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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디 워홀의 대중매체를 이용한 이미지 차용에 관한 연구
60년대의 풍요로움 속에서 본 워홀의 삶은 맨몸으로 이룩한 아메리카드림의 실현이었고 그것은 아주 대중적인
인기를 가졌고 그러나 품위를 유지하는 스타 그 자체였다.
"돈을 버는 것도 예술이고, 일하는 것도 예술이고, 비지니스야 말로 최고의 예술이다"라고 했던 워홀은 그 누구
보다도 자신이 살았던 시대를 명확하게 반용하는 인물이었다.
자신의 머리를 염색하고 이상한 복장으로 남 앞에 서기를 좋아했던, 일종의 스타중독중에 걸린 것처럼 보이는
워홀은 뛰어난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며 자신이 선택한 대중적인 소재와 대중적인 접근방식, 그리고 무엇보다도
삶과 작품을 일치시키려는 그의 전략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워홀이 택한 제작방법인 실크스크린 기법이나 기존의 물건들을 복사하여 수없이 많은 오리지널의 카피를
생산해낸 방식은 이제껏 미술이 가지고 있었던 독창적인 것, 유일무이한 의미에서의 순수미술의 의미는 퇴색해
버리고 능률적이고 표준화된 것을 요구하게끔 했다.
이는 그가 사용하는 복제의 이미지는 내용을 체감하고 인간의 반응폭을 축소하여 인간 선택의 자의성을 배제
하므로 결국 비개성적 기계화를 이루는 그의 작품세계의 요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논문은 워홀의 평범한 것에 대한 직관적인 성찰에 통해 자신에 대한 평가와 관계없이 현대적인 공업, 소비,
향락 사회의 단면들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현대기계문명에 대한 인간소외의 사회고발적 내용이 담겨져 있으며
또한 예술전반에 흐르는 과장되고 미화된 현실을 더 정직하게 수용하려는 적극적인 태도가 엿보인다.
기계적인 제작과 약간의 변화를 준 복제로, 위대한 작품의 기준이자 현대 미술의 양보할 수 없는 독창성과 개성
이라는 난공불락의 성채를 공략했던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살펴봄으로써 진정한 예술은 무엇이고 예술과 대중
이라는 난점을 어떠한 방식으로 타계했는를 이 논문을 통해 살펴보려고 한다.
목 차
Ⅰ 서론 1
1. 연구 목적 1
2. 연구 내용 및 방법 2
Ⅱ 앤디워홀의 예술론 4
1. 시대적 배경 4
2. 앤디워홀의 예술세계 12
3. 반복과 복제 20
Ⅲ 대중매체를 이용한 이미지 차용 26
1. 앤디워홀의 대중성 26
2. 앤디 워홀의 이미지 차용방법 및 기법 43
1) 이미지 차용 43
① 만화
② 대중스타
③ 상표 및 대량 생산품
④ 죽음과 재난이미지
2) 기법과 양식 57
① 번지기 선 기법 (Blotted Line)
② 실크스크린 (Silk Screen)
Ⅳ 앤디워홀의 미술사적 의의 67
Ⅴ 결론 71
참고문헌
참고도판
ABSTRACT
참고도판목록
Ⅰ서론
1. 연구목적
오늘날의 문화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대중매체라 할 수 있다. 2차 세계대전을 거치고 난 뒤 다른 어느 시기
보다도 정치, 사회 , 경제 문화 등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다. 그것은 경제체제의 발달 및 소비 사회의 출현으로
인한 경제적 풍요에서 비롯되었다.
그 결과 계층간의 소비수준과 가치관에 차이가 없어지게 되면서 사회는 점차 획일화되었고 조직된 사회 속
에서 인간은 부속품과 같은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대중매체에서 반복적인 이미지에 무의식적으로 대중은 영향을 받게 되고 더 이상자기의 개성이나 주관 따위를
찾기 위해 고민할 필요가 없게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분위기는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일무이한 독창성
과 개성을 예술창조의 지상목표로 삼았던 이제까지의 관례가 20년 가까이 지속되어온 추상표현주의의 등장
으로 보다 실제적이고 현실적인 것을 추구하는 이 시대의 대중들로부터 외면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 논문은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인 대중문화속에 등장하는 이미지로 미술을 수용하는 팝 아트와 미국의 팝 아티
스트 중에서도 매체의 이용과 소비시대의 특성을 독창적으로 표현한 앤디 워홀의 대중매체의 이미지 차용에
관한 문제를 다뤄보기로 하겠다.
우선 팝 아트의 탄생 배경 특징 그리고 앤디 워홀이 가지는 미술사적 위치를 파악하고 앤디 워홀의 회화를 이해
하기 위해서 그가 제작방식으로 택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어떻게 예술적 생산과 산업적 생산의 절충으로 보고
시대정신을 표현했는지 연구해보아야 한다.
그는 기계적인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예술 작품을 반복적 생산함으로써 이젤 회화의 전통을 부수고, 전통적인
미술가의 개념을 변화시켰을 뿐 아니라 미술 작품의 유일성 파괴 등 미술가와 미술의 범위를 무한히 확장시켰다.
또한 워홀은 산업사회에 맞는 작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예술적 생산방식을 산업화한다는 것이 워홀의 독특한
면이었다.
화실을 공장의 개념으로 바꿔놓고, 기계에 대한 찬미를 하며, 코카콜라 병, 캠벨 수프깡통 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대량생산품과 마릴린, 재클린 케네디, 엘비스 프레슬리와 같은 유명인의 이미지와 죽음과 재난
이미지 등을 반복과 연속으로 본래의 의미는 상실한 채 그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절대 반영하지 않음으로 해서
워홀은 그들을 비인간화 시켜 버렸다.
이러한 이미지는 현대사회에 무수한 반복되어 쏟아져 나오는 정보화된 대중적 이미지로서 시대의 허상을 보여
주는 것이다.
물리적, 도덕적, 감정적, 미학적인 모든 단계를 통해 중립성을 유지하게 위해 인간의 사회현상에 대해 어떠한
선입견도 가함 없이 냉정한 관찰자에 섰던 앤디 워홀에 대한 평가를 이 논문을 쓰며 내려보고, 진정유명해지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 부단히 노력을 아끼지 않았던 한 작가의 예술세계에 대한 의미를 정리해 보고자 한다.
2. 연구내용 및 방법
본 논문의 Ⅱ장에서는 앤디워홀의 예술론을 시대적, 역사적 배경으로 살펴보며 앤디워홀의 예술세계를 3가지
특성으로 분류함으로써 유형을 파악하고, 반복과 복제를 통한 워홀예술의 중심을 연구하였다.
Ⅲ장에서는 대중매체를 이용한 이미지 차용에 대해 기법과 양식 차용내용등을 비교하며 워홀의 예술이 가지는
대중적 특징과 예술성을 파악한다.
특히 워홀이 사용한 기법중 대표적인 번지기 선기법과 실크스크린 기법을 중심으로 제작한 작품들의 비 개성적
인 기계과정을 통해 전통미술을 완전히 보편 평준화를 시킬수 있었던것에 대해 연구하고자 한다.
Ⅳ장에서는 워홀이 지니는 미술사적 의의를 통해서 선각자적인 위치와 후대 미술에 끼친 영향에 대해 연구
하고자 한다.
연구자료는 각 도서관에 소장된 자료와 연구논문, 일간지나 잡지에 실린 내용을 참고했다.
도판은 워홀의 작품을 효과적으로 이해하기 위해 이용하였으며, 각종 화집과 정기간행물, 전시회 팜플랫을 통해
촬영제작하여 수록했다.
앤디워홀에 관한 본 연구는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수준을 뛰어넘어 그가 지니는 역사적 의의와 위치를 파악하여
시대에 끼친 영향력과 현대미술에 있어서 대중과 예술성이라는 한계를 어떻게 접목시켰는지에 대해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고자한다.
Ⅱ 앤디워홀의 예술론
1. 시대적 배경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엄청난 양으로 쏟아지는 '이미지'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다. 인쇄된 그림이나 사진
들이 들어 있는 신문, 서적, 잡지, 만화, 영화, TV등의 다양한 시각 매체를 통하여 매일 매일 시간마다 갖가지
종류의 이미지들이 산재해 있다.
또한 가전제품, 실내장식품, 의류, 진열장의 장식, 빌 보드 간판, 포스터, 교통수단, 도시 환경 등의 일용품과
생활 공간의 직접 적인 접촉을 통해서도 많은 양의 이미지를 체험한다. 시각을 통해 받아들이는 자극의 양은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해졌고, 그 종류와 복잡성은 이루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이다.
대중문화는 2차 대전 후 현저하게 나타났다.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인 대중문화 속에는 수많은 이미지로 넘치
게 되었다.
1950년대의 후반과 60년대는 바로 서구산업사회의 물질주의 문명이, 특히 미국에 있어서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대중문화의 대중전달에서는 내용이나 질적 가치가 아닌 양적인 면이 더 중요하게 된다.
매세지의 이러한 초 과잉상태는 예술의 성격마저도 변화시키고 말았다.
이같은 '새로운 이미지의 환경'은 사람들의 감성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나아가 '신체적으로 지배'
하기까지에 이른다.
다량으로 신속하게 공급되는 이미지들에 에워싸여 사람들은 그것들로부터 의식적인 수준에서 무의식적인
수준에 이르기까지 설득을 당하며, 동시에 그 이미지들을 즉각 즉각 소비하고 곧바로 새로운 것을 요구하게
끔 암암리에 지지 받으며 살아간다.
시각적인 이미지의 총량은 과거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해졌고 그 종류와 복잡성은 이후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이다. 새로운 이미지의 환경은 사람들의 감각과 정신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키고 관념과 정신적인
체계마저 붕괴시킨다. 일상생활에서의 이미지의 접촉과 빈도는 자극의 강도가 클수록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영향도 더 비례하여 커진다.
상업적 인 선전을 필요로 하는 현대의 대중사회는 이러한 이미지의 일상적인 대중이미지를 미술의 범주에 포함
시키기를 꺼려해 왔고 미술과는 무관한 것으로 여겨졌다. 특수한 일부의 이미지들만의 미술의 영역으로 받아
들여 왔고 순수미술의 영역에서만 그 이미지를 사용한다.
예술을 위한 예술로의 지향이 보여 주어 왔듯이 예술가들만의 아류적 구성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이러한 예라 할
수 있겠다.
특수한 하나로서 대량생산이 아닌 하나만으로 제작된 것으로의 이미지만이 미술품으로 자격을 갖추고 인정되어
왔던 것이다.
변화된 경제적, 문화적 분위기는 당연히 미술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유일무이한 독창상과 개성을 예술창조의 가장 중요한 목표로 삼으면서 전후 20년 가까이 진행되어온 추상표현
주의는 보다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것들의 의미를 부여하게 된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그 의미는 퇴색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1960년대에 이르러 대중매체를 통한 대중문화가 순수예술의 영역에 본격적으로 도입되기 시작하였
으니 바로 팝 아트의 등장이 그것이다.
오늘날의 사람들도 여전히 미술에 관한 한 유일성, 또는 희소성, 영구성 따위의 고전적인 관념에 사로잡혀 있다.
미술만의 특권, 지고의 표현양식과 소비하고 폐기하는 대량생산 체계 하에 일회성 이미지는 실제적 사회가치와
정신적 권위를 상징하는 가치 속에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딜레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순수미술이라는 '시대를 초월하는 영원한 문화'는 기이하게도 기계 부제 방식과 대중매체를 통해서 일종의
세속적인 종교로서 전파 보급된다. 걸작 미술품의 대량 복제는 유일성·희소성·영구성 등등 그 원작이 표방하는
가치와는 원칙적으로 상반되는 것이면서도 그러한 가치들의 보급과 신비화에 기여한다.
이미지가 대량생산되는 시대에 그 대량생산방식을 통해 이미지의 유일성 또는 희소성이 신화적으로 가치를
부여받는 다는 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오늘날 상징적 문화는 표면상으로 대량생산체제를 거부하면서도 뒤쪽으로는 은밀하게 결탁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는 위선적이고 배타적임으로 부인 할 수 없다.」
팝아트의 등장은 추상표현주의가 세계적으로 성공을 거둔 이래 사람들은 미국 미술은 거대하고 대담하며 거친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고, 팝 아트는 이러한 고정관념을 파괴한 미국적 현상이다. 팝 아트는 처음
에는 영국에서, 그리고 그 다음에는 미국에서 각각 독자적으로 일어났다. 미국에서의 탄생을 계기로 팝 아트는
일시에 전 세계의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팝 아트 특유의 직접적인 표현양식에 열렬한 반응을 나타냈다.
또한 예술과 오락에 있어서의 재미를 젊은 세대에게서 기대하는 중년층뿐 만 아니라 팝 아트의 형식을 타당하게
여긴 사람들은 누구나 팝 아트에 매력을 느꼈다.
팝 아트 그 자체는 디스코데크 시대의 산물은 아니나 그것에 대한 관중의 반응은 확실히 디스코테크적이었다.
그런데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팝 아트의 잡종적인 성격이다.
그것은 추상이 지배하던 20년간의 산물로서 구상적 전통보다는 추상적인 전통을 물려받고 있다.
팝 아트는 현재의 리얼리즘보다는 미국의 색채추상과 더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1955년 로버트 라우센버그(Robert Rauschenberg)와 제스퍼 존스(Jasper Johns)가 뉴욕화단에 등장한
중요한 해이다. 이 전시회는 팝 아트로 넘어가는 다리역할이 되었다. 이 두 작가는 모두 작품양식이나 주제로
보아 팝 화가는 아니다. 그러나 그들은 지금도 유럽에서는 물론, 매스미디어를 통해서 팝 화가로 간주되고 있다.
그러나, 팝 아트의 영향이 뉴욕 미술계 전반에 널리 느껴지게 되는 것은 1961년 초에 이르러서 이다.
처음 5년여 동안은 어느 정도 '언더그라운드(underground)'의 성격을 띠었다고 할 수 있다.
그후 팝이 화단에 공식적으로 데뷔했을 때 최초의 반응은 놀라움과 혐오, 나아가서는 거부이기조차 했다.
이러한 거부 반응은 특히 뉴욕에서 심했는데 거기에는 역사적인 이유가 있었다.
당시는 미국내에서 일어난 양식으로서 최초로 국제적 명성을 획득하는데 성공한 추상표현주의가 확고부동하게
자리를 잡고 있던 때였다. 팝아트의 미국에서의 초기반응은 미술평론가들은 무시해 버리려고 한 반면, 화상과
수집가 환영을 받았다.
영국에서 만들어진 최초의 진정한 팝 아트 작품은 리차드 해밀턴(Richard Hamilton)의 <오늘날의 가정을
이토록 색다르고 멋지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꼴라쥬이다.
이 작품은 1956년 화이트 채플 화랑에서 열렸던<이것이 내일이다>라는 제목의 전시회에 출품되었던 것이었다.
팝 아트가 영국 대중에게 최초로 큰 반향을 일으킨 계기는 1961년의 <동시대 청년작가전>이었다.
데이비드 호크니, 데렉 보쉬어, 앨런 존스, 피터 필립스, 키타이, 등이 참가했던 이 전시회는 미술의 새로운
세대를 부각시켜 주었다.
미술평론가들의 의심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물질적인 면에서 성공을 거두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주요한 팝 작가
들은 놀랄 만큼 단시간 안에 확고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고, 물질적 부를 누리게 되었다.
팝 아트가 굳건한 기반을 내릴 수 있었던 곳은 영국보다는 미국이다. 팝 아트는 개방적이고 매 순간 새롭게
태어나는 미래지향적인 미국 사회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도형적인 시각에서 볼 때 팝의 주제에 관한 많은 전례가 미국은 물론 유럽에서도 발견된다.
돌이켜 보건대, 지난 시기에 상업적 주제가 순수미술의 소재로'발견되지'않았다는 사실에 의아해 하지 않을 수
없다. 팝의 씨앗은 이미 50여년전 큐비즘의 꼴라쥬에 의해 심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팝 아트의 선조를 유럽에서 찾을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팝의 뿌리를 다다(Da Da)
안에서 발견할 수 있다. 별로 달가워하지는 않지만 다다의 거장들 자신도 팝 아트와 다다의 유사성은 일찍이
인식하고 있었다.
영국과 미국에서 팝 아트가 등장한 것이 전적으로 역사적인 영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팝 아트의 생명력은 그 양식이 그러하듯이 현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유럽의 두 대가들이 사사이
전형으로서 가장 강한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즉, 레제와 뒤샹이 바로 그들인데, 이들은 젊은 세대의 미술가들
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하더라고 팝을 가능케 한 미학적 상황을 형성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이들의 작품은 서로 정 반대의 위치에 놓을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감성의 결여 내지 약화라는 점에서 서로
연결되어 있다.
1914년 이후 뒤샹이 거주했던 뉴욕에서는 로버트 라우센버그과 제스퍼 존스가 레오 카스텔리 화랑에서 개인전
을 열었는데 이 전시회야말로 팝 아트로 넘어가는 다리 역할을 되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이러한 미술적 경향을 '팝 아트'란 용어로 쓰기 시작하였다. 이 용어를 처음 사용했는지는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어느 미술 평론가는 '앨로웨이가 1954년에 처음으로 팝 아트라는 말을 사용했다'라고 말했다.
그 뒤 1954년-55년 겨울과 1957년 사이 인디펜던스 그룹회원들의 공동작품 및 토론과 관련된 대화에서 널리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이때 크게 두 종류로 팝 아트는 나누어지는데 영국과 미국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미지 사용을 사진으로 이용
하여 실크스크린 기법을 그대로 캔버스에 전사하는 워홀과 같은 경우, 리히데 슈타인과 같이 조잡한 만화로
부터 빌려온 스타일을 확대시켜 그려내기도 하고 짐다인은 실제 오브제를 평면과 조합시키기도 한다.
이렇듯 미국에서 활동하는 팝아티스트 사이에서도 뚜렷한 차이점이 있었다. 미국의 경우와 영국의 경우는 앞
에서 열거한 차이보다 더 확연한 차이를 드러낸다.
먼저 영국의 팝 아트를 살펴보면 영국의 팝 아트는 흔히 오해가 많이 있었다. 까닭은 무기력한 비평의 범람으로
인해 1950년대의 미술현상이 잘못 이해되었기 때문인데, 그 예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마틴 프리드만은 했다.
피터 블레이크는 (리차드 해밀턴과 함께 ) 1950년대 중엽 영국과 미국에서 거의 동시에 전개된 팝 아트의 영국
창시자 였다.
그러나 사실은 팝 화가로서의 블레이크와 해밀턴은 모든 점에서 다르다.
그들은 다른 자료, 다른 근거기준, 다른 추이를 가지고 있다. 더욱이 그들은 창시자가 아닌 본격적인 팝 아티스트
였다. 또 다른 영국의 팝 아트의 특징은 미국보다 양식적 관점에서 분류가 곤란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리차드
해밀턴은 엄밀성, 흥분의 배제, 다른 딴 작가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냉소적인 위트 등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그의 작품은 각각 하나의 개념의 구현이고, 개념 자체가 물질적 형태를 지배하고 있기 때문에 작품간을 연관
짓는 것은 지적 과정의 연속성뿐이다.
키타이, 에두아르도 파올로치, 앨랜 존스의 작품을 보아서도 팝 아트의 일반적인 이미지와는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팝 아티스트의 공통점이 양식적언어, 완전히 발달되어 모든 종류의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에
적용될 수 있는, 전성기 르네상스 화가들이 가졌던 것과 같은 종류의 양식적 언어에 있지 않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 대신에, 현대적 삶의 지배적인 분위기에 대한 지나칠 정도의 민감한 반응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은 꾸르베나 반 고호 모두가, 보다 넓은 대중관객에 접근하기에는 이젠 회화의 생산 방식에 한계가 있음을
이해했으며, 팝아티스트 자신의 회화 스타일에 민중적 가치를 통합시킴으로서, 매체를 민중적 이미지의 방향
으로 전이시켜 이젤 회화의 엘리트주의와 투쟁했다.
대중문화에 대한 가장 명쾌하고 긍정적으로 제시된 팝 아트는 대중문화와 대중매체의 재료를 도상, 기법, 관례적
표현의 소재로 사용했던 전문적 예술가들에 의해 제작된 작업까지 망라된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팝 아트는 직접적으로 감지된 현실이 아니라 그래픽디자인이나 대중매체 가운데서 발견되는
현실에 대한 기존 표현방식을 음미의 대상으로 삼는다.
팝 아티스트들이 인상주의, 혹은 자연을 대상으로 하는 직접적 작업방 식을 따르지 않았다는 사실은, 현대 도시
민들에게 들판, 나무, 산 등의 자연이 인공적으로 구축된 빌딩과 실내, 도로 표지판, 신호물, 포스터, 신문,
라디오와 TV방송 등의 세계로 대치되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는 매체로 포화된 환경 속에서
생활하고 있는 것이며, 이것은 도시에 갇혀서 자연으로부터 소외된 인간들의 색조와 이미지인 것이다.
전후의 유래 없는 풍요 속에서 대량생산에 따른 동일한 제품의 대량소비를 누리게 된 미국의 중산층들은,
이제 주관적인 감정이나 자기만의 고유한 감성보다는 대중적이면서 실질적이고도 현실성 있는 것에 신념을
갖게된다. 그리하여 "각 시대에는 그 특유한 인간의 이미지가 있다." 라고 한 폴 테일리치의 말대로 독창적인
것에 무관심하고 비개성적인 것에 자연스럽게 느끼는 인간을 표현하는 새로운 방식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맥락에서 의식 있는 미국인 사이에는 새로운 각성과 제도가 제기 되었으며 소비와 생산의 메카라 불릴
수 있는 미국에서의 대중적이고 생산적인 이미지의 회화도입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중에서도 이런 흐름에 가장 잘 부흥하는 대표적인 작가로 미국 팝 작가인 앤디워홀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워홀의 팝 양식은 어디까지나 "화가 자신과 작품이 하나이다."라는 기본 입장에 근거하고 있다.
작품 속에서 양식이 진지하게 노출되면서 작가 자신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다거나 반대로 작가 자신이
팝적인 생활을 하면서도 작품 속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나타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작가와 대상과의
이 변화를 극복하려는 점에 있어서 워홀의 작품 태도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2. 앤디 워홀의 예술 세계
워홀은 자기 작품에 대해
"나는 미국을 숭배한다. 내 작품은 미국에 관한 몇 개 주석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내가 그리는 이미지는 오늘
날 미국의 기초가 되는 비인간적인 생산품과 고함을 지르는 등 요란한 유물론적 사물을 형상화시킨 것들이다.
이것은 매매될 수도 있는 모든 것을 반영하고 있고, 또 우리가 양식으로 삼고 있는 일시적이고 실용적인 상징적
인 상직이다" 라고 설명한다.
앤디워홀은 이러한 산업사회의 대중적 이미지를 대량생산 방식과 기계적 복사, 반복이라는 현대사회의 일면을
적극적으로 수용한다. 그는 현대의 매스미디어, 매스커뮤니케이션에서 쏟아지는 많은 양의 이미지가 반복적
단일성으로 치닫는 것을 직시하고 같은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자꾸 반복하여 배열하는 작업이미지를 보여준다.
그러는 방편으로 워홀은 자신의 명성을 진작시키기 위해 유명한 관념과 제품을 사용하여 경력을 삼았다.
Campbell's soup 과 coca - cola 로부터 마릴린 몬로와 엘비스 프레슬리 까지의 그의 주제의 명성을 먼저
획득함으로, 세계적으로 인정받게 되고 주가를 올리게 되는 산업적인 물품에는 자신의 명성과 안면을 활용
하게 되었다.
그의 유명 상표 물품의 그림은 경제적 실체로의, 유도 미사일로부터 미스 아메리카까지 정말로 모든 것의 철,
흥행, 포장, 광고, 소비자 보호 운동에 실리주의의 입장을 굳힌 전형으로 미국 문화의 본질적인 실리주의를
반영한다. 보도사진에 시작한 다른 그림은 우리로 하여금 자동차 충돌의 상습적인 파괴와 우리의 도시에서 주기
적인 인종 갈등의 미국적 풍경을 훼손하는 비참하게 익숙한 폭력의 어느 정도를 새롭게 보게 만든다.
현대의 생략형태의 모든 은유인 음식통, 예쁜 얼굴과 도막난 차는 지적· 정신적 가치가 상대적으로 결여된 우리
의 시대를 암시하기도 한다.
워홀은 계속 미래예술기획에 대하여 계획하고 있었고 친구들에게 실제로 시험한 것으로 자신의 비공식의 시장
연구를 실행하고 있었고, 전에 비슷하게 행해지지 않았던 것이 확대되어지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는 고안을 위해 친구들을 괴롭히고, 극단적이고"미친"(그의 좋아하는 말 중에 하나를 골라서)발상을 위해서
친구들에게 지속적으로 간청할 때면 무정할 수 있었다.
그는 뻔뻔하게 다른 예술가로부터 창의적인 재료를 훔쳤다. 그의 예술은 물론, 그가 행한 거의 모든 것은 주의
를 끌도록 계산된 고의적 도발이었다.
예를 들어 그가 작품의 소재로 이용했던 <캠벨깡통(그림 1)>의 경우에는 깡통 문화권에 속한 사람에게만 감상이
가능한 것이 된다는 점에 주목한다. 특수하고 보기 어려운 물건이 아니라 흔하게 일상적으로 보고 사용하는
물건이 아니면 안된다는 그의 작가적 주관인 것이다.
그것은 아주 전형적인 일상용품에 속한 물건일 때 감상 효과가 크다는 그의 신념은 담고 있다.
워홀이 선택한 주제들이 전형적으로 널리 잘 알려진 물건이나, 유명상표, 유명인사들이라는 사실이 그의 그림
을 유명하게 만든 이유 중의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러한 대중성의 오브제화의 선택과 이것을 그리는 화법이
모두 쉽고 단순하게 이해되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앞에서 살펴본 워홀의 특성을 크게 세가지로 나눈다면
첫째, 반복적 이미지,
둘째 상업성
셋째로는 비개성적 이미지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반복적 이미지의 특징으로는 먼저 들 수 있는 작품으로는 수프깡통을 작품 가득 메운 <32개의 수프깡통>
(그림 2) 과 <80개의 2달러 짜리 지폐>(그림 3) <코카콜라병>(그림 4)등을 들 수 있다.
수프깡통 한 개의 표현으로부터 워홀은 다수의 깡통으로 변화했다. 하나의 깡통이 가지고 있는 대중적 이미지
가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 되풀이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새로운 시각적 이미지의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미술에 있어서 반복은 지극히 현대미술 양식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이지 전통적인 제작방식에서는 거의 그 유래
를 찾을 수 없다. 다만 순수미술 보다는 모자이크나 장식미술 같은데서 찾아 볼 수 있고 우리의 생활환경 주위
에서 나타나는 벽지의 문양, 장판, 커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것이 그 예라 하겠다.
순수미술에서는 동일 형태의 반복은 단조로운 구성으로 오히려 회피되어 왔으며 이것이 적극적으로 수용된
것은 20C에 들어와서의 일이다.
반복적 형태는 화면의 표면을 따라 시각을 이동하게 되고, 보는 이들에게 화면의 깊이와 거리 공간감이 부정되고
이미지와 캔버스간에 지극히 범속한 관계성을 낳게 하고 평면성을 주지시키며 형태가 가진 메시지를 강조하는
결과를 준다. 20세기 미술에서는 다양한 경향을 통해서 이같은 효과들이 추구되어 왔다.
미래파에서는 움직이는 사물의 연속적 모습을 재현하기 위해 옵 아트에서는 시각적 착시효과를 위하여 폴록이나
토비와 같은 추상표현주의 작가들은 자발적 행위의 궤적으로, 팝 아트나 누보레알리즘의 경우에는 대량 소비
사회의 일면을 드러내는 증후로서, 그리고 미니멀 아트나 색면 추상작가들은 작품의 물질성과 평면성을 강조
하기 위하여 반복의 방법을 사용하였다.
이러한 반복의 형태는 다양한 형태를 보이는데 그것은 비 정형, 기하학적, 구상적 형태로 분류할 수 있다.
이러한 형태상으로 보면 워홀의 반복은 지극히 구상적이다.
<마릴린 몬로> <코카콜라> <수프깡통> <엘비스 프레슬리>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작품은 언제나 명료하며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사물들이다.
이러한 것들은 대중 소비사회의 일면을 상징하는 기호이고 이들을 반복하는 방법은 대량전달을 위한 대중매체
들의 광고기법을 이용하는 것이며, 동시에 현대사회의 한 단면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워홀의 반복적 행위는 항상 일관된 것만은 아니다. 그것은 같은 형태로 반복되어 있으면서도 나름대로 변화를
보여주고 있으며 이 변화를 통해서 미묘한 뉘앙스를 느끼게 한다.
워홀은 회화에서뿐만 아니라 그가 만든 실험 영화에서도 반복을 보여준다. 1963년에 제작된 <잠>에서는 고정
된 카메라로 장장 6시간 동안 한 남자의 잠자고 있는 모습만 비추고 있고 <먹는다 Eat>에서는 팝 작가 로버트
인디에너가 버섯을 먹고 있는 장면을 4시간 30분 동안 비치게 하기도하고 자기자신이 서부 총잡이가 되어
<외로운 총잡이>(그림5) 라는 실험영화를 만들기 도 했다.
그저 되풀이 할 뿐, 이것을 보고 있는 관객 자신이 계속 앉아서 오히려 이쪽편이 영화의 주인공이 되버리고 만다.
보통의 영화에선 배우의 매력이나 극의 흐름에 따라 그저 피동적으로 감동하는 것이고 보면, 워홀은 거의 움직
이지 않는 단순한 행위를 되풀이하는 사람을 복사 체로 선택하는 것은 영화는 움직이는 것이라는 관념을 타파
하고 시간예술로서의 영화를 순수시간에만 환원시켜, 그래서 '본다'는 의미를 관중에게 생각하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이러한 실험영화에서 보여지는 지루하고도 권태로운 행위의 반복은 그의 실크스크린을 모체로한 판화에서와
같은 일종의 '반복의 구조'라고 명명할 수 있을 듯하다. 단지 '시간성'으로 번안했을 뿐으로 반복의 구조는
그것이 '무표정한 반복으로 인해 거의 표현을 상실'해 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다시 말하면 '무표현의 표현'이라고 할 수 있으며, 반복되는 동작을 느린 동작으로 (Slow Motion) 보여주며
느린 동작에서 오는 피사체의 움직임을 더욱 명확하게 보는 사람들에게 인식하게끔 한다. 따라서 표현하지 않으
면서 표현하고 있음에서 '표현과 비표현'사이의 미묘한 긴장의 밸런스를 회복해 주고 있는 경우이다.
그의 작품에서는 평범한 대상이나 사건의 집요한 반복에서도 이질적인 이미지간의 충돌은 없으며 다만 단일한 영
상의 반복만이 있을 뿐이다. 무미건조한 일상생활에서의 타성을 새삼 의식하게 하고 특수한 이미지의 반복으로
'특수'에서 '보편'으로 내려서 어느것 일상적인 것이 가장 특별한 새로운 것으로 자리바꿈을 하게 된다.
마치 우리가 뜬눈으로 매일 같이 보고 있으면서도 안보고, 잊고 있는 흔한 상품광고와도 같은 것이며, 막상 잊고
있는 듯하면서도 마음의 어느 구석에 새겨져 있는 하찮은 기억과 같은 것으로 오늘날의 매스프러덕션의 상품
광고가 노리고 있는 의도가 바로 그런데에 있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워홀의 예술은 이러한 광고미술의 심리
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워홀 예술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반복성'은 전통미술의 귀족화, 특수성의 가치를 하락시키고 비개성적인 기계
적인 과정을 통해서 전통적 미술을 완전히 보편화, 평균화 시킴으로서 대중과의 관계를 긴밀하게 해주고 있다.
둘째로 상업성을 기초로한 워홀의 작업은 여러 팝 아티스트 중에서도 특히 구별되는 작가이다.
예술과 상업이라는 불가분의 관계를 그는 직접적이고 능동적이었다. 그것은 예술구조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
으며, 대량생산 및 소비팽창사회에서 예술품도 상품화, 계량화되는 추세가 만연되어, 미술의 영역에서도 '상업
주의'가 판을 치며 균형과 탄력성을 잃어가고 있다.
산업화의 영향으로 광고와 정보의 홍수를 이루고 이러한 것들은 '주체'도'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조화'도 없이
단순한 소모품이 되어버려 일회적으로만 존재한다. 그가"나의 작품은 누구에게서도 만들어질 수 있다."고 한
것은 그의 작품이 복제 수단에 의해 만들어졌고 다시 그 자체가 복제될 수 도 있다는 뜻으로도 받아들여진다.
워홀의 작품은 일련의 공정 자체가 생략되고 단지 선택되어 졌다는 것만으로 이미 작품이 되어 버렸고 개성
이나 특징은 없다.
1971년 비평가 로버트 허기스( Robert Hughes)는 「워홀의 작품<수우프 깡통>은 급진적인 예술이 아니다.
워홀에게서 과격한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수프통조림을 대량생산하는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작품을 생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비문화에서 '생산'을 뒤쫓아가는 소비미술에 다름이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워홀은 이러한 비평을 거부하지 않았으며 '상품을 만드는 기계가 되고 싶다'고 말하였고 실제 그러한 행동은
그의 작품과 활동에서 주지할 수 있는 사실이다.
예술다음의 단계는 비지니스 아트라고 말하며 훌륭한 사업은 최상의 예술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워홀의 삶 자체가 예술이었던 것처럼, 삶의 목표는 성공이었 고 예술은 성공을 이루는 도구였던 것이다.
예술의 상업적 차원을 간파하고 대량방식체계를 가장 미국적 현상이라 받아들였던 그는 그의 작품에 자본주
의의 본성을 기꺼이 받아들이며 워홀적이고 미국적인 독창적인 작업을 할 수 있었다.
세번째로, 비개성적 이미지를 살펴보기로 한다.
워홀의 작품 제작방식은 그 제작 방법에 있어서 예술과는 상반되는 기계적인 방법을 쓴다. 그것은 개인적으로,
주관적 감정 개입될 소지가 없으며 그저 작가는 무엇을 소재로 택하느냐 에만 관심을 가진다.
비개성적 이미지를 위해 그는 판에 박힌 똑같은 그림을 계속 찍어내기로 했다. 그래서 그가 택한 것이 실크스크린
이라는 기법이었는데, 그것은 기존 미술 질서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었으며 순수미술에 대하여 가지고 있던 전반
적 가치하락이었다.
벤자민(W. Benjamin)의 에세이 <생산자로서의 작가 -The anthor as producer, (1934)>에서 그는 사회적 상호
관계는 생산관계에 의해 결정되며, 거기에 관여하고 있는 예술가는 그와 같은 관계를 변혁시키는데 힘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는 반드시 진보적 예술기법과 생산수단을 향한 혁신적 자세가 수반되어야 한다.
벤자민의 이러한 주장은 워홀회화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핵심이 된다. 실크스크린에 의한 복제, 기계적 생산방식
은 결국 주관이 개입되는 한계적인 창조보다는 객관적인 생산만이 요구될 뿐이다.
그가 기계적인 방식을 고집한 이유도 작가자신의 내면적인 주관을 억제하고 이로써 현대 기계문명시대의 인간은
개성을 상실하고 획일화된다는 사회 고발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간과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예술전반에 흐르는 과장되고 미화된 현실을 더 정직하게 직시하고 수용하려는 그의 적극적인 태도가 엿보
인다 할 수 있다.
앞에서 설명한 듯 그의 예술관은 미술이 가지고 있던 권위적이고 유일성에 대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미술
의 대중화에 힘써온 작가이다. 어쩌면 워홀은 자신의 삶만이 자신을 지배하고 있다는 생각을 즐기는 작가이다.
결국 워홀은 자신의 예술성을 상업성과 연관시키며 시대를 앞선 놀라운 통찰력을 이용해 대중매체의 본질을
파악하고 그 영향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알았던 선구자적인 작가였다고 생각한다.
비난이든 칭찬이든 오늘날 미술에 끼친 워홀의 영향력을 무시하는 사람은 없고 오히려 현대미술의 상업화와
대중화를 이끈 기수라고 할 수 있는 확고한 위치를 다듬었다고 말하는 것이 무리가 아닌 것은 확실하다.
3. 반복과 복제
주제면에 있어서나 제작 방식에 있어서 서구 예술의 전통적인 관습에 정면으로 도전한 앤디 워홀의 반미학적인
태도는 그의 작품을 통해 지속적으로 전개되었다.
워홀은 다양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 취급하는 태도는 동일했다. 즉, 코카콜라 병이나 캠벨수프 깡통의 상품
이미지건, 마릴린 몬로나 켸네디의 미망인 재클린과 같은 유명인들의 이미지건 간에 모두 상업적인 디자인과
같이 하나의 도상을 제시한다. 하나의 이미지를 반복해서 제시하지만 결국은 같은 이미지가 나오지 않고 각기
서로 다른 이미지로 나온다는 점을 앤디워홀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이다.
앤디 워홀은 위와 같은 복제의 서로 다른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표현하기 위해 기계적인 방식인 실크스크린
방식을 도입한다. 실크스크린은 똑같이 계속해서 같은 모양의 그림을 찍어낸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물감을 내리는 속도, 물감의 농도, 압력 등 여러가지 요인 때문에 처음부터 끝날 때까지 작업의
형태가 일정하지 않다. 이러한 실크스크린의 우연한 효과는 복제되어 반복된 이미지라 할지라도 서로 다른
이미지로 변화하게 된다는 것을 그는 꿰뚫고 있었다. 그의 이러한 복제와 반복의 화면 형태는 추상표현에서
찾을 수 있다.
워홀의 작품과 추상과의 관련성을 찾아보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잭슨 폴록 (Jackson Pollok 1912-1956)으로
대표되는 액션 페인팅 (Action Painting)과의 영향관계를 살펴보아야 한다.
폴록은 자신이 창조한 액션페인팅을 통해 2차 대전 이후 새로운 미국회화를 대변하는 인물이 되었으며, 현대
회화의 방향을 변환시킨 여러 요소들을 제공하였다.
먼저, 격렬하면서 거의 우연적인 물감 흩뿌리기로 구성된 폴록의 화면은 직관적이거나 우연적인 요소들에 의해
생명력을 얻는데, 워홀이 초기에 번지기 선 기법으로 제작한 많은 작품들과, 실크스크린에서 우연히 발생하는
얼룩과 명암이 그대로 드러나 있는 그의 반복된 이미지들 은 폴록을 연상케 한다.
또 워홀이 존스의 드로잉과 회화의 직접적으로 의존한 것으로 보이는 초기 작품의 무수한 선영등 은 추상표현
주의의 전면적인 선긋기보다는 덜하나 거의 서체 적이고 장식적인 선의 모습 등에서 폴록의 특징과 워홀의
유사함을 보인다.
또한 액션페인팅의 연속적이고도 전면 균질적인 면구성 (All Over) 과 앤디 워홀의 코카콜라 병으로 연속적인
배열 구성을 하여 화면을 덮는 실크스크린 기법은 공통점이 있다 할 수 있겠다.
한편 추상과의 연결을 찾고자 할 때 우리는, 워홀과 비슷한 시기에 나란히 진행되면서 그 표현 양식에 있어서
현저한 차이를 보이는 미니멀 아트와 워홀의 작품을 비교해 봄으로써 폴록이라는 이전 세대뿐 아니라 동년배
들과도 서로 연관이 있음을 추적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그의 단일 작품인 <황금색의 마릴린>에서 평면화된 금속성의 화면위에 최소단위로 축소된 하나의
이미지를 뚜렷이 부과시키고 있는 점, 그리고 <빨간색의 엘비스>에서 보이는 기본 단위의 무수한 반복 등은 그
단순성과 절제된 느낌 등으로 이내 미니멀 아트와 유사한 분위기를 전달하고 있으나 미니멀 아트와 같은 이론
을 지니고 있지는 않다.
앤디워홀이 제작한 소벽지 (Cow Wallpaper)는 르윗(Sol Lewitt)의 벽지 드로잉과 짝을 이루는 것으로서 이들
작품에서 사용된 반복과 나열의 회화 형태는 예술의 고유성과 개성대신 비개성을 부각시키고, 프래임과 이미지
의 경계 또는 건축 요소와 장식적인 요소라는 기존 서구 개념을 부숨으로써 이젤 회화의 한계를 극복하고 그
차원을 무한히 확장시켰다는데 그 의의가 있다.
워홀의 작품과 미니멀 아트와의 연관에 대해서 루시 스미스는 "워홀의 실크스크린 이미지들은 구상적이기는
하지만 내용이 없기 때문에 미니멀 아트와 거의 흡사하다고 말했다.
핑거스 위튼은 워홀의 모든 주제가 미니멀과 같은 구조속에서 단순히 형식적으로 재현되 었다고 평가하였다.
로젠블럼은, 워홀 작품의 단순하면서 규칙적인 형태와 미끈한 표면 그리고 원색의 사용 등은 미니멀 아트와
같은 추상 미술과 형태적 성질을 공유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가장 훌륭한 팝 아티스트가 곧 가장 훌륭한 추상 미술가라는 관점을 낳았다.
1971년 리차드 모르페 (Richard Morphet)는 지폐 시리즈, 먼로 시리즈, 캠벨 깡통 등에서 나타나는 그리드
(Grid)와 순환되는 반복을 추상에서 기원한다고 인식하였다.
워홀이 일상적인 소비재를 다루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유명인의 이미지. 주문초상을 제작하는 것은 구상의
회복을 이루긴 했지만 그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추상회화의 전통에도 놓일 수 있는 모순적이고도 불확
정한 구조를 가진 것이다.
린 토르프는 이와 같은 성질, 즉 워홀의 작품이 어떠한 계통이나 위치할 수 있는 특성을 지녔다는 것이야말로
그를 팝아트 경계 너머로 존재하게끔 하는 요인으로 보았다.
한편 워홀의 반복과 복제의 형태는 영화에서도 살펴볼 수 있다.
그의 언더그라운드 영화의 시작은 카메라를 고정시켜 전혀 운동이 없는 것, 조금 운동이 가미된 것, 그리고 이중
영상 기법을 쓴 것, 마지막으로는 전문가와의 합작으로 이르기까지 한다.
그의 영화는 일상 생활의 생활 속에서 누구나 반복하는 일상행위를 삼고 있는데 <수면>은 카메라를 고정시킨
상태에서 잠자는 사람의 동태를 포착하는 지루한 영화이다.
그의 영화는 모두 경험한 현재의 차원에 시간의 무차원 가상을 도입했다.
그것들이 따분할수록 더 효과적으로 이미지가 우리들 자신의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준다.
워홀의 영화는 지금까지 놓치고 있었던 그 하찮은 일상적인 행위를 문자 그대로 클로즈업해서 이것을 있는
그대로의 상태로 해서 우리 눈앞 에 재현해 보이는 것이다.
또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면서도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이미지를 영상의 무의미한 반복을 통해 우리에게
인식하게끔 한다.
그의 작품 가운데도 가장 유명한 먼로 시리즈는 실크 스크린화된 사진들의 사실적인 요소들이 그가 사용하는
스탠실 작업과정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나타나며, 각 상마다 변화를 조화 있게 통일시키고 있다.
실제보다 좀더 크게 반복되는 그의 얼굴을 긴 시간동안 변화하지 않고 있는 하나의 상으로서 워홀은 사진을
통해 하나의 영상적 전형으로 고착시키고 있다.
워홀의 작품 제작기법중 현대문화의 이미지의 반복되는 복제는 양식적인 면에서 미술계의 혁신을 추구하는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현대 소비사회의 대량 전달매채 속에서 쏟아져 나오는 일상적이고도 통속적인 이미지에
가장 민감한 반응을 나타낸다.
그는 현대의 매스미디어, 매스 커뮤니케이션에서 쏟아져 나오는 이미지가 일련의 반복성, 획일성으로 치닫는
것을 직시하고 먼로나 캠벨수프 깡통, 콜라병 등과 같이 똑같은 이미지를 기계적으로 계속 반복하여 배열하는
작업을 추진했다.
이와 같이 워홀은 현대 대량소비사회의 선전광고에서 강압적으로 주입하는 반복성을 그의 작품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워홀은 대중의 의식을 지배하는 현대사회의 매스미디어의 위력을 알고 있었고 그 이미지의 반복에 의해서 그
이미지만이 가지고 있는 내용이 약해지고 평면화 되어지어 보편화된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워홀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것들에 대해 우리의 반응을 마비시키는데 큰 관심을 보였다. 특별한 사건이 매스컴
에 오르내리면서 사건이 보편화되고, 자국에 대한 어떤 극단적인 묘사보다도 철저한 반복은 많은 의미를 가져
다주는 것이다. 그 좋은 예로 재난시리즈를 들 수 있는데 참혹한 사건들의 비인간화 과정을 시각화하여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에 우리의 주위를 돌려놓음으로서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이미지를 세계의 창의로 간주할
수 없게 한 다.
또한 이미지를 연속 반복하여 끔찍한 사고 현장의 느낌을 둔화시키며 사고 희생자들에 대한 극단작인 표현주의
적 묘사보다 더 많은 의미를 전달해준다.
앞에서 살펴보았던 워홀은 복제된 이미지들에 반복을 통해 우리가 알고 있던 이미지가 아닌 또 다른 새로운
이미지를 끄집어내고 익숙해진 일상생활을 연속해 봄으로서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했던 일상의 이미지를
재인식시키는 역할을 했다.
반복과 복제라는 기법을 통해 기종의 하나의 이미지를 여러 개의 서로 다른 이미지로 재창출했다는 것은 작가
로서뿐 아니라 훌륭한 아이디어맨으로도 자신의 삶을 즐기는 작가라 할 수 있겠다.
Ⅲ 대중매체를 이용한 이미지 차용
1 앤디워홀의 대중성
18세기 이후 일과 삶에 대한 대중들의 인식과 태도는 변화했고 경제적인 열망이 널리 퍼졌으며, 이와 동시에
사회이동, 교육, 소득에 따라 고도로 동질화된 취향과 생활양식에 대한 열망이 퍼졌다.
이러한 열망은 대중교육, 대중매체, 광고들의 과정을 통해 파급되고 대량으로 제조되었다.
이러하여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이 줄어듦으로서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문제에 직면하기 시작했고,
시간뿐만 아니라 소득 또한 증대되어 남은 시간을 줄이는데 도움이 될만한 여러 가지 매체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즉, 신문, 영화, TV, 단체여행 등 결국 경제적, 정치적 문화적인 권력이 '대중'의 수중으로 옮겨가는
사태가 발생했다.
다시 말해 이러한 현상을 산업주의의 속물취향(KITSCH)를 만들어 냈고, 매스미디어에 의한 대중 문화를
싹트게 하였다.
18C부터 매스미디어는 어떤 파국이나 중요한 전환 없이 견고하게 확장되었다. 그러나 현대에 들어와 대중문화
를 계급적 전통 취향의 오랜 장벽을 무너뜨리고 문화적 차이를 용해시킨 역동적이고 혁명적인 추진 체가 되었다.
이에 대중문화는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이질화된 문화를 혼합해 버리며 이른바 '동질화된 문화'를 만들게
되었다.
대중문화는 2차대전 후 현저하게 나타났다.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인 대중문화 속에는 수많은 이미지로 넘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는 바로 서구 산업사회의 물질주의 문명이, 특히 미국에 있어서 황금기를 구가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대중문화의 대중전달에서는 내용이나 질적 가치가 아니라 양적인 면이 더 중요하게 취급된다. 메시지의 이러한
초과잉상태는 결국 예술의 성격마저도 변화시키고 말았다.
전후 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자본주의 문화는 전달 매체의 홍수라는 새로운 생활 환경을 인간에게 제시하였다.
대중매체를 핵심으로 하는 20세기의 문화는 그 이전까지 유지되어온 예술경험 방식을 지배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예술은 과거에 비해 한층 혼란한 상황에 처해진 데다가 환경으로부터 맹렬한 도전을 받기에 이르렀다.
기호나 이미지 그리고 인위적으로 제작된 물건이 대중문화 속에서 대중 전달을 통해 나타났다.
대량 생산품의 예를 들면 청량음료로 유명한 코카콜라를 들 수 있다.
유명한 영화배우도, 대기업의 총수도, 정치가도, 평범한 집안의 아이들도 거리의 뒷골목의 가난한 이들도 모두
똑같은 음료를 마신다는 것이다. 단지 양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광고가 이 시대를 특정 짓는 중요한 문제가 된다.
광고가 자본주의 문화의 생명이고 광고 없이 자본주의는 존재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광고는 소비자본주
의의 꽃이다.
광고는 상품구매자를 설득하고 소비자의 행동을 규정하기 위하여 끊임없이 상품을 선전한다.
광고는 상품을 사고 소비하라고 하는 것이지 상품을 만들고 생산하라는 것이 아닌 것처럼 그것은 자연스럽게
생산보다는 소비를 강조하는 것과 통한다.
게다가 광고는 광고가 선전하는 상품들만 소비재인 것이 아니라 광고 그 자체가 소비재이다.
소비재가 상품을 소비하라고 선전하는 것이 광고인 것이다.
광고는 이렇게 '소비'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다. 그것은 차라리 현대 자본주의의 정신을 맹종한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광고는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허용하지 않고 자본주의의 소비정신에 모든 사람들이 순응하고
굴복하게 만든다. 물론 그 순응과 굴복의 반대 급부는 불행과 궁핍보다는 행복과 풍요라는 것을 광고는 강조한다.
유럽과 미국을 중심으로 자본주의는 산업혁명, 1920-30년대, 세계 제 2 차 대전을 지나면서 1960년대에 과학
기술의 혁명의 시대로 간다.
미국에서 1920년대 '소비문화'가 처음 나타났다.
이때 소비가 아니라 소비문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소비가 하나의 체계를 이루어 물질적인 유통과정을 주도해
나간다는 뜻을 갖는 것이다.
유행처럼 한가지 상품이 전국을 동질화할 정도가 되었을 때 소비문화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은 무리가 없었을
것이다.
이것은 1960년대의 미국의 눈부신 경제 발전과 더불어 사회보험과 복지혜택으로 인해 소득의 재분배가 이루어
지게 되었고, 그 결과 갈브레이스(J. K. Galbraith)가 말하는 '풍요로운 사회'를 맞이하였다.
소득의 재분배는 임금노동자의 수입과 전문 노동자의 수입의 균등화를 가져왔으며, 1960년대에는 전 노동력의
절반이 경영직, 전문직, 사무직, 판매직에 종사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는 임금 노동자와 '화이트칼라'의 소비수준과 가치관에까지 영향을 미쳐 계층간의 동질화
현상을 초래하였다. 따라서 미국은 차츰 '동질화된 사회' (homogenized society)로 변화되고 있었고, 사회에는
획일성(conformity)이 팽배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상황을 주요한 몇 가지로 정리하자면
첫째, 대량생산과 대량소비, 그리고 거기에 따르는 광고물의 범람을 들 수 있다. 상품의 대량생산에 따르는
대량공급으로 물질의 풍요로움은 극에 달하였고, 대부분의 상품은 당시 기업 통합에 의한 대기업에서 생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제품을 사용하게 되었다.
여기에 더하여 기업들의 선전광고는 소비자들의 새로운 욕망을 창조해 냈고, 그들의 기호를 조종하였으며,
따라서 개인을 대량시장의 한 작은 부속품으로 축소시켜 놓았다.
둘째는, 대중매체의 발달로 이것이 불러일으킨 영향력은 지대하였다. 1940년대 말부터 보급되기 시작한 TV는
신문과 잡지 그리고 이 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 수단이었던 라디오를 대신하면서 1960년대에 이르러 전
가정의 90%가 소유하게 되는 따름 확산을 보였다.
TV를 비롯한 대중매체는 빠른 전달과, 수용의 범위를 확장시킴으로서 대량생산과 소비를 촉진시키고,
소수의 엘리트 사회로부터 대중사회로의 전환을 가능케 하였다. 또 TV에 의해 지배되는 대중문화는 점차 동질
화되어 갔고, 사회의 구성원으로 하여금 그 사회에 무저항적으로 순응하게끔 만들었다.
셋째는, 큰 회사를 포함한 거대한 조직의 출현을 들 수 있다. 산업화되고 전문화 된 새로운 조직사회 속에서
개인은 고유한 개성적인 주체 자로서의 위치를 상실하였다.
개인주의적 윤리대신 새로운 집단 윤리가 나타나게 되고 창조의 원천은 개인이 아니라 집단이며 개인적 성취
보다는 소속감이 중요시 되는 새로운 20세기 후반기의 윤리가 나타나게 되었다.
이것은 데이비드 리스만(David Riesman)이 주장한 '타인 지향적'인 인간이 많아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었다. '내부지향적'인 인간은 자신의 가치관과 주관에 기반 하여 스스로를 판단하고 그에 따라 자기의 목표를
실현하는 사람들로서 예술세계에 있어서는 개성적인 내적 정서를 표현하고자 한 추상표현 주의가 이러한
경향에 속한다.
그러나 '타인 지향적'인 인간의 대규모의 조직체 혹은 지역사회의 인정을 받았을 때 자기를 실현하였다고 느끼
는 사람들로서, 20세기 후반기의 소비사회가 탄생시킨 새로운 인간형이었다.
팝아티스트들이 인간을 어떠한 정신이나 세계를 통괄하는 주체적인 것으로서가 아닌, 하나의 물체로서 혹은
문명인자로서 그 모습을 표현한 것은 이러한 사회현상들 속에서 표출된 하나의 예술적 방식이라고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들 수 있는 특징은, 2차 대전을 치르면서 전쟁무기의 개발 등과 관련된 과학의 발전에 미국인들은
매력과 신뢰를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1961년 타임지는 올해의 인물로 특별한 개인이 아닌 미국의 과학자를 선택하였다.
이는 미국인들이 과학과 공학을 매력 있게 바라보고 있음을 보여주는 예이다.
이러한 과학의 신뢰는 주관적인 감정과 공존하는 감성의 표현보다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실제적인 것들에
대한 신념을 낳았다.
앞에서 살펴본 것과 같이 변화된 시대적 문화적 분위기는 미술계에는 그대로 반영되어 나왔다.
먼저 경제적인 풍요는 일반대중들로 하여금 자연스럽게 미술계에 관심을 갖게 하였는데 이는 50년대 초에만
하더라도 소수의 몇 몇 현대 화랑만 존재하였던 것에 비해 1963년에 이르자 화랑수가 350여개에 이르게 된
것으로 그 정도를 짐작케 한다.
화랑의 증가는 새로운 미술에 대한 대중의 구매욕을 반영하는 동시에 후원자-투자자-수집상 체계를 낳게
되었고 신문, TV등은 다투어 이 새로운 형태의 미술과 뉴욕의 화랑인 레오카스텔리(Leo Castelli), 그리고,
그의 화랑에 전속된 화가를 다루게 되었다.
이중에서도 가장 주목할만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후 많은 미술운동 중에서도 추상표현주의의 등장이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추상표현주의는 전후에 나타난 수많은 양식의 실험 가운데 최초의 새로운 양식이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단절
이라 할 수 있는 전쟁 전으로부터 전후에 이르는 기간에 하나의 분수령을 형성했다는 점이다.
2차 대전후 미국은 세계최강국의 위치를 정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는 듯 미국은 팝
아트의 메카가 되었다.
나는 소비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명제는 1950년대와 60년대 구미 소비사회의 풍조를 간명하게 요약해
주는 표어이다. 팝 아트는 이 소비사회에 일면 긍정적 반응을 보였던 것이다. 팝 아트의 도상에는 소비상품,
특히 식품에 대한 분명한 강박관념 같은 것이 드러난다.
소비상품에 대한 예술적 강박관념에 관해서 이념적으로 정당화시켜 보이려는 듯한, 미국사회의 본질을 보는
워홀의 견해는 다음과 같다.
이 나라 , 아메리카의 위대성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들로 본질적으로는 가장 빈곤한 소비자들과 똑같은 것을
구입한다는 전통을 세웠다는 점이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즉, 여러분은 TV를 시청하면서 코카콜라를 볼 수 있는데, 여러분은 대통령 또는 리즈
테일러가 그것을 마신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여러분도 마찬가지로 그것을 마실 수 있다. 콜라는 그저 콜라일
뿐, 아무리 큰돈을 준다 하더라도 길모퉁이에서 건달이 빨아대고 있는 콜라와는 다른, 어떤 더 좋은 콜라를
살수는 없다. 모든 콜라는 똑같은 것으로 통용된다. 리즈 테일러도 거렁뱅이도, 그리고 여러분도 그 점을 알고
있다.
이같은 견해에 타당성이 없지는 않다.
즉 대량생산은 산업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동일한 제품을 동일하게 즐길 수 있게 하며, 문화의 평준화와 사회적
관습의 통일을 가져온다. 그러나 워홀의 그와 같은 사회, 정치적 이해는 지나치게 어설픈 데다가 순진하기까지
하다. 코카콜라 같은 청량음료가 사회적으로 유익하며 필요한 것인지, 그렇지 않다면 무언가 인간의 진정한
요구와 관계된 것인지 어떤지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고 있다.
또 전 세계에 걸친 그 제조 공장의 배경에 대한 고려도 전혀 없다. 그것이 사회적 공익이 아니라 개인적 이익
이라는 이해관계에서 제조된다는 사실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고 있다.
소비라는 의미에서의 선택이, 곧 생산이라는 의미에서의 선택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부유한 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은 청량음료를 소비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부자는 훨씬 많은 양을 소비할 수 있다.
더욱 자명한 사실은 그 같은 선택의 '평등'이 주택, 복지, 후생, 교육 등 과 같은 보다 많은 경비가 드는 사항에
해당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앤디 워홀은 신비스럽고 묘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인기나 명성을 잘 이용하는 작가로 유명하다.
그는 1928년 8월 6일 피치버그에서 체코슬로바키아 이민 2 세로 태어났다. 본명은 앤드류 워홀라 (Andrew
warhola)1차대전 직후 아버지가 미국으로 망명한 후 태어났는데, 아버지는 평생 건축노동자, 탄광부로 일해
왔기 때문에 워홀은 가난하고 이름 없는 세월을 보냈다.
경제공황, 전쟁 등 잇달은 궁핍함 속에서도 워홀은 아버지의 특별한 배려덕분에 카네기 인스티튜트에 입학할
수 있었고, 그는 그 덕에 상업예술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상업 예술가, 디스크 디자인, 광고캠페인,
디스플레이어, 심지어는 TV기상예보 그림까지 다양한 방면에서 상업디자이너의 자리를 굳히고 그 뒤 팝
아티스트로 명성을 날린 후 1987년 2월22일 쓸개 담낭 수술로 죽었다는 설과 에이즈로 사망했다는 설 등 죽음
에 이르기까지도 많은 일화를 남겼다.
그가 아티스트로 나서길 결심한 건 1950년대 후반 제스퍼 존스와 로버트 라우센버그의 작품과 경력에 관심을
갖게 되면서 시작했다.
그리고 아티스트로서의 자신의 포부가 전면에 나타나게 되었다.
그는 예술가란 평범한 것을 특별한 것으로 변형시킬 수 있는 사람으로 생각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유명한 예술
가가 되고 싶었다. 그는 화랑에서 그의 작품이 인정되고 전시되고 팔리며 그 작품들이 미술관에 들어가는 것을
원했다. 그것이 그의 새로운 실체 즉, 자기자신을 변형시키는 방법이라 생각했다.
이런 판단에서 워홀은 자신에 대한 의도적인 감추기, 신비감을 조성하기는 대중 앞에 자주 나타나면서 수행
된다는 점에서 더욱 교묘하고 이중적이다.
워홀은 공식적인 인터뷰, 대학의 강연, 파티참석 등과 함께 그의 공장이라고 부르던 작업실을 개방함으로서
자신을 노출시킨다. 그러나 그 드러냄은 자신의 전부를 보여준다거나, 의도를 열어보이는 것이 아니다.
단지 스타를 만드는데 결정적인 요소인 대중 앞에 나타난다는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
대중 앞에 나타나서도 그는 신비감을 허물지 않았다.
예를 들면 그는 대학 초청 강의에 가서도 그가 대동한 슈퍼스타들이 강의를 하는 동안 '완벽한 신비처럼 무대
위에 그저 조용히 앉아 있곤 했다.
심지어는 그런 일 조차 싫증이 나자 알렌 미제트(Allen Midgette)라는 인물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가 워홀처럼
분장하고 대신 강의에 참석하게 까지 했다.
이 위장 참석은 들통이 날 때까지 4개월 동안이나 계속된다.
들통이 난다해도 전혀 손해 볼 것 없는 위장참석이라는 행위는 그의 감추기와 드러내기 전략에 확실한 증거가
된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이유에서 대량생산품을 대상으로 소비상품에 대한 예술적 강박관념에 관해서 이념적으로
정당화시키려는 노력을 한다.
그의 공장에 모여든 사람들은 끊임없이 작업에 대한 아이디어를 쏟아냈고 워홀은 그 아이디어를 수용해 작품
을 제작했다.
1963년 가을, L.A 의 페러스 화랑에서 열린 전시회에 출품된 두번 겹쳐 찍은 엘리스 프레슬리(Double Elvis)
(그림 6)는 워홀의 조수였던 젊은 시인 제런드 말랜거의 아이디어였다.
또 워홀의 재난 시리즈의 출발점이 되는 129명의 죽음 (129die in jet)(그림 7) 은 헨리 갤잘러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 것이다. 워홀은 조수들이 일하는 사이를 돌아다니면 어떤 색깔이 멋있는지 묻기도 하면서 권위적이
거나 지배적이 아닌 수동적인 방식으로 자신을 열어두었다.
워홀의 이러한 방식은 르네상스 시대의 대가들이나 바로크 시대의 거장 루벤스(Paul Rubens)와도 유사하다.
르네상스 시대만해도 대가들은 성모의 얼굴과 같은 주요한 부분만 직접 그리거나 만들고 나머지는 대게 조수
들이 그렸다. 루벤스는 더욱 극단적이었다. 화가이자 유명한 외교관이었던 루벤스는 그의 작업실에 풍경, 동물
전문의 화가인 조수들을 데리고 있었다. 나중에 대가가 된 안토이 반 다이크(Antony Van Dyck)와 프란스
스나이더(France Snyders)도 그의 조수였다. 루벤스는 스케치와 구도 세부를 결정한 다음 나머지는 조수들
에게 맡기고 외교활동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그림이 거의 끝날 무렵 작품의 마무리를 손질하는 정도였다.
물론 워홀 시대 화가의 위상과 당시의 화가의 위상에는 대단한 차이가 있다.
루벤스 시대의 화가란 형태와 색채를 사용해 세계를 창조해내는 타고난 재능을 가진 인물이며, 그의 작품은
사람들의 감정과 열정을 일깨워 일상에 충격을 주는 존재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워홀은 루벤스와 같은 지배적인 권위를 행사하지 않았다.
순수 미술 작가로서 워홀의 대약진은 그가 선택한 주제가 성공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상업 미술을 그만 둔 워홀은 세련된 드로잉과 결별하고 하류 사회의 일상적인 이미지들에 주위를 기울인다.
만화, 병, 깡통라벨과 그 밖의 대량 생산된 이미지들이 그의 작품의 기저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똑같은 음식이라 하더라도 상표를 바꾸게 되면 특별한 만족감을 줄 수 있다는 광고 전략에 대해 하나의
도전적 자세를 취한다. 사람들은 흔히 광고 속에 무언가 예술성이 있다고 착각하기 십상이다.
광고의 홍수 속에서 소비자는 식별력을 갖춘 감식자가 되는 것이다.
60년대 초에 워홀이 위험한 인간으로 취급되던 이유는 그가 엉뚱하게도 제품선전 방식을 예술에 도입한 동시에
통속성과 동일성을 찬미하면서도 하나의 유명한 예술가로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다.
명성을 따내는 수단으로서의 용도 이외에는 이제 예술에서 기대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어졌고, 아방가르드의
이념조차 하나의 사기 행위나 유행, 작품 판매, 사업적 술수의 차원으로 전략해 버렸다.
일상적 이미지들을 드러나게 해 사람의 눈길을 끈 워홀은 다시 한번 그 이미지를 감추어 버린다.
즉, 워홀은 노출되어 있으면서 감춰진 이미지들을 드러나게 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감춰 버리는
이중 전략을 구사하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워홀의 이미지들은 냉담하고 무지건조 하게 원래 이미지들과 거리를 유지한다.
그 거리를 워홀은 즐기고 있는 것이다.
워홀이 다루는 스타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타들은 스크린과 지면들을 장식하지만 그것은 단지 이미지로서 뿐
스타들의 이미지는 노출되어 있지만 자연인으로서의 육신과 사생활은 은폐되어 있다.
워홀은 그 이미지에 주목한다. 스타의 이미지는 콜라병이나 수프캔처럼 일상적이며 일반인들에게 실제의 현실
보다 더 리얼하게 받아들여진다. 워홀은 이번에도 역시 그 스타 이미지들을 반사하는 거울이 된다.
그러나 스타의 은폐의 어떤 측면도 비춰주지 않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소재 중에 가장 워홀적이며 훌륭한 것이라면 그것은 물론 수프캔, 브릴로 상자 등의 일상 용품
과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몬로, 앨비스드의 스타들과 대중매체에 의해 생산된 이미지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소재들은 워홀의 창의력이 고조되었던 1960년대 초기에 집중적으로 다루어진다.
워홀은 자신이 콜라병을 소재로 삼은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나라 미국의 위대성은 가장 부유한 소비자들도 본질적으로는 가장 가난한 소비자들과 똑같은 것을 구입
한다는 전통을 세웠다는 점이다. TV 광고에 등장하는 코카콜라는 리즈 테일러도, 미국대통령도 그것을 마신다
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당신들도 마찬가지로 콜라를 마실 수 있다.
콜라는 그저 콜라일뿐 아무리 큰돈을 준다 하더라도 길모퉁이에서 건달이 빨아대고 있는 콜라 보다 더 좋은
콜라를 살 수 없다. 유통되는 콜라는 모두 똑 같다.
워홀의 이 말은 흔히 대량 생산품에 의해 비롯된 소비 문화에 대한 찬사의 의미가 있다고 해석되지만, 그러한
해석은 워홀이 소비사회에 대해 지나치게 순진한 입장을 갖고 있다고 본 것이다.
워홀은 수프깡통에 대해서도 '그것은 마셔왔고 지난 20년간 매일 같이 수프를 먹으며 앞으로도 똑같은 일을
되풀이 할 것이기 때문에 캠벨 수프를 다루었다'고 말했다.
워홀의 이러한 견해들은 사실 찬사나 비난을 떠나 평범한 삶이 선전 광고에 의해 대량 생산품들과 빈번히 접촉
하고 영향을 받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그의 작품의 중요한 소재는 영화배우나 대중스타였다.
그는 영화배우들과 미국문학의 그 시대의 위대한 인물에 대한 헌신적이며 열렬한 숭배자 였다.
스타의 숭배는 실제 현존하는 인간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즉 그의 육체적인 존재는 단지 이러한 환영이 실제
존재한다는 증거를 제공해 줄뿐이다.
그의 대중적 모습에 의해 설명되듯 그 보다 더 잘 스타숭배의 기교를 꿰뚫어 본 작가는 없다.
대중스타중 표현을 가장 많이 했고, 워홀이 좋아하는 모델인 마릴린 몬로(Marilyn Monroe)(그림 8)는 또한
다른 종류의 '머리 나쁜 금발 미인'이었다.
비교적 소수의 사람만이 실제로 그녀를 개인적으로 만났다 해도 그녀는 항상 실제 현존하는 인간이었다.
영화만이 그녀에게 섹스여신의 지위를 인정했다.
워홀은 마릴린 몬로의 사후 그녀를 모델로 선택했고 죽음이 그녀의 초자연적 존재성을 확실하게 해 주었다.
험프리 보가트(Humphrey Bogart)와는 달리 사후의 인기가 그녀 생전의 인기를 훨씬 능가하는 유일한 배우
였는데 여기에는 워홀이 큰 공헌을 했다.
워홀은 실제로 그의 스타를 주제로 한 작품이 어떻게 해석되는 지간에 문제가 되는 것은 아름다움뿐이라고
이야기했다. 몬로는 촌스럽게 튀는 색깔로 프린트한 것은 일종의 상징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름다움뿐이며 몬로는 행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자신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일종의 아름다움뿐이며 몬로는 아름답고 만약 어떤 것이 아름다운 것이라면 그
색채도 아름다운 것이라는 것이다.
워홀의 이러한 이야기는 자신의 작품이 그가 다룬 스타들에 대해 어떤 해석을 가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스웬슨의 지적처럼 단지 그가 좋아하기 때문에 작품화한 것에 불과하다는 증거가 된다.
그러나 워홀의 주장이나 스타에 대한 관점과는 상관없이 워홀이 다룬 몬로는 하나의 이콘(Icon)이 된다.
이콘이 됨으로써 몬로는 영원한 젊음의 상징이 된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워홀의 작품 해석자들은 워홀이 다룬
스타 특히 몬로가 갖는 의미에 대해 여러 가지 해석을 시도한다.
마이클 프리트 (Micheal Fried)는 "몬로와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명성과 대중성의 형성에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며, 거기에는 필연적으로 신비감이 따른다.
몬로의 도상은 우리시대에 가장 영향력 있는 신비의 하나다"라고 말했다.
린 토르프나 핀커스위트(Pincus Witten), 카더 레트클리프(Cater Ratclift)같은 사람은 <황금빛 마릴린>(그림 9)
이 상업매체를 통해 여러 대중의 눈에 띄게 되는 몬로이미지의 단순한 재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몬로를 섹스심벌이미지와 더불어 마돈나 상의 변형물이라 해석한다. 즉, 몬로와 성모 마리아를 세속적인
상징과 종교적인 상징을 대변하는 두 개의 상징 체계를 보고, 이 작품이 서로 다른 시대에 존재하는 문화적
종교적 신비를 효과적으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와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는 마릴린 몬로 정도는 아니라도 워홀
에 의해 수많은 그림으로 묘사된 또 다른 우상이었다. 그들 간의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이 배우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즉, 그들은 미국의 성공 이야기의 전형이라는 것이다. 본명 노마 진 베이커(Norma Jean
Baker), 일명 마릴린 몬로는 학대받는 아이로부터 유명한 배우가 되었다.
엘비스 프레슬리는 노래하는 트럭기사에서 전 시대의 유명한 우상이 되었으며, 아역 여배우로 시작했던 엘리자
베스 테일러는 할리웃(Hollywood)에서 가장 높은 보수를 받는 배우 중 하나가 되었다.
이들에게는 '매력'(glamour)이 있었다. 매력이란 개념은 극히 현대적인 발명품이다. 유화가 번성할 당시에는
매력이란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다.
우아함, 고상함, 권위 등의 개념들이 이와 유사한 듯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를 지닌다.
18세기 영국 초상화의 가장 대표적인 작가 토마스 갠즈버러(Thomas Gainsborough)에 의해서 묘사된 시든
(Siddens)부인은 전혀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시든 부인은 그녀가 선망의 대상이기 때문에 행복할 수 있다라는 식으로 묘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론 시든 부인은 부유하고 아름답고 재능이 있어 보이고 행운도 따르는 사람으로 보여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시든 부인의 모습은 그녀 자신의 것이고 또 그렇게 여겨져 왔다. 이 작품에서 시든 부인이 보여
주는 것은 그녀와 비슷해지고 싶은 사람들과는 전혀 무관하다.
이 경우 모델의 아름다움은 다른 사람들의 선망에 의해 이룩된 것이 아니다. 앤디 워홀이 그린 마릴린 몬로는
이와 정 반대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매력이란 사회 내에서 많은 사람들의 감정에서 우러나오는 선망이 없이는
성립되지 않는다. 워홀은 이런 매력의 개념을 대중스타를 통하여 미술에 끌어들였다.
그리고 그 본래의 이미지의 우상적인 상투형을 강조함으로서 스타가 제조되는 과정 그 자체를 폭로한다.
미국사회의 속사정을 고발한 사회적 사건을 죽음과 재난 시리즈로 냉정하게 보여주었다.
신문에 게재된 사진화보 속의 사건이 아무리 참혹하다 하더라도 -차량 충돌 사고, 살해당한 사람, 고문의
희생자, 군사적 잔학행위, 굶주린 어린이, 핵전쟁 등등-그것에 반응하는 우리의 정서적 잠재력은 그것을 많이
대면하면 대면할수록 더욱 감소된다.
이런 현상은 대중매체의 이미지를 증폭, 유포시키는 능력에서 빚어지는 불가피한 부산물의 하나다.
캔버스를 가로질러 반복되는 격렬한 이미지들로 구성된 그의 몇몇 작품들은 이러한 비인간화의 과정을 시각화
하고 있다.
즉 일체의 내용에 대한 감각의 상실을 가져오는 형식적 패턴을 사용하여 이미지를 지긋지긋하게 반복 시켜
몰아붙이는 방식을 곧이곧대로 펼쳐 보이는 것이다.
이런 작품들은 사물의 있는 그대로의 이미지에 우리의 주의를 돌려놓음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이미지
를 세계의 창으로 간주할 수 없게 한다.
워홀은 그 형식성, 물질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위치에 이미지를 배치시킨다.
그렇게 해서 이미지란 현실로부터 추상된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끼도록 한다.
예술의 독창성에 대한 무관심, 가장 분명한 소재를 표현하려는, 그리고 상투형을 포용하려는 의지로 인해 워홀
은 오늘날의 대다수 예술가와 구별된다.
예술사를 통해 볼 때 상투형들 가운데 어떤 것은 수세기 동안 존속되어 왔으며, 표현방식에 있어 항상 중대한
역할을 수행했음이 실증되고는 있지만, 일반적으로는 예술과 불편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늘날 우리의 문화는 개인주의와 개성적 표현이라는 이념의 지배를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사람들 사이의 서로 다른 점이, 그들이 서로 공유하고 있는 어떤 것보다 더 높은 가치를 획득한다.
그래서 공산화된 중국의 집단주의는 '모든 사람들이 똑같이 입고, 생각하도록 강요받는다. '는 이유로 업신여겨
지는 것이다.
더구나 우리의 문화는 산업시대에 속해 있다.
청바지를 선택하는 데 있어서 광고는 개인주의를 부추기는 반면, 그 산업체에서는 수백만이 입을 수 있을 만큼
의 청바지를 생산한다.(이런 이율배반적 현상을 '대중 개인주의'라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유사성, 평범성,
익명성, 상투형 등이 바로 대부분의 순수예술가들이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대중문화의 특징이다.
(그러나 워홀은 우리에게 그것을 직시하도록 밀어붙인다.)
워홀은 다음과 같은 말로 'Business Art'라는 자신의 철학을 이야기했다.
"비지니스 아트는 예술 다음에 오는 단계이다. 나는 스스로가 상업적 예술가이기를 주장했고, 이제는 비지니스,
즉 예술사업가로서 끝마무리를 지으려 한다. ..... 사업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가장 매력적인 종류의 예술이다. ...
...돈을 번다는 것은 예술이며, 일한다는 것도 예술이며, 훌륭한 사업은 최상의 예술인 것이다.
워홀은 자본주의 제도 속에서의 예술의 자본주의적 본성을 기꺼이 정직하게 직시하려는 극소수 현대 예술가들
중 한 사람이다.
소련의 사회주의 리얼리즘 작가들이 그들 사회의 공식적 가치를 찬양하는 것과 똑같이 그렇게 워홀은 그가
속한 자본주의 아메리카의 가치를 찬양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그러한 가치를 노골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워홀을 리얼리스트, 즉 자본주의 리얼리즘 작가라고 주장할 만도 하다.
만약 예술가들이 그가 살고 있는 사회의 진실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들 개인의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건 간에
어떤 비판적 차원이 제기될 것이다. 일말의 진실성을 담고 있는 묘사는 필연적으로 그 사호의 허위와 모순을
드러내게 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의 부당함에 관련시켜 보는 한, 그 문제에 대한 워홀의 접근방식의 한계는 명백하다.
워홀은 화려한 대중적 인기 속에서 활동했었던 예술가다.
그것 때문에 손상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것을 오히려 자신의 목적에 맞춰 잘 활용하고 있다.
대중 문화계에 편입해 들고 자기를 쓰는 순수 예술가가 있다면 그가 바로 앤디 워홀일 것이다.
워홀은 이제 더 이상 한 개인적 예술가로서 간주되지 않는다. 그는 사무실과 다수의 직원들을 거느린 사업체
를 갖고 있다. '워홀'은 이제 일군의 상품에 붙여진 제조 상표다.
그리고 워홀은 대단히 성공한 예술가이다. 그의 작품의 서구 전반에 걸쳐 공공미술과 및 개인의 소장품이 되어
있다. 그것이 각기 다른 이유에서 열 부류의 관중에 의해 감상된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워홀을 비방하는 사람들을 그의 작품을 소비사회에 대한 무비판적 찬양이라 해석한다.
그의 작품을 그렇게 읽는 것은 피상적이며, 또 그의 작품이 오늘 사회에 유효한 비평적 가치를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는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2. 앤디워홀의 이미지 차용방법 및 기법.
1) 이미지 차용
①만화
대중매체에서 가장 널리 이용되어온 것은 만화일 것이다. 만화를 이용한 이유는 만화가 지니고 있는 호소력
이다. 즉, 만화에는 다른 매체에 비해 설득과 정보전달을 쉽게 해주는 것이다.
2차 대전후 미국에서는 많은 만화가 대중매체로서 많이 나타났다.
그 중 가장 잘 알려진 리히텐슈타인( R.Lichtenstein)(그림 11)이다. 그는 인쇄매체의 특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고 평면적이고 담대한 만화의 구성방식은 그에게 즉흥적인 영감을 주는 원천이 되었던 것이다.
잡지에 실린 만화의 형태를 변형시킴이 없이 기계적으로 그려나간 리히텐슈타인의 방식은 유동적인 붓자국을
남기는 추상표현 주의의 방식과 완전히 대치된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에는 기존회화의 분위기에 대한 도전
의식 이상의 다른 무엇이 내재되어 있었다.
즉 리히텐슈타인은 팝 작가들 가운데에서 가장 형식주의에 밀착된 특성을 보인 작가로서, 약간 수정된 선의
굵기라든가 선명하게 처리한 색점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대중문화의 저속성보다는 자기 나름대로 정교한
매너리즘을 추구한 것이다.
리히텐슈타인에게서 착안한 아이디어로 워홀은 1960년-62년사이 신문의 연재 만화 (comic strips)와 광고
에서 파생된 작품을 내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작품은 화가로서의 결단력이 부족한 것으로 흔히 추상표현주의의 패러디(parady)로 오해되었다.
그 뒤 워홀은 보닛 텔러(Bonwit Teller)진열장에서의 다른 두작품[광고]와 [Before & After](그림 12)에서의
이미지는 순전히 사실적인 신문자료에서 그린다
두작품의 주제는 육체적 자아개선이다. 개선된 자세, 실루엣, 더많은 머리, 더 넓은 어깨, 날렵한 코, 등을
약속하는 증진도구들과 제품들, 이러한 광고들이 워홀의 육체적 불안의 핵심을 나타낸다.
1961년 제작한 마네킹은 그 당시의 유행으로 모양을 내고 있는 모습을 5개의 작품으로 회화를 제작했다.
5점 모두 이미지를 신문의 만화와 광고에서 따온 것인데-어떤이는 광고에서 이미지를 따왔다고도 하고 만화
에서 차용했다고 도 본다.-이 작품은 변형과 자아초월의 은유와 극적으로 변화하는 인물을 보여 준다.
즉, 수펴맨(그림13)이 수퍼맨 가운을 입을 때만 초인으로 변하고 뽀빠이가 시금치를 먹고 난 뒤 강한 사람으로
변한다는 것이다.
만화는 한정된 컷에서도 강한 느낌을 주며 호소력 깊은 인상을 준다. 워홀은 이런 장점을 한껏 발휘해서 다른
매체에 비해 설득력과 용이한 전달 수단에 이용하였다.
② 대중스타
가난한 이민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우스꽝스러운 외모 지나치게 소극적인 성격으로 어려움을 겪었던 워홀은
어려서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TV를 보거나 라디오를 들었고, 위인전을 대신하여 헐리우드 스타에
대한 전기를 읽었으며 끊임없이 연예계 가십잡지나 타블로이드판 신문을 읽었다.
그리하여 워홀의 내면에는 자연스럽게 유명인에 대한 동경이 뿌리깊이 박히게 되었고 그의 작품을 통해 등장할
뿐 아니라 그 자신 스스로가 명사중의 명사로 되게끔 하는 근본적인 요인이 되었다.
워홀이 헐리우드 영화와 그것을 둘러싼 명성에 관심을 가졌던 것을 고려할 때, 60년대 워홀이 영화배우를 포함
한 유명인의 이미지를 제작했던 것은 단지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그렸을 뿐이라는 스웬슨의 판단처럼 스타에
대한 그의 선망이라고 여겨진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선망의 대상으로 여기던, 사람들의 이미지에 근거를 둔 최초의 실크스크린 그림의 동기가
된다. 워홀은 그들 즉 대중스타와 자신을 동일시했는데, 자신을 동일시 한 것은 이중적이다.
하나는 소망의 대상으로서 이고 다른 하나는 모델의 역할로서이다.
기존의 초상화들의 개별 인물의 특별한 것을, 그것이 부이건, 사회적 지위이건 혹은 인간성이 건간에, 드러내
고자 애쓴 것에 비해 워홀의 초상화들은 인간을 드러내 보이는 동시에 또 감추고 있음으로 해서 전통적인 초상
화에 고유한 개성이라는 개념을 거부한다.
워홀이 60년대에 다루었던 유명인의 이미지에는 마릴린 몬로, 재클리 케네디, 엘비스 프레슬리 등이 있으며,
이들 외에 일반인에게는 널리 알려져 있지 않으나 미술계에서는 상당한 인지도를 지녔던 에델 스컬의 이미지를
소재로 한 것 등이 포함된다.
그는 특히 마릴린 몬로에게 열을 올렸다. 1962년 8월 그녀의 자살이 알려진 후 먼로시리즈는 우리시대의 중요한
이미지중 하나를 나타내 준다. 먼로의 작품은 그 실제 인물들에 대한 것이 아니라 영화를 통해 제시된 대중의
우상으로서의 역할에 맞춰 그려진 것이다.
그는 도금한 비잔틴(Byzantine)식 우상으로서[골드 마릴린 몬로]를 창조했다.
그러나 여기에서 숭배하는 대상은 축복 받는 처녀가 아니라 약간 음탕한 유혹하는 여자로 표현하여 그 얼굴의
이미지는 성적인 마력으로 가득 차 있다. 이러한 육감적이고 화려한 마릴린 몬로는 약물남용, 실패한 결혼, 정사,
결국 자살의 희생물 같은 실생활의 불행한 것을 감추었다.
워홀의 마릴린 몬로 그림들에서 바로 그 인간적이고 상처 입기 쉬운 그녀는 사랑을 위한 그리고 사랑을 위한
그리고 사랑을 받기 위한 욕구의 상징적 이미지가 된다. 입술만 여러 줄로 나타난 [마릴린 몬로의 입술]
모순을 찬양한다.
마릴린 입술의 실크스크린을 이용하여 끝없이 반복하게 표현하며, 키스의 개념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없어
지게 한다.
따라서 먼로의 역할은 대중의 우상의 역할에 맞춰 그려졌기 때문에 그녀의 개인 생활이나 감정은 워홀의 제작
에서 중요하지 않았다. 단지 우연에 의한 얼룩과 다양한 컬러나 그림자가 있을 뿐이고 그것들과 모델의 감정
상태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더구나 황홀하고도 환각적인, 금속성 색채를 사용함으로써 그것에서 풍기는 새로움과 인공성으로 인해 인간의
감정상태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그들이 무엇을 느끼는지 절대 반영하지 않음으로 해서 워홀은 그들을 비인간화 시켜버렸다.
마릴린에서와 같이 그는 처음에는 리즈(Liz)를 그녀가 심하게 아플 때 죽을 운명이라는 견지에서 그렸다.
그러나 그녀의 무한한 다양성에 너무 매혹되어, 그녀의 아역 배우로 뿐만 아니라 나일강의 여왕으로 대중에게
나타나며 영화에서든 실생활에서든 매우 잘 알려진 로멘스를 통해 할리우드의 여왕이 되는 식으로 선풍을
일으키는 주색에 빠진 사람으로 그리기도 했다. 그리고 워홀의 작품 중 유명한 몇 개의 주제가 되었던 재클린
시리즈였다. 1963년 11월 22일 J.F케네디 암살에 깊은 충격을 받았고, 여기에서 또 하나의 시리즈가 나왔다.
그것은 그 사건과 대통령의 미망인이었던 재클린이었다. 그녀는 고상한 처신에서 비극적인 여왕의 역할을
떠맡았다.
워홀의 연속된 이미지에 의한 반복성은 심미적 느낌 이상의 것이 된 것은 이러한 그림들에서였다.
그 당시의 그의 반복된 이미지는 보는 사람들에게 강박적인 느낌을 갖게 하였다. 왜냐하면, 실제 사건이 이미
TV에서 무한히 반복했기 때문에 그 자체가 모든 사람의 의식의 일부분이 되었었기 때문이다.
[재키 (Jackie)]같은 그림에서 조합한 이미지들의 거친 불일치가 좀더 넓은 층의 사람들에게 그의 시각적 전략
을 이해하도록 도왔다. 외관상 특정 주제에 관해 많은 작품을 대량으로 제작하는 것뿐만 아니라,
주제 및 기교의 선택을 통해서 그가 성취하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와같이 워홀이 유명인의 매력에 관한 관심만큼 죽음의 주제에 열중하였던 것과 관련하여 패트릭 스미스는,
매력과 죽음은 변증법적 극단에 위치하지만 워홀에게 있어 매력의 재현은 죽음의 재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며
나타났다고 밝혔다.
즉 워홀의 마릴린 몬로, 엘리자베스 테일러, 재클린 케네디 등의 유명인 이미지의 구성은 그들의 비극적 상황에
대한 통찰이었으며, 이들 그림이 가지는 매력은 인물의 신비에서 기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되는 비극적
상황의 예견으로부터 그들의 이미지를 구성한데에 있다고 말한다.
명성이란 유명세를 얻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그것은 허망하게 사라질 수도 있는 것으로서 그러한
허망함이 죽음이라는 상징으로 대변된 것인지도 모른다.
한편 캔버스 전체 표면에서 나타나는 대중스타들의 이미지 반복은 어디가 시작인지도 불분명하고 중요성의
서열도 없다. 워홀의 이미지 반복법은 단어의 반복과 같은 심리적 효과를 갖는다. 즉 한 단어를 계속 반복하다
보면 본래의 의미를 일고 기이하고도 낯선 소리가 되어 버리듯이 한 시각적 이미지가 계속 반복되어 나타나면
그 통합적인 형태를 잃고 의미 없는 부분들의 집합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의 개개의 인물 이미지는 어떤 기대되는 전체적 의미를 상실한 채 반복을 통해 진부한, 평평한 형태가 되어
버리고 만다. 반복이 계속될수록 한 이미지가 지니고 있는 특수성, 일화성, 감상적인 내용성은 점차 잊혀지고
보편화되어 그것이 장식적이고 조형적인 속성이 보다 강조되어 버리고 마는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워홀은 유명인의 이미지를 초상화할때 반복기법과 실크스크린의 우연적인 얼룩에
의한 이미지의 분열과 보편화, 그리고 인간의 감정상태와는 전혀 부합되지 않는 색채를 케리커쳐적인 얼굴
윤곽과 일치하지 않게 칠하는 방식 등을 통해 새로이 구성된 얼굴을 드러내게 되었으며 그 얼굴은 닮긴 했어도
절대 내면의 진실은 거의 드러내지는 않는다는 역설에 직면케 하였다.
우리가 몬로나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이미지를 선뜻 초상화라고 부를 수 없는 것도 다 이에 연유하나 바로 이런
껍데기뿐인 표면적 이미지야말로 현대산업사회에서 매스미디어 등에 의해 개성과 주관이 상실된 채 아무리
끔찍한 일에도 무감각해진 비인간적인 우리들의 모습에 대한 적나라한 반영임을 상기시키면서 그 의미는 보다
중요하게 부각된다.
③상표와 대량생산품
워홀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끈 신문 광고는 노골적이고 매우 직접적이다.
광고는 소비자가 현재의 자연스런 생활에 최대한의 불안을 느끼게 한다. 광고가 자극하는 불만, 불안, 공포,
불행의 심리적 체계는 자본주의가 끊임없는 시장개발을 위해, 가치증식을 위해 가동하는 결핍, 부족의 메카니즘(Mechanism)에 일치한다. 광고는 상상의 욕구를 만들어내고 구매자를 창조한다.
산업혁명이후 사람들은 일하는 시간이 줄어듦으로써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는 문제에 직면하고, 소득
증대에 따른 남은 시간을 줄이는 데 도움이 될만한 여러 가지 매체를 이용하게 된다.
다시 말해 이러한 현상은 산업주의의 속물취향(Kitsch)을 만들어 냈고, 매스미디어에 의한 대중문화를 싹트게
한다. 18C부터 매스미디어는 견고하게 확장되었고, 2차 세계대전후 현대 산업사회의 특징인 대중문화 속에는
수많은 이미지로 넘치게 되었다.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는 바로 서구 산업 사회의 물질주의 문명이,
특히 미국에 있어서 황금기를 구가하던 시기와 일치한다.
대중문화의 대중전달에서는 내용이나 질적 가치보다는 양적인 면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었고, 메시지의 이런
초 과잉상태를 결국 예술의 성격마저 변화시키고 말았다. 전후기술의 발달에 힘입은 자본주의 문화는 전달
매체의 홍수와는 새로운 생활환경을 인간에게 제시하였다.
대중매체를 핵심으로 하는 20C 문화는, 대변해야할 기초나 이미지 그리고 인위적으로 제작된 물건을 통해
전달하기 시작했다. 즉, 현대 자본주의가 소비시대라고 본 워홀은 대량생산품인 코카콜라, 델몬트, 복숭아
통조림, 캠벨수프, 브릴로 비누상자, 하인즈, 토마토케찹 등과 같은 제품들과 돈, 우표 같은 공공 대량 생산품
을 주제로 선택한다. 신문은 이런 것을 보여주었고 워홀은 그 길을 추구했다.
그것은 물론 광고의 주요 매체이고, 인쇄광고 운동에 노련한 그가 소비자의 욕구를 불러일으키고 어떤 면에서
욕망의 대상물을 제공한다는 수단으로 선택했으나 그러나 이것보다 선정적인 뉴스거리와 소문의 원천으로
명성을 위한 수단으로서 그렸다.
슈퍼마켓의 물품들이 1960년에 그의 작품[반쪽의 복숭아(Peach Halves)]에서 이미 나타났지만,
소문에 의하면 1961년에 화상인 머리엘 래토(Muriel Latow)가 그에게 한 제안을 받아들여서 [캠벨 수프 깡통]
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수프깡통은 형태가 다양한데 처음에는 손으로 그렸고 나중에는 그 절차를 단순화하여 각각의 깡통이 기계에
의해 대량 생산된 것처럼 똑같이 처리했다. [녹색 코카콜라]와 [취급주의 - 유리 감사합니다](그림 17)은 사방
연속하여 반복적으로 제시되어 마치 슈퍼마켓의 진열장 속의 상품과 같이 보여진다.
반복적으로 제시되는 상품은 그가 제작 방식을 실크스크린기법을 택하면서 효과적으로 표현된다.
그리고 '캠벨 수프 깡통의 사나이'로 알려진 앤디 워홀은 태연하게 보통 수프깡통에 서명을 해서 그것을 기념품
으로 판매함으로서 전문가를 조롱했다.
한편 상업주의적 인기에 편승해서 자신들의 수상쩍은 야합조성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만들려 하고 있다는
거센 비난이 쏟아졌다.
다인의 패러디는 그가 사용하는 오브제들의 '의미'에 따라서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회화 안에서 상용
되는 방식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했다. 그는 주제나 새로운 포름의 고안에는 관심이 없고 그리는 방식들은 복잡
하고 흔히 장황하게 설명하는데 몰두한다. 일찍이 초현실주의자들은 유명한 미술작품의 일부를 떼어 내거나
그것의 위치를 변경시킴으로써 옛 걸작을 조롱했다.
워홀의 회화를 이해하는 결정적 단서는 그가 제작방식으로 택한 실크스크린 기법이다.
그가 실크스크린기법을 자신의 작품에 이용한 까닭은 경제적으로 실크스크린은 하나의 화폭이나 연속적으로
이어진 화폭에 손쉽게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유일하게 한 번 제작하는 회화대신
전통적인 제작방식의 한계를 극복하는 수단이었다.
1961년-62년으로 해가 바뀌자 워홀은 조바심이 났다. 로스앤젤레스의 페라스 화랑에서는 <캠벨 수프 깡통>을
전시할 수 있었지만 뉴욕에서는 도무지 전시를 열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L.A의 반응도 거의 무관심하다고 할
만큼 비호의적이었다. 페라스 화랑이 있는 길 아래 쪽에서는 또 다른 그림 중개인이 실제 수프깡통을 쌓아 놓고
"진짜 단돈 29센트"라는 푯말을 붙여 놓였다. 그러는 동안 에밀의 안토니오는 엘리노아 워드(Eleanor Ward)
에게 뉴욕에 있는 그녀의 화랑, 스테이블 겔러리에서 워홀이 전시회를 가질 수 있도록 부탁하였다.
워홀이 회고하는 바에 따르면 이들 셋이 함께 만난 자리에서 안토니오는 정면으로 그녀에게 워홀의 전시회를
개최해 줄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고, 이러한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한 응답으로 "그녀는 지갑을 꺼내 지폐가
들어 있는 부위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나서 1달러 따리 지폐한장을 꺼내놓고 '앤디' 만약 당신이 이것을 그려준다면 전시회를 열어주겠어요"
라고 말을 했다한다.
워홀이 일련의 지폐시리즈(그림 18)를 제작한 후인 1962년 가을, 그녀는 약속을 지켰고, 이러한 워홀의 첫 번째
뉴욕 전시회에 대한 반응은 즉각적이고도 대단한 것이었다.
이제 워홀은 적어도 맨하탄의 미술세계에서는 유명인이 되었다.
지폐시리즈의 탄생도 실크스크린이라는 방식이 없었다면 감히 제작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한 작업실의 개념
은 공장의 개념으로 전환시키면서 효율적인 생산방식을 이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산업사회에 맞는 산업예술(이를테면 팝 아트)을 제작하기 위해 예술적 생산방식을 산업화한다는 것이 워홀의
명민함이었다. 또 이러한 통찰은 지극히 이단적이며 불안한 조짐이기도 했다.
화실을 공장으로 바꿔놓으면서, 기계에 대한 찬미를 공헌하고 나서면서, 시시콜콜하고 뻔한 이미지들을 가장
유효한 것으로 선택하면서, 자신은 별난 재능이나 솜씨를 지니지 못했다고 주장하면서, 반복과 단조로움, 권태
에 축복을 내리면서, 워홀은 예술과 예술가가 전통적으로 맺어왔던 가치에 사실상 도전했다.
그러나 한편 워홀의 작품이 모든 면에서 산업제품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기업에서 무더기로 상품을 제조할 때의 목적은 그 모든 상품들을 동일한 것으로 제작하려는 데에 있다.
그 중 어떤 제품 하나가 고유 모델과 맞지 않을 때 그것은 불량품으로 제거된다. 이에 비해 워홀의 판화는 색채
의 변조, 잉크 작업의 상이성, 상의 배치 및 그 찍혀 나오는 위치의 어긋남 등으로 인해 하나하나가 달리 구별
된다.
바꿔 말해서, 워홀은 작품을 순수예술권 내에서 판매하려면 유일성의 가치를 잃지 않아야 함을 익히 알고 있었다.
따라서 워홀은 판화 제작 과정 속에 '실수'를 개입시킴으로서 그 가치를 보존시킬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판화는 우표와 같다. 소인이 찍힌 우표가 그 가치를 발휘하듯이, 프린트 과정의 실수가 있는 작품이 가장 값나
가는 것이다.)
이렇듯 그의 실크스크린 기법은 예술적 생산과 산업적 생산 사이의 절충으로 볼 수 있다.
이로써 워홀은 주제와 형태적 요소를 포함하는 규정적인 양식의 개념에 의문을 던지면서 미술사안에서 분류의
개념으로서의 양식을 예술제작에 초점을 맞추는 그것으로 변화시켰다는데 의의를 가지고 있다.
④죽음과 재난이미지
워홀은 1963년부터 미국 현대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죽음의 형태를 시각화한 '죽음과 재난의 시리즈'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워홀이 「아트뉴스(Art News)지에서 가진 스웬슨과의 인터뷰에서 왜 죽음에 대해 다루려하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죽음의 실존을 믿고 있다. 당신은 금주의 인콰이러(Enquirer)지를 보았는가? <토요일의 재난>(그림 19) -
목이 반쯤 잘리어져 있고, 팔과 다리가 거기에 널려 있었다. 진저리가 난다. 그러나 그런 일은 항상 일어나고
있다. 최근에 사진으로 많은 시체들을 대했다.
사람들은 모든 것을 사진으로 찍는다. 사람들에게서 사진을 빼앗아 버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신문에는 대형비행기 사고 사진이 실려 있다. 나는 또한 <마릴린 몬로>를 그린다. 내가 하고 있는 모든 것들은
'죽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성탄절, 노동일, 휴일 .............. 그리고 언제든 라디오를 켜면 '400만이
죽어가고 있다'는 뉴스를 듣게 된다. 그런 것들이 그것을 시작하게 했다. 그러나 그런 끔찍한 사진을 자꾸 자꾸
보면 나중에는 아무렇지도 않게 된다.
<129명의 죽음>도판 은 실크스크린 프린트지만 추락한 비행기체에는 붓자국이 선명하였다.
이후 그의 작품에서는 수공업작업에 종지부를 찍고 거칠고 비개성적인 사진 스크린작업에 몰두하였다.
그 뒤 완성된 시각적 교통사고(Optical Car Crash)그림 에서는 사고 이미지가 서로 번지고 겹쳐, 지독히 혼란
스럽게 반복됨으로서 프린터 작업 그 자체가 혼돈 속에서 고통받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재난 시리즈는 동요되지 않는 평점을 유지하고 있다. 워홀은 이러한 고속도로상의 죽음을 하나의 처형
의 형태로 만들고 싶었던 것일까? 또 이러한 주제는 1940년대 후반에 제작된 그의 초기 작품 - 즉 중국 상하이
남부역이 폭파된 후, 버려진 어린아이를 찍은 뉴스 사진을 소재로 한 작품-에서 이미 나타나는 것처럼 재난과
죽음의 주제는 워홀에게 잠재된 관심사였음에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죽음에 대한 이미지를 매력과 연관해 본래의 이미지와 거리가 먼 아름다운 색조를 쓴 점은 특이
하다고 할 수 있다.
스웬슨이 왜 폭력적인 죽음의 이미지를 재현하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죽음을 믿는다. 헐리우드의 매력적인
스타의 '눈부신 대리물'을 믿는 것처럼"이라고 답변했듯이 워홀은 죽음과 같은 침묵과 정적을 자신이 좋아하던
매력적인 존재와 같은 방식으로 다루었던 것이다.
'재키시리즈'(그림 20)의 경우 워홀은 대통령으로서 케네디가 미남이기 때문에 좋아하였지만 그의 죽음에 대해
서는 슬퍼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TV와 라디오에서 모든 사람들이 슬퍼하도록 프로그래밍 하는 것이
오히려 귀찮을 정도이며 자신은 케네디의 암살에 불안을 느끼지 않을 뿐만 아니라, 활기찬 방식으로 이러한
소재를 다루었다고 하였다. 사실 느낌으로부터 자신을 분리시키려고 노력했던 그의 작품에 감정적인 내용을
담으려는 시도는 거의 의미가 없다고 하겠다.
재키 시리즈는 계속 제작했는데 이는 1965년까지 계속되었다.
이와 함께 워홀은 케네디와 그의 사무실 문장, 그리고 케네디의 죽음을 다룬 표제 뉴스에 초점을 맞춘<플래쉬
(Flash)>이라는 잘 알려지지 않은 작품도 제작하였다.
워홀은 이러한 시각적 파편들을 탁월한 감각으로 각도를 조절하고 배치하였기 때문에 동일한 이미지가 스크린
을 가득 채우거나 단순한 격자 형태로 줄을 맞추어 배치되어 있다. 혹자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워홀이 암살
사건에 대해 보다 침착해 질 수 있었고, 이에 따라 주제를 보다 발랄한 방법으로 다룰 수 있었다는 의견을 제시
하기도 한다.
그 뒤 죽음의 형벌에 대해 혼란할 때<전기의자시리즈>(그림 21)를 미국이 인종차별 철폐로 소란할 때 <인종
폭동>으로, 1980년신 나찌주의가 대두 되었을 때<시대정신>과 2차 대전을 종지부 찍고 일본의 패망을 안겨다준
원자폭탄을 주제로한 <원자폭탄>, 건물에서 떨어지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자살> 등으로 반응하였다.
토마스 크로우(Thomas Crow)와 마이클 콘 (Micheal Cone)과 같은 비평가는 워홀이 미국 정치의 허점을 드러
내는 데에 매력을 느꼈으며 그가 '재난'이라 제목을 붙인 작품들은 정치적 주제와 연결되었다고 평가한다.
이에 반해 카터 라트클리프(Carter Ratcliff)는 스타의 이미지를 비롯하여 전기의자, 교통사고, 사회적인 사건 등
모든 재앙시리즈는 동등 한 관점으로 다루어 졌으며, 워홀을 사회적인 비평가로 보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또 존 워커는 "만약 예술가가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의 진실에 대해 밝히고자 한다면 거기에는 개인의 정신적
신념에 따르는 비판의 시각이 제기되어야 할 것이다. 워홀이 흑인과 백인경찰사이의 폭력적인 대치나 죽음의
도구로 쓴 전기의자나 케네디 암살 후의 재키를 다루었다 하더라도 그의 작품은 그 같은 정치적 쟁점에 직접
관여한 것이 아니다."라는 공감할 만한 견해를 발표하였다.
1972년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동차 사고로 죽은 이를 그리는 이유에 대해서 그들이 알려지지 않은 인물의 죽음
이기 때문에 그리고 죽은 자들은 어떠한 행동도 취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린다고 했다.
이러한 언급에서 루시 리파트는 "워홀은 현대 생활 속의 가공할 만한 일들에 대해 일체의 비평을 거부하고
초연한 입장에서 바라본다. 그의 초연함이란 담담하게 영화를 관람하는 사람의 태도이다. 이런 점에서 워홀은
기계공학적 사회를 충실하게 반영한다."고 평가하였다.
워홀은 물리적, 도덕적, 감정저기, 미학적인 모든 단계를 통해 중립성을 유지한 예술가로서 일단의 사회현상에
대해 어떠한 해석과 평가를 가함 없이 마치 거울처럼 그것을 비추어 내었다. 즉 자신이 매체와 같은 입장에
서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을 단순히 수용했고, 그러한 수동성은 주관적인 편견 없는 객관화의 과정을
통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다. 워홀작품의 대부분은 다른 사람의 제안에 의해 이루어 졌으며 이것은 워홀의
매개적 위치를 말해주는 하나의 예가 된다.
2) 기법과 양식
①번지기 선(Blotted line)
1950년대 상업미술가로 활동하고 있을 때 그를 유명하게 만든 기법은 모노타입 과정으로 제작된 불명료한
번지기선으로, 이는 기름이 칠해져 흡수가 안되는 종이 위에 잉크로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다시 흡수력이 좋은
종이 위에 눌러 찍어 휘갈겨 그린 듯한 느낌과 번지는 효과를 낳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법은 무척 개인적인 느낌을 주면서도 또 한편 비개인적이기도 한 것으로써, 원래의 그림과 마지막
결과물 사이에 일정한 거리를 두는 방법인 한편 선에 대한 워홀의 세련된 감각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단순하면서도 멋을 내지 않은 듯이 보이는 선들은 그의 작품에 달콤하고 어린아이 같은 순진함을 느끼게 한다.
이것은 또한, 그 당시 그의 친구들이 그를 부끄럽고 까다롭지 않은 성격의 소유자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봐서 워홀 자신에 대한 직접적인 표현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장식적이면서도 세예체 같은 선은 마티스(Henri Mattisse)와 벤샨(Ben shshn)의 드로잉과 매우 유사성을
갖는다.
위의 도판에서 두 그림을 비교할 때 유려하고 서체 적인 전체적인 느낌이 초기의 워홀이 마티스의 작품을 분명
히 알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시기 동안의 워홀의 상업적 삽화를 살펴보면 벤 샨의 판화와 드로잉과도 접했음을 알 수 있다.
워홀의 1950년대에 행해진 삽화들은 벤샨의 평면적이면서 입방체 적인 형태와 끝을 후린 부드러운 선 등의
특징을 공유하는데 예를 들어 벤샨의 <기대고 있는 소년 The Reclining Boy1943>에서 보이는 평면적이고
모가진 형태는 워홀의 <알콜중독 Alcoholism 1953>에서도 나타난다.
이러한 마티스와 벤 샨으로부터의 영향은 워홀 스스로 천명하였는 바 그의 절친한 친구였던 챨스 리센비
(Charles Lisanby)가 그에게 인생에서 정말 소망하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워홀은 이에 대해 "마티스
같이 되고 싶다." 라는 대답을 했다.
여기서 우리가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워홀이 위에서 살펴본 것과 같은 양식적 영향만을 마티스에게서 받아들
이고자 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워홀이 진실로 원했던 것은, 어떤 일을 하든지 즉각적으로 유명해지는 마티스와 같은 유명세를 획득하고 싶어한
것이다. 벤샨으로부터의 영향에 있어서도 그의 그래픽 적인 스타일뿐 아니라 마티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벤 샨이 누리는 유명한 예술가로서의 명성 때문에 그런 스타일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번지기 선 기법에 의해 완성된 소위 복사물은 워홀의 후반 실크스크린 이미지처럼 잉크의 농도와 무게의 다양성
으로 인해 절대 동일하게 두 번 찍히지 않았으며, 베껴진 드로잉에 손으로 색을 칠함으로써 오리지날과 복사물
에 대한 일반적 개념을 뒤집었다.
또 잉크로 드로잉을 프린트함으로써 본래의 드로잉을 여러 개로 늘린 셈이 되고 그리하여 결국 미술사에서
신성한 영역이었던 오리지날과 유일성이라는 개념의 가치를 격하시켰다.
또 색을 칠할 때 친구들에게 각각 칠한 부분을 전담시킴으로써 후에 조수를 기용하는 그의 작업방식의 선례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예측할 수 없는 결과에 대한 우연성, 누구에 의해 실행되었는지 알 수 없는 익명성 그리고 작가 자신
의 손 작업이 아닌 기계적 방법에 대한 열망 등은 후에 워홀의 60년대 작품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들인바,
워홀의 상업예술과 순수예술사이에 거의 지속성이 없다고 종종 논의되는 것에 반박을 제기하게 한다.
이것은 워홀의 광고 디자인을 보면 보다 명확해 지는데, 밀러 구두 디자인(그림 24)에 사용된 그래픽 적인 스타일,
단순화된 형태, 그리고 무엇보다 연속적인 구성 등은 60년대 초기 작품에 대한 선례를 이루는 것들이다.
상업예술에서의 성공은 워홀에게 고수입과 두 번의 아트 디렉터 클럽 상을 안겨 주었지만 예술가를 스타로 만들
어 주는 순수예술의 신비한 정신적인 분위기를 주지는 못했다.
상업미술가였을 당시, '구두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칭송까지 얻었던 그의 구두 드로잉은 그러나 예술로서는
인정을 받지 못하였으니, 1956년 그의 구두 드로잉 전시는 무관심 혹은 비꼬는 듯한 비평만을 받았을 뿐이었다.
따라서 그가 그토록 지향하는 스타가 되기 위해서는 상업 일러스트레이터 이상의 것이 되어야만 했고,
이런 그가, 당시 종종 상업작품을 하던 존스와 라우셴버그의 작품을 숭배했을 분 아니라, 상업 미술가로서는
도저히 누릴 수 없는 그들의 스타적인 지위에 더 큰 인상을 받게 된 것은 당연하기 까지하다.
따스하고 섬세하며 창의성이 보이는 인간적인 회화 스타일이 그의 야망을 성취시키지 못할 것임을 깨달은 워홀
은 그것을 미련 없이 버리기로 결정한다. 즉 1960년 워홀은 헨리 겔드잘러 (Henry Geldzahler)와 함께 번지기
선 기법에 기초한 모든 드로잉과 회화작품 폐기시키고 예정되어 있던 명사들의 발 드로잉 시리즈 전시를 취소
했다. 한 예술가가 그의 작품을 유행사조와 맞지 않는 다고 해서 완전히 변신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성공을 최우선 순위에 두는 워홀은 달랐다. 워홀의 미술사에서의 중요성은 그의 작품 뿐 아니라,
이와 같이 예술가를 비세속적인 사람으로 보는 전통적인 개념을 단호히 거부하고 고객의 취향에 맞는 제품을
제공하는 사업가로서의 개념을 열어 놓아 다음 세대들에게 길을 만들었다는 데서 더 큰 의의를 찾을 수 있다.
②실크스크린(Silk screen)
워홀의 회화를 이해하는 결정적인 단서는 그가 제작방식으로 택한 실크스크린기법이다.
워홀의 경우 실크스크린은 사진적 관점과 회화적 과정을 모두 포함한다.
워홀은 1950년대 초 상업예술의 삽화가로 일하던 시절부터 이미 반복 이미지를 낳게 되는 여러 가지 판화기법
을 알고 있었는데 즉 고무나 나무에 문양을 새겨 여러 번 찍으면 같은 형태들이 산출되는 점을 이용하여 그는
<적색 항공우표 Red Airmail Stamps 1962>와 <그린스탬프 - S&H Green Stamps 1962> 그리고 <꽃 시리즈>
등에서 반복이미지를 제작한 바 있다.
그러나 1962년 8월 이 되자 그는 그 방법을 그만두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작업들은 물론 원하는 숫자만큼 한
모델로부터 같은 이미지를 반복할 수는 있으나, 우선 모델이 되는 형판을 이용할 때 손에 의해 일일이 윤곽선을
복사지로 옮기거나 도장을 하나하나 찍어야 하는 수공 적인 성격이 강한 방법들이었고 또한 그 작업 과정에
있어서도, 결과적으로 서로 같은 형태들을 만들어 내기 위해서는 화면 위에서 형판을 누르는 손의 힘을 규칙적
으로 주도를 신경을 써야 한다던가 하는 여러 가지 조건이 따랐기 때문이다.
결국 워홀은 이러한 방법이 "갑자기 너무나 집에서 만든 것 같이 보였다. 나는 공장 조립대에서 만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보다 강렬한 것을 원했다."라고 말하며 <100개의 캠벨 수프깡통>(그림 26)과 <20개의 마릴린 몬로>,
<마오쩌뚱>에서 실크스크린 기법을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워홀의 경우 실크스크린은 사진적 과정과 회화적 과정모두를 포함한다. 한 점의 실크스크린 원판은 다양한 색조,
색상, 디자인으로 변화시켜가면서 동일한 이미지를 수백 개씩 만들어내며, 안료, 잉크의 양, 밀대의 압력,
이미지의 자리바꿈이나 겹쳐 찍는 방식 등을 다양하게 구사하는 데 사용될 수 있다.
워홀이 판화 제작가나 직물 디자이너가 사용하는 기법을 차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경제적으로, 실크스크린은
하나의 화폭이나 연속적으로 이어진 화폭에 손쉽게 동일한 이미지를 반복할 수 있게 한다. 대량생산을 고려할
때, 실크스크린은 생산 율에 가속도를 붙여 생산고를 늘인다. 각각이 유일하며 한 번으로 끝나는 한 점의 회화
를 제작하는 대신, 워홀은 작품을 한 벌로, 복제판으로 (인쇄물처럼)제작할 수 있었다.
워홀은 먼저 수동실크작업을 하다가 1962년 후반에 나온 몬로시리즈에서 사진 실크스크린으로 전향하였다.
손으로 잘라 스크린을 만드는 것과 원칙적으로 크게 다를 바 없지만 사진 스크린을 제작하기보다 복잡하다.
먼저 사진 이미지를 깨끗한 아세테이트 천 위에 전사시킨 다음 기술자들이 빛에 민감하도록 처리가 된 스크린
위에 이 천을 놓고 스크린을 강한 빛에 노출시켜 사진 이미지가 나타나게 한다.
스크린이 다 마르고 나면 손으로 자른 스텐실과 같은 방법으로 사용하는 것이 가능하다.
사진 스크린은 신문의 사진과 같이 작은 점무늬로 이루어져 있어 어떠한 명암 톤도 표현할 수 있었으나 워홀은
언제나 중간 톤을 삭제한 극단적인 명암의대치만 사용하였다.
사진 실크스크린은 수동적인 스텐실보다 훨씬 강력한 '공장 조립대 효과'를 부여하는 것으로 작품의 제작과정에
있어서 워홀은 단지 섬세하게 감독할 뿐이다.
실제로 그는 몇 벌씩 제작할 수 있도록 실크스크린을 부분적으로 기계화했다. 이 부분적 기계화는 조수를 고용
하거나, 그들에게 작업을 맡길 수도 있음을 뜻했다. 워홀 스스로가 한 대의 '기계처럼'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것은 결코 우연한 발상에서 어쩌다 뱉은 말이 아니었다. 그의 뉴욕의 작업실이 '공장'으로, 그의 실크스크린
작품집이 '공장판'이라 불려지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었다. 스크린인쇄과정을 보여주는 다락방작업실 사진은
그것이 하나의 작은 공장과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한다.
사진 이미지를 실크스크린 하는 것은 라우셴버그에 의해서 먼저 시도되었는데, 그는 워홀이 한 작품에 같은
이미지를 수없이 반복하는 것과는 달리 단일한 이미지를 다른 그림에 다시 등장시켜 새로운 관계에 놓이는
것을 보여주고자 하였다.
라우셴버그가 하나의 이미지를 이 작품에서 저 작품으로 반복시킨 것은 순환의 메타포로서 삶의 방식을 재현
하고자 한 것이며 워홀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대량생산 소비사회와 비개성적인 현대사회를 묘사하기 위해
하나의 이미지를 한 작품 속에서 수없이 반복시켰다.
이에 대해 부클로(Benjamin Buchloh)는 워홀이 라우셴버그와 같이 실크스크린을 사용하고는 있으나 거기
에는 더 이상 라우셴버그의 회화가 지니는 '의미'와 '이야기'를 찾아볼 수 없다고 지적하면서 워홀은 뒤샹이
레디메이드에서 내용을 무시한 것과 같은 태도로 회화에서 이야기를 부정하였다고 설명했다.
워홀이 실크스크린작업을 함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목표로 삼았던 것은 개별 미술 작품의 유일성 개념보다는
일반적 개성이라는 개념은 해치는 것이었다. 누가 제작한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개성적이고 일반
적인 실크스크린 기법은 또한 모든 것을 쉽게 하고자 하는 그의 인생철학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작업실은 공장이라 불리게 됐으며 과거의 예술적 최상의 가치였던 개성적인 표현은 그 자체에 대해
의문점을 제기했으며 그는 많은 조수의 도움을 받아가면서 여러 개의 작품을 제작할 수 있었다.
이에 관련하여 그는 이런 말을 했다.
" 나는 내것을 누군가 다른 사람이 내 대신 제작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가급적 많은 사람들이 한
실크 스크린 판을 이용하여 누구도 그 그림이 정말 내손에 의한 것인지 또는 다른 사람들에 의한 것인지를 잘
알 수 없게 끔 된다면 그것은 아주 멋진 일이다."
라고 말했다.
그의 실크스크린된 이미지들이 익명성과 표준성을 지니고 있다는 점, 그리고 누구에게라도 자신의 작품을 맡길
수 있다는 언급 등으로 워홀은, 하나의 작품은 유일하다는 것이고 기존의 어느 것과도 구분될 수 있는 독창적인
것이어야 한다는 전통적인 미술개념과 독창적으로 맞서게 되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모든 사람은 재능이 있다. .......모든 사람은 예술가로 태어난다.'라는 미학적 관점이 실려있다.
그러면서 예술은 특별한 배타적인 행위도 아니고 예술적 장인과 기술적 장인의 완전한 구분 또한 없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뒤샹은 "나는 예술가의 창조적 기능을 믿지 않는다. 예술가와 일반인은 같다.
그의 직업은 사업가의 그것과 같다."고 말함으로써 모흘리 나기와 함께, 워홀이 화가와 작품 자체의 개성을 거부
하면서 미술가의 고유한 권위에 도전하고 미술가의 개념을 확장시키는데 영향을 주었다.
기계적 기법을 통한 이미지의 정확한 복제라는 기대는 우연적인 실수로 말미암았다, 매번 같은 선명도나 실크
결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말았다. 본래 상업예술에서 표면에 매끈함과 명확한 윤곽선을 주기 위해 사용
했던 실크스크린 기법이 워홀에 이르러 실크스크린에 점점 물기가 말라감에 따라 군데군데 여백이 생기고 이
빈 여백은 물감에 의해서 막혀서 실크의 흔적이 남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추상표현주의에나 있음
직할 자유분방하고 제멋대로의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한 작품을 반복해 찍을 때 자그마한 형태들간의 차이점이 존재하도록 만들었고 이는 워홀의 작품
에 풍부한 조형적 요소를 산출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불완전성과 부정확성에서 오는 잉크 얼룩에 의한 변화는 그것이 우연한 효과라고는 하지만, 실상 그런 기술상
의 불완전성에 의해 자취를 남기기로 결정한 것은 워홀 자신의 결정이므로 그의 의도적인 변화에의 추구라고도
할 수 있다.
따라서 순수예술권 내에서는 작품에 대한 유일성의 가치를 잃지 말아야 한다는 점과 상업성을 추구하는 점을
교묘히 절충시킨 워홀은 우연성을 토대로 실크스크린 기법으로 해결점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실크스크린 기법
으로 기계적이 되고 싶다는 그 자신의 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은 워홀것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 수 있는
이미지로 제작된 것이다.
Ⅳ앤디워홀의 미술사적 의의
워홀의 작업 방법, 내용, 태도 또는 어록 등을 통해서 다른 팝 작가들과는 다른 그만의 조형언어를 느낄 수 있다.
그의 예술은 현대미술에 있어서 미술의 대중화, 사회화되는 것에 커다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것은 이제가지 불변의 진리처럼 떠받들려지던 미술의 전통적인 가치에 대해 가차없는 부정과 도전이었다.
그를 다른 팝 작가들과 구별짓게 하는 특징들로는 크게 보아서 비개성, 상업성, 반복성들이 그것이다.
미술사가 강태희에 의하면 다음과 같이 워홀의 특징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워홀은 오리지널리티를 부정했
으며 작가의 손수 작업(Authorship)에 대해 무관심했고 끝없는 반복을 통해 작품의 유일무이성을 부정했으며
솜씨나 기량에 무관심했다. 그리고 무자비한 상업주의와 출세 지상주의 등이 있다.
결과적으로 그는 미술품에 따라다니는 천재와 영감의 산물이라는 광휘(Aura)를 말살하고(그것보다는 작품 자체
의 가치 대신에 작가의 명성이 말하는 광휘로 대치하였고),고급 전통 미술과 대중 미술의 경계를 부정하고,
나아가 미술품을 상업 시스템에 종속되는 일개 상품으로 파악, 제시했으며, 또한 미술가의 위상을 대중적인
스타의 그것과 큰 차이 없이 규정하였다.
워홀이 참여해 왔던 일련의 다채로운 경력과 작품에 대한 당시의 여러 냉소적인 비판과 외면에도 불구하고,
오늘날 워홀의 작품은 전 세계의 권위 있는 공공미술관에 전시되거나 수많은 수집가들에게 받아 들여지는 등,
그는 현대의 미술사에 있어서 확고하게 자리를 잡았다.
그는 동시에 혹은 각기 다른 시기에 그래픽 디자인, 판화, 조각, 영화, 사진, 광고, TV, 각종 저술활동에 관여해
왔으며, 작품을 포함해서 자신의 생애 자체가 60년대의 팝 아트의 중심에 위치하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처럼 그가 창조했던 예술과 대중적 평판의 신화적인 혼합물로서' 워홀리즘(Warholism)이란 용어가
탄생되었으며, 이제 워홀리즘 현상은 엘리트 계층에서 대중에까지, 전통적인 드로잉에서 영화에까지 광범위한
분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그가 택한 만화, 대중스타, 광고 등 기발하고 번득이는 소재들은 어쩌면 아무런 고려 없이 무차별하게 선택되어
졌다는 잘못된 평가도 있었지만 사실 20C의 역사와 당시 사회의 광범위한 이미지를 1960년대에 제작된 그의
작품들은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젠퀴스트, 톰 웨셀만등의 팝 아티스트들과 함께, 미국적인 예술로 추상표현주의
가 보편화되던 시기 이후에, 산업화와 대중매체의 발달에 의해 새로이 형성된 미국미술을 시도한 것으로 인정
받고 있으며 워홀은 이 영역에 있어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비지니스 아트라는 개념을 세운 그는 이러한 산업사회의 생리를 누구보다도 잘 파악하고 이용할 줄 아는 사람
이었다. 실제로 상업광고 디자이너로 활약하면서 팝의 태동이전부터 이미 그는 이 분야에서 성공도 하고많은
부도 축적했다.
자신의 작업실을 공장(Factory)이라고까지 부르며 작품제작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나 우연까지도 우연의 효과
라고 생각하며 전혀 개의치 않았으며, 한동안 그의 어머니가 작품의 싸인을 도맡아서 찬 사실도 워홀의 예술의
상업적인 면을 반영하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앤디 워홀은 바로 이러한 점을 채택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런 제작 과정은 '누가 그린 그림인지 분간 못할 정도로 비개성적이고, 일반적이고, 기계적인 과정이며,
지극히 잘 알려진 소재들 즉 일회용소비상품(코카콜라, 수프깡통)대중적 우상(엘비스 프레슬리, 마릴린 몬로)등
매스미디어의 의미를 선택하는 것에 「주저하지 않는다.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도 "나는 내 화면에 단순히 사물
의 실상을 그릴뿐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내가 가장 잘 아는 것이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이렇듯 오리지날 작품
을 하기 위해 이미지를 창조해 내지는 않으리라 생각했고,기계적인 것에로 접근하려는 태도 등에서 질서적인
것, 규칙적인 것, 반복적인 것, 표준적인 것, 차디찬 것 따위의 인간적 정서와 상반되는 기술적인 것을 수용하고
동화하려는 비개성적인 태도가 있다.
마르코 리빙스턴(Marco Livingstone)은 "그는 오직 자기자신을 모델로 취함으로써 비개성적인 화가의 대표로
알려진 워홀을 예찬하고 있으며, 뉴욕팝의 기원으로 거슬러 올라갔다."고 평하였다. 또 제프쿤스는 합성재료를
사용한 조각작품을 통해 80년대의 경향을 상징하는 화가라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커다란 성공과 부를 얻었다.
그는 워홀이 주장하는 내용 없는 표면적인 작품으로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었다는 점에 있어 더욱 워홀과 비교
되는데, 리빙스턴은 그에 대해 "쿤스는 뒤샹으로 부터 시작되어 존스 , 워홀로 이어지는 계보의 마지막 인물
이다."고 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80년대에는 반복과 나열의 방식, 산업적인 합성제료의 사용, 현대 대중매체의 도상으로서 매체이미지의
사용, 레디메이드 오브제의 재현, 그리고 대량생산에 대한 언급이 다시 미술의 기본 요소로 등장하였고,
워홀은 이러한 후세대들에게 꾸준히 영향을 주었다.
워홀이 택한 제작방법인 실크스크린기법이나 기존의 물건들을 복사 복제하는 방법을 수없이 많은 오리지널의
카피 (Copy)를 생산해낸다.
그러므로 독창적인 것, 유일무이한 의미에서의 순수예술의 의미는 탈색하고 능률적이고 표준화된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이는 그가 사용하는 복제는 이미지의 내용을 체감하고 인간 반응의 폭을 축소하여, 인간 선택의 자의성
을 배제하는 바, 결국 비개성적 기계화이다.
이상과 같이 "캠벨깡통의 사나이"라는 조롱과 함께 쏟아지던 수많은 비판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과 예술을 향한
그의 열정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워홀은 자신의 예술을 우리 시대의 한정된 미, 즉 순간적이며 언제나 폐기처분 될 수 있는 단순한 화려함에 헌신
하였다. 우리는 고대 초의 서구 예술의 세련됨에도 르네상스의 지적인 힘과 근대 초의 영웅주의에도 여전히 민감
하다.
그러나 우리에게 가장 친밀한 것은 당연히 현대이다.
워홀은 이러한 친밀감을 받아들이도록 가르치며 무에 대한 변주가 놀라우리만큼 풍성한 20C후반을 직시하도록
한다. 그의 가장 놀라운 이미지의 힘은 우리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핵심적인 일상생활과 직접 연결된 것들이며
결국 미학사업의 대전제를 다시 창조한다는 점에 있어서 전후의 어떤 작가도 워홀을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Ⅴ 결론
지금까지 앤디워홀의 작품세계와 미술사적 의의를 살펴보았다. 워홀은 이제껏 고급, 희소성의 예술의 의미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와 헐리웃의 대중스타 마릴린 몬로를 동격으로 함으로써 저급 문화와 고급문화에
대한 간격을 없앴다.
그의 작품의 특성과 미술전반에 끼친 의의를 몇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 반복성에 관한 문제이다.
하나의 이미지를 수없이 반복하고 그것을 나열하였는데 이것은 워홀의 가장 커다란 특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반복적인 나열 방식은 캠벨수프깡통을 진열된 상품처럼 보이게도 하고, 스타들의 개성적인 부분을 약화시키
기도 했다. 죽음과 재난에 있어서는 충격과 공포를 제거시키고 그저 무감각한 상태로 빠지게 하기도 하는 수단
으로 사용된다.
둘째로는 주제의 선택을 비개성적인 것으로 주관적으로 선택하였고 전통회화에서 중요시하던 개성적인 것에
대해 정면으로 대응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뒤샹의 레디메이드를 비롯해서 존스의 과녁이나 깃발, 맥주깡통이미지와 같은 레디메이드 이미지,
라우센버그의 콤바인 페인팅에 등장하는 오브제를 들 수 있다. 워홀의 작품을 제작함에 있어 그는 자신의 감정
을 배제한 채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러한 태도는 뒤샹의 '무관심의 미학'에서 비롯되었고 제스퍼 존스의 감정이입을 배제한 예술관,
그리고 세계 2 차 대전후 사회적 상황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셋째로 그가 제작방법에 선택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들 수 있다. 실크스크린을 통해 그는 미술의 상업화에 앞장
설 수 있었다. 기존의 유일한 미술품과는 달리 실크스크린 방식에 의해 수없이 많은 생산을 할 수 있었고,
이것은 자신의 작품을 대량생산 될 수 있는 상품과 동등한 위치에 놓고자하는 의지가 수반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실크스크린 기법을 통해 하나의 작품을 수없이 같은 작품으로 생산해 냄으로써 미술품의 유일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였다.
넷째로는 누구나 할 수 있다라는 말로 함축할 수 있는 그의 예술관을 들 수 있다.
작업실을 공장의 개념으로 인식하고 제작과정에 있어서 보조자를 고용해 자신의 작품을 맡기고 자신은 감독
하는 일을 했다는 점은 예술가의 고유한 권위에 정면으로 맞 대응하는 일이라 할 수 있다.
예술가는 선택되어진 소수의 재능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다기 보다는 누구나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아이디어만
가지고 있다면 예술가가 될 수 도 있고 성공할 수도 있다는 견해이다.
결론적으로 워홀이 행한 모든 행위들은 주위를 끌려고 철저히 계산된 고의적 도발이었고, 수많은 광고 사업과
삽화가로 일한 그는 직관적으로 어떠한 발상과 주제가 팔리는가를 정확히 꿰뚫을 수 있었다.
괴이한 예술은 창조하려는 그의 지칠 줄 모르는 욕망을 가끔 그를 단순한 흥미 보유로 이끌어내어 전통적 회화
의 영역을 뛰어넘는 독창적이고 혁신적인 것이다.
70년대의 지루함을 워홀이 끝냈다는 휴즈의 말처럼 워홀은 80년대 재능있는 많은 작가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대중문화를 통해 미술의 폭을 늘리고자 하는 많은 현대의 예술가들에게도 좋은 선례가 되는 것이다. 따라서
산업시대의 급변하는 사회에서 우리 미술이 나가야 할 길과 대응해야할 방법을 워홀에게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
ABSTRACT
A Study on Andy Worhol's Mass Media Image Reproduction
By Sung-Hee Kim
Major in Art Education
The Graduate School of Education
Kyung Hee University
Seoul, Korea
Andy Warhol's life was realization of American dream. He realized the dream from nothing in the
wealthy time of 60's. Warhol was a real star who achieved very popular success with his own dignity.
He had famous reputation and his time could be represented by his art. He said "Earning money is art,
working is art, and business is the best art." He enjoyed to show himself in peculiar dress with hair
dyeing. Whether or not he was addicted to being a star, Warhol had very penetrating artistic view.
He chose popular subjects, and reproduced them in a popular way.
This thesis investigates how Warhol gave special meaning to ordinary things. Whatever people criticise
him, he analysed the subjects with his very penetrating view to reveal behind sections of modern
industry, consumption, and enjoyment. His art was created through his own mechanical procedure of production, and then it was copied several times with little modification. This whole process was
revolutiona
ry change from modern art which adored individuality and creativeness of artist as the best value.
Andy Warhol's art could be a very useful example to look for what the true art should be, and it would be
worth to watch how he tried to set the relations between art and the public.
참 고 문 헌
1) 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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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기 간행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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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영 《해외작가 연구편》 미술세계, 1994년 9월호.
이영철 《위기의 육체와 성》 가나아트, 1992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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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경희대학원 미술교육과 사이트
석사학위논문
Andy Warhol의 대중매체를 이용한
이미지 차용에 관한 연구
지도교수 최 병 식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 전공
김 성 희
1998년 2월 일
Andy Warhol의 대중매체를 이용한
이미지 차용에 관한 연구
지도교수 최 병 식
이 논문을 교육학 석사학위 논문으로 제출함
1998년 2월 일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미술교육 전공
김 성 희
김성희의 석사학위 논문을 인준함
주심교수
1998년 2월 일
경희대학교 교육대학원
국 문 초 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