州)에 도착하여 이아(二衙)에서 서경(西坰)주D-002을 뵈었다. 사는 향소청(鄕所廳)에 숙소를 정하고 나는 관비(官婢) 돈이(頓伊)의 집에 정하였다. 저녁에 김숙도(金叔度)와 조이숙(趙怡叔)주D-03이 찾아왔다. 밤에 양자점(梁子漸)이 찾아와 이야기하였다. 15일 부윤(府尹) 한공(韓公)을 상아(上衙)에서 뵈었다. 공은 내 형님의 친구이다. 그의 아들 언(?)과 섭(●)은 모두 나의 친구인지라 종일토록 술 마시고 읊었는데, 판관(判官) 남이흥(南以興)도 함께 있었다. 16일 이사(二使)가 취승정(聚勝亭)에서 만났다. 나와 연숙 그리고 김숙도·조이숙 두 종사관도 함께 참여하였다. 17일 어사(御史) 윤명익(尹鳴益)이 당도하여 찾아와 밤새도록 조용히 이야기하였다. 18일 대윤(大尹 : 부윤(府尹) 한공(韓公)을 높여 가리킴)과 명익(鳴益)이 아헌(衙軒)에서 바둑을 두었다. 나도 가서 구경하고 밤중에야 돌아왔다. 19일 명익이 나의 숙소에 왔는데, 대윤이 바둑판을 들고와서 종일토록 바둑을 두었다. 저녁에 이숙과 자점이 와서 이야기하였다. 20일 윤명익이 떠났다. 21일 요동의 백패(白牌)는 웅 대행(熊大行)이 이미 산해관(山海關)을 통과하였고, 유태감(劉太監)도 북경(北京)을 떠났다고 하는 소식을 전해왔다. 22일 연위사(延慰使) 신현옹(申玄翁 현옹은 흠(欽)의 호)이 도착하여 취승정에 숙소를 정하였으므로 가서 뵈었다. 23일 사를 모시고 서경(西坰)의 숙소에서 연위사와 만났다. 24일 도사연위사(道司延慰使) 홍휘세(洪輝世 휘세는 홍서봉(洪瑞鳳)의 자)가 도착하였다. 25일 웅사(熊使) 백패가 지나갔다. 26일 현옹과 학곡(鶴谷 : 홍서봉의 호)이 나의 숙소에서 만났다. 자점도 함께 하였다. 27일 이숙과 함께 숙도의 병문안을 갔다. 28일 방백(方伯)이 도착하였다. 29일 방백이 나의 숙소로 찾아왔다. 대부(大府 : 부윤을 가리킴)는 간단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그믐날이었으므로 뒷동산에 올라 홀로 앉아 송춘시(送春詩)를 지었다. 붉은 꽃잎은 비오듯이 지고, 그윽한 새소리는 영롱하게 들려오니 고향 생각에 서글펐다. 4월 1일 문례관(問禮官) 이성(李惺)이 도착하였다. 2일 현옹이 여러 번 찾아와 채호영(彩毫詠)과 춘영(春詠)의 시를 보자고 하였다. 아마 여인(汝仁)이 이야기한 것 같다. 마지 못해 내 놓으니 현옹이 소매 속에 넣어 가지고 가버렸다. 3일 서경이 취승정에서 이의(肄儀 사신을 맞는 의식을 연습함)를 행하므로 사가 참관하러 가므로 우리 두사람도 따라갔다. 4일 휘세·연숙·자성·이숙과 정주 목사(定州牧使) 윤차야(尹次野)와 영유(永柔) 홍효숙(洪孝淑)이 모두 내 숙소에 모여 종일토록 술마시고 시를 읊었다. 5일 차오산(車五山 오산은 차천로(車天輅)의 호)의 숙소에서 휘세와 만났다. 자점도 함께 하였다. 6일 다시 이의(肄儀)를 거행하였다. 7일 웅사(熊使)가 진강(鎭江)에 도착하였다. 양행(兩行 : 유태감 원접사와 웅 대행 원접사 일행)은 모든 관원을 대동하고 교외(郊外)에서 칙서를 맞는 예를 행하였다. 성으로 돌아오는데, 구경하는 남녀로 성곽이 꽉찰 지경이었다. 여인(汝仁)은 내 곁에 있다가 길가의 여자들 중에 부(府)의 창기(娼妓)들이 모두 나와 줄지어 꿇어 앉아 인사하는 것을 보았다. 여인(汝仁)이 헤어보니 내방에 들어온 일이 있던 자가 12명이었다. 나는 시를 지어 자조(自嘲)하였다. 시의 끝 구절에, 남쪽 길가 열두 여인/十二金釵南陌上 일시에 고개 돌려 봄바람에 웃는다/一時回首笑春風 하였는데, 여인은 풍류(風流)는 끊어지지 않고 바로 이 사람에게 있다고 크게 칭찬하였다. 8일 웅 대행이 강을 건넜다. 교외로 나가 마중하여 관(館)에 들어와 예를 행하고는 물러났다. 9일 웅사가 떠나고 서경 일행이 따라 갔다. 나는 휘세와 오산의 숙소에 가서 그가 정인(情人)과 이별하는 것을 보았다. 자점도 몹시 슬퍼하면서 떠나갔다. 현옹이 상아(上衙)에 있어 휘세와 함께 가 뵈었다. 조금 뒤에 대윤(大尹)이 소관(所串)에서 돌아와 간단히 한잔하고 헤어졌다. 10일 사는 이아(二衙)로 숙소를 옮겼고, 나도 향청(鄕廳)으로 옮겼다. 11일 인백(仁伯)이 창성(昌城)에서 찾아와 함께 머물렀다. 12일 인백을 데리고 연숙에게 가서 밤중까지 이야기하다가 돌아왔다. 13일 요동 백패는 유사(劉使)가 지난 6일에 산해관을 통과하였다고 통보하였다. 14일 현옹이 찾아 오셨다. 당신이 지은 내 문집의 서(序)를 내보였다. 그런데 칭찬이 너무 지나쳐 부끄러워 어찌할 바를 몰랐다. 15일 휘세와 함께 현옹을 방문하였다. 조금 뒤 사가 찾아와 마침내 연숙과 대윤을 불러 술자리를 벌이고 밤이 되어서야 헤어졌다. 16일 표당(表堂)을 요동으로 보내 유사(劉使)를 만나 원역(員役 : 수행원)의 수효를 줄이고 사정을 탐지하여 돌아오게 하였다. 17일 밤중에 갑자기 여인(汝仁)의 숙소에 가 오랜 시간 이야기하다 돌아왔다. 18일 요동의 백패는 유사가 16일 요동에 도착하였다고 통보하였다. 백패는 진강(鎭江)에 도착하는 것을 맞이한 뒤에 다시 출발한다고 한다. 19일 문례관(問禮官) 오익(吳翊)이 도착하였다. 20일 방백이 돌아왔다. 21일 표헌이 돌아와, "중국의 사신은 밤낮없이 여정을 재촉하여 이미 요양(遼陽)에 도착하였고 18일 아침 아문(衙門)에 가서 만나려 하였으나 아문이 매우 깊고 은밀하여 바로 만날 수 없었고, 겨우 이름을 통하니 사(使)가 대청에 앉아 불러 들였는데, 재배(再拜)하고 말하려 하니, '오늘 진강으로 출발하여 24일에는 강을 건널 것이니 너는 물러가라'하고는 좌우에서 붙들어 내어 한마디도 못하였다." 하고 또, 문하관(門下官) 전강(田康)과 소당(小? 내시(內侍)) 왕진(王進)이 제일 입김이 세어 헌이 찾아가 절하고, "결호(結好 : 좋은 의의를 맺자는 뜻)하자."하였더니, 전강이, "원역(員役)에 대해서는 어른께서 이미 다 알고 스스로 줄였으니 네 말을 다시 들어볼 것이 없으며, 이번 길의 은폐(銀幣)의 수효는 엄만(嚴萬) 때보다 한 등 더해야 하니 설득하려 애쓰지 말라."고 하였다 한다. 22일 이의(肄儀)를 행하였다. 23일 교외에 나가 예의를 행하였다. 오정 때쯤 유사(劉使)는 진강에 도착하고, 저물녘에 왕진과 전강이 먼저 관(館)에 도착하였다. 사(使)가 대문에서 맞아 술을 따르며 정성껏 접대하였다. 백패가 비로소 왔다. 원역은 소당(小?) 3명, 상공(相公) 16명, 근수(?隨) 12명, 조례(?隷), 취수(吹手), 주역(廚役) 등 모두 1백 20여 명이었다. 24일 아침에 유사가 강을 건넜다. 일행은 교외에서 마중하였다. 관(館)에 들어가 의식 절차를 마치고 유사가 방에 들어가니 아문은 엄숙하고 조용하여 밖에 나와 번거롭게 구는 자는 하나도 없었다. 얼마 있다가 대청에 나와 앉아 원접사 이하의 예(禮)를 받고는 바로 들어가 버렸다. 연위사가 잔치하기를 청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25일 그대로 머물렀다. 전강이 표헌과 정득 두 대역(大譯)을 불러 은폐의 수를 의논하였는데, 너무나 많아 사(使)는 종일 힘껏 싸웠으나 겨우 그들이 말한 액수의 반을 감했다. 그러나 엄만이 왔을 때에 비하면 두 배나 되었다. 26일 비로소 잔치를 받았다. 유사는 우리들을 매우 공손하게 대하였고 하인들을 엄히 다스려서 밖에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은폐의 일만 아니면야 허·위·황·왕(許魏黃王 : 일찍이 왔다간 청백한 사신 네 사람을 가리킴)과 별로 차가 없을 것이다. 저물녘에 현옹은 먼저 떠났다. 27일 그대로 머물렀다. 유사가 용만관(龍灣館)과 영조(迎詔)의 시 두 수를 내주어 바로 판에 새겨 걸었다. 28일 그대로 머물렀다. 방백(方伯)은 먼저 떠났다. 29일 유사가 비로소 출발하였다. 소관에서 점심먹고 양책에서 묵었다. 5월 1일 차연에서 점심을 먹고 임반(林畔)에서 묵었다. 2일 그대로 머물렀다. 3일 운흥(雲興)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정주에 닿았다. 승지(承旨) 홍준(洪遵)이 현관례(見官禮)를 행하였다. 4일 그대로 머물렀다. 5일 연회를 받았다. 6일 그대로 머물렀다. 7일 납청정(納淸亭)에서 점심을 먹고 가산에서 묵었다. 유사가 지은 시에 대해 화답이 없다고 표헌에게 물어오기에, 황공하여 감히 화답하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8일 공강정(拱江亭)에서 점심을 들고 저물녘에 안주에 도착하였다. 9일 연위사 오덕령(吳德齡)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사(使)가 이번 길에 화답하는 시 12편을 유사에게 드렸다. 유사는 이 시를 보고 나서 바로 데리고 온 감생(監生) 서명(徐明)을 불러 사에게 사례하게 하였다. 명은 거인(擧人 향시에 합격한 사람)출신으로 소흥부(紹興府) 산음현(山陰縣) 사람인데, 뽑혀서 북경에 와 있는 것을 유사가 주청해서 데리고 왔다. 문서와 예의에 관한 일은 모두 그가 주관하였다. 저녁에 연회를 받았다. 10일 아침에 유사(劉使)는 사(使)와 우리 두 사람(허균과 유연숙)에게 예물을 보냈다. 저사(紵絲), 향선(香扇), 서책 등 물건이 매우 푸짐하였다. 저물녘에 숙녕에 당도하였다. 서경이 찾아와 말하기를, "북경에 있을 때 서자(庶子) 도망령(陶望齡)을 만났다. 그는 궁유(宮諭) 주지번(朱之蕃)주D-004을 만난 일이 있는데, 주(朱)는 '조선에 허모(許某)라는 사람이 있는데, 그 누이의 시는 천하에 으뜸간다.'고 하더라며, '네가 그 나라에 가면 꼭 그 시집을 구해 가지고 오라.'고 하였는데, 도감(都監)이 바로 그 사람이구료. 시집이 있는가?"하고 물었다. 나는 바로 보따리에서 한 부를 꺼내주었다. 11일 순안에서 묵었다. 전강과 양유토(楊有土)는 나와 동갑이라고 찾아왔다. 서 상공(徐相公)도 뒤따라 와서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유토는 집이 북경 순성문(順成門) 안에 있으며 할아버지의 음덕으로 금의서창자사(錦衣西廠刺事)가 되었고 관은 공봉내정직(供奉內庭職)인데, 이것은 부천호(副千戶)에 해당한다고 하였다. 내가(內家 : 황제)를 뵌 일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황제께서 나오시지 않은 지 16년이나 되었으니 유사도 자주 뵙지는 못한다."고 하였다. 서 상공은, "난설시집(蘭雪詩集)을 유공(劉公)도 원하고 있고, 나도 한 부 청합니다." 고 하였다. 나는 남은 한 권을 꺼내 유사에게 전하도록 하고 서 상공에게는 서울에 가서 주기로 하였다. 전강과 양유토도 청하므로 모두 서울 가서 주기로 하였다. 12일 순안을 출발하였다. 웅사(熊使)와 유사가 길에서 만나 인사하고 평양에 도착하였다. 저녁에 서(徐)·전(田)·양(楊)이 예물을 보내왔는데, 모두 푸짐하였다. 나는 방백(方伯)에게 청하여 인삼과 종이와 활과 칼을 주어 답하였다. 13일 연위사 최관(崔瓘)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저녁에 전강과 양유토가 찾아와 이야기하였다. 14일 사가 연회할 것을 청하였더니, 허락하지 않았다. 유사는 기자묘(箕子墓)에 참배하고는 은(銀) 20냥을 내어 서윤(庶尹) 이홍주(李弘?)에게 주면서 사우(祀宇)를 중수하라고 하였다. 15일 부자묘(夫子廟 공자를 모신 사당)에 참배하고 소나무를 심게 하였다. 또 은 20냥을 내어 중수에 보태게 하였다. 16일 비로소 연회를 받았다. 서·전·양이 나의 숙소로 와서 간단하게 한잔하고 갔다. 천추사(千秋使) 조공 존세(趙公存世)와 서장관 유혁(柳?)이 와서 만났다. 17일 서경(西京)을 떠나 중화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황주에 당도하였다. 전 상공(田相公)이 찾아왔었다. 18일 연위사 박이장(朴而章)과 황해 감사(黃海監司) 이경함(李慶涵)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성절사(聖節使) 유공 몽인(柳公夢寅)과 서장관 김효경(金孝敬)이 도착하여 서로 만났다. 19일 연회를 받았다. 서울 집에서 종(奴)이 왔다. 내가 관과(館課)에 세 번 일등하여 품계가 올랐다 한다. 사는 문서를 올려 계속 대동하기를 청했다. 저녁에 서·전·양 삼공은 내가 승진하였다고 찾아와 축하하고 괘홍(掛紅)하였다. 나는 국상중이라고 괘홍은 사양하였다. 20일 봉산에서 묵었다. 21일 검수에서 점심을 먹고 저물녘에 용청에 도착하여 묵었다. 저녁에 유사가 옥권자(玉圈子) 1매(枚)와 옥잠(玉簪) 한 벌을 보내왔다. 저녁에 전 상공이 찾아 왔다. 22일 안성에서 점심을 먹고 평산에서 묵었다. 23일 낮에 오조천(吾助川)에서 쉬고 점심은 금교에서 먹고 저물녘에 송경(松京)에 도착하였다. 24일 저녁에 양상공(楊相公)이 찾아와 이야기하였다. 조서개독례(詔書開讀禮)에 대해 은근히 물어 오기에 나는 예전에는 폐백(幣帛)이 없었다고 대답하니, 양은, "중국왕부(中國王府)의 예(例)로는 개독례가 있는데 은 수천 냥에 해당한다." 고 하였다. 나는 알지 못한다고 대답하였다. 25일 연위사 민몽룡(閔夢龍), 유수(劉守) 한효순(韓孝純), 감사(監司) 김신원(金信元)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유사(劉使)는 개독례에 대해 알아오라고 명령하였다. 사(使)는 관리 여러 명을 모아 놓고 연구해 보았으나 하는 수 없이 유연숙을 서울로 먼저 보내 임금의 뜻을 받아 오게 하였다. 26일 유사의 생일이라고 임금께서는 문안사(問安使) 여유길(呂裕吉)을 보내고 명삼(明蔘) 백근과 은 천냥, 그리고 여러 가지 물품을 이에 어울릴 만큼 보내셨다. 유사는 매우 기뻐하였다. 저녁에 서상공이 내 숙소로 와서 백락천집(白樂天集)을 주었다. 28일 유사는 임금께 답례를 푸짐하게 하였다. 망단(?緞), 서금(瑞錦), 소옥대(素玉帶), 옥배(玉盃), 아각선인(牙刻仙人) 등 이었다. 전 상공의 말로는 3백 금(金)에 해당하는 값어치라 한다. 27일 연숙이 돌아왔다. 저녁에 전(田)과 양(楊)이 내 숙소에 와서 즐겁게 이야기하다 돌아갔다. 29일 유사가 연회를 받기로 하였다. 개독례(開讀禮)에 3천 금이 정해졌기 때문이다. 그믐날 새벽에 출발하여 오목(梧木)에서 잠깐 쉬고 점심은 마산에서 먹고 저물녘에 벽제에 도착하였다. 6월 1일 좌의정 오성(鰲城 이항복(李恒福)의 봉호)과 연위사 조정(趙挺) 및 도승지(都承旨) 김상용(金尙容)이 현관례를 행하였다. 낮에 연회를 받았다. 2일 새벽에 교외에 이르자 나는 복명(復命)하고 조서를 받들고 창덕궁(昌德宮)에 들어가서 조서를 선포하였다. 새로 지은 궁궐은 넓었는데, 건물과 섬돌[階陛]이 숙연하여 절도가 있었다. 넓은 마당에는 법가(法駕 임금이 거둥 때 쓰는 수레)가 늘어서고 헌악(軒樂)이 차례로 연주되며 백관의 환패(環?)는 쟁그렁거리는 것이 태평스럽던 옛날 모습 그대로였다. 먼저 임금[先朝] 생각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나는 승진을 하였지만 아문(衙門)에 문안하지 못했는데, 유사는 양 상공을 보내 축하하고 홍저사(紅紵絲), 녹화주(綠花紬), 홍리(紅履), 소화은대(素花銀帶), 향옥배(香玉盃)와 사반불(砂磻佛) 1개, 금강경(金剛經) 1부, 전지(?紙) 백 장을 보내왔다. 나는 상께 아뢰고 찾아가 사례할 것을 청하였더니 상께서 허락하셨다. 곧 관(館)으로 가서 보내준 것에 대하여 사례하고 돌아왔다. 유사(劉使)는 문서를 상께 올려 일행에게 상관(賞官 상으로 관직을 올려줌)할 것을 청하였다. 상께서는 사(使)를 한 자급(資級)을 올려 정헌(正憲)에 제수하고 나는 실직(實職)은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使)에 제수하고, 연숙은 부응교(副應敎)에 승진 제수하고 표당(表堂 표헌을 가리킴)은 실직에 붙이고, 정당(鄭堂 정득을 가리킴)과 이언겸은 각각 한 급이 더해졌다. 사는 이조 정랑(吏曹正郞) 정광성(鄭廣成)을 내 후임으로 하고 정원(政院)에서는 나를 도사전위사(都司餞慰使)로 임명하였다. 사는 즉시 계(啓)를 올려 일로(一路)가 번거롭고 시끄러우니 종사관 한 명을 줄이고 허모와 동행할 것을 청하였다. 상께서는 이를 허락하셨다. 정이조(鄭吏曹 : 정광성을 가리킴)는 가지 않았다. 22일 유사가 출발하여 귀국 길에 올랐다. 나도 뒤따라 갔다. 저녁에 벽제에서 묵었다. 23일 연회를 받고, 마산에서 묵었다. 24일 개성에 도착하여 연회를 받았다. 여기서부터 일행은 모두 흰 옷을 입고 자신이 데리고 온 관원은 모두 검정옷에 각대(角帶)를 하고 연회에는 음악을 연주하지 않게 하였다. 25일 금교와 오조천을 지나 평산에서 묵었다. 26일 안성을 지나 용천에서 묵었다. 27일 검수를 지나 봉산에 도착하였다. 28일 황주에 이르러 연회를 받았다. 서(徐)·전(田)·양(楊) 삼공(三公)이 내 숙소에서 조촐한 술자리를 가졌다. 이야기 끝에 나는 중국 만력(萬曆 명 신종의 연호)의 재상 중에 누가 좋고 나쁜지를 물었다. 양은, "장강릉(張江陵)은 권리를 좋아하긴 하나 그 재능이 아주 크다. 그가 재상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때 백관들은 두려워하고 조심하면서 법을 준수하였고, 이웃 오랑캐[四夷]들이 복종하여 천하가 번영하였다. 그 뒤 장나(張羅)와 신시행(申時行)은 총애를 받고 권력을 잡았다고는 하나 모두 이에 미치지 못한다. 마자강(馬自剛)은 강직하고 허국(許國)은 청렴하고 신중한 사람이고 왕석작(王錫爵)은 엄하고 의연한 사람이고 왕가병(王家屛)과 장위(張位)는 모두 괜찮은 사람인데, 조지고(趙志皐)는 탐욕스럽다는 평이 있으며 심일관(沈一貫)은 녹(祿)을 지키느라 위에 아첨하니 쓸 만하지 못하다. 현재의 주갱(朱●)도 올바른 사람이다. 이정기(李廷機)는 꼼꼼하기만 했지 대절(大節)이 없고 섭상고(葉向高)는 왕의 총애를 받고 있다. 이 밖에는 모두 평범하다." 고 하였다. 내가 또 부원대신(部院大臣)에 대해 물으니 서(徐)와 양(楊)이, "양박(楊博)·장학안(張學顔)·오태(吳兌) 세 사람은 초기에 명망이 있었고, 근년에는 이세달(李世達)과 손비양(孫丕揚), 박(博 양박을 가리킴)의 아들 준민(俊民) 등이 좀 말할 만하다. 증성오(曾省吾)란 사람은 재략(才略)이 좀 있긴 하나 그가 장강릉(張江陵)에게 붙었기 때문에 남들이 멸시한다. 양외(楊巍)는 젊어서는 명망이 있었으나 만년에는 쓸모가 없게 되었다." 고 말하고는, 다시, "치사(致仕)한 예부 상서(禮部尙書) 육수성(陸樹聲)은 금년에 백 살인데 성명(性命)을 다스리는 학문을 하여 외모가 아직도 노쇠하지 않았다." 고 하였다. 나는 다시 문장은 누가 제일이냐고 물었더니 서는, "태창(太倉 왕세정(王世貞))과 신안(新安 이반룡(李攀龍))이 가버린 뒤에 나라 안에 문장 맡을 사람이 없다. 적수(赤水) 도융(屠隆)과 규양(葵陽) 황홍헌(黃洪憲)이 동남쪽에서 이름을 날리고 이 밖에 낭중(郞中) 사조제(謝肇?)와 세마(洗馬) 구대상(區大相) 및 편수(編修) 고기원(顧起元)이 그 뒤로 우수한 자이다."하고서는, 또 "전에 태사(太史) 황휘(黃輝)를 따라 안남(安南 : 인도지나 방면)에 사신으로 갔었는데 그 나라에도 글을 아는 사람이 매우 많으나 대개가 천박하여 귀국(貴國)의 시처럼 돈후하고 전려(典麗)한 데는 미치지를 못한다. 또한 인심이 사나워 도처에서 불화가 생기므로 사신들은 번번이 병사를 포진하여 스스로 지켰다. 그 나라 빈상(?相 빈객을 안내하는 벼슬아치)도 모두 엄하게 경계하며 대하였다. 풍토(風土)가 매우 나빠 장독(?毒 산천의 독기)에 걸리면 번번이 구토와 설사를 하였다. 뱀과 벌레가 많아 중국과 비슷한 귀국과는 딴판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준 선물은 모두 금주(金珠), 서향(犀香), 취우(翠羽), 명박(明珀) 등이었다. 귀국은 보배는 없으나 인재가 바로 보배이다." 고 하니, 전 상공(田相公)이 웃으면서, "명삼(明蔘)이 남쪽 나라에 가면, 한쪽으로도 큰 구슬 하나를 바꿀 터인데 어떻게 보배가 전연 없다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전은 또, "젊었을 때 도독(都督) 뇌여림(雷汝霖)을 따라 서천국(西天國 인도)에 갔는데, 가락관(嘉?關)에서 출발하여 서번(西番)관 토로번(土魯番)을 지나 곤륜산(崑崙山) 밑으로 해서 갔다. 그 산을 바라보니 높고 크기가 마치 하늘의 반은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서천국에 도착하니 장안(長安)에서 1만 8천 리였다. 5개월이 걸려서야 도착하였는데 그 나라의 서울은 사위성(舍衛城)이었다. 그 나라 왕은 백반(白飯 석존의 숙부)의 자손이며 고관들은 모두 승복(僧服)을 입고 있었다. 한문자(漢文字)를 쓰지 않으며 기후는 중국과 비슷하나 겨울에도 춥지 않았다. 금이나 옥, 구슬 등이 많으며 사람들이 서로 해치지 않는 참으로 평화로운 나라였다. 그곳 사람들도 인삼을 귀하게 여겨 삼 한 냥 값이 금 한 냥이었다. 주는 선물이 매우 풍성하였는데, 그곳 왕을 세우고 2개월을 머물다가 돌아왔다. 나는 이로 인해 집안을 일으켰는데 뇌 도독은 금과 구슬들을 많이 받았다고 탄핵을 받아 선물받는 것을 몰수하라는 왕명이 있어 황금 3천 냥과 명주(明珠) 열 말, 화완포(火浣布) 백 필을 관(官)에 납부 하였으나 뇌 도독의 집에서 미리 딴 곳에 숨겨 놓은 것이 또한 금 3천 냥과 명주 스무 말이었다. 이로 인해 관직을 빼았겼다 해도 북경의 부자가 되었다."고 하였고, 양은, "이러하기 때문에 내관(內官)도 서천(西天)의 봉사(奉使)로 가기를 원하게 되었다. 계묘년에 그 나라 세자(世子)를 책봉하는데 초리태감(初鯉太監)은 3만 금을 바치고 가서 몇 십만 금을 얻어 가지고 왔다."고 말하였다. 서는, "이번에 유사가 귀국에서 얻은 것도 7만 금이니 귀국 백성의 고혈(膏血)이 말랐을 것이다."고 하였다. 29일 평양에 도착하였다. 7월 1일 비가 내려 머물렀다. 나는 순안으로 먼저 떠났다. 2일 순안에서 묵었다. 나는 먼저 숙천으로 떠났다 3일 숙천에서 묵었다. 저녁에 연숙과 함께 세 상공[三相公]의 숙소를 차례로 방문하였다. 전과 양은 한 처소에 있어 술자리를 마련해 주고 물러났다. 서의 숙소는 별관이므로 가서 술 한잔 나누기를 청하였더니 기일(忌日)이라고 사양하였다. 4일 안주에서 묵었다. 5일 가산에서 묵었다. 6일 정주에 도착하였다. 나는 먼저 운흥에 가서 묵었다. 7일 먼저 임반에 도착하였다. 저물녘에 유사(劉使)가 도착하였다. 8일 차연에서 점심을 먹고 양책에 이르렀다. 나는 먼저 소관에 가서 묵었다. 9일 유사가 의주에 도착하였다. 전위사(餞慰使) 이필영(李必榮)·정사신(鄭思愼)과 만나고 돈사(頓舍)에 숙소를 정하였다. 평사(評事) 한겸(韓謙)이 찾아와서 인사하였다. 10일 연회를 받았다. 11일 유사는 사(使), 방백(方伯), 부윤(府尹)과 우리 두 사람(허균과 유연숙)을 초대하여 연회를 베풀었는데, 매우 풍성하고 정성스러웠다. 저단(紵段), 향라(香羅) 등을 차등 있게 선물하였다. 연회가 파한 뒤에 사 이하는 그 자리에 남아 16상공들을 위해 송별연 할 것을 청하였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왔다. 서 상공이 나와 이별하러 찾아와 즐겁게 술을 마시고 돌아갔다. 12일 새벽녘에 전과 양이 나의 숙소로 찾아와 악수를 한 다음 이별하고 돌아갔다. 일찍 강을 건너 역관 장사원(張士元)과 의주 역학(義州譯學) 박인희(朴燐禧)를 시켜 도사(都司) 왕급(王汲)에게 연회를 마련하고 기다리게 하였더니 유사는 시간이 없어 참석할 수 없다고 연회를 중지할 것을 청하므로 곧 의주 판관 남이흥(南以興)을 시켜 은(銀)으로 환산하여 2냥을 보내었다. 중강(中江)으로 돌아오니 전(田)과 양(楊)은 먼저 배에 올라 있었다. 서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좀 있다 서(徐)도 왔다. 이별할 때에 서는 눈물을 닦으며 괴롭게 하직하고 전과 양도 섭섭한 모습으로 떠나갔다. 오정 때쯤 연청(宴廳)에 도착하였더니 유사도 도착하였다. 술을 세 순배 돌리고 나서 우리 두 사람을 불러들여 각각 술 한 순배씩 돌리고는 일어나 수레에 타고서 악수를 하고 이별하는데 매우 정중하고 다정하게 하고 떠났다. 저녁에 숙소로 돌아왔다. 13일 보고서를 올렸다. 14일 비가 와서 그대로 머물렀다. 15일 연숙과 함께 먼저 출발하였다. 사는 유사가 어전에 드리는 예물첩(禮物帖)을 나에게 주며 궐 안에 갖다드리게 하였다. 소관을 경유하여 양책에서 묵었다. 16일 차연과 임반을 지나 운흥에서 묵었다. 17일 정주를 지나 가산에서 묵었다. 18일 안주에 도착하였다. 연숙은 취하여 그대로 머물렀고 나는 먼저 숙녕에 도착하여 주수(主?) 윤신수(尹莘?)와 금향정(錦香亭)에 앉아 달이 뜨기를 기다렸다. 밤이 되어도 연숙은 오지 않았다. 19일 순안을 지나 평양에 도착하여 연광정(練光亭)에서 묵었다. 한밤중 달빛은 대낮과 같고 물결은 금빛으로 출렁거리는데, 난간에 기대어 서니 허전하여 마치 무엇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20일 배 위에서 방백과 작별하고 중화를 경유하여 황주에서 묵었다. 21일 봉산과 검수를 지나 용천에서 묵었다. 22일 안성과 평산을 경유하여 금교에서 묵었다. 23일 개성을 지나서 마산에서 묵었다. 24일 벽제를 지나 서울에 다다라서 서쪽 성문 밖 민간 집에서 묵었다. 25일 아침 일찍 복명하고 유사가 어전에 드리는 예물을 정원(政院)에 전달하였다. 예방(禮房) 유공량(柳公亮)이 일일이 수효를 점검하고 받아들였다. 나는 물러나와 형님을 뵈었다. 이번 길은 마침 국상(國喪) 중이어서 풍악을 금하는 때라 연도(沿道)의 주군(州郡)마다 환영하고 전송하며 오래 지체하는 일이 없었고 풍악과 여색[聲色]으로 귀를 어지럽히거나 정을 나누는 일이 없었으므로 여관(旅館)은 한가하고 조용하여 한묵(翰墨)만을 일삼았다. 그러므로 지은 시가 4백여 수나 되었으니 참으로 많다 할 것이다. [주 D-001] 나옹(懶翁) : 이정(李楨)의 호. 조선 선조 초의 화가, 자는 공간(公幹), 나재(懶齋)·나와(懶窩)·설악(雪嶽)이라고도 하였다. 본관은 전주, 증조부 때부터 화가의 가정으로 10세에 이미 이름이 알려졌고 13세에 장안사(長安寺)의 벽화를 그려 절찬을 받았다. 과음으로 30세에 요절했다. 특히 산수화·인물화를 잘 그렸고, 글씨도 잘썼다.《국역성소부부고》Ⅱ집 '이정애사(李楨哀辭)' 참조. [주 D-002] 서경(西坰) : 유근(柳根)의 호. 자는 회부(晦夫), 본관은 진주(晉州). 이황(李滉)의 문인.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호종하고 사은부사로 명 나라에 다녀오고 호종공신으로 진원부원군(晉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정묘호란 때 강화로 왕을 호종하던 중 통진(通津)에서 죽었음. 괴산의 화암(花巖) 서원에 제향함. 시호는 문정(文靖). 저서에《서경집(西坰集)》이 있음. [주 D-03] 조이숙(趙怡叔) : 이숙(怡叔)은 조희일(趙希逸)의 자. 호는 죽음(竹陰)·팔봉(八峯). 본관은 임천(林川). 명 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이 오자 예조 좌랑에 특진 김상헌(金尙憲), 유근(柳根) 등과 접반사(接伴使)가 되어 시문으로 찬탄을 받았다. 1627년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왕을 강화에 호종, 뒤에 예조 참판으로 접반사가 되어 모문룡(毛文龍)을 맞았다. 서화에 뛰어났고 시문에 능했다. [주 D-004] 주지번(朱之蕃) : 명(明) 나라 금릉(金陵) 사람. 자는 원개(元介), 호는 난우(蘭?). 서화에 능하였다. 이부 시랑(吏部侍郞) 때 조선에 사신으로 나왔을 때 뇌물을 모두 물리쳤다. 조선 사람들이 글씨를 청하며 초피(貂皮)와 인삼을 선물하자, 그것으로 명화(名?)·고기(古器)를 사가지고 돌아갔다. 저서에 《봉사고(奉使稿)》가 있다. [주 D-005] 헌악(軒樂) : 종(鍾)·경(磬)·고(鼓) 등 타악기를 시렁[架]에 매달고 현악기와 함께 연주하는 음악으로서 대례(大禮)나 대제(大祭) 때에 사용한다. 헌가악(軒架樂)이라고도 함. . ■성소부부고 제22권 설부 1 (說部一) 성옹지소록 상(惺翁識小錄上) 우리나라의 풍속이 문과의 장원은 중시하지 않고, 사마시(司馬試 진사시의 별칭)의 장원을 중시한다. 사마시는 문장의 고하(高下)를 따지지 않고 1∼2등 10여 명을 뽑으며 인물을 가려서 하기 때문에 한번 방(榜)에 들면 종신토록 공경을 받는다. 본조(本朝)의 이석형(李石亨)·배맹후(裵孟厚)는 생원시(生員試)와 진사시(進士試)에서 모두 장원하였다. 김모재(金慕齋)가 이를 흠모하여 생원 진사 두 시험에 응시하였다. 모두 잘해서 다 장원하게 되었으나 고관(考官)이 한쪽 시험을 깎아서 둘째로 만들었으므로 마음으로 항상 분하게 여겼다. 그후 자신이 고관이 되었을 때에 김구(金絿)가 두 시장에서 지은 글이 아울러 1등이었으므로 힘껏 주장하여 양쪽을 다 장원으로 뽑았다 한다. 세묘(世廟 세종(世宗)) 때에 처음으로 독서당(讀書堂)을 설치해서 사가독서(賜暇讀書)케 하여 후일에 크게 임용하려 하였는데 당시에는 산사(山寺)에서 독서하는 경우가 많았다. 최초에는 권채(權採)·신석조(辛碩祖)·남수문(南秀文)이 사가독서하였고, 다음은 성삼문(成三問)·신숙수(申叔舟)·박팽년(朴彭年)이 하였고, 또 다음은 이석형(李石亨)·최항(崔恒)·성간(成侃)·이영서(李永瑞)·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김수온(金守溫)·서거정(徐居正)·이승소(李承召)·강희맹(姜希孟)이 서로 잇따라 하였다. 문묘(文廟 문종) 때에는 홍응(洪應)·홍귀달(洪貴達)·어세겸(魚世謙)·박기년(朴耆年)이 사가독서하였다. 흉년에는 철폐하였고, 이유 없이 사가독서를 시키지 않은 때도 있었다. 성묘(成廟 성종) 때에 이르러 비로소 성현(成俔)·채수(蔡壽)·조위(曺偉)·허침(許琛)·양희지(楊熙止)·권건(權健)·유호인(兪好仁) 등에게 용산사(龍山寺)에서 글을 읽도록 하였다. 이후부터는 결원이 있으면 보충하였고, 동호(東湖)에다 독서당(讀書堂)을 지어 엄연히 한 아문(衙門)이 되었다. 중묘(中廟 중종) 때에는 고과(考科)하는 방법이 매우 엄해져서 잇따라 두 번을 입격(入格)하지 못하면 도태시켰다. 이들에 대한 은사(恩賜)와 특별한 대우가 옥당(玉堂)에 뒤지지 않았는데, 난리가 일어나자 폐지되었다. 금상(今上) 초년에 대신(大臣)과 의논하고 다시 설치하도록 명해서 이이첨(李爾瞻) 등 12명을 선발했으나, 다음해에 흉년이 들어서 우선 정지하였다. 서당(書堂)은 40세가 안 된 사람 중에서 선발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청련(靑蓮) 이후백(李後白)이 처음으로 40세에 뽑혔고, 이이첨은 48세에 뽑혔으니 파격적인 일이다. 당상관(堂上官)으로 사가독서를 한 이는 박민헌(朴民獻)과 이덕형(李德馨)이다. 조사(詔使 중국 사신)의 빈대(?待)는 반드시 당대에서 문망(文望)이 높은 자를 뽑았다. 박원형(朴元亨)과 허종(許琮)은 모두 의표(儀表)와 예모(禮貌)로 중국인에게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박이 방주(芳洲 명 나라 유태(兪泰)의 호)와 화답한 시와 허가 규봉(圭峯 명 나라 동월(董越)의 호)과 화답한 시는 모두 종사관(從事官)으로 수행한 이삼탄(李三灘 이름은 이승소(李承召))과 신삼괴(申三魁 삼괴는 신종호(申從濩)의 호)가 대신 지은 것이었다. 박연성(朴延城)은 세 번 원접사(遠接使)가 되었고, 정호음(鄭湖陰 호음은 정사룡(鄭士龍)의 호)도 세 번 원접사가 되었으나 그중 한 번은 내관(內官 환관)을 접대(接待)한 것이므로 박보다는 영예롭지 못하다. 세 번 종사관(從事官)이 된 사람으로는 이삼탄(李三灘)이고, 나도 세 번이었으나 그중 한 번은 내관(內官)이었다. 그러나 내가 빈대한 유태감(劉太監)은 시를 잘 지어서 창수(唱酬)하는 데 따른 괴로움이 한림(翰林) 과도관(科道官)이 왔을 때보다도 더 심하였으니, 호음(湖陰)이 조용하게 넘긴 것에 비하면 힘이 들었다고 하겠다. 규봉(圭峯)이 조사(詔使)로 왔을 때 허충정(許忠貞 충정은 허종(許琮)의 시호)은 종사관(從事官) 두 사람을 대동하였는데, 한 사람은 삼괴(三魁 신종호(申從濩)의 호)였고, 한 사람은 직장(直長) 박증영(朴曾榮)이었다. 참하관(參下官 7품 이하의 관원)으로서 종사관이 된 것이다. 그후 주지번(朱之蕃)·양유년(梁有年)이 왔을 때에 조이숙(趙怡叔 이숙은 조희일(趙希逸)의 자)은 박사(博士)에서 전적(典籍)으로 뛰어 올라 종사관이 되었으니 또한 은명(恩命)이었다. 조사(詔使)를 빈대(?待)하는 데는 반드시 필찰(筆札)을 담당하는 자가 있었다. 국조(國朝)에서 조신(曺伸)·홍유손(洪裕孫) 같은 사람을 등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종래 제술관(製述官)을 대동한 사람은 없었는데, 임인년(선조 35, 1602년)에 고천준(顧天峻)과 최정건(崔廷健)이 왔을 때에 월사(月沙 이정귀(李廷龜)의 호)는 김현성(金玄成)·차천로(車天輅)·권필(權?) 세 사람을 대동하였고, 병오년(선조 39, 1606년)에 서경(西坰 유근(柳根)의 호)은 다시 김현성과 권필 두 사람을 대동하기를 청하였으나 권은 사퇴하고 김만 수행하였다. 기유년(광해군 1, 1609년)에 서경(西坰)이 또 차천로와 양경우(梁慶遇)를 대동하였는데, 이로부터 규식(規式)이 되었다 한다. 적암(適庵) 조신(曺伸)은 규봉(圭峯)이 왔을 때부터 자양(紫陽)이 왔을때까지 그때마다 전례(典禮)의 임무를 맡아 직무를 잘 처리하였다. 이때에는 아직 한리학관(漢吏學官)이 설치되지 않았었기 때문데 적암(適庵)이 그때마다 의원(醫員)의 직함으로 왕래하였다. 그후 정번(鄭蕃)을 출신이 천하다 하여 과방(科榜)에서 삭제하는 대신 한리학관을 설치하여 그를 처우했다. 이후로는 조사(詔使)가 올 때마다 학관(學官)에게 필찰(筆札)을 맡겼으니, 정번·어숙권(魚叔權)·정화(鄭和)·박지화(朴枝華)·권응인(權應仁) 등이 서로 잇따라 이 일을 맡아 하였다. 지금은 이재영(李再榮)이 도합 네 번이나 이 일을 맡았는데 무리 중에서 가장 민첩하고 총명하여 서경(西坰)이 매우 감탄하였다. 그래서 주지번(朱之蕃)·양유년(梁有年)과 수창한 시는 대부분이 그가 지은 것이라 한다.
9. ■연려실기술 별집 제5권 사대전고(事大典故) 빈사(?使) 대개 조사(詔使)를 접대할 때에는 반드시 필찰(筆札)을 맡은 사람이 있었다. 조신(曺伸)·홍유손(洪裕孫) 같은 사람이다. 제술관(製述官)을 대동하고 가는 일은〈그 전에는〉없었는데, 고천준과 최정건이 왔을 때, 이정귀는 김현성·차천로·권필을 대동하였고 병오년(1606년)에 유근(柳根)은 또 김현성과 권필 두 사람을 데리고 가기를 청하였는데, 권은 사퇴하고 김은 갔다. 기유년(1609년)에 근(根)은 또 차천로와 양경우(梁慶遇)를 대동하였으므로 드디어〈제술관 대동이〉정식(定式)이 되었다고 한다. 조신(曺伸)은 규봉(圭峯 : 중국 사신의 호) 조사(詔使)로 왔을 때부터 자양(紫陽 : 중국 사신의 호)이 왔을 때까지 계속 예(禮:의식(儀式))를 맡아 보는 임무를 담당하였는데, 이때에는 한리학관(漢吏學官)을 설치하지 않았던 까닭으로 신(伸)은 항상 의원(醫員)으로서 왕래하였다. 정번(鄭蕃)이 가문이 천하여 과거에서 제명되면서부터 조정에서는 그를 위해 학관(學官)을 설치하여 번(蕃)을 처우하고, 조사가 왔을 때는 문득 학관으로 필찰(筆札)을 맡아보게 하였다. 번(蕃)과 어숙권(魚叔權)·정화(鄭和)·박지화(朴枝華)·권응인(權應仁)·이재영(李再榮)이 서로 이어갔다. 《지봉유설》
10.■기재사초 하(寄齊史草下) 임진잡사(壬辰雜事) 유지숙이 내전(內殿)을 모시고 영변에서부터 박천(博川)에까지 대가를 뒤쫓아 왔다가 세자가 벌써 강계(江界)에 갔다는 말을 듣고 즉시 아뢰기를, “신은 늙고 몸이 쇠하여 상을 수행할 수 없으므로 세자를 수행하기 바라옵니다.”하니, 상이 그 말을 들어 주었다. 박천군 안의 5리쯤 되는 곳은 나무가 울창하였는데, 한 가닥 오솔길이 열려 있었다. 임진년(1592년) 6월 삼경에 대가가 출발하니, 종관 10여 인이 앞에서 길을 인도하였는데, 무사는 겨우 5∼6명에 불과하였다. 자상이 말을 채찍질하면서 나를 불러 말하기를, “나와 그대는 모두 병관(兵官)이고 또 전위대가 너무 허술하니, 앞서 가야 하지 않겠는가.”하고는, 곧 어마(御馬)를 매질하며 나갔다. 상이 내관(內官)을 돌아보며 누구냐고 물으니, 아무개 아무개 올시다 하였다. 당시에 시위가 고단하고 취약하며 인심이 매우 두려워하는 것이 임진강(臨津江)에서 보다도 더 심하였다. 한리학관(漢吏學官) 이재영(李再榮)이 사자관(寫字官)을 이끌고 중도에서 도망가니, 종행하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계문(啓文)의 규식(規式)을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또 글을 쓸 만한 사람도 없었다. 하루는 내가(박동량:朴東亮 1569∼1635(선조 2∼인조 13) 자상(子常)·대년(大年)과 같이 각각 장계 하나씩을 지었는데, 문세(文勢)와 자체(字體)가 제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 뒤에 자상·대년은 팔에 병이 나 쓰지 못하여 내 혼자 쓴 것이 10여 편이나 되었다. 대년은 오억령(吳億齡)이다.
11.■성소부부고 제2권 시부 2 - 병한잡술(病閑雜述) 전오자시(前五子詩) 석주(石洲)는 말하기를 '5편이 모두 경한(勁悍)하고 침료(沈寥)하다." 하였다. 나(허균)는 세상과 틀어져서 당로(當路)한 공경(公卿)들과는 능히 사귐을 맺지 못하고 오직 박예(薄藝)로써, 문단의 동맹(同盟) 두세 형제들에게 알아줌을 받았다. 그래서 밤낮으로 상종하여 혹은 창수(唱酬)로, 혹은 담론으로 서로들 절차(切磋)하면서, 한가로이 해를 마치곤 한다. 그 사람들은 바로 권필 여장(權?汝章)·이안눌 자민(李安訥子敏)·조위한 지세(趙緯韓持世)와 나의 재종형 허체 자하(許?子賀) 및 소싯적부터 친한 벗 이재영 여인(李再榮汝仁)인데, 이 다섯 사람은 문장이 모두 세상에 드물고 때에 궁한 것도 마찬가지이니, 어찌 문인의 결습(結習)이 으레 곤고한 운명이란 말인가. 드디어 오자시(五子詩)를 지어 이로써 풍아(風雅)를 드날리고, 교정(交情)을 기술하여 때로 보고 스스로 위로하는 바이다. 그 차례는 연대별로 기록하고 지(地)로써 끝마쳤다. 이여인(李汝仁) 나는 작은 이 사내를 사랑하노니/我愛?丈夫 더벅머리 시절부터 글월 빛났네/詞華自童? 백가의 모든 말을 꿰뚫었어라/貫穿百家語 즐기기를 추환처럼 여겼소/嗜之如芻? 서능은 고사 증거 우월하다면/徵事徐陵優 육기는 재주 많아 근심 불렀네/多才陸機患 격발도 빠른 데에 비유 못 되고/擊鉢未喩捿 영설은 게으름을 되려 비웃어/映雪還嗤慢 비단 짜서 봉의 무늬 구김살지고/組錦蹙鳳文 옥을 쪼아 화판을 아로새겼네/琢玉雕花瓣 여번이라 그 값이 절로 높은데/璵?價自高 세속은 천히 보아 조롱하누나/俗賤爭嘲? 시루에 교봉할 이 만난다면/詩壘値交鋒 나는 그대를 위해 좌단하리라/吾爲君左袒 비웃는 자 나라에 가득하더라도/笑者任滿國 그 실상은 속이기 어렵느니/其實自難? 하향(下鄕)에서 의식(衣食)에 시달렸었고/下邑困桂玉 위도엔 근심 한탄 배불렸어라/危途飽憂歎 같은 병 함께 앓는 적막한 길손/寂寞同病客 하늘가에 해도 장차 늦어가는걸/天涯歲將晏 12.■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5 - 논사류 2 인물(人物) - 한국 경번당(景樊堂)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46) 세상에서, 허초당(許草堂 이름은 엽(曄))의 딸 난설헌(蘭雪軒)을 저작랑(著作郞) 김성립(金誠立)의 부인이라 하는데, 약간 재주가 있고 시(詩)에 능하여 《난설헌집(蘭雪軒集)》1권이 세상에 전해지며, 그 서문(序文)은 명(明) 나라의 사신이었던 난우(蘭?) 주지번(朱之蕃)이 썼다. 이 때문에 그 시집(詩集)이 중국에 들어가 온 천하에 알려지게 되었다. 세속에서, "허씨(許氏)가 부군(夫君)의 사랑을 받지 못한 때문에 '인간에서는 어서 김성립과 사별하고, 지하에 가서 영원히 두목지를 따르리.[人間願別金誠立 地下長隨杜牧之]'라는 시를 짓고 이어 호(號)를 경번당이라 하였으니, 이는 번천(樊川 당(唐) 나라 두목(杜牧)의 호)을 사모한 것이다."고 전해지고, 우산(虞山) 전겸익(錢謙益)의 열조시선(列朝詩選), 어양(漁洋) 왕사진(王士?)의 별재집(別裁集), 주죽타(朱竹?)의 명시종(明詩綜)·정지거시화(靜志居詩話), 서당(西堂) 우동(尤?)의 서당잡조(西堂雜俎)등에도 다 허씨를 경번당으로 인정하고 있는데, 천하에서 다 허씨를 경번당으로 알고 있다는 것은 허씨에게 있어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그러므로 우리나라의 선현(先賢)들이 그렇지 않음을 많이 변론하였다. 폐상(廢相) 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의 강산필치(薑山筆?)에, "허씨는 그런 사실이 없는데, 사람들이 억지로 끌어대어 괜히 그런 누명을 받게 된 것이다."해명하였고, 우리 조부의 천애지기서(天涯知己書)에, "담헌(湛軒) 홍대용(洪大容)이 연경(燕京)에 갔을 때 전당(錢塘)의 추루(秋●) 반정균(潘庭筠)이 '귀국(貴國)의 경번당은……어찌 다행이 아니냐?' 묻자 담헌이 '지하에 가서 영원히 두목지를 따르리.'라는 시구를 인용 대답했다." 하였고, 이어 나의 조부 형암공(炯庵公)이, "듣건대, 경번당은 허씨의 자호(自號)가 아니라 천박하고 경솔한 사람들이 침해하고 조롱하는 말이라 하는데, 담헌 같은 이가 어찌 이를 해명하지 않았던가. 만약 난공(蘭公 반정균의 자)이 시화(詩話)를 편찬할 때 담헌의 이 대답을 기재하게 된다면 허씨에게 어찌 매우 불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는데, 내가 그 본집(本集)을 살펴보면 그 곡자시(哭子詩)에 '거년엔 귀여운 딸애를 잃고 금년엔 귀여운 아들을 잃었다.[去年喪愛女 今年喪愛子]' 하였으니, 부군과의 사이가 좋지 않았다는 말은 허위이다. 내가 평소에, "젊은 부녀가 아무리 부군과의 사이가 좋지 않다손 치더라도 어찌 다른 세대의 남자를 사모하여 경번당이라 자호까지 할 수 있겠느냐." 생각하며 세속에 전하는 풍설을 늘 불만스럽게 여겨 오다가 신돈복(辛敦復)의 학산한언(鶴山閑言)에, "난설헌이 경번당이라 자호한 데 대해 세상에서, 두번천(杜樊川)을 사모한 때문이라 하는데, 이 어찌 규중(閨中)의 부녀로서 사모할 수 있는 일이겠는가. 당 나라 때에 선녀(仙女) 번고(樊姑)가 있었는데 호(號)는 운교부인(雲翹夫人)으로 한(漢) 나라 때 상우령(上虞令)이었던 선군(先君) 유강(劉綱)의 아내였다. 그는 선격(仙格)이 매우 높아 여선(女仙)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이름도《열선전(列仙傳)》에 기록되어 있으므로 난설헌이 바로 그를 흠모하여 경번당이라 칭한 것이다."는 대문을 보고서야 무릎을 치며 통쾌하게 여겼다. 이 어찌 억울한 누명을 깨끗이 씻어 줄 수 있는 단안(斷案)이 아니겠는가. 또 본집(本集)도 허씨의 친저(親著)가 아니므로 다음과 같이 그 사실을 열거한다. 지봉(芝峯) 이수광(李?光)의 유설(類說)에, "허난설헌의 시는 근대 규수(閨秀)들 가운데 제일위이다. 그러나 참의(參議) 홍경신(洪慶臣)은 정랑(正郞) 허적(許●)과 한집안 사람처럼 지내는 사이였는데 평소에 '난설헌의 시는 2∼3편을 제외하고는 다 위작(僞作)이고, 백옥루상량문(白玉樓上梁文)도 그 아우 균(筠)이 사인(詞人) 이재영(李再榮)과 합작한 것이다.' 했다."하였고, 신씨(申氏)의 상촌집(象村集)에도, "《난설헌집》에 고인(古人)의 글이 절반 이상이나 전편(全篇)으로 수록되었는데, 이는 그의 아우 균이 세상에서 미처 보지 못한 시들을 표절 투입시켜 그 이름을 퍼뜨렸다."하였고, 전우산(錢虞山)의 소실(小室)인 하동군(河東君) 유여시(柳如是)도《난설헌집》에서 위작(僞作)들을 색출하여 여지없이 드러냈으니, 난설헌의 본작(本作)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김성립의 후손인 정언(正言) 김수신(金秀臣)의 집이 광주(廣州)에 있는데, 어느 사람이, "간행된《난설헌집》이외에도 혹 책상자 속에 간직된 비본(?本)이 있느냐?" 고 묻자, "난설헌이 손수 기록해 놓은 수십 엽(葉)이 있는데, 그 시는 간행본과 아주 다르다."대답하고 이어, "지금 세상에 전해지는 간행본은 본시 난설헌의 본작(本作) 전부가 아니라 허균의 위본(僞本)이다."하였다. 그 후손의 말이 이러한 것을 보면 아마 그 집안 대대로 내려 오는 실전(實傳)일 것이다. 지봉의 실기(實記)와 상촌의 정론(定論)과 후손의 실전이 낱낱이 부합되므로 쌓였던 의혹이 한꺼번에 풀린다. 내가 평소에 동관습유(?管拾遺)를 편찬하면서 우리나라 규방(閨房)의 시들을 모아 이 책을 만들었는데, 경번당의 사실이 매우 자상하게 수록되었으니 함께 참고하는 것이 좋다.
13.■연려실기술 제21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과장(科場)에서 부정을 행한 폐단 ○ 【경술년(1610년) 겨울 별시】그 중에는 글을 못하는 이가 많아서 글제를 미리 내어 주었는데도 스스로 짓지 못하였는데 글을 지을 수 있는 이는 이재영(李再榮)·이진(李晋) 등 두어 사람 뿐이었다. 매양 과거보는 시기가 되면 각기 세력을 가지고 쟁탈하기 때문에 수일 동안에 거처를 3, 4 군데나 바꾸었다 이재영(李再榮)이 고양(高陽) 군수가 되었을 때 감사가 상의할 일이 있다고 부르더니 며칠 후에 감사 아들이 과거에 올랐다. 이에 사람들이 시를 지어, “고양군수는 바삐 왕래하더니, 간사의 문전에 경사도 많네.”라고 하였다. 이진(李?)은 평양에 우거(寓居)하였었는데, 세력가가 종과 말을 보내어 맞이하였다. 도중에 동파(東坡)의 여관에 묵었는데 밤중에 도적이 뛰어들어 사람들이 모두 달아나 피하였는데, 그 도적이 물러간 뒤에 각각 행장을 점검하니 추호도 없어진 것이 없고 이진만이 없어졌다. 이때가 추운 겨울철이기에 이진을 청양구(靑羊?)로 싸가지고 와서 이내 과거를 보았는데, 그때 사람들이 과거한 그 사람을 지목하여, “청양급제(靑羊及第)다.”하였다. 병진년(1616년) 알성과(謁聖科)는 3, 4일 전에 간흉한 사람이 그 같은 당파 이진사에게 붓을 보냈는데 전해 준 사람이 잘못 알아 성이 같은 이웃집에 전하였다. 이에 그 사람이 받아서 자세히 보니 붓대통 속에 작은 종이가 있는데, 이는 그 과거의 글제인,‘당 나라 여러 신하들이 유류화(楡柳火)를 하사받음을 사례한다.’는 것이었다. 그 사람이 이웃집에서 사문유취(事文類聚)를 빌려다 보았는데, 마음속으로, 반드시 이 책을 곧 찾아갈 것이라고 짐작하고 급히 그 요긴한 문자만 베끼고 다시 그 붓을 이웃집 이진사에게 전해 주었더니 조금 뒤에 그 집에서 과연 사문유취(事文類聚)를 찾아갔고 두 사람이 모두 합격되었다. 막 과거장에 들어갔을 때 글제를 미쳐 내지도 않았는데 모인 사람 가운데서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오늘은 불이 나온다. 불이 나온다.”하더니, 과연 이 글제가 나왔으나 이첨의 세력을 두려워해서 사람들이 감히 말을 못하였다. 《사옹만록(思翁漫錄)》
14.■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이이첨(李爾瞻) 등을 논핵하다 중북(中北)과 대북(大北)이 서로 공격하다 ○신유년(1621, 광해군13) 4월에 김탁(金濯)의 소에,“이첨이 근년에 올린 흉악한 차자(箚子)가 중국에 들어갔다는 말은 온 나라 사람들만 자자하게 들은 것이 아니라, 전하께서도 그 십분의 일은 들으셨을 것입니다. 대체 흉악한 글이 천하에 전파하여 임금을 팔고 자신이 정직하다는 명성을 얻으려는 그 마음을 가지고 중국 사신과 더불어 자리를 같이 하여 접대할 때에 무슨 말은 하지 않겠습니까. 하물며 그의 형세가 곤궁한 귀신이 되어 하지 못할 모략이 없으며, 수행원도 그의 심복이 많으며, 이재영(李再榮)은 그중에도 특히 심한 자입니다. 흉악하고 비밀스러운 계책이 모두 이 자의 손에서 나왔고 문장이 또 그의 특기이니 신은 국가의 헤아릴 수 없는 중국 사신이 강을 건너 간 뒤에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신이 또 들으니, 이첨이 조정을 떠난 다음날에 존숭당상(尊崇堂上) 박정길(朴鼎吉)이 도감(都監)에서 그 낭청(郞廳)이중길(李重吉)을 불러 말하기를,‘의호단자(議號單子)가 어디 있는가?’하니 중길이,‘궤 속에 있습니다.’하였습니다. 정길이‘광창(廣昌 이이첨)이 갈 때에 나에게 의호단자를 등서(謄書)하여 두고 그 정본은 꼭 사람을 시켜 급히 보내라고 하였으니 그 궤를 열고 등서할 수 없는가?’하니, 중길이‘삼공(三公)이 모여 앉아서 봉한 자물쇠이니 지금 마음대로 열지 못합니다’고 하자, 정길(鼎吉)이 보내야 된다고 되풀이 말하였으나, 중길이 끝내 거절하였다고 합니다. 의호를 존중하는 일이 사신 접대하는 데에 큰 관계가 없는데도 그 정본(正本)을 이같이 급하게 보내도록 서두르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신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의호도 거기에 소용이 있습니까.《명륜록》
☞존숭당상(尊崇堂上) : 당시에 광해군의 생모를 존숭하기 위하여 임의로 존숭도감(尊崇都監)을 설치하고 당상(堂上)과 낭관(郞官)이 일을 보았다.
15.■연려실기술 제20권 폐주 광해조 고사본말(廢主光海朝故事本末) 박응서(朴應犀)의 옥사(獄事) 김제남(金悌男)을 죽이고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다. 엄성(嚴惺)은 내�기고 이덕형(李德馨)은 서울을 떠났다. 정온(鄭蘊)의 소도 아울러 부록하였다. 계축년(1613년) 봄에 박응서(朴應犀)전 정승 순(淳)의 첩의 아들·서양갑(徐羊甲)목사(牧使) 익(益)의 첩의 아들.심우영(沈友英)전(銓)의 첩의 아들·이경준(李耕俊)병사(兵使) 제신(濟臣)의 첩의 아들·박치인(朴致仁)·치의(致義) 치의(致毅)라고도 쓴다. 충간(忠侃)의 첩의 아들 가 생사를 같이할 친구가 되어서 소양강(昭陽江) 가에 같이 살면서 집의 이름을 무륜당(無倫堂)이라 하고, 시를 짓고 술마시는 것으로서 낙을 삼았다. 강변칠우(江邊七友)라고도 하고, 죽림칠현(竹林七賢)이라고도 하였다. 도당(徒黨)을 결성하여 도적이 되어 조령(鳥嶺)에서 서울 상인 동래(東萊) 은장수라고도 한다. 을 죽이고 포도청에 잡혔다. 응서가 곧바로 자백하려고 하니 포도대장(捕盜大將) 한희길(韓希吉)·정 항(鄭沆)이 고의로 국문(鞫問)을 가볍게 하면서 응서를 꼬여, “네가 이러이러하다고 말만 하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큰 공을 세울 수도 있으니 모름지기 깊이 생각해서 다시 진술하라”하였다. 응서는 흔연히 다시 진술하기를,“우리들은 도둑이 아닙니다. 장차 큰 일을 일으킬 생각으로 양식과 무기를 준비하려 했습니다. 국구(國舅)김제남(金悌男)과 몰래 통하여 영창대군을 받들어 임금을 삼으려고 한 것입니다” 하였다. 정 항등이 들어가서 아뢰자 광해가 친히 국문하였다. 《일월록》·《하담록》. ○ 응서가 고변한 것은 이이첨(李爾瞻)의 꾀에서 발단이 된 것이다. 처음에 응서 등이 문예를 즐기며 병서를 익혀서 허균(許筠)·이재영(李再榮)·이사호(李士浩)의 무리와 왕래하면서 사귀어 놀았다. 무신년에 서양갑·심우영·이경준·김평손(金平孫)등과 함께 연명으로 소를 올려 벼슬길을 통하려 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으므로 마음속에 불평을 품고 돌아왔다. 여강(驪江)가에 굴을 만들어 한 집안에서 살림을 같이 할 계획을 하고, 기린(麒麟)춘천 에 곡식을 쌓아 두어 뒷 날에 병란을 피할 준비를 하였다. 도원(桃園)의 결의(結義)를 모방하여, 형적이 괴이하고 비밀스러워서 다른 사람이 알 수 없는 것이 많았는데 이때에 은 장수를 죽이고 포도청에 잡혔다. 은 장수의 노복 춘상(春祥)이 그들을 뒤밟아 여주(驪州)에 가서 그들이 사는 곳을 알고 포도청에 고발하였다. 이때 이이첨은 영창대군이 항상 대비의 곁에 있는 것을 몹시 미워하여 온갖 계책으로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응서의 죄가 사형에 해당하는 것이라는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희길의 집에 가서 공손히 절하니, 희길은 사피하면서,“영공(令公)께서 나에게 무슨 뜻으로 절하십니까” 하였다. 이 이첨은,“공의 얼굴을 보니 복스럽게 생긴 상(相)입니다. 머지 않아서 반드시 큰 공을 세울 것이므로 하례하는 것입니다”하였다. 밤에 이첨이 친척되는 이의숭(李義崇)을 시켜 비밀히 응서에게,“너의 죄는 사형에 해당하니 그렇게 죽는것보다는 내 말을 따라 소를 올려 반역을 고변하는 것이 좋겠다. 이같이 하면 죽음을 면할 뿐 아니라 정훈(正勳)에 기록될 것이다” 하였다. 응서는 기뻐하여 그 말에 따라, 경준은 격문(檄文)을 짓고 김경손(金慶孫)·평손(平孫)은 격문을 전했다고 끌어 넣었다. 그 격문에,‘참 용이 일어나기 전에 가짜 여우가 먼저 운다’는 말이 있었는데,“참 용은 영창을 가리킨 말이고, 가짜 여우는 광해를 가리킨 말이다”하였다. 양갑·우영·인발(仁發)·경준·경손은 잡혀와 국문을 받고, 홍인(弘仁)과 치의는 망명 도주하다가 홍인은 잡혔고 치의는 끝내 잡히지 않았다. 홍인·인발·우영 등이 잇달아 사형을 당하였다. 양갑은 그 어머니가 몹시 맞으며 고문당하는 것을 보고는 분연히 큰 소리로,“전하께서 세 가지 큰 죄악이 있기에 우리들이 의병을 일으켜 적(賊 광해(光海))을 토벌하려고 하는데, 어째서 반역했다고 합니까”하고, 아버지(선조)를 죽이고 형(임해군)을 죽이고 친족의 윗 항렬 부인과 간음(姦淫)했다는 말을 임금 앞에서 크게 부르짖으니 사관(史官)이 차마 이 말을 쓰지 못하였다. 순창 문관(淳昌文官) 호방진(扈方辰)이 기록한 것이다.
16.■연려실기술 제21권 폐주 광해군 고사본말(廢主光海君故事本末) 허균(許筠)이 사형받다 무오년[광해군 10년(1618)] 8월 영의정 기자헌(奇自獻)이 일찍이 경운궁(慶運宮)으로 글을 화살에 매어 쏘아 들여보낸 변고의 장본인이 허균이라고 지적했기 때문에 드디어 허균과 원수가 되었다. 위의 폐대비(廢大妃) 조 아래에 자세히 말하였다. ○ 정사년(1617) 11월 26일에 전 현감 이문란(李文蘭)이 은밀히 소를 올려 아뢰었으며, 기준격(奇俊格)이 몰래 두 번이나 소를 올려 아뢰었으며, 허균도 은밀히 소로 아뢰었다.《응천일기》 ○ 예조 좌랑 기준격의 소에“나라가 불행하여 역적의 변고가 잇달아 일어났습니다. 그 중에도 역적의 뿌리는 실상 허균이었는데도 오히려 목숨을 보전하고 있으니, 신은 몹시 마음이 아픕니다. 기유년 겨울에 허균의 집에 갔더니 허균이,‘의창군(義昌君)은 선왕의 사랑하는 아들로 그를 세자로 세우자고 했으나 너의 아버지가 저지시켰다.’고하였습니다. 신해년 겨울에 허균이 또 말하기를‘연흥(延興 김제남(金悌男))이 나를 시켜 심정세(沈挺世)의 딸을 며느리 삼도록 윤수겸(尹守謙)에게 청혼해 달라고 하였다. 연흥은 수겸이 일찍이 훈련도감 군사들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결혼하여 큰일을 행하여 두 송장을 끌어내고, 영창 대군을 세우고 대비에게 수렴청정 시키고자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신이 놀라서 묻기를, ‘두 송장은 누구인가?’하니,‘임금과 동궁이다. 같은 날 나와 연흥이 가서 윤수겸을 보고 혼인하기를 청하였는데 윤수겸이 비록 싫더라도 어찌 감히 따르지 않으랴.’하였습니다. 신이 묻기를,‘윤수겸이 무슨 말로서 대답하던가?’하니, 망설이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연흥을 통하여 대궐 안의 일을 들으니 임금이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하였는데 대개 차마 들을 수 없는 내용이었습니다. 또 말하기를,‘내가 지금은 연흥에게 지휘를 받고 있지마는 일이 이루어진 후에는 내가 병권을 모두 쥐고, 때가 되면 무사를 시켜 연흥까지 죽이고 나의 권세보다 높은 사람이 없도록 하고 대비를 끼고 온 나라를 호령하여 다른 사람들은 감히 숨도 못쉬게 할 것이니 이것이 바로 고단수이다. 이내 중국에, 아뢰되, 이러이러한 입으로 차마 말할 수 없는 말을 나열하고 임금은 적자(嫡子)가 아니기 때문에 폐위시키고 적자 의(?)를 세웠다고 한다면 은(銀) 1만 냥까지 쓰지 않아도 일이 순조롭게 될 것이다.’했습니다. 또 말하기를,‘내가 권세를 잡는 것은 좋지만, 심정세의 집이 너의 집을 원망하고 있으니 심정세가 세력을 얻게 되면 너의 집이 크게 패할 것이다.’했습니다. 신이 그 말을 듣고 곧 소를 올리자고 했으나 그 당시 온 조정의 동인·서인·남인·북인을 막론하고 모두가 신의 집을 미워하고 있었기 때문에, 혹시 위협하고 도리어 죄를 뒤집어 씌우지나 않을까 두려워하여 여러가지로 생각해 보아도 계책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희형(趙希珩)을 시켜 그 혼인만 중지시켰습니다. 허균은 선조(先朝) 때에 공주 목사를 파직당하고 부안으로 돌아왔는데 부안 군수는 바로 심광세였으므로 허균이 광세와 이의를 세우고 권세 쥘 것을 모의했습니다. 또 경술년에 죄를 입어 옥에 갇혔고, 신해년 1월에 귀양갔다가 돌아와서는 허균의 집과 광세의 집이 문을 마주 대하고 있었으므로 아침저녁으로 상종하면서 흉악한 모의를 감히 하였습니다. 허균의 천성이 경솔하고 망령된 탓으로 신이 그 말을 듣게 된 것입니다. 허균은 제남(悌男)과 함께 서로 공모하여 도읍을 옮길 의논을 주장하여 참서(讖書)의 본문에 없는 말을 첨가하여 ‘일한(一漢)·이하(二河)·삼강(三江)·사해(四海)’라 하였는데 하(河)라는 것은 교하(交河)를 말한 것입니다. 온 나라 사람으로 하여금 소란하고 난리나 났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한 후에 이내 일을 꾸미겠다고 했으니, 이것도 또한 그가 스스로 한 말입니다. 허균이 공주 목사로 있을 때에 삼영(三營)을 설치하였다는 비방이 있었는데 삼영은 식객 심우영(沈友英)·윤계영(尹繼榮)·이재영(李再榮)을 말합니다. 우영은 허균의 처가집 가까운 친족으로서 서로 친하여 한 몸과 같이 친밀한 것은 온 나라 사람이 모두 아는 바입니다. 허균이 일찍이 글을 지어 우영에게 주면서,‘나의 벗은 심군(沈君)이다.’고 했습니다. 허균은 한 평생 정도전(鄭道傳)을 사모하여 항상 현인(賢人)이라고 칭찬하였으며 스스로 선집한 《동인시문》에 도전의 시를 맨 첫머리에 싣고, 우영(友英)의 작품도 아울러 뽑아 넣었습니다. 계축년 후에 허균이 말하기를,‘내가 복이 있어 남쪽으로 내려갈 때에 우영에게 지어준 시를 문집 속에 넣으려고 모두 가지고 갔는데 이때 마침 우영의 사건이 발생하여 나는 화를 면했다.’고 했습니다. 우영과 양갑(羊甲)은 모두 허균이 품에 안아서 기른 자입니다. 허균이 양갑의 자(字)를 석선(石仙)이라고 지어 주었으며, 매양 말하기를,‘지금의 영웅은 내가 본 바로는 오직 서석선(徐石仙)만이 있을 뿐이다.’했으니 허균이 법망에서 빠져 잡히지 않은 것이 어찌 괴이한 일이 아닙니까. 또 말하기를,‘역적의 격문은 내가 지었지마는 내가 우영을 시켜 내 이름을 말하지 못하게 하였기 때문에 드디어 면하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매양 말하기를,‘이이첨의 집에 머리가 큰 뱀이 있는데 영경(永慶)과 직재(直載)의 귀신이라고 하니 오래 안가서 반드시 패망할 것이다.’하더니 변고가 난 후에는 몸을 둘 곳이 없어서 드디어 이첨에게 가서 의탁하였습니다. 신이 계축년 가을에,‘전에는 어찌 대비에게 수렴청정 하도록 하고 이의(李?)를 임금으로 세운다고 하다가 지금은 어찌 대비를 폐하자고 말하느냐?’하고 물으니 허균은,‘네가 나이 어리니 무엇을 알겠느냐. 말로를 걷는 사람은 화살이 떨어지는 곳에 과녁을 세워야 세상을 살아 나가는 데 걱정이 없을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런 말은 대개 허균이 경솔하고 천박하지 않았다면 신이 반드시 들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그(허균)도 또한 후회하여 그 일 아는 사람을 반드시 죽이고자 하여, 기회를 타서 화를 꾸미려고 못하는 짓이 없습니다. 또 말하기를,‘내가 만약 권력을 쥐고 대비가 정사를 돌본다면 내가 심이기(審食其 : 한 나라 여후(呂后)의 정부로 궁중에서 늘 거처하였다)가 되는 것도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며, 마땅히 원상(院相)이 되어 궁중에서 온 나라의 일을 결정할 것이다.’고 했습니다. 이렇듯 허균의 불량하고 패려하고 흉악한 죄는 머리털을 뽑아서 죄를 세어도 세기가 어렵습니다. 지금은 큰 논의가 이미 정해졌으니 비록 허균과 같은 흉악한 도적의 도움이 없더라도 또한 일을 처리할 수 있습니다. 원컨대, 허균이 종묘사직을 위태롭게 하여 의창(義昌)을 임금으로 세우려고 한 죄와 이의(李?)를 끼고 대비를 수렴청정 시키고자 한 죄를 추궁하기 바랍니다.”하였다.《청야만집(靑野?輯)》
17.■연려실기술 제20권 폐주 광해조 고사본말(廢主光海朝故事本末) 모비(母妃)를 폐하여 서궁(西宮)에 있게 하다 ○ (정사년) 2월 1일에 사용(司勇)민인길(閔仁佶)이 비밀히 소를 올려, “흉악한 익명서는 허균의 짓입니다”하였다. 이에 행사직(行司直)허균·지사(知事)성우길(成佑吉)·부원군(府院君) 유희분(柳希奮)·사복정(司僕正) 유충립(柳忠立)·봉상주부(奉常主簿) 이재영(李再榮)·급제(及第) 기수발(奇秀發)·활인서별좌(活人署別坐) 이사정(李士星)·이문학관(吏文學官) 이원형(李元亨)이 모두 비밀소(秘密疏)를 날마다 와서 바쳤다. ○ 4일에 삼사가 합계하기를,“민인길이 비밀히 고발한 후로 서로 잇달아 소를 올려, 서로 싸우는 것처럼 되었사오니 빨리 국문하여 사실을 캐내어 처단하기를 청합니다. 승정원에서는 사리와 체통을 돌아보지 않고 이미 변고를 고발한 인길을 가두도록 청하지도 않으며, 자기 변명의 비밀소를 받아 들여서 상소가 연달으니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해당 승지를 파직시키소서”하였다. ○ 7일에 영의정이 차자를 올렸는데 그 대략에,“선왕때에 간사한 사람이, 신이‘장차 동궁을 무함한 사람을 귀양보내고자 한다’하고, 자기가 동궁을 무함한 사람이라고 하면서 뽐내고 남을 업신여겨 장차 큰 옥사를 일으키려 했으니, 만약 큰 옥사가 일어났더라면 전하가 어떤 처지에 놓였겠습니까. 다행이 선왕의 밝으심에 힘입어 형벌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그 간사한 사람이 신을 두려워하여 신에게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글을 보내었는데 그 글에 ‘살려 준 은혜는 나를 낳은 이와 같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간사한 사람이 장차 신이 협박을 받을 것(익명서에 있는 말)이라고 하니 진실로 괴이한 일입니다. 계축년 무렵에 원임(原任)으로 있을 때 의주부윤(義州府尹)의 일로도 오히려 조정에 편히 나오지 못했사온데, 하물며 지금 신이 당한 말은 얼마나 큰 죄입니까. 그런데도 마음이 편안할 수 있겠습니까. 수년 전에 어떤 사람이 서울에 와서 글을 보내어 신에게 떠나가기를 권했는데 그 계책이 교묘한 듯하지만 실상은 어리석고 망녕된 것이었습니다. 금년에는 신의 (姓)을 직접 거론했으며, 또 부신(符信)을 내어 준다고 말했으니 그 말은 다만 함정에 밀어 넣으려고 한 정도에서 그치지 않습니다”하였다.〈강릉(江陵)에서 올린 차자〉 ○ 판윤(判尹)윤선(尹銑)·유희발(柳希發), 덕양도정(德陽都正)충윤(忠胤), 봉래군(蓬萊君)형윤(炯胤), 능원군(綾原君)보(?), 경평군(慶平君)늑(?), 경창군(慶昌君)주(?), 흥안군(興安君)식(?), 문성군(文城君)건(健), 전함(前啣)송석조(宋碩祚), 호군(護軍)윤기헌(尹耆獻), 전 판관김여순(金汝純), 필선(弼善)곽천호(郭天豪), 보덕(輔德)배대유(裵大維), 검열(檢閱)안응로(安應魯), 판교(判校)이유록(李綏祿), 형조참의정규(鄭逵), 좌참찬(左參贊)민몽룡(閔夢龍), 설서(說書)이모(李慕), 승문정자(承文正字)심지청(沈之淸), 분병조정랑(分兵曹正郞)이종언(李宗彦), 봉상주부(奉常主簿)이재영(李再榮)·이원엽(李元燁)·이대엽(李大燁), 겸설서(兼說書)임흥준(任興俊), 봉교(奉敎)박종윤(朴宗胤)·구익환(具益煥), 시교(侍敎)이경익(李慶益)·김주하(金奏夏), 사정(司正)최철견(崔鐵堅), 공조참의장자호(張自好), 참봉이간(李簡)·이영(李英)·김원(金瑗)·임기령(任麒齡), 군수이언직(李彦直), 부정(副正)이람(李?), 부사직(副司直)최위(崔?), 사직(司直)이담(李憺), 전 현감 이덕순(李德純), 군수한형(韓?), 판관이덕언(李德言), 예조좌랑 한정국(韓定國), 해신군(海愼君)이희령(李希齡), 행 호군(行護軍)유지신(柳止信),전 정(前正)허경(許儆), 부사(府使)조명욱(曹明?), 사과(司果)조석명(趙錫明), 판관홍응귀(洪應龜), 부봉사(部奉事)구현(具玹), 현감민여현(閔汝賢)·이경황(李慶滉), 군수 안종길(安宗吉)·이안민(李安民), 판관권광환(權光煥)·주부(主簿)남수(南燧), 판관이숭원(李崇元)·세마(洗馬)유시립(柳時立), 별제(別提)윤형임(尹衡任), 사어(司禦)신수을(愼守乙)·평시령(平市令)이문현(李文顯), 사직(司直)문경홍(文慶弘)·김정간(金廷幹)·권극정(權克正)·김운성(金雲成)·이정생(李挺生)·금부경력(禁府經歷)정결(鄭潔), 직장(直長)이준익(李俊翼), 내자정(內資正)금변(琴?), 별제(別提)이경후(李慶後), 감역(監役)성창렬(成昌烈), 주부민대(閔?), 직장최원우(崔元祐), 전적(典籍)채승선(蔡承先), 학정(學正)이유일(李惟一), 현령김조(金?), 주부박항길(朴恒吉), 현감유덕민(柳德民)·조효원(趙孝元), 상례이시립(李時立), 형조좌랑 이원여(李元輿), 직강(直講)정대해(鄭大海), 별좌(別坐)심숙(沈淑), 별제(別提)임광후(任光後), 주부이응철(李應喆), 판관이숙(李潚), 주부정종길(鄭宗吉), 봉사유여성(柳汝惺), 병조좌랑김우익(金友益), 첨정(僉正)조계한(趙繼韓), 행 사과(行司果)정진철(鄭震哲), 사용(司勇)김효신(金孝信)·윤인남(尹仁男)·원유남(元裕男)·유승서(柳承瑞), 첨지(僉知)한총(韓叢)·유황(柳璜), 교관(敎官)이성석(李聖錫)·정응운(鄭應運), 전 현감 유효원(柳孝元), 초관(哨官)신대지(申大枝), 직장(直長)남궁격(南宮格)·박찬(朴璨), 봉사조탁(趙鐸), 참봉정문회(鄭文晦), 감역(監役)임석준(任錫浚)·통례(通禮) 양극선(梁克選), 상례(相禮)정유번(鄭惟?), 군기주부(軍器主簿) 윤호(尹?), 분병조좌랑(分兵曹佐郞) 박률(朴慄)의 의견에 어떤 사람은,“대사의 의논이 이미 발의되었으니 어찌 감히 이견을 말하겠습니까.”하고, 어떤 사람은,“온 나라의 공론이니 어찌 다른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하고, 어떤 사람은,“어찌 포의보다 뒤져서야 되겠습니까.”하였다. 이상은,“대사 의논이 이미 발의 되었으니 어찌 감히 다른 논의를 할 수 있으랴.”하는 사람들이다.
18.■연려실기술 제23권 인조조 고사본말(仁祖朝故事本末) 계해년(1623년)의 죄적(罪籍) 전 군수 이재영(李再榮)전후의 흉한 상소는 대부분 그의 손에서 나왔으며 과거 시험에 남의 글을 대신 지어 주어 부정하게 합격시킨 것이 몇인지 알 수 없다. 잡혀 국문당하여 매맞아 죽었다.
19.■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중도부처류(中途付處類) ○ 전 우윤 이여검(李汝儉) : 사헌부가 아뢰었다. “원래 집안에서의 행실이 파렴치한 위인으로 이이첨을 상전같이 섬겼습니다. 폐모의 논의에 부회하여 그 공으로 과거를 도둑질하였고, 그 악한 짓을 한 것은 국인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중도부처하소서.” 차작하여 급제한 일은 이재영(李再榮)과 이진(李進)의 공초에서 나왔다. 방목에서 삭제. ○ 이진(李進)흡곡(?谷)으로 정배. : 사간원이 아뢰었다. “과장에서 대작을 못할 짓이 없이 하였으니, 잡아다가 국문하소서.” 뒤에 석방되었으나, 사헌부가 아뢰었다. “역적 괴수에게 이[?]같이 달라 붙어서 흉참한 소장을 지어 주었으니, 이재영(李再榮)과 다름이 없습니다.”
20.■계해정사록(癸亥靖社錄) 복주류(伏誅類) ○ 전 군수 이재영(李再榮) : 사헌부가 아뢰기를, “원래 미천하고 간사한 사람으로 이이첨의 노예가 되어서 전후의 흉악한 음모가 모두 그 손에서 나왔을 뿐만 아니라, 이 사람이 대작해서 급제한 사람이 얼마인지 알지 못하오니, 잡아서 국문하게 하소서.” 하였다. 매맞아 죽었다.
21.■백호전서 제14권 계사(啓辭) 인견(引見)하였을 때 아뢰기를, “죄인 한순석(韓舜錫)이 차작(借作)해 준 일이 이미 발각되었으니, 이전에 그가 차작해 준 사람들을 다시 물어 근래의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응징해야 합니다. 더구나 순석은 본시 패악 무도한 인물로서 전에 인신(印信)을 위조한 일에 간여하였으나 요행으로 형벌을 면했습니다. 그가 거칠고 보잘것없는 문장을 가지고 과장(科場)에서 농간을 부린 것이 오늘날뿐만이 아니므로 사람들이 모두 지적하여 온 나라 사람의 말을 막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가 공초(供招)하여 자복한 것에 따라 단지 유배시키는 율(律)만을 시행할 경우, 대중의 분노를 씻을 수 없고 간사한 폐단을 응징할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죄인 한순석을 인조조(仁祖朝) 때 이재영(李再榮)을 처벌한 전례에 따라 다시 엄한 형벌을 가하여 전후 차작해 준 사람을 캐물어 간악한 자를 응징하고 폐단을 막으며 악을 제거하여 모조리 없애도록 하소서.” 하였는데, 윤허하지 않는다고 답하였다. - 같은 날 (정사년 10월 23일)-
22.■응천일록 2(凝川日錄二) 경신년(광해군 12, 1620년) 8월24일 원접사의 계는 대개,‘데리고 갈 인원은 종사관에 이조 좌랑서국정(徐國楨)·전 좌랑김시국(金蓍國)·전 판관이식(李植)을, 능서관에 겸설서유흠(柳)을, 제술관에 첨지이재영(李再榮)·황간현감(黃澗縣監)차운로(車雲輅)를, 사자관에 첨지 이복장(李福長)·전 참봉이성국(李誠國)을, 전자관(篆字官)에 사과경유겸(景惟謙)을, 화원(?員)에 사과이징(李澄)을, 차비역관에 박인상(朴仁祥)·진예남(秦禮男)·이응(李應)·이유(李瑜)를, 대강역관(擡?譯官)에 정충헌(鄭忠獻)·이현남(李賢男)·박경생(朴庚生)·최응린(崔應麟) 등을 아울러 데리고 가겠으며, 또 신의 본직 및 관장하고 있는 내국·금부·비변·훈련·영건 등의 직임을 우선 체차할 것을 아뢴다.’는 것이었는데,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이식은 어떠한 사람인지 모르겠거니와, 전례에 의하여 재주와 명망이 있는 사람을 잘 가려서 데리고 가라. 또 본직 및 겸직에 대하여는 선조(先朝)의 옛 전례를 자세히 상고하여 처리하겠으니, 아직 그대로 보살피라.”하였다.
23.■응천일록 2(凝川日錄二) 정사년(1617 광해군 9) 광해 정사(1617 광해군 9) 1월부터 광해 계해(1623 광해군 15) 2월까지 2월3일 봉상주부 이재영(李再榮)이 비밀히 상소하였는데, 입계하였다. 급제기수발(奇秀發)이 비밀히 상소하였는데, 입계하였다. 활인서 별좌이사성(李士星)이 비밀히 상소하였는데, 입계하였다.
24.■응천일록 3(凝川日錄三) ○ 1623년 7월 16일 사헌부의 계는 대개, “진사 기준격(奇俊格)은 본래 음흉하고 수상한 사람으로 지난 정사년(광해군9, 1617)간에 소를 올려 급변을 위에 알려, 국구(國舅)김제남(金悌男) 및 심엄(沈?) 부자를 무고하여, 흉악하고 참혹함이 극에 달했습니다. 상소 가운데에‘균(筠)이 부안 현감(扶安縣監)으로 있을 적에 심광세(沈光世)와 더불어 영창대군을 세워 권세를 갖기를 모의하였다.’하였고, 또‘균이 제남과 모의하여 천도(遷都)에 관한 의논을 주장하여 참서(讖書)에도 없는 첫째 한양, 둘째 교하, 셋째 강화, 넷째 해풍[一漢二河三江四海]이라는 말을 더 넣었다.’ 하였으며, 또‘무신년(선조 41, 1608년)에 심엄은 일이 발각될 것을 염려하여 놀라고 두려워서 스스로 죽었는데, 사람들이 목매어 죽었다고 하였다…….’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정(元情)할 때에 심이기(審食其)의 말을 들어서 자전(慈殿)을 지적하여 탓하기까지 하였으니, 이것은 정조(鄭造)·윤인(尹?)·위경(偉卿)의 무리들도 말하지 않았던 바입니다. 그 대역무도하고 하늘에 사무치는 극악한 죄를 다스리지 않을 수 없으니,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결정하소서. 과장(科場)에서 다른 사람이 지은 것을 빌려서 응시한 죄는 해당 법률이 있는데, 기수발(奇秀發)이 빌려서 응시하여 과거에 오른 정상은 이재영(李再榮)의 공초에서 나왔으니, 여계선(呂繼先)의 전례에 의하여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결정하소서. 기순격(奇順格)은 낭자에게 재물을 탐한 진상이 이응해(李應?)보다 더 심하고, 죄 없는 사람을 쳐 죽인 죄가 박엽(朴燁)에 못지않으니 위리안치하소서.”하니, 비답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수발은 과거 급제를 말소하였고, 순격은 삭직하여 쫓아내었는데, 이제 또 죄를 더 주면 어찌 지나치지 않겠느냐?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이귀의 탑전의 계사로 인하여, 영상의 처소에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좌승지가 아뢰기를, “영상에게 돈유하였더니, 말하기를 대개,‘신이 죽을 나이에 다다르니, 죽음이 조석에 박두하였다. 죽기 전에 성상을 위하여 조그마한 수고를 바치려는 것이 본디부터 먹은 마음이었는데, 터럭만큼이라도 물러가 쉬며 스스로 편 하려는 계교가 있겠는가? 요즘 듣건대, 탑전에서 대간의 논평이 여러 번 나왔다 하니, 외람되이 대신의 직에 앉아 있어 대간의 논평이 두려우며, 사세로 헤아려 보아도 태연히 지나쳐 버릴 수 없다. 그러나 신이 시종 출사하지 않는 것은 오로지 늙어서 기력이 다하였기 때문이다. 어찌 감히 말을 늘어놓아 우러러 진달하겠는가? 그런데 승지를 보내어 돈유까지 내리니, 황공하고 죄송함을 이길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남의 말 때문에 미안스럽게 여기지 말고, 모름지기 속히 출사하여 내가 바라는 뜻에 부응하도록 내일 다시 가서 타이르라.”하였다. 사헌부가 아뢰기를, ○ 7월21일“전 군수 김명룡(金命龍)은 차작(借作)으로 과거에 올랐음이 이재영(李再榮)의 공초에 뚜렷이 드러났으니, 기수발과 함께 잡아다 국문하여 법대로 죄를 정하도록 하소서.” 하니,‘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 8월 5일 금부가 유몽인을 군기시 앞에서 형을 집행하였음을 아뢰었다. 또 아뢰기를, “김명룡·기수발이 차작(借作)으로 과거에 올랐는데 아직까지 죄를 결정하지 않아, 대간이 잡아다 국문하여 죄를 결정할 것을 계청하였습니다. 이재영(李再榮)은 이미 차작하였다고 공초하고서 죽었으니, 명룡 등이 어디에서 밝히겠습니까? 법대로 죄를 결정함이 어떻겠습니까? 아뢰옵니다.”하니, “아뢴 대로 하라.”하였다. 죄인 유흠·신훈은 형을 더하고, 유흠은 압사(壓死)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25.■일사기문(逸史記聞) 찬자 미상 ○ 계축년(광해 5, 1613년) 4월 28일. 사형수 박응서(朴應犀)의 고변은 이이첨의 꾀에서 비롯되었다. 응서란 자는 사암(思庵)박순(朴淳)의 서자로서,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허홍인(許弘仁)·유인발(柳仁發)·박치의(朴致毅)·이경준(李耕俊) 등과 뜻이 합하여 사생을 같이할 벗을 맺었다. 그들은 모두 이름난 집의 서자들로 문예까지 곁들였는데 혹 선학(禪學)에 몰두하기도 하고 때론 병서를 익히기도 하였다. 그리고 평소 오가면서 교분을 둔 자들은 곧 허균·이재영(李再榮)·이사호(李士浩) 등의 유였다. ○ 누군가 경기 감사로 있을 때 그의 아들이 양근 군수(楊根郡守)이재영(李再榮)의 대작으로 급제하자, 어떤 이는 시를 이렇게 썼다. 양근 태수 불이 나게 드나들더니 / 揚根太守往來忙 감사댁에 경사 났네 / 方伯家中慶事昌
26.■죽창한화(竹窓閑話) 찬성(贊成) 이덕형(李德泂) 저 우리나라의 공도(公道)는 오직 과거(科擧) 뿐이었는데, 임진년 병란이 있은 후에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고 법강(法綱)이 해이해져서 한두 시관(試官)이 과거보는 시험장에서 사정(私情)을 행한 것이 시초가 되어, 그 폐단이 점점 만연되어 폐조(廢朝) 때에 이르러 가장 심했으니, 큰 둑이 한 번 무너지자 염치가 모두 없어져서 돈에 환장한 사람보다도 심하였다. 이것은 실로 권간(權奸)이 나라 정치를 맡아 오랫동안 문형(文衡)의 자리를 차지하여 여러 번 시원(試院)을 주장하여 사당(私黨)을 넓게 심어서 자기들의 세력을 펴려고 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크든 작든 사람을 뽑는 과장에는 반드시 미리 글 제목을 내가지고 문객(文客)과 일가붙이 중의 젖비린내 나는 자제들을 시켜 먼저 남에게 가서 차작(借作)을 받게 하였으니, 이는 차천로(車天輅)로부터 그릇된 예가 생겼고 이재영(李再榮)으로부터 기원되었다. 또 관서(關西)에 이진(李進)이란 자가 있어 제법 과문(科文)을 잘 지었다. 이 사람은 재상의 집에 출입하면서 많은 보수를 받고 글을 지어 주어서 과거에 급제한 자가 또한 많았다. 또 식년(式年)의 강경과(講經科)에 있어서도 역시 미리 일곱 대문(大文)의 문제를 내가지고 이것을 익히 외우게 했기 때문에 우수하게 급제되지 않는 자가 없었다. 우리나라 과거는 고려 광종조(光宗朝) 때 처음 만든 것으로 지금까지 5∼6백 년이 된다. 그러나 공도(公道)가 없어지기는 지난번보다 더한 때가 없었으므로 보고 듣는 바에 놀라고 해괴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어, 나라 안에 말이 시끄럽고 인심이 흙처럼 무너졌다. 그래서 시골에서 경서(經書)를 연구하는 선비나 일생동안 시문을 짓던 문사들이 모두 책을 덮고 과거를 폐하고서 세태에 통분하며 은거하고 만다. 그러므로 그 대각(臺閣)에서 날뛰고 청현(淸顯)한 벼슬자리에 벌여 있는 자들이 모두 학문이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다. 그들은 권간(權奸)의 손에서 양육되어 그 풍지(風旨)를 따라서 여러 번 신인(神人)이 공노할 큰 옥사를 일으키고 마침내는 윤리(倫理)가 거의 없어지고 의리가 막혀 버려 종묘와 자식의 위태로움이 간신히 잡아맨 기(旗)의 술과 같았으니, 만일 반정(反正)의 일이 없었다면 거의 금수의 땅이 될 뻔했다. 큰 이익이 있는 곳에는 그 폐단을 막기가 어려운 법이라, 지금까지도 남은 습관이 아직도 있으니 어찌 탄식할 일이 아니겠는가? 이재영(李再榮)은 부윤(府尹) 선(選)의 첩의 아들로 글을 잘했다. 더욱이 사륙문(四六文)에 능하여 장원으로 급제하여 벼슬이 통정(通政)으로 군수까지 하는데 이르렀다. 27.■恬軒集卷之三十四 行狀 西河任相元公輔著 ■염헌집권지삼십사 행상 서하임상원공보저 嘉善大夫行承政院都承旨任公行狀 가선대부행승정원도승지임공행상 公諱有後。字孝伯。號萬休。其先出於?川。麗朝有諱子松。以功封府院君。三 공휘유후。자효백。호만휴。기선출어?천。여조유휘자송。이공봉부원군。삼 傳而球。事我太宗。官參知政事。又四傳而明弼。官參奉。乃公之高祖也。曾祖 전이구。사아태종。관참지정사。우사전이명필。관참봉。내공지고조야。증조 尹。文科牧使。祖國老。文科吏曹判書。考守正。文科弘文校理。居判書公憂。 윤。문과목사。조국로。문과이조판서。고수정。문과홍문교리。거판서공우。 過?不起以孝聞。?金氏。節度使▦▦之女 과?부기이효문。?김씨。절도사▦▦지녀 。公生于萬曆辛丑十一月初三日幼而夙慧。在大夫人抱。試授以絶句。聞則輒誦 。공생우만력신축십일월초삼일유이숙혜。재대부인포。시수이절구。문칙첩송 。六歲。校理公捐館 。육세。교리공연관 。七歲。始就鄕塾。受小詩。便能屬辭。觀者莫不奇之 。칠세。시취향숙。수소시。편능속사。관자막부기지 。八歲。受史略。居一歲。能通一秩。從掌令李惟達學。李公歎賞曰。爾之才調 。팔세。수사략。거일세。능통일질。종장령이유달학。이공탄상왈。이지재조 絶倫。吾不足爲師也。?求名師而講?乎。乃?衣於疏菴先生之門。疏菴與公爲三 절륜。오부족위사야。?구명사이강?호。내?의어소암선생지문。소암여공위삼 從兄弟。時姜掌令汝載。亦學於疏菴。贄以詞賦。疏菴?譽之。公色頗?然。疏菴 종형제。시강장령여재。역학어소암。지이사부。소암?예지。공색파?연。소암 曰。汝亦能有所作乎。公曰。鄕曲孤陋。不敢望姜生也。公試令爲科詩。旣成而 왈。여역능유소작호。공왈。향곡고루。부감망강생야。공시령위과시。기성이 進之。疏菴大驚。始敎以唐音作詩之法。復取莊,韓漢史諸大家質之。入法輪寺 진지。소암대경。시교이당음작시지법。복취장,한한사제대가질지。입법륜사 。課讀歲餘。文義驟進。若決江河而下也。許筠素與校理公善。見公之才。甚奇 。과독세여。문의취진。약결강하이하야。허균소여교리공선。견공지재。심기 之日。欲作文。當學司馬遷史記也。一日。公詣其家。筠與一客狎而辭。極悖褻 지일。욕작문。당학사마천사기야。일일。공예기가。균여일객압이사。극패설 。客者。卽李再榮也。公年十三。心竊鄙之。遂絶跡不復往。而乃師疏菴也。 。객자。즉이재영야。공년십삼。심절비지。수절적부복왕。이내사소암야。 十八歲。入庭試。文當高選。而考官以落一句?而黜之。甲子。登司馬兩試。初 십팔세。입정시。문당고선。이고관이락일구?이출지。갑자。등사마량시。초 擬公所作爲魁。而及?號。考官升其所親。屈公爲第二。時皆惜之。丙寅。擢庭 의공소작위괴。이급?호。고관승기소친。굴공위제이。시개석지。병인。탁정 試及第。選入槐院。丁卯。以假注書。扈駕江都。朝廷議與淸和。公再上疏。引 시급제。선입괴원。정묘。이가주서。호가강도。조정의여청화。공재상소。인 義斥之。戊辰。以假官久居政院。是時。諸勳臣蓄疑光海舊臣。廣開告密之門。 의척지。무진。이가관구거정원。시시。제훈신축의광해구신。광개고밀지문。 公弟之後。素失學無賴。與鄕人陰圖作亂。其意實欲告變而取富貴也。遂以其謀 공제지후。소실학무뢰。여향인음도작란。기의실욕고변이취부귀야。수이기모 洩諸勳臣。鄕人怨其爲所欺。引其叔父判書就正。判書方被竄逮來。?其兩子杖 설제훈신。향인원기위소기。인기숙부판서취정。판서방피찬체래。?기량자장 死。公亦坐繫而得釋。自傷其一家之親相禍。作絶義文。告於先墓。終身不見之 사。공역좌계이득석。자상기일가지친상화。작절의문。고어선묘。종신부견지 後之面焉。仍絶世遁跡。自屛於東海之濱。其地卽蔚珍。而有溪山之勝。築精舍 후지면언。잉절세둔적。자병어동해지빈。기지즉울진。이유계산지승。축정사 硏墳籍。郡人請學者甚衆。公奬進而成就之。嗣是有取進士者凡數人焉。癸酉。 연분적。군인청학자심중。공장진이성취지。사시유취진사자범수인언。계유。 拜居昌縣監。辭不就。甲戌。拜居山察訪。未一歲棄歸。在官郵中。積弊盡剔之 배거창현감。사부취。갑술。배거산찰방。미일세기귀。재관우중。적폐진척지 。郵人至今稱之。丙子。拜高山察訪。自免歸。淸人襲我。上駕幸山城。疾馳奔 。우인지금칭지。병자。배고산찰방。자면귀。청인습아。상가행산성。질치분 問不及。從倡義使李顯英於關東。未幾而罷。戊寅。拜江原都事。庚辰。拜禮曹 문부급。종창의사이현영어관동。미기이파。무인。배강원도사。경진。배예조 佐郞。皆不應命。乙酉。拜慶尙都事。其年病免。己丑。在蔚珍。遭大夫人憂。 좌랑。개부응명。을유。배경상도사。기년병면。기축。재울진。조대부인우。 歸葬廣州。其未殯。不進勺水。旣葬。唯啖松葉及橡實。或???。以延朝夕。蔬? 귀장광주。기미빈。부진작수。기장。유담송엽급상실。혹???。이연조석。소? 鹽醬之屬。?不進焉。廬于墓側。晨?必拜墓。蓋校理公之沒也。幼不能持服。至 염장지속。?부진언。여우묘측。신?필배묘。개교리공지몰야。유부능지복。지 是欲追服之。嫌其異俗也。內憂旣終。食素心喪。復三年前後凡六年。?瘠之容 시욕추복지。혐기이속야。내우기종。식소심상。복삼년전후범육년。?척지용 。哀慕之形。親戚隣里。莫不感動。而亦怪其能支也。癸巳。拜永川,仁同。皆 。애모지형。친척린리。막부감동。이역괴기능지야。계사。배영천,인동。개 辭以疾。李公敬與疏薦其純孝至行過人。而避名文辭恬退。卓居朝紳之石。宜有 사이질。이공경여소천기순효지행과인。이피명문사념퇴。탁거조신지석。의유 以奬拔也。及入對。復力薦之。孝廟命銓曹甄用之。後拜司藝掌樂正司憲府掌令 이장발야。급입대。복력천지。효묘명전조견용지。후배사예장악정사헌부장령 左通禮。皆不出。拜寧海府使。至官。停疑訟。抑?宗。捐質布之羨。代償民?。 좌통례。개부출。배영해부사。지관。정의송。억?종。연질포지선。대상민?。 府民感悅。以不候使臣。見?。得罷乙未。拜江陵府使。戊戌。陞秩。拜鍾城府 부민감열。이부후사신。견?。득파을미。배강릉부사。무술。승질。배종성부 使。府與胡地接壤。公至則沿江置戍。禁?出者。嚴其約束。民有欲亡入胡地者 사。부여호지접양。공지칙연강치수。금?출자。엄기약속。민유욕망입호지자 。卽捕斬之建受降樓。作逍遙堂。館宇頹?。無不一新。府常貢鹿皮狼尾麝香之 。즉포참지건수강루。작소요당。관우퇴?。무부일신。부상공록피랑미사향지 屬。民力有不給者。官自贍之。以寬徵斂。修?舍課儒藝。大變??士風。及聞孝 속。민력유부급자。관자섬지。이관징렴。수?사과유예。대변??사풍。급문효 宗升遐。茹素累月。?于因山之成。隣邑敬服。皆以爲難也。庚子。自禮曹參議 종승하。여소루월。?우인산지성。인읍경복。개이위난야。경자。자례조참의 。拜潭陽府使。不??。獨身之官。是歲。適大侵。預儲穀米。飢民之仰哺者。率 。배담양부사。부??。독신지관。시세。적대침。예저곡미。기민지앙포자。솔 以一旬與糧。科條甚備。務爲便民。遠近流徙者。數逾萬餘。而賴以全活。御史 이일순여량。과조심비。무위편민。원근류사자。수유만여。이뢰이전활。어사 奏其績。命升嘉善。臺諫以爲守令以賑蒙賞者太多。爭而寢焉。以小事失方伯意 주기적。명승가선。대간이위수령이진몽상자태다。쟁이침언。이소사실방백의 。罷歸。府民立碑思之。其妹氏避疾。寓于公家而沒。其家素貧。凡殮斂棺槨。 。파귀。부민립비사지。기매씨피질。우우공가이몰。기가소빈。범렴렴관곽。 無不自辦。茹素者亦五月。後除承旨者再矣而皆辭。淸譯李一善肆爲貪暴。跨馬 무부자판。여소자역오월。후제승지자재의이개사。청역이일선사위탐폭。跨馬 入闕。莫敢誰何。國人憤?。公慷慨抗疏。以爲一善特我民之被?者。倨傲若此。 입궐。막감수하。국인분?。공강개항소。이위일선특아민지피?자。거오약차。 請奏治其罪。時皆?之。丁未。拜淸風府使。是歲亦飢。其艱政。?如潭陽時。而 청주치기죄。시개?지。정미。배청풍부사。시세역기。기간정。?여담양시。이 民無?者。監司嘉之。問所賑穀幾何。公終不自言。監司益嘉其不伐。上聞之。 민무?자。감사가지。문소진곡기하。공종부자언。감사익가기부벌。상문지。 特升嘉善。庚戌。拜工曹參判。辛亥。拜都承旨。病免。是時。朝廷以宿望。連 특승가선。경술。배공조참판。신해。배도승지。병면。시시。조정이숙망。연 擬大司諫,大司成。有怨公者。構諸臺諫?。?家難時事。劾之。副提學李敏迪上 의대사간,대사성。유원공자。구제대간?。?가난시사。핵지。부제학이민적상 箚辦之。罷其臺諫。壬子。拜京幾監司。時守令有罪當杖者。屬有赦而免之。相 차판지。파기대간。임자。배경기감사。시수령유죄당장자。속유사이면지。상 臣以公爲姑幾之而待赦。請下獄。玉堂亦上箚明其?。公旣被年少者侵?。不樂在 신이공위고기지이대사。청하옥。옥당역상차명기?。공기피년소자침?。부악재 朝。求爲慶州府尹。公不以年老自怠。束下以嚴。撫民以恩。剖斷若神。案無滯 조。구위경주부윤。공부이년노자태。속하이엄。무민이은。부단약신。안무체 牘。府中大治。六月。以家忌哭泣過哀。因而氣之。宿疾大發。以某月某日捐館 독。부중대치。육월。이가기곡읍과애。인이기지。숙질대발。이모월모일연관 。歸葬廣州故山。?安東金氏。通政三傑之女。無後。以兄子翊登繼之。嗚呼。 。귀장광주고산。?안동김씨。통정삼걸지녀。무후。이형자익등계지。오호。 公天資明?。充以學問。論議?藉。接人以款。不見有崖岸也。闊略吏事者。文人 공천자명?。충이학문。논의?자。접인이관。부견유애안야。활략리사자。문인 之恒也。而其臨民?事。克勤克密。細務畢擧。所至有去後思。若其律身之嚴。 지항야。이기림민?사。극근극밀。세무필거。소지유거후사。약기율신지엄。 事先之誠。雖古之獨行者。未易及也。家無擔石。而臨祀則雖耕牛畜馬。亦必斥 사선지성。수고지독행자。미역급야。가무담석。이림사칙수경우축마。역필척 賣。極其?潔。忌日則不?粒米。以終其日。居處必?掃靜整。儼然淸坐。手未嘗 매。극기?결。기일칙부?입미。이종기일。거처필?소정정。엄연청좌。수미상 釋卷。其文章。典勁秀傑。有西漢之風。晩年尤喜周易。平生製作。不肯?集。 석권。기문장。전경수걸。유서한지풍。만년우희주역。평생제작。부긍?집。 故其家所藏。僅四卷也。公吾先大父之三從弟也。少嘗問字。過蒙奬借。聽其議 고기가소장。근사권야。공오선대부지삼종제야。소상문자。과몽장차。청기의 論。沾其膏馥者多矣。稔知公之謙德不?。故狀公遺事。而無一毫浮辭。以備太 논。첨기고복자다의。임지공지겸덕부?。고상공유사。이무일호부사。이비태 史公之擇。謹狀。恬軒集卷之三十四 사공지택。근상。염헌집권지삼십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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