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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타야마(片山徹) 선생(先生)
지난 8월 일본 가타야마 선생이 근 70세로 승천하셨다. 나는 종전 전 동경에 체류할 때 쓰카모토(塚本) 선생 집회에서 선생을 만나 많은 폐를 끼치고 또 사랑을 받았다. 선생은 도대체 나에게는 일본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다. 선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모든 것을 초탈한 순수 고고(孤高)한 신앙인이었다. 아니, 실로 천국인이었다. 그리고 내가 선생과 가까워진 데는 이런 일이 있었다. 동경 가서 얼마 안 되어 쓰카모토 선생께서 ‘구하라(久原) 군의 모습’이란 책을 주시며, 집회에 나오는 가타야마 군이 돌아간 친구를 위해 열심히 만든 좋은 책이니 읽으라고 했다. 나는 많은 추억 가운데서 특히 가타야마 선생이 동경대학 4년 동안 한 하숙에서 또 때로는 한 방에서 구하라 씨와 지낸 장문의 추억기를 통해 크리스천의 우정이 어떠한 것인지를 알았고, 또 두 분 선생의 고전 독파 등 독서 생활을 통해 그 후 나의 독서 생활에 많은 지침을 얻었다.
이 무렵부터 서울서 ‘성서조선’ 관계의 선생들이 동경에 오면 대개 가타야마(片山徹) 선생의 주선으로 환영회가 열렸고, 또 여기에 연소한 나 같은 것도 선생께서 꼭 참석을 권해 주셨다. 이래서 나는 차츰 선생이 한국과 관계가 깊은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선생의 선친께서 오랫동안 한국에서 관리로 계셨던 관계로 선생은 소학교도 서울서 다녔고, 서울 중학에서 오카야마(岡山)의 6 고(高)를 거쳐 동경대학 물리과를 나왔으며, 김교신 선생과도 우치무라(內村) 문하의 동지로서 절친한 사이인 것도 알게 되어 더욱 선생을 가까이하게 되었다.
동경대학을 나오신 후 선생은 당시 사관학교에 취직하셨는데, 태평양전쟁이 일어날 무렵 기독자로서 이를 크게 뉘우치고 규슈(九州)의 사가(佐賀) 고등학교에 가셨다가 1, 2년 후 다시 동경 도립고등학교에 오셔서, 수년 전까지 이의 후신인 동경도립대학에 계셨다. 선생은 사가에서 돌아오셨을 때 나 같은 것에게도, 군은 사회 참여를 먼저 하고 공부에 들어왔지만 나는 이번 시골 가서 겨우 세상을 배우고 왔다고 겸손한 말씀을 하셨다.
그리고 이 무렵부터 거지반 전쟁 막판까지 나는 대체로 혼자 수년 동안 선생으로부터 희랍어와 히브리어를 주 1회 교대로 배웠다. 희랍어는 고린도 전후서를 다 읽은 것으로 기억된다. 히브리어는 이사야를 꽤 읽었다. 이때 쓰카모토 선생이 이를 듣고, 노 군은 막연한 공부만 하지 말고, 가타야마 선생과 공부하는 바에야 구약을 좀 본격적으로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는 말씀을 비친 일이 있다.
이런 일도 있어서, 선생께서는 마르티 등 독일 고급 구약 주해서에 의해 내용적으로도 자세하게 가르쳐 주셨다. 그러나 지금 생각하면 당시 전쟁 체제하 교수들의 고달픈 생활 중에서 또 심한 공습 가운데서 선생께 많은 무리를 끼쳤던 것이 아닌가 하여 죄송한 생각을 금할 수 없다. 사실 선생은 생애를 통해 아주 건강한 편은 아니었던 것으로 안다. 수년 전 정년 전에 도립대학을 그만두신 후 가정 집회와 성서 원어반 등으로 수년간 전도에 전력하시던중 폐환으로 자리에 눕게 되셨으며, 그 후 일단 쾌유는 되었으나 이번 돌아가신 것도 이의 여병(餘病)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나는 선생의 개인 신앙 잡지의 출간을 고대했는데 진정 아쉬움을 금할 수 없다. 선생은 정년 후의 사업으로 이도 구체적으로 계획하고 계셨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선생은 성서 원어뿐 아니라 영어·독어·불어·라틴어 등에 정통하신 것은 물론 한국어에도 상당히 깊이 들어가셨던 것으로 안다. 인하여 선생은 쓰카모토 선생의 희랍어·히브리어 원어반에서도 늘 선생의 대강(代講)을 하시는 때도 많았다. 특히 생애 다듬으신 성서 희랍어와 히브리어의 평이한 입문서를 선생은 지난 봄 깨끗한 자필 원고에 의해 출판하셨다. 그 후 또 선생은 한일 양민족의 진정한 친선을 위하여 일본 국민이 쉽게 배울 수 있는 한국어 입문서를 이번 최후 병상에서 완성하셨다고 한다. 일전 보내 온 부인의 편지에 의하면 4월 중순 이후 선생 병상 일기에는 위 ‘한국어 입문’에 대한 구상 기타의 많은 말씀이 계셨다고 한다. “밤중에 잠이 깨면 한국어 문법서에 대한 구상을 짠다.”라는 대목이 많은 것으로 보아, 이는 병상에 계신 주인의 큰 위로였던 모양이라고 부인은 말씀하셨다.
그리고 선생의 이 어학 재능과 또 한국어에 대한 깊은 사랑과 노력은 선생의 선친과도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언제 선생께 들은 이야기지만, 선친께서는 과거 한국에 계실 떄 단독으로 한일사전(韓日辭典)을 계획하시고 수만 매의 카드를 만드셨는데, 은퇴 후 일본에 귀국해서도 이를 만지고 계신다고 하셨다.
나는 위에서 선생은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 모든 것을 초탈한 순수 고고한 신앙인, 아니 실로 천국인이었다고 했는데, 선생은 과연 이 더러운 인간의 현실 가운데서 오직 믿음으로 티없이 깨끗하게 피어난 한 송이 아름다운 기독교적인 인격이었다. 나는 선생을 생각할 때 늘 예수의 산상수훈 8복 중 마음이 청결한 자를 생각한다. 이 청결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나뉘지 않는 한결같은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는 말할 것도 없고, 선생이 믿음의 은사 쓰카모토 선생이나 또 6고에서 모셨던 미타니(三谷) 선생을 대하는 태도 역시, 실로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라는 예수의 말씀 그대로였다. 선생은 청년 시절 동경 와서 우치무라 문하에서 믿음과 성서와 기독교 고전과 성서 원어 등에 열중한 나머지 고등학교 시절의 우수했던 성적이 다소 떨어져 아버님께서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렇게 선생은 내외로 믿음과 성서에 깊이 침잠했으나, 그러나 선생은 선생의 많은 친구들처럼 전문 전도자는 되지 않았다. 그렇다, 선생은 사업—일의 사람이 아니고 믿음의 사람이었다. 선생은 물리학을 했으나 소위 학자는 아니었다. 생애 학위도 없었던 것으로 안다. 말하자면 선생은 신앙적인 숨은 교육자로서 생애를 보내셨다. 학문도 학문이지만 역시 선생은 믿음으로 학생들의 영혼을 깊이 사랑하셨다. 이리하여 선생은 전공인 물리학 이상으로, 믿음에 의한 소수 자신의 학생들의 영혼의 교육자, 수호자였다고 생각된다. 그렇다, 선생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그대로 사람의 영혼에 쏟아 부으셨던 것이 아닌가 한다.
(1968년 12월 제171호)

첫댓글 김교신이 《성서조선》 출간 문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터놓고 의논했던 동지 가타야마 데츠片山徹는 우치무라 문하에서 함께 배운 무교회주의자였다. 부친이 오랫동안 조선에서 관리로 일했기 때문에 소학교와 중학 시절까지 서울에서 자랐고, 도쿄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발발 무렵 기독교 신자로서 이를 크게 뉘우치고 일본 육사를 그만뒀고, 규슈九州의 사가佐賀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도립고등학교에 근무했다.
전시 일본 사회에서 군 관련 직위를 떠나는 것은 큰 희생이었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은 일본 사회의 엘리트 중 엘리트로, 군부 영향력이 절대적인 시대에 군과 가까운 위치는 높은 사회적 존경과 영향력을 보장받았다. 그의 육사 사직은 군부와의 연결을 끊는 것으로, 전쟁 중에는 “비애국적” 낙인이 찍힐 위험도 있었다. 감시나 배제 같은 장기적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었다. 당시 육사 교수(문관)는 고급 관료급 대우로, 일반 고등학교 교사보다 훨씬 높은 급여와 혜택(연금, 주택 등)을 받았다. 그가 고등학교 교사, 특히 지방의 사가 고등학교로 옮긴 것은 급여 저하와 불안정을 의미했다. 가타야마가 신앙 양심으로 군국주의에 협력한 과거를 뉘우치고, 평화로운 교육 현장으로 돌아간 것은 물질적·사회적 안정을 포기하고 신앙을 우선한 큰 희생이었다.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녔던 김교신과 닮은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