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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37) ① 현풍→ 구지 창동제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제15구간 (현풍→합천보) ① [현풍→ 구지 창동제]
2020년 11월 01일 (일요일) [독보 32km]▶ 백파
* [현풍 홍시호텔]→ (가을비 속에서)→ 도동서원→ 구지하얀가람→ 강둑 길→ 수변공원 길→ 구지 오토캠핑장→ (대구교육청 낙동강수련원)→ 긴 강둑길→ (중앙119구조본부→ 구지면 대구국가산업단지)→ 창동1제→ 대암4제→ (넥센타이어)→ 내동배수문→ 강변 구비길→ [이노정}→ 전원교회→ 쌍용부페식당→ 고갯마루 점심→ 강변 테크길→ 대암교회→ 목단2리→ 곽재우 장군 묘소→ 우곡교 앞→ 강변길→ 송곡제→ 무심사→ 무심사 산길→ 중마→ 장천 우산리→ 장천 제방길→ 합천-창녕보→ [기원섭 이상배 마중]→ 황강→ 합천(읍)→ 가고파식당 → 제우스모텔]
* [현풍 ; 대구 달성군 현풍읍 원교리] ← 동남쪽에서 ‘차천’ 합류(천왕산 발원, 달창저수지 경유)
* [경상북도 고령군 덕곡면 율지리] ← 북쪽에서 ‘회천’ 합류(수도산 / 가야산 동면 발원, 고령 경유)
오늘의 낙동강 종주 (1) ― 현풍→ 도동서원→ 구지 대구국가산업단지
11월 1일 오늘은 낙동강 종주 제15구간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에서 합천-창녕보까지 걷는다. 현풍을 출발하여 먼저 다람재(터널)를 지나 ‘도동서원’을 탐방하고 달성군 구지면의 긴 제방 길을 걸어, 창녕군의 영역에 있는 ‘무심사’ 고개를 넘어 합천-창녕보에 이르는 여정이다. 그리고 다시 현풍으로 와서 상경할 예정이다. 수요일에 문화원 강의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출행에 앞서, 현풍시외버스 터미널 앞에 대기하고 있는 택시 기사에게 오후 시간에 맞춰 합천보에 와 주도록 예약을 했다.)
가을비 내리는 날, 빗속의 출행
오전 8시, 아침에 일어나 행장을 차려 나가보니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아! 오늘은 비오는 낙동강이구나!’ 아침식사를 하기 위해 시가로 나갔다. 일요일 이른 아침, 대부분의 식당은 문을 열지 않았다. 유일하게 열려 있는 김밥집에 들어가 따끈한 오뎅국물을 곁들여 식사를 하고 점심까지 준비하였다. 차가운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방수 외장의 파카를 입었다. 현풍시외버스터미널에 가서 상경하는 고속버스 시간을 확인하고 오늘의 종주에 돌입했다. 현풍천을 따라서 내려오다가 현풍고등학교 앞에서 다리[5번 국도 현풍3교]를 건너 낙동강 강안의 도로에 들어섰다. 강안까지 약 2km, 빗줄기가 그침없이 떨어진다. 우무(雨霧)가 끼어 강안의 풍경도 잔뜩 흐린 상태였다. 바이크로드는 강변의 지방도로에 곁들여 있다. 비오는 날 이른 아침 간간이 자동차가 오갈 뿐 오가는 사람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강변도로, 다람재터널
잘 정비된 낙동강 강변의 길은 늘 아득하게 보인다.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겼다. 중부내륙고속도로 교각 아래를 지나 ‘차천’ 하구(河口)의 다리를 건넜다. ‘차천(車川)’은 청도와 창녕의 경계에 있는 천왕산(619m)에서 발원한 운봉천이 창녕군 성산면 달창저수지를 경유하여, 이곳 현풍읍 원교리에서 낙동강에 유입된다. 하구 둔치의 잔디밭에 현픙읍 ‘원오파크골프장’이 있다. 새로 포장한 강변도로는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직선으로 뻗어 있었다. 몸을 가지런히 세워 마사이보법으로 나아간다.
현풍읍에서 6km 걸어온 지점에 갈림길이 있다. 왼쪽으로 가면 ‘다람재’를 넘어가는 구 도로이고, 직선의 길로 바로 가면 새로 건설된 ‘다람재터널’을 통과한다. 내가 작년(2019년) 8월 30일 도동서원을 탐방할 때 터널 공사가 한창이었는데, 그 사이 터널이 개통하고 도로도 산뜻하게 포장을 .해 놓았다. 작년에 이곳을 지날 때 다람재를 넘으면서 그 고갯마루에서 도동서원과 낙동강을 조망(眺望)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바쁜 일정을 생각하여, 터널로 통하는 바이크로드를 택하여 걷는다. 자동차가 다니는 터널 길은 어둡고 시끄러워 불편하지만 직선의 거리가 짧다. 다람재 도로는 가파른 산길을 굽이굽이 돌아서 넘어야 하는 난(難) 코스이다. 거리나 시간이 터널 길에 비해 3배 이상 힘이 든다. 오늘의 몸은 터널의 바이크로드를 따라가지만, 내 마음은 작년의 다람재를 넘는다.
도동서원 가는 길, ‘다람재’
작년 2019년 8월 국제퇴계학연구회(회장 이광호 박사)에서 ‘道學의 源流를 찾아서’라는 주제로, 2019년 7월 6일, 유네스코 (UNESCO)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우리나라 9개 서원을 탐방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그때 필자도 참여하여 다람재를 넘어 도동서원을 탐방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현풍에서 도동1리, 도동서원으로 넘어가는 길은 다람재를 넘어야 했다.
다람재는 느티골과 정수골 사이의 산등성이가 마치 다람쥐를 닮아 붙여진 이름이다. 원래 강변 벼랑에 난 오솔길이 있었는데 1986년 산허리를 끼고 도는 이 도로를 닦았다. 이 다람재 도로를 준공하고 나서 고갯마루에 ‘다람재 기념비’를 세웠다. 이르기를 ‘재 너머 마을들이 이웃이 되면서 훈훈한 인정과 복지의 짐바리가 거침없이 넘나들게 되었다. 영남의 젖줄인 낙동강 푸른 물결에 상고선이 줄을 잇고 나루 흥청거리던 번영을 뒤찾자 … / 1986년 12월 26일 / 달성군수 신영식 짓고 취헌 곽동주 쓰다’ 그런데 지금은 평지의 ‘다람재터널’이 개통되어 힘들게 산을 오르내리는 고갯길을 이용하지 않는다.
‘다람재’에는 낙동강과 도동마을을 조감할 수 있는 높다란 ‘육각정’이 있다. ‘도동서원’도 뚜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오른편으로는 멀리 잦아드는 산줄기 사이로 꼬리를 감추며 낙동강이 유장하게 흐르고, 왼편으로는 다복솔 들어찬 대니산이 몸을 낮추며 강으로 다가드는 산자락, 고가(古家)의 강마을 곁에 낙동강을 바라보며 북향의 서원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
다람재에는 도동서원의 주인공인 김굉필이 쓴 시의 비석이 있다. 흘림체 글씨의 칠언시 「路傍松(노방송)」(길가의 소나무)이다.
一老蒼髥任路塵 (일로창염임로진) 한 그루 늙은 소나무 길가에 서 있네
勞勞迎送往來賓 (노노영송왕래빈) 괴로워도 오가는 길손 맞고 보내네
歲寒與汝同心事 (세한여여동심사) 찬 겨울에 너와 같이 변하지 않는 마음
經過人中見幾人 (경과인중견기인) 지나가는 사람 중에 몇이나 보았느냐
길가의 한 그루 노송(老松)이 산을 넘어가는 고단한 나그네를 영송(迎送)하는데, 그 마음은 ‘일로창염(一老蒼髥)’, 차가운 세태에도 변하지 않은 푸른 절조(節操)를 지니고 있다. 이 소나무는 세상을 바라보는 한원당 김굉필의 마음을 상징하는 것은 아닐까. 이것은 변하지 않은 조선의 선비 정신일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 …’은 염량세태(炎凉世態)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공자도 송백(松柏)의 절조를 말씀하셨다. “날씨가 추워진 후에야 소나무와 잣나무의 푸름을 알게 된다.(子曰 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也)”고 했다.『논어』 자한편(子罕編)에 나오는 말이다.
추사(秋史)도 그의 「세한도(歲寒圖)」에서 제자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의 변함없는 마음을 이 ‘세한(歲寒)의 송백(松柏)’으.로 표현했다. 「세한도(歲寒圖)」는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59세 때인 1844년, 제주도 유배 당시에 그린 것으로 지위와 권력을 잃어버렸는데도 사제 간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고 그를 찾아온 제자인 역관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1865)에게 그려준 것이다. 일체의 장식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최소한의 먹만으로 빈집과 노송, 세 그루의 잣나무를 그렸다. 잎이 다 떨어져 겨우겨우 목숨을 이어가는 듯한 노송과 잣나무는 말 그대로 황량하고 추운 풍경이다.
그리고 그림과 그리게 된 시말(始末)을 적은 글이 화면에서 같은 비중을 점한다. 유배지의 자신을 잊지 않고 연경(燕京·지금의 베이징)에서 귀한 책들을 구해다준 제자 이상적의 인품을 칭송하며 답례로 그려 보낸 것 이다. 추사(秋史)가 유배지에서 붓을 들었다. “우선(藕船), 이것을 보시게. … 한겨울 추운 날씨가 된 다음에야 송백이 시들지 않음을 알게 된다네(歲寒然後 知松柏之後凋). 그대는 나에게 귀양 이전이라고 더 해준 것이 없고, 귀양 이후라고 덜 해준 것이 없다. 이전의 그대는 칭찬할 게 없었지만 이후의 그대는 성인(聖人)의 칭찬을 받을 만하지 않겠는가?”
다람재, 한훤당 김굉필의 시 「노방송」의 고절한 정신은 조선을 관류하는 선비 정신의 근본을 이룬다. 그 노송의 정신이 「세한도(歲寒圖)」에 시퍼렇게 살아있다. 「세한도(歲寒圖)」는 국보 180호로 지금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김굉필과 도동서원
다람재에서 산 굽이길을 돌아 1km 아래 내려오면 터널 길과 만나게 되고 바로 도동서원 앞에 이른다. 서원 앞에는 오래된 은행나무 거목(巨木)이 서 있다. 서원의 지킴이처럼 버티고 서 있다. 도동서원의 건립을 기념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심었다는 바로 그 은행나무이다. 한강 정구는 한훤당 김굉필의 외증손자이다. 한훤당의 따님이 곧 한강의 할머니인 것이다. 오늘따라 가을비가 내리는 음산한 날인데도, 만추의 은행나무는 정결한 황금빛으로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 달성 도동서원(道東書院)은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1454∼1504)의 도학과 덕행을 숭앙하기 위해 세운 서원으로,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 도동1리에 있다. 현풍에서는 낙동강을 오른편에 끼고 약 6㎞쯤 가면 닿는 곳이다. 도동서원은 대니산(戴尼山)의 한줄기가 서북으로 뻗어 내린 끝자락 북쪽 기슭에 북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앞으로 낙동강 건너 고령 땅 개진면 들이 넓게 펼쳐진 곳이다. 서원 앞에는 보호수로 지정된, 수령이 오래된 은행나무가 있고, 그 뒤로 비교적 경사가 급한 지형을 따라 서원이 조성되어 있다.
도동서원은 원래 1568년(선조 1)에 현풍 비슬산 기슭 쌍계동에 건립되었으나, 1597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자, 1605년(선조 38) 지금의 자리에 '보로동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중건되었고, 1607년에 ‘道東書院’(도동서원)'으로 사액을 받았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은 김굉필을 두고 '동방도학지종(東方道學之宗)'이라고 칭송했는데, '도동(道東)'으로 사액한 것도 공자의 도(道)가 동쪽으로 왔다[東來]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1865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 때에도 훼철되지 않은 47개 서원 가운데 하나로 병산서원·도산서원·옥산서원·소수서원과 더불어 5대 서원으로 꼽힌다. 서원 건축이 가져야 할 모든 건축적 규범을 완벽히 갖추고 있는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서원으로 평가된다.
도동서원(道東書院)이 건립된 현풍(玄風) 땅과 김굉필(金宏弼)이 관계를 맺게 된 연유는 증조부 김중곤이 현풍 곽씨 가문에 장가를 들어 현풍에 정착하면서부터이다.
성장기를 현풍면 대니산 남쪽 솔례촌에서 보낸 한훤당은 호탕하게 놀기를 좋아하고 거리낌이 없었는데, 18세 때 합천군 ‘야로’에 있는 집안에 장가들면서 처가 근처 계곡에 ‘한훤당(寒暄堂)’이라는 조그마한 서재를 짓고 학문에 열중하게 된다. 이때 인근에 위치한 함양군수로 있던 점필재(佔畢齋)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의 수제자가 되어 『소학(小學)』을 배우면서 정몽주(鄭夢周)-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맥(脈)을 잇게 된다.
도동서원(道東書院)
도동서원을 구성하는 건물들은, 반듯하게 설정한 중심축을 따라 수월루(水月樓), 환주문(喚主門), 중정당(中正堂), 내삼문(內三門), 사당(祠堂)이 차례로 배열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중심축에는 이를 명확하게 나타내기 위한 통로와 계단이 자리하고 있다. 이는 성리학을 집대성한 주자(朱子)가 말한 ‘추뉴(樞紐)’, 즉 만물의 축과 중심성을 나타낸 것으로 해석된다.
이와 같이 도동서원의 전체적인 건축 구성과 배치 형식은 우리나라 서원 건축 중 가장 규범적이고 전형적이며, 건축적 완성도와 공간 구성도 우수하다는 평을 듣는다. 특히 1600년대에 건립된 강당과 사당 등 건물들은 당시 서원과 사묘(祠廟)건축을 대표할 만큼 매우 훌륭한 짜임새를 보이고 있다.
도동서원에는 나직나직 막돌허튼층쌓기한 4단의 석축이 가지런하다. 이런 석축이 유난히 많아 사당에 이르기까지 무려 18개의 석단이 폭과 높이를 바꿔가며 전개된다. 경사진 터를 적절히 나누어 넓은 곳에는 건물을 앉히고 좁고 가파른 곳에는 뜰을 가꾸었는데, 쌓아올린 기법이 동일하여 통일성을 유지하면서도 높고 낮게, 넓고 좁게 변화를 주어 아기자기한 멋을 만들어낸다.
[수월루(水月樓)와 환주문(喚主門)]▶ 서원 입구의 문루인 ‘수월루(水月樓)’는 유생들이 휴식과 풍류를 즐기던 곳으로, 1888년(고종 25)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73년에 중건되었다. ‘물 위에 비친 달빛으로 글을 읽는다’는 뜻을 가진 수월루는 서원의 정면에 솟아 있다. 난간을 두른 2층 누마루에 오르면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서원 주변의 경관이 한눈에 들어온다. 그런데 수월루는 ‘다른 건물의 담박함에 비하면 지나치게 기교적이고 부재들이나 구조도 빈약하여 오히려 도동서원의 품격에 흠이 된다.’는 평을 받기도 한다.
수월루 안쪽은 사방이 담장으로 막힌 좁고 가파른 공간이다. 강학공간으로 올라가는, 가운데 좁은 계단이 가볍게 환주문까지 이어진다. 환주문(喚主門),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는 뜻이지만, '환주(喚主)'는 단순히 문 안에 있는 주인을 부르는 말이지만, '내 마음의 주(主)가 되는 근본을 찾는다’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 환주문은 도동서원 중정당으로 들어가는 문인데, 갓을 쓴 유생들이 고개를 숙여야만 들어설 수 있을 정도로 크기가 낮고 작다. 절병통이 얹힌 사모지붕이다. 문턱 중간에 꽃봉오리를 새긴 돌을 박아 잠시 머물기를 유도하기도 한다. 은연 중 겸손과 절제의 예(禮)를 가르치는 것이다.
[중정당(中正堂)]▶ 서원 정문인 환주문에 들어서면, 너른 마당 위로 강당인 중정당(中正堂)이 올려다 보인다. 중정당은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장중한 건물이다. 평면구성은, 가운데 세 칸은 대청이며 그 좌우로 한 칸 반짜리 온돌방을 들이고 나머지 반 칸에 마루를 깔아 대청과 연결시켰다. 덤벙주초에 굵직한 민흘림 두리기둥을 세우고 그 위에 주심포를 짜 올렸으며 창방의 중간마다 화반을 받쳤다. 지붕 끝은 겹처마로 정리하고 양 측면 박공에는 풍판을 달았다. 주심포식 건물로 기단이 높은 탓인지 크기보다 웅건해 보인다. 마치 흔들림 없는 도학자의 의젓하고 당당한 풍모를 느끼게 한다. 1605년 완공되었으며 서원을 감싸는 담장과 더불어 보물 제350호로 지정되어 있다.
[중정당의 기단(基壇)]▶ 기단은 계단의 디딤돌을 일곱 단으로 쌓을 만큼 높다. 크기와 색깔이 다른 돌들이 빈틈없이 서로 맞물려서 조화를 이룬다. 정면에는 양쪽으로 나누어 계단을 내었다. 갑석 바로 아래에는 네 마리 용이 물고기와 여의주를 물고 머리만을 내밀고 있는가 하면, 다람쥐를 닮은 작은 짐승이 꽃송이를 옆에 두고 오르고 내리는 모습의, 조각된 돌이 박혀 있기도 하다.
[생단(牲壇)과 정료대(庭燎臺)]▶ 중정당 서쪽 마당에 사각형 돌기둥에 받쳐진 정사각형의 판돌이 하나 놓여 있다. 생단(牲壇)이라는 것이다. 생(牲)이란 향사 때 제수로 쓰일 소나 돼지·염소와 같은 짐승을 말한다. 생단은 제사 전날 제관들이 그 생을 올려놓고 품질이 제수로 적합한지를 검사하는 곳이다. 강당의 대청 앞 기단의 중앙에 놓인 정료대(庭燎臺)는 긴 돌기둥과 사각형의 상석으로 이루어졌다. 정료대란 상석 위에 솔가지나 기름통을 올려놓고 불을 밝히는 일종의 조명대다. 서원의 정료대는 야간에 치르는 제례 때 쓰이며, 보통 사당 앞마당에 설치된다. 도동서원처럼 강당 바로 앞에 놓이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강당 앞마당 좌우에 위치한 동재와 서재는 구조와 크기가 같아 서로 대칭을 이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한 칸은 마루이고 두 칸은 온돌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자연 방위상으로는 서쪽에 놓인 거인재(居仁齋)를 동재(東齋)라 부르고 동쪽에 있는 거의재(居義齋)를 서재(西齋)라 일컫는다는 점이다. 서원의 좌향이 북향인 데서 오는 변화로서 자연방위에 관계없이 인간의 인식을 우위에 두는 성리학적 세계관의 작은 표현이라 하겠다.
[내삼문(內三門)과 사당(祠堂)]▶ 중정당을 돌아들면 가파른 경사지를 5단의 얕은 축대를 쌓아 분할하고, 그렇게 생겨난 터에 모란을 듬성듬성 심고 배롱나무에게도 한 자리를 베풀었다. 가운데에는 내삼문으로 오르는 계단을 내었다. 거칠긴 하지만 봉황으로 보이는 짐승을 새긴 소맷돌까지 갖춘 계단은 지세에 맞추어 자연스런 곡선을 그린다.
강당 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내삼문(內三門)이 서 있고, 그 뒤에는 담으로 두른 일곽에 사당(祠堂)이 있다. 정면 3칸 측면 3칸의 겹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다. 제향공간인 사당은 서원의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다. 사당에는 한훤당(寒暄堂)김굉필(金宏弼)을 주벽으로 하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는 자연으로 돌아가 자연과 일체가 되기를 원하는 김굉필의 도학정신을 표현한 벽화(壁畵) 두 점이 있다. ☜ [도동서원] (한국미의 재발견—궁궐·유교건축, 2004.11.30., 이상해) 참조
… 2019년 7월 6일, 제43차 유네스코 (UNESCO) 세계유산위원회에서 우리나라 9개 서원이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이 9개 서원 가운데 도동서원이 포함되어 있다. 최초의 서원인 영주 소수서원(1543년 건립)을 비롯하여, 함양 남계서원(1552년 건립), 경주 옥산서원(1573년 건립), 안동 도산서원(1574년 건립), 장성 필암서원(1590년 건립), 달성 도동서원(1605년 건립), 풍산 병산서원(1613년 건립), 정읍 무성서원(1615년 건립), 논산 돈암서원(1634년 건립) 등이다.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
김굉필(金宏弼)의 본관은 서흥(瑞興), 자는 대유(大猷), 호는 사옹(蓑翁)·한훤당(寒暄堂)이며,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서 학문을 배우면서 특히 『소학(小學)』에 심취하여 스스로 ‘소학동자(小學童子)’라 칭하였다. 1480년(성종 11) 초시에 합격하였으며, 1494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에 의해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주부·감찰·형조좌랑 등을 역임하였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평안도 희천에 유배되었는데, 그곳에 찾아온 조광조(趙光祖)에게 학문을 전수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극형에 처해졌으나 중종반정 이후에 신원되어 도승지가 추증되고, 1517년에는 정광필(鄭光弼) 등에 의해 우의정이 추증되기도 했다. 학문경향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로 이어지는 의리지학(義理之學)을 계승하였으며, 치인(治人)보다는 수기(修己)에 중점을 두었다.
문인(門人)으로는 조광조(趙光祖)·이장곤(李長坤)·김안국(金安國) 등이 있으며, 16세기 기호사림파(畿湖士林派)의 주축을 형성하였다. 1610년(광해군 2) 정여창(鄭汝昌)·조광조(趙光祖)·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 등과 함께 동방5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됨으로써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계승한 인물로 인정받았다. 아산의 인산서원(仁山書院), 희천의 상현서원(象賢書院), 순천(順天)의 옥천서원(玉川書院), 달성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한훤당집』, 저서에 『경현록(景賢錄)』, 『가범(家範』등이 있다.
성균관 문묘(文廟)에 종사된 조선 초 성리학자 김굉필(金宏弼)은, 어렸을 때 아버지의 무인 기질을 닮아 호방하기도 했지만, 집안의 귀한 독자였던 탓에 거리낄 것 없었다. 어린 김굉필의 거친 성품은 예법을 중시하는 엄한 어머니의 가르침을 받았다. 어머니는 김굉필에게 새벽마다 마루 아래에서 문안을 시키며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 있으면 엄정한 얼굴빛으로 훈도를 했다. 김굉필은 장성해서 글을 배워 생원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성종 11년(1480) 김굉필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김굉필의 학업 성취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은 21세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하에 들어가 배운『소학』이었다. 김종직은 김굉필에게 『소학』을 가르치며, “진실로 학문에 뜻을 두려면 마땅히 이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광풍제월(光風霽月)도 이것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라고 했다. ‘광풍제월’이란 비 갠 뒤 맑게 부는 바람과 밝은 달이란 뜻이다. 마음이 넓고 쾌활하여 아무 거리낌이 없는 인품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도 쓰이는데, 이 말은 북송北宋 때 황정견(黃庭堅)이 주돈이(周敦頤)의 인품을 평한 데서 유래한 말이다. 『태극도설太極圖說』을 지은 주돈이는 성리학의 개척자 중 한 명이다. 김종직은 『소학』을 초학자들의 입문서로만 간주하지 않고, 성리학 공부의 요체로 판단하고 김굉필에게 권했다.
『소학』정신의 실천과 교육에 매진했던 김굉필에게 출사의 기회가 찾아온 것은 41세 때인 성종 25년(1494)이었다. 이때 그는 숨은 선비[遺逸]를 천거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경상감사의 추천을 받고 서울 남부의 참봉(종9품)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다음 해 연산군 1년(1495)에 전생서(典牲署) 참봉으로 옮겼다. 연산군 2년(1496)에는 군자감 주부(종6품)가 되었고, 곧바로 사헌부 감찰(정6품)로 자리를 옮겼다가 연산군 3년(1497)에 형조 좌랑(정6품)을 맡았다.
연산군 4년(1498)에 무오사화(戊午士禍)가 일어나자 김종직의 문도라는 이유로 유배형을 받았다. 그리고 다시 연산군 10년(1504) 갑자사화(甲子士禍) 때 참형을 받고 저잣거리에 효수되었다. 김굉필의 마지막 모습은 단아하고 비장했다고 한다. 사형 명령이 내려지자 김굉필은 목욕재계하고 관대(冠帶)를 갖춘 후 형장에 나갔다. 그리고 손으로 수염을 쓰다듬어 입에 물고 칼날을 받았다. “몸과 터럭과 피부는 부모에게 받은 것이니 감히 훼손할 수 없다.(身體髮膚 受之 父母 不敢毁損)”는 『효경孝經』의 가르침을 마지막까지 지키려 했던 것이다.
그는 당나라 한유韓愈의 글을 좋아했고, 특히 ‘장중승전 후서(張中丞傳 後序)’에서 장순(張巡)이 남제운(南霽雲)에게 “남아는 죽어도 불의(不義)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南兒死耳 不可爲不義屈)”고 말했던 대목을 읽을 때마다 세 번 되풀이해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의 죽음도 불의에 굴하지 않은 의연한 죽음이었다. ☜ 최연식,『조선 지식인의 국가경영법
구지하얀가람’ 길 — 바이크로드 도동제(堤)
오전 9시 10분, 도동서원 탐방을 마치고 다시 낙동강 강안의 도로에 들어섰다. 날이 많이 훤해졌지만 여전히 비는 내리고 있었다. 다행이 빗줄기가 거세지는 않았다.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방수복 파카를 입었으니, 아무리 비가 내려도 문제는 없다. 서원 앞 낙동강은 옛날 도동나루, 거기에서 조금 내려오니 갈림길, 도로와 강둑으로 이어지는 바이크로드가 갈라지는 지점이다. 길 우측에 ‘구지하얀가람’이라는 조형물이 있다. 말하자면 지금부터 이 강변 길이 구지하얀가람길[도동제(堤)]인 것이다. 여기부터 1,7km 나가면 ‘수달서식처’가 있다는 이정표도 있다. 이제 도로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트레킹에 돌입했다. 긴 제방 길이 이어진다. 오른쪽 강안은 ‘청보리뜰’이다. 직선의 길을 한참동안 걸었다.
차가운 가을비 내리는 날
간간이 얼굴을 때리는 빗방울을 맞으며 걷는다. 지난 8월 3일 태백 황지를 출발한 이래, 이렇게 비를 맞으며 걷는 것은 처음이다. 내가 낙동강 물길을 걷는 동안 하늘은 늘 쾌청하고 태양은 화사하게 길을 열어주었다. 그런데 오늘 11월 1일,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주변의 수목이 노랗게 가을 물이 들고 강가의 빛바랜 잡초들이 비에 젖고 있다. 낙동강에 비가 내린다. 내가 감상주의자인지는 몰라도 나는 비오는 날을 좋아한다. 아니 무연히 비를 맞고 걷는 것을 좋아한다. 낙동강 긴 여정 속에서 홀로 가는 길. 혼자서 비를 맞고 걷는 것이 호젓하고 고적해서 좋다. 내 시야에는 사람은 물론, 정말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그야말로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니 자유도 이런 완벽한 자유가 없다. 스스로 여유가 생기고 다리에 힘이 솟는다. 문득 ‘인자무적(仁者無敵)’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맹자의 말이다. ‘내 마음이 넉넉하고 따뜻함으로 충만하면 세상 모든 것을 다 사랑할 수 있다’는 뜻이다.
남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물길
오전 9시 26분, 바이크로드 직선의 주로의 바닥에 ‘↑낙동강 하구둑 165km, ↓안동댐 220km’가 표시되어 있다. 그리고 아득하게 길이 이어진다. 얼마 가지 않아 길은 좌측으로 완만하게 구비를 튼다. 현풍에서 여기까지는 낙동강이 동쪽에서 서쪽으로 흘러왔는데, 이제 그 방향을 남쪽으로 바꾸는 것이다. ‘ㄱ’자로 휘어져 가는 둑방의 길이다. 길의 좌측에는 구지면 도동리 마을과 초록빛 들판이 펼쳐져 있다. 가을비의 물기를 머금어 더욱 싱그러운 풍경이다. 그리고 오른쪽으로는 강안의 습지 너머로 낙동강물이 호수처럼 고요하다.
그리고 낙동강을 중심으로, 오른쪽 강 건너는 고령군 우곡면 야산이다. 낙동강 강안까지 내려와 있다. 좌측의 구지(면)에는 대니산의 끝자락인 진등산, 석문산이 하얀 안개를 드리우고 구지면 마을을 감싸고 있다. … 여기가 거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영우 정성수 사장이, 여기 구지면에 유명한 인물로 쌍용그룹의 김성곤 회장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의 말에 의하면 ‘구지 사람’ 치고 김성곤 회장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그는 이곳 낙동강 달성에서 태어나 크게 성공을 하였고, 그리하여 고향을 위해 많은 기여를 한 모양이었다.
현풍`구지의 인물 김성곤(金成坤), 쌍용그룹과 국민대학교를 경영한 …
기록에 의하면, 김성곤은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읍 하리에서 김광도(金光度)와 김봉옥(金鳳玉)의 5남 1녀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 1950년 6·25전쟁으로 김성곤이 경영한 금성방직 안양공장이 불탄 뒤, 1952년 동양통신을 창간하고 1953년 연합신문을 인수하였다. 1956년 태평방직과 아주방직을 인수한 데 이어, 1958년 달성에서 제4대 민의원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1959년 국민학원(지금의 국민대학교)을 인수하고, 1960년 대한유도회 회장에 피선되었으며, 1962년 국제신문편집인협회(IPI) 정회원이 되었다. 1962년에 이르러 쌍용양회를 설립하여, 국내 굴지의 쌍용그룹으로 재벌의 위치를 굳혔다. 그는 또 국회 재경위원장으로 활약하기기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 1975년 갑자기 타계하였다. 가족장으로 국민대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가 1984년 강원도 평창에 이장되었고, 2014년 고향인 이곳 대구광역시 달성군 구지면으로 재이장되었다. 국민훈장 무궁화장이 추서되었다.
구지하얀가람 수변공원길
오전 9시 40분, 도동서원에서 2.5km 내려온 지점, 바이크로드는 강안의 수변공원으로 내려가고 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면 강 건너 첩첩 산록에 하얀 안개를 드리운 산들이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구지하얀가람 수달습지’를 안내하는 이정표가 있다. 아마 이곳 습지에 야생수달이 서식하는 모양이다. 여기서부터 구지 슬로우비치까지가 수변공원이다. 산책로와 화장실 그리고 주차장까지 갖추고 있다. 습지의 바이크로드는 길 양 옆으로 비에 젖은 잡초가 우거지기도 하고 떡버들나무가 군락의 가로수를 이루고 있다. 그런데 그 동안 소강상태를 보이던 빗줄기가 세차게 쏟아지기 시작했다. 파카 후드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요란하다. 방수가 잘된 옷이라 비가 몸에 스며들지는 않는다. 그런데 몸에 와 닿는 굵은 빗줄기가 뭔지 모르게 편안한 느낌이 들었다. 일종의 정화(淨化)의 의식 같은 느낌 … 나에게 아직도 남아있는 묵은 것들, 불량한 군더더기를 씻어내는 듯한 카타르시스를 맛본다. 주변에 풍경을 돌아볼 여유가 없으니 발목에 힘을 주고 다급한 빗소리에 맞추어 자진모리로 걸을 뿐이다. 이정표가 '합천-창녕보까지 17.6km'를 가리키고 있다. 비는 계속해서 쏟아지고 있었다.
광활한 갈대밭, 무성한 잡초가 우거진 둔치의 공원 길이다. 길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비를 맞으며 한참 동안 걸었다. 비가 소강상태를 보이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오전 10시 정각, 약 20분 동안 큰비를 맞았다. 건너편(고령) 강안의 산록에는 뽀얀 안개가 산등성이를 감고 돌아가는 가을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 그리고 좌측의 산도 빗줄기에 씻긴 듯 맑은 기운이 감돌고 지방도로의 가로수가 울긋불긋 단풍이 들어 아름다운 풍경화를 보여주고 있다.
낙동강오토캠핑장 그리고 대구교육청 낙동강 연수원
오전 10시 24분, 제방(堤防) 길로 올라섰다. 제방 옆에 바로 구지면 오설리 ‘강변오토캠핑장’과 ‘낙동강레포츠밸리’ 건물이 산뜻하게 자리하고 있다. 네온의 자막이 돌아가는 건물 앞에는 수십 대의 캠핑카가 좌우의 열을 맞추어 광장을 매우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니 원근법의 초점이 보이지 않는 아득한 직선의 주로가 가다리고 있다. 제방의 주위에는 나무 한 그루 없이 환하게 열려있다.
오전 10시 32분, 구지면 징리, 제방의 좌측에 아주 깔끔한 현대식 건물이 연이어 있다. 숙소인 콘도식 건물과 대구광역시 교육청 낙동강연수원 건물이었다. 그리고 식당을 겸한 대형 강당 건물이 이어지고 야외 잔디구장, 야외 공연장 그리고 아기자기하게 가꾼 공원의 산책길이 산뜻하게 조성되어 있었다. 공기 맑은 낙동강변에 대구시의 교사들이나 학생 등 교육관계자들이 연수를 하거나 휴양을 겸하는 시설이었다. ‘참 공기 맑은 강변, 좋은 자리에 멋진 시설을 해놓았구나!’ 생각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건물 벽 위에 ‘대한민국 교육 수도, 대구’라고 쓴 알록달록한 색채 로고가 눈길을 끌었다.
직선의 제방은 끝이 없이 이어진다. 강안의 너른 둔치는 갈대와 잡초가 무성하여 강물은 보이지 않는 다. 바이크로드 길바닥에 ‘↑낙동강 하구둑 160km, ↓안동댐 225km'가 표시되어 있다. 낙동강 자전거길은 경상북도 북부의 안동댐과 부산광역시 낙동강하구둑, 부산 사하구 하단동 을숙도를 잇는 바이크로드를 말한다. 앞으로 부산까지 400리를 더 걸어가야 한다. 태백의 황지를 기점으로 하면, 종주하는 낙동강 1,300리 중 900리를 걸어온 셈이다. 그러나 아직도 갈 길이 멀다! … 세차게 내리던 비는 멈추었다. 잔뜩 흐리지만 비를 마감한 하늘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상배 대장의 전화] — 기원섭 일행, 합천-창녕보에서 만나요!
오전 10시 50분, 전화벨이 울렸다. 이상배 대장이었다. 지난 8월 3일, 강원도 태백에서 낙동강 종주를 시작할 때, 봉화의 분천까지 함께 동행했던 기원섭을 비롯한 이진애·김옥련 대원과 함께하면서 전화를 한 것이다. 이 대장과 기원섭 일행은, 오늘 오전 왜관에서부터 달성의 하빈까지 낙동강 라이딩을 하고, 오후에 SUV 자동차를 몰아 합천-창녕보까지 가서, 거기서 나를 기다리겠다는 것이었다. 봉화 분천 이후 기원섭 일행은 자동차에 ‘미니벨로Minivelo’(접이식 자전거)를 싣고, 여기저기 낙동강 명소를 찾아서 라이딩을 즐기고 있는 중이었다. 그러므로 그 동안 오직 ‘두 발로’ 종주(縱走)하는 나와 같이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런데, 오늘 라이딩 일정을 나의 일정에 맞추어 합천-창녕보에서 만남을 갖고자 하는 것이다. 고맙고 반가웠다. 오늘 같이 차갑게 가을비가 내리는 날, 외로운 낙동강 여정에서, 처음 뜻을 함께했던 ‘대원들’이 합천보에서 기다리겠다고 하니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 그런데 나는 오늘 합천-창녕보까지 종주한 뒤, (11월 4일 수요일 문화원 강의가 있어) 아침 현풍에서 미리, 합천보까지 택시가 오도록 예약해 놓았다. 현풍에 와서 고속버스편으로 상경할 예정이었다.
잠시 마음의 갈등(葛藤)했다. … 그러나 반가운 친구들의 호의를 뿌리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예약한 현풍의 택시 기사님에게 여차여차 전화를 했다. 아침에 기사님을 통해서 예약한 저녁 6시 30분 서울행 고속버스표와 합천보 왕래 택시 예약을 취소했다. 너무나 미안했다. 괜히 나로 하여 번거로움만을 드린 것 같아서 너무 미안했다. 그래서 예약한 고속버스표를 취소할 수 없거나 위약금이 발생하면 배상하겠다는 말씀까지 드렸다. … 잠시 후 기사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모든 것을 잘 처리했으니 좋은 여행이 되기를 바란다고 하셨다. 현풍의 착한 기사님! 언젠가 현풍을 찾는 날, 따뜻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다. 낙동강 인심이 좋다! 그러고 보니 현풍은 인간적인 유풍이 살아 있는 곳이다.
구지 대구국가산업단지
전화 후, 한참을 내려오니, 호수처럼 고요한 강안의 둔치는 떡버들나무 군락과 갈대밭이 어우러져 있는데, 좌측은 ‘항공구조구급대’ 제목의 건물과 넒은 잔디광장을 갖춘 ‘119중앙구급대’가 자리하고 있다. 이어서 긴 긴 제방을 따라 대규모 ‘대구국가산업단지’의 공장 건물과 새로 조성된 공장 부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그 산단 뒤쪽으로 ‘구지면 행정복지센터’가 있는 다운타운이 있다. 멀리 백색의 아파트 단지가 즐비하게 자리하고 있었다. 지형적으로 보아 대니산 남쪽의 달성군 구지면 화산리, 창리, 응암리 일대의 넒은 평야에 조성된 대규모 산업단지이다.
지도상으로 보면 여기 대구국가산업단지에 이어, 창녕군과 경계를 이루는 구지면 내리·대암리에도 달성 제2차산업단지가 조성되고 있다. 지역이 대개 평지를 이루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 낙동강변의 농경지를 대규모 산업단지로 개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대구광역시가 야심차게 추진하고 있는 경제개발특구이다. …♣
<계 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