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메일
  • |
 
카페정보
카페 프로필 이미지
무교회주의 자료실
 
 
 
 

카페 통계

 
방문
20260828
0
20260829
4
20260830
2
20260831
0
20260901
12
가입
20260828
0
20260829
0
20260830
0
20260831
0
20260901
0
게시글
20260828
0
20260829
0
20260830
0
20260831
0
20260901
12
댓글
20260828
0
20260829
0
20260830
0
20260831
0
20260901
18
 
 
 

회원 알림

 

회원 알림

다음
 
  • 방문
  • 가입
    1. 김다운
    2. 까페룽고
    3. 거북이
    4. 수군작
    5. 요수엘
    1. 여름가을하늘
    2. 깊은바다
    3. 살아 있는 진실
    4. Wonyoung Soh..
    5. 유길팔
 
 

지난주 BEST회원

 

지난주 BEST회원

 

지난주 BEST회원

 
 
카페 게시글
▶[노평구선생] 가타야마(片山徹) 선생(先生)(1968년 12월 제171호)
박상익 추천 0 조회 22 26.09.01 22:04 댓글 2
게시글 본문내용
 
다음검색
댓글
  • 작성자 26.09.01 22:04

    첫댓글 김교신이 《성서조선》 출간 문제로 곤경에 처했을 때 터놓고 의논했던 동지 가타야마 데츠片山徹는 우치무라 문하에서 함께 배운 무교회주의자였다. 부친이 오랫동안 조선에서 관리로 일했기 때문에 소학교와 중학 시절까지 서울에서 자랐고, 도쿄제국대학 물리학과를 졸업한 후 육군사관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그러나 태평양전쟁 발발 무렵 기독교 신자로서 이를 크게 뉘우치고 일본 육사를 그만뒀고, 규슈九州의 사가佐賀 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도립고등학교에 근무했다.

  • 작성자 26.09.01 22:05

    전시 일본 사회에서 군 관련 직위를 떠나는 것은 큰 희생이었다. 육군사관학교 교관은 일본 사회의 엘리트 중 엘리트로, 군부 영향력이 절대적인 시대에 군과 가까운 위치는 높은 사회적 존경과 영향력을 보장받았다. 그의 육사 사직은 군부와의 연결을 끊는 것으로, 전쟁 중에는 “비애국적” 낙인이 찍힐 위험도 있었다. 감시나 배제 같은 장기적 불이익을 초래할 수 있었다. 당시 육사 교수(문관)는 고급 관료급 대우로, 일반 고등학교 교사보다 훨씬 높은 급여와 혜택(연금, 주택 등)을 받았다. 그가 고등학교 교사, 특히 지방의 사가 고등학교로 옮긴 것은 급여 저하와 불안정을 의미했다. 가타야마가 신앙 양심으로 군국주의에 협력한 과거를 뉘우치고, 평화로운 교육 현장으로 돌아간 것은 물질적·사회적 안정을 포기하고 신앙을 우선한 큰 희생이었다. 가슴에 사직서를 품고 다녔던 김교신과 닮은꼴이다.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