견문각지(見聞覺知)
‘견문각지(見聞覺知)’란
견(見)⋅문(聞)⋅각(覺)⋅지(知)가 합쳐진 것으로서,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을 총칭하는 말이다.
견(見)⋅문(聞)⋅각(覺)은 전5식의 마음작용에 해당하고,
지(知)는 제6 의식과 이보다 더 심층의 식(識)들의 마음작용에 해당한다.
따라서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마음[心], 즉 6식 또는 8식이 객관 세계[대상]를 접촉하는 것을 총칭한다.
마음의 모든 인식활동 또는 인식기능을 총칭하면서, 그것을 견ㆍ문ㆍ각ㆍ지 네 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 여기서 ‘각지(覺知)’는 ‘깨달아 안다’는 뜻이 아니라,
‘느끼고 안다’로 풀이해야 한다.
견문각지는 불교의 인식론(유식론)에서 나온 것으로
인식기능인 여섯 가지 인식(六識) 작용, ― 내지 여덟 가지 인식작용을 네 가지로 정리한 것이다.
우리에게는 눈(眼), 귀(耳), 코(鼻), 혀(舌), 피부(身), 마음(意)의 여섯 가지 인식기관이 있고,
이 기관들은 각각 고유의 인식기능이 있다.
그 기능의 작용을 보면,
눈은 보고(見),
귀는 듣고(聞),
코는 냄새를 맡으며(聞),
혀는 맛을 보고(覺),
피부(온 몸)는 촉감 등을 느끼고(覺),
마음은 앞의 다섯 가지를 통합하거나
고유의 기억작용 등과 연계해서 분별 판단하고 아는(知) 것이다.
다시 말해 견ㆍ문ㆍ각ㆍ지(見聞覺知)는 다른 동물에 비해
인간이 지닌 탁월한 모든 능력을 요약한 것이며,
그 작용이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라는 뜻이 된다.
그런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에 끌려 다녀서는 안 된다’는 충고를 듣는다.
그것은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그것이 진짜가 아니라는 뜻이 숨어 있다.
분명 탁월한 능력이기는 하지만 오직 그것만이 진실이라고 집착하게 되면
그때부터 자신이 자신을 속이는, 자신이 자신에게 속는 묘한 상황이 전개된다.
흔히 인간이 다른 생명체에 비해 우월하다고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이 탁월한 인식능력을 왜 불교에서는 그대로 인정하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인식능력 자체가 나쁘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이 주인 노릇하게 하지 말라는 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자기가 ‘보고, 듣고, 느끼고, 분별’ 해서 아는 그것이 가장 확실하다고 믿는다.
그렇지만 문제는 수많은 사람들이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경우가 없다.
― 그만큼 감각이라는 게 부정확하다.
―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주장하게 되면,
다른 사람과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이는 곧바로 갈등과 싸움으로 이어져
큰 불행을 초래하게 된다. 세상에서 벌어졌던 엄청난 전쟁도
그 시작은 단순한 생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부처님은 낱낱의 생각들이
절대적으로 영원히 옳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 가르쳐 주셨다.
따라서 이미 일어난 그 생각에 절대적 가치를 두지 말고
치우침이 없는 중도적 지혜로 밝게 보라는 말이다.
중도적 지혜를 발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모든 생각이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으며, 번갯불 같은 것임을 밝게 봐야 한다.
한 생각이 일어나 끌려가기 시작하면 그림자처럼 고통이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그 자리가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한다.』― 송강 스님
결국 견문각지란 육식(六識) 작용을 가리키는 것이고, 중생은 견문각지로 살아간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코와 혀와 몸으로 느끼고, 의식으로 많은 것을 안다[覺知].
이것을 분별식(分別識)이라고 한다.
각지(覺知)는 분별해서 안다는 말이다. 이건 몸이다,
이건 넓다, 이건 작다, 이건 좋다, 이건 싫다,…
이렇게 미추호오(美醜好惡)를 분별한다. 그런데 이러함이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것은 순전히 자기 혼자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견문각지(見聞覺知)에서 성성적적(惺惺寂寂)의 경지로 나아가는 것이 수행이다.
견문각지(見聞覺知)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見 : 보다.
聞 : 듣다.
覺 : 느끼다.
知 : 알다.
초기경전 맛지마니까야에 이 견문각지(見聞覺知)에 대한 내용이 있으며 뜻은 위와 같다.
여기서 ‘각(覺)’은 무엇을 깨닫는다는 뜻이 아니고 느낀다는 의미다. 통각의 준말이다.
보는 자는 없고, 마음이 보여지는 것을 알 뿐이다.
듣는 자는 없고, 마음이 들려지는 소리를 알 뿐이다.
느끼는 자는 없고, 느끼는 작용이 있을 뿐이다.
아는 자는 없고, 마음이 알 뿐이다.
어떤 실체로서의 "나⋅영혼⋅자아"가 있어서 그게 다 하는 게 아니고,
마음이 다 하는 것이다. 마음은 비어 있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다 한다.
할 수 있는 것만 내 마음이 다 하는 것이다. 할 수 없는 것은 못하는 것이고, …
내 마음이 모든 걸 다 한다면, 모든 걸 다 만들어낸다면,
모든 게 다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면, 그 누가 고통을 당하리오,
내 마음대로 안 돼서 괴로운 것이다.
‘일체유심조’는,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것엔 어느 정도 적용될 수 있으나,
외부의 것들은 적용되지 못한다. 외부는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
물론 어떤 것들은 부분적으로 가능하지만, 내 뜻대로 안 되니까, 마음을 내려놓으라는 것이다.
일반적인 의미에서, 견문각지가 많다는 것은 경험이 풍부하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널리 쓰이는 해석에 따르면, 견(見)⋅문(聞)⋅각(覺)⋅지(知)의 각각은 다음을 뜻한다.
이 해석은 부파불교의 설일체유부의 주요 논서 가운데 하나인 <대비바사론> 제121권에 나타난 견해와 일치한다.
견(見)은 6근 가운데 안근, 즉 눈으로 대상의 색깔과 모양을 보는 것을 뜻한다.
문(聞)은 6근 가운데 이근, 즉 귀로 대상의 소리를 듣는 것을 뜻한다.
각(覺)은 6근 가운데 비근⋅설근⋅신근의 3가지 근(根),
즉 코⋅혀⋅몸으로 대상의 냄새⋅맛⋅촉감을 지각하는(느끼는) 것을 뜻한다. ―
깨달음, 즉 구경각 또는 지혜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지(知)는 6근 가운데 의근(意根)으로 법, 즉 대상의 정신적 측면을 요별하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견(見)⋅문(聞)⋅각(覺)⋅지(知) 가운데 견(見)⋅문(聞)⋅각(覺)은 전5식과 관련된 마음작용을 말하고,
지(知)는 제6 의식 또는 그 보다 더 심층의 제7 말나식 또는 제8 아뢰야식과 관련된 의식작용을 말한다.
전체적으로 말하자면,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마음[心] 즉 6식 또는 8식이 외경(外境), 즉 객관세계를 접촉하는 것을 총칭한다.
---<잡집론(雜集論)>의 해석---
대승불교의 유식유가행파의 주요 논서 가운데 하나인 안혜(安慧: 475~555)가 지은 <잡집론>에 따르면,
견문각지(見聞覺知)의 해석은 일반적인 해석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잡집론>에 따르면 견(見)⋅문(聞)⋅각(覺)⋅지(知)의 각각은 다음을 뜻한다.
먼저, ‘견문각지(見聞覺知)해서 파악한 의미[義]’라는 낱말이 사용되는데,
<잡집론>에 따르면, 이것은 견의(見義)⋅문의(聞義)⋅각의(覺義)⋅지의(知義)를 통칭하는 낱말이다.
견의(見義)는 봐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안근 즉 눈으로 보고 받아들인 것[眼所受]을 말한다.
문의(聞義)는 들어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이근 즉 귀로 들어서 받아들인 것[耳所受]을 말한다.
각의(覺義)는 각(覺) 즉 심(尋-개괄적으로 사유하는 마음작용)으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견의와 문의에 응해 자연히 저절로 생각[思]이 구성[搆]돼 파악한 것을 말한다.
예를 들어, 심(尋)의 마음작용이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사(思)와 상응해서 저절로 그 대강을 그린[搆] 것을 말한다.
지의(知義)는 지(知) 즉 사(伺-세밀하게 고찰하는 마음작용)로 파악한 의미라는 뜻으로,
자신의 내부에서 받아들인 것[自內所受]을 말한다.
예를 들어, 사(伺)의 마음작용이 ‘보고 듣고 저절로 대강 그려진 것'을 사(思) 또는 혜(慧)와 상응해서 내적으로 의식적으로
’세밀하게 살펴서 파악하는 것 또는 그린 것‘을 말한다.
그리고 상(想, 표상작용)의 마음작용은 5온 가운데 상온(想蘊)에 해당하는데,
구료상(搆了相), 즉 요별을 구성하는 성질을 본질적 성질[相]로 하는 마음작용이다.
유정에게 상(想)의 마음작용이 있기 때문에 갖가지 법의 모양과 유형을 구성해 그려낼[搆畫] 수 있으며,
견문각지(見聞覺知) 해서 파악한 의미[義]에 따라 갖가지 언설, 즉 설명하는 말을 일으킬 수 있다.
이러한 견문각지(見聞覺知)는 <반야경>과 <대지도론>을 따르면,
생각과 업(業)의 발생을 일으키는 것으로 설명되어지고 있다.
아래는 <반야경>에 나오는 사리불과 수보리존자 사이에서의 대화이다.
사리불이 말했다.
“인연이 없으면 업(業)은 생기지 않고
인연이 없으면 생각[思]도 생기지 않습니다.
인연이 있어야 업이 생기고
인연이 있어야 생각도 생깁니다.”
이에 수보리가 말했다.
“사리불이여, 참으로 그렇습니다.
인연이 없으면 업은 생기지 않고
인연이 없으면 생각도 생기지 않거니와
인연이 있어야 업도 생기고
인연이 있어야 생각도 생깁니다.
보고[見]ㆍ듣고[聞]ㆍ느끼고[覺]ㆍ아는[知] 법 가운데서
마음이 생기며,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 못하는 법 가운데서는 마음이 생기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에는 깨끗한[淨] 것도 있고 더러운[垢] 것도 있으니,
그러므로 사리불이여, 인연이 있기 때문에 업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으며,
인연이 있기 때문에 생각[思]이 생기고 인연이 없는 데서는 생기지 않습니다.”
위에서의 말처럼, 견문각지[見聞覺知]는 생각을 일으키는 인연이라는 것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알지 못한다면 생각을 일으킬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견문각지에서의 각(覺)은 깨달음⋅지혜라는 뜻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생각을 일으키는 인연이 되는 게 바로 견문각지이다.
아래는 <대지도론>에 나오는 용수보살의 설명이다.
「업은 신업(身業)과 구업(口業)이며, 생각은 의업(意業)만을 말한다.
생각이야말로 진실한 업이고,
신업ㆍ구업은 생각 때문에 업이라 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업은 네 가지의 법으로 인한 것이니, 보고 듣고 느끼고 아는 것[견문각지]이다.
이 네 가지로 인해
곧 마음이 생기며,
이 마음은 인연에 따라 생기되,
혹은 깨끗하기도 하고
혹은 깨끗하지 않기[不淨]도 하다.
깨끗하지 않은 것은 죄업(罪業)이요,
깨끗한 것은 복업(福業)이다.
마음이 생긴 걸 생각이라고 한다.
견문각지의 인연으로 마음이 생긴 것,
그것이 곧 생각이다.
마음이 외부와의 접촉으로 인해 움직여 동한 것이 생각이다.
그런 생각을 일으켜서 좋은 생각을 할 때는 선업을 짓고,
나쁜 생각을 할 때는 악업을 짓는다.」
이와 같이 생각과 업(선업/악업)과의 관계를 밝혀놓았다.
생각을 일으키는 가장 큰 요소는 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느끼는 것과 알아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여지고,
들려지고,
느껴지고,
알아질 때 생각, 즉 분별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해탈하려면, 좋다 싫다하는 생각을 일으키지 말아야 한다.
좋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탐욕이 생기고,
싫다는 생각을 일으키면 분노가 일어난다.
본질이 공하므로 그것은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기에
좋다 싫다는 분별을 일으키지 말라고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분별만 일으키지 않으면
갈등을 피할 수 있고, 악업을 짓지 않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