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야구는 내 삶의 활력소이다.
프로야구 시즌이 시작되고 텔레비전으로 중계를 보다 보면, 특이한 복장과 분장을 하고 승패와는 상관없이 그냥 응원을 위해 사는 것처럼 행동하는 별난 사람들을 자주 접한다. 우리는 이런 사람들을 야구에 살고 야구에 죽는(野生野死), 야구에 곱게 미친 사람들이라고 부른다. 나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거의 버금한 수준에 있다.
프로야구가 1982년도에 출범했을 때는 사직야구장이 건립되기 전이라, 구덕운동장 동편에 붙은 구덕야구장에서 경기를 했었다. 그해 우리 부서에서도 야구의 인기에 편승하여 단체로 야구 관람을 갔었다. 그날 롯데의 상대는 제과업계의 맞수이자 호남을 연고로 하는 해태 타이거즈였다. 우리는 당연히 홈팀의 응원석인 1루 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런데 문제의 소지가 하나 있었다. 우리 부서의 핵심 선배 중 한 분이 해태를 응원한다는 거였다. 그래서 자리는, 같이 하되 타이거즈 선수가 안타를 쳐도 절대로 손뼉을 치거나 벌떡 일어서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를 하였다. 안 그러면 뒤에서 소주병이 날아와 애꿎은 우리 머리까지 깨진다고 통사정을 하였더니, 선배도 그 정황을 이해하고 그러마고 굳게 다짐했다.
사실 그때 경기장 상황은 보통 심각한 게 아니었다. 내가 경기 중에 화장실에 잠깐 들렀을 때의 일이다. 넥타이를 맨 점잖게 생긴 관중 한 분이 술 취한 집단에게 둘러싸여 멱살잡이를 당하고, 거의 폭행 수준의 욕을 얻어먹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해태 응원하노!”
“안 그래도 경기가 지고 있어서 열 받아 죽겠는데, 확 마!”
경기는 엎치락뒤치락 끝에 홈팀인 롯데가 지고 말았다.
경기가 끝나고 야구장 앞, 구덕맨션 1층에 있는 맥줏집에서 뒤풀이를 할 때였다. 마침 롯데 선수들 몇몇이 퇴근 복장을 하고 우리가 있는 곳으로 쑥 들어왔다.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우리 부서원 중에서 목소리가 큰 선배가 기어이 한소리를 하고 만다.
“경기도 지고 뭐가 잘났다고 뻔뻔스럽게 여기에 기어들어 오노, 그냥 집에나 쳐가지!”
그러자 분위기가 일순 싸해지고, 조금 있으니 선수들이 소리 소문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제야 속에 묻어둔 이야기를 하나 털어놓으려고 한다. 그때의 살벌한 분위기 때문에 인사도 못 했지만, 그중 한 선수는 중1 때 바로 내 뒷자리에 앉았던 친한 급우였다는 사실, 나중에 미스터 올스타를 두 번 하고, 야구계의 신사로 알려진, 감독을 여러 번 한 그 선수, 그날의 분위기상 모른 체 시치미를 뚝 떼고 내 살길을 찾을 수밖에….
그리고 1983년 무렵, 부산에 사무실을 둔 국가기관끼리 친목과 체력증진을 위해 재부 행정기관 체육대회가 열렸을 때였다. 대회는 구덕운동장 주변의 체육시설을 이용하여, 축구, 배구, 육상, 줄다리기 등으로 승부를 겨루는 방식이었다.
나는 축구 선수로 선발되어 축구장으로 임시 개조한 구덕 야구장에서 몸풀기로 공을 다루고 있었다. 내가 찬 공이 3루 벤치 쪽으로 힘없이 굴러갔다. 마침 그 앞에 나와 있던 선수가 공을 발로 차지 않고 손으로 잡아 밝고 겸손한 표정으로 나에게 건네줬다. 그 선수가 고(故) 최동원 선수다.
최 선수의 불같은 강속구와 무쇠 팔의 투혼으로, 롯데는 1984년에 후기리그 우승과 함께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게 되었다. 그 후의 행적을 보면 그는 야구를 위해 살고, 야구의 발전을 위해 혼신을 불살랐던 진정한 부산 사나이임에 틀림이 없다. 약자 편에 서서 시대를 앞서가다 자기를 희생한 거인 중의 거인이 아니던가. 우리 모두는 그에게 너무나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1986년 사직야구장으로 옮기고 난 뒤에는 귀갓길이 멀어서 발길이 좀 뜸해지기는 했다. 그래도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 호국영웅의 시구가 있으면, 행사 겸해서 필히 관람석 한자리를 차지했다. 갈 때마다 느끼는 사항이지만 사직야구장의 응원 열기만큼은 자타 공인 리그 최고 수준이다.
우뚝 솟은 조명탑에 대낮같이 밝은 조명등이 켜지고, 하얀 유니폼을 입은 홈팀의 선수가 푸른 잔디밭에 장난감 병정처럼 포진한다. 이에 어우러진 백구가 경쾌한 타구 음을 울리며 까만 밤하늘을 가르기 시작하면, ‘부산 갈매기’, 돌아와요‘ 등 세상에서 가장 큰 사직 노래방이 펼쳐진다. 뒤이어 찢어진 신문지 흔들기, 완급을 조절한 파도타기, 머리에 덮어쓴 황색 봉다리의 물결 등, 누구라 할 것 없이 열광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든다.
요즘 야구장에 가면 여성과 가족 단위의 관중들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관전 문화가 건전한 쪽으로 잘 성숙되어 있다. 하지만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거친 수컷들이 판을 치는 야생(野生)의 세계가 따로 없었다.
술에 만취하여 욕설은 기본이고, 오물을 투척하여 앞에 앉은 관중들은 마른하늘에 날벼락 맞기 일쑤였다. 2009년에 개봉하여 천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해운대〉를 본 사람들은 다들 공감했을 게다. 술에 대취한 설경구가 철망을 부여잡고 조선의 4번 타자 이대호 선수에게 욕설을 질펀하게 내지르던 장면이 ’어찌 저래 실제와 똑같노!‘ 하고.
사실 현장은 더 난장판이었다. 술에 만취한 관중이 흐트러진 복장으로 경기장에 난입하여 경기 진행요원과 술래잡기를 하는 것은, 애교 수준에 불과하고, 드럼통으로 된 쓰레기통에 불을 질러 드높은 그물망 위로 끌고 올라가 필드에 던져 넣는 고난도의 묘기도 서슴없이 펼쳐냈다. 그게 혼자 힘으로는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데 사태의 심각성이 있다. 누군가 주동이 되어 군중 심리를 부추기면, 영화〈부산행〉의 좀비들처럼 떼거리로 사정없이 확 달려들었다.
성적이 나지 않으면 구단 버스 앞에 드러누워 감독 청문회도 서슴없이 해대고, 버스 유리창도 박살을 내는 등 극성팬들의 등쌀에 선수들도 영화처럼〈극한직업〉으로 내몰렸다고나 할까. 아버지를 따라온 애들을 생각하면 얼굴이 다 화끈거릴 정도였다. 물론 파울볼을 잡으면 “아(이이들)주라!”하는 좋은 풍토를 조성한 것도 있긴 하지만….
휴대폰에서 야구 중계가 보편화되지 않았을 때, 나는 KBO리그가 개막하면 모든 일정을 텔레비전 중계에 맞췄다. 지금은 성적이 부진하여 시들해졌지만, 부산 남자라면 다 그랬다. 회식 중에도 수시로 화장실에 가는 척하며 식당 텔레비전 앞에서 서성였다. 술자리가 파하면 교통비 아끼지 않고 부리나케 택시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 택시 기사는 당연하다는 듯 라디오 주파수를 야구 중계에 맞췄다.
롯데가 한참 꼴찌 탈출을 위해 사력을 다할 때, 텔레비전 중계 화면에 비친 열혈 팬들 손에는 이런 현수막이 들려져 있었다.
“롯데가 잘해야 집구석이 편하다.” 마치 나의 경우를 빗댄 것 같았다.
경기에 지고 나면 기분이 엉망이 된다. 특히 집에서 중계를 보고 있으면 아내가 내 눈치를 슬슬 보고, 가급적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는다. 경기가 잘 풀리지 않으면 온갖 욕설을 다 퍼붓는다. 그러다가 역전이라도 시키면 세상 다 가진 기분으로 혼자서 손뼉을 치고 방방 뛰며 난리도 아니다. 내가 생각해도 살짝 맛이 간 상태가 된다.
그래도 이기는 날은 부부간에 금실이 돈독해지는 효과는 있다. 아내 입장에서는 야구가 병 주고 약 주고 하는 셈이다. 그래서 시즌이 끝나면, 나의 세상 다 끝난 표정과는 달리 아내는 새삼 홀가분한 표정이 된다. '아, 오해하지 마시라!' 이것은 내가 한참 젊고 현직에 있을 때의 이야기다. 지금은 텔레비전 채널 선택권 자체가 없으니, 궁여지책으로 텔레비전 한 대를 더 구입하여 안방에서 쥐 죽은 듯이 조용히 보고 있다.
롯데가 한국시리즈에서 마지막으로 우승한 게 1992년도이다. 그 이후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와서 ‘노 피어(No Fear)’를 강조하며 공격야구를 한 시즌과 양승화 감독이 취임하여 불펜을 동원한 ‘벌떼 야구’로 연달아 가을야구를 한 시즌을 제외한 나머지는 전반적으로 성적이 별로였다. 내 야구 관전사(觀戰史)를 놓고 보면 정신건강에 별로 이로울 게 없었다는 이야기다. 아내도 그만큼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는 뜻도 되고,
우리 다섯 형제의 야구사랑은 큰형님에게서 정점을 찍는다. 큰형님은 소위 말하는 골수 롯데 팬인 롯빠다. 팔순이 넘은 연세 탓인지, 근자에 노환으로 병원에 입원을 하고 치매기도 살짝 있다.
다급한 마음에 전력상 어려운 줄 알면서도 이렇게 억지를 부릴 수밖에.
“롯데야! 우리 큰형님이 건강하고 정신이 온전할 때, 우승이란 선물을 줄 수 있도록 야구 좀 잘하자. 부탁한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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