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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사구조론의 양상들
한 용 환
目 次
1. 서 - 주관주의 시학과의 결별
2. 이원론적 서사구조론
3. 이원론의 양상들
4. 또다른 서사적 층위
5. 삼원적 서사구조론
6. 결론과 전망
1. 서 - 주관주의 시학과의 결별
현대의 서사 연구가들은 그들이 아리스토텔레스 이래의 낡은 시학을 대체한 혁신적이면서도 과학적인 이론을 창안
했다는 자부심을 공유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이 고안해 낸 방법이 과거의 방법과는 완전히 다르다고
공공연히 주장한다. 마치 미지를 개척하는 데 성공한 모험가들처럼 그렇게 주장하는 그들의 목소리에는 득의스런
자신감이 배어있다.
그들이 누군가로부터 빚을 졌다는 사실조차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들이 빚진 것은 지난 이천
년간의 서구 시학의 전통이 아니다. 그들이 내세우는 대부는 단 한 사람 - 생전에는 기껏 인도 유럽어의 음성학적
체계를 다룬 단 한 권의 저서 밖에는 간행하지 않은 스위스 제네바대학의 산스크리트어와 역사언어학 교수였던
사람이다.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 사람은 훌륭한 제자를 둔 덕분에 사후에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페르드난 드 소쉬르이다.
현대 서사 연구가들의 이같은 자부심과 오만에 가까운 자기 확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럴만하다고 수긍하는
입장과 회의하는 입장이 있을 수 있을 것이다. 회의하는 쪽에 서라면 그들의 새로운 이론이라는 것도 그들의 주장
과는 달리 과거의 시학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 있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할 것이다.
사실상 그러한 생각도 설득력과 근거가 아주 없다고만 볼 수는 없다. 구조주의 시학이 전통 시학의 승계에 불과
하다는 비판론을 변호하기 위해서는 구조주의 시학의 서사 구조론을 살펴보는 일이 도움이 된다.
구조주의 시학의 요체이자 골격인 서사 구조론은 그렇게 보고자 한다면 완전히 새로운 이론은 아니라고도 볼 수 있다.
문학의 구조는 형식과 내용간의 긴장 관계의 결과에 다름 아니라는 전통 시학의 주장과 구조주의 시학의 관점 - 서사
구조는 스토리와 담론이라는 이분법적 국면의 분리할 수 없는 결합의 결과라는 이론은 적어도 이론적 체계로서는
거의 유사한 것이라고 보아지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구조주의 시학이 시학 본래의 활력을 위축시켰고 시학의 영역을 축소시켰을 뿐만 아니라 종국에는 시학의
담론을 도구적 담론으로 격하시켰다는 비판은 충분한 근거와 설득력을 가진다.
그러나 한마디로 말해서 이같은 회의론과 비판론은 수사학적 정당성은 있지만 생산성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같은 사실을 입증하기는 너무나 쉽다.
구조주의 시학은 더 이상 보여주기showing와 말하기telling 따위의 개념을 장황하게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과거의 시학과 분명히 다르다. 구조주의 시학이 고안해 낸 여려 가지 쟁점과 개념들은 과거에는 전혀 논의되어져 본
적이 없고 씌어져 본 적이 없는 것들이다.
덕분에 우리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개념과 방법에 의존해서 서사적 상황과 서사물 자체를 분석하고 논의할 수 있게
되었다.
가령 전통시학은 서사의 요체는 플롯이고, 플롯이란 사건들의 의미있고 흥미있는 배열이라고 설명해왔다.
그러나 제라르 쥬네뜨가 개발한 방식을 차용하면 우리는 좀더 분명하고 조리있게 서사적 상황을 분석하는 일이 가능
해진다. 이 때 분석의 대상이 되는 것은 서사 행위narrating act에 의해 결과된 서사적 담론narrative discourse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시학이 간과한 것은 무엇인가.
제라르 쥬네뜨는 과거의 시학은 진술ststement의 문제와 내용에만 관심을 기울인 나머지 서사적 발화narrative
enunciating의 문제를 소홀하게 취급했다고 말한다.1) 그리고 그러한 지적에 우리는 공감하고도 남는다.
무엇보다도 현대의 서사 연구가와 분석가들은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와 그렇게 할 수 없는 문제를 가려내었
다는 점에서 과거의 연구가들과 확연하게 구분된다.
이 문학작품은 타당한 해석적 관점과 효과적인 기법의 구사를 통해 독자들로 하여금 나름대로의 세계와 인생에
대한 새로운 전망에 도달하게 해준다.
과거의 문학 연구가들과 비평가들은 이런 식으로 모호하게 말함으로써 그들의 책무를 완수함과 동시에 그 책무로
부터 도피했다. 이런 식의 진술에서 분명하게 드러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들은 문학의 현상에 대해 수다스러울
정도로 많은 말을 하지만 실제로 말한 것은 별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런 식의 진술은 무언가를 밝혀내기보다는
숨기고 모호하게 만드는 측면이 더욱 크다. 독자가 도달했다고 말하는 인생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전망이 도대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짐작해 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독자들이 실제로 그러한 전망에 도달했는지의 여부도
확인할 길이 없겠기 때문이다.
그런 식의 해석에 비교한다면 발자크의 소설을 분석하는 바르트나 프르스트의 소설에서 시간 양상을 구분해내는
쥬네뜨의 진술은 얼마나 명료한가. 그들에게서는 이렇게도 저렇게도 해설될 문맥은 찾아지지 않는다.
그들이 명료성을 획득하는 방법은 단순하기는 하지만 매우 합리적이다. 그들은 분명하게 말할 수 없는 사실은 말
하지 않는 방법을 통해서 명료성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에서 과거의 시학과 결별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들이 결별한 것은 주관주의 시학이다.
2. 이원론적 서사구조론
모든 서사물이 공유하는 공통의 구조를 가정한 건 롤랑 바르트였다. 그리고 구조주의 시학은 그것이 스토리와 담론
이라는 사실을 밝혀내었다. 안과 밖, 혹은 남성과 여성처럼 스토리와 담론은 대립되어 있으면서도 불가피하게 결집
된다는 점에서 그것은 가장 견고하면서도 강력하게 응집된다.
물론 그것은 상호 의존하는 관계이다. 그리고 모든 현상들 중에서 그것은 가장 논리적이고 명백한 구조적 관계이다.
밝음은 어둠에 의해, 강함은 연함에 의해, 큰 것은 작은 것에 의해 그 존재 근거가 성립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이다.
서사물의 구조가 스토리와 담론의 상보적 결합의 결과라는 인식은 종래의 관점 - 문학은 내용이 형식에 수용된 결과
라는 인식과는 본질 적으로 다른 것이다.
내용이 형식에 수용된 결과 혹은 형식이 내용을 담은 결과라는 관점에 잠복된 문제점이 무엇인지는 비평의 역사
자체가 자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비평은 지금까지 오직 하나의 쟁점에만 매달려온 셈이고, 그 쟁점은 다름 아닌 내용
우선론과 형식 우선론이었다.
문학을 내용과 형식의 구성물이라고 보는 한 상충하는 관점이 제기되는 건 피할 수 없는 사정이라고 보아야 한다.
일심동체를 이루지 못한 부부에게는 불화가 끊기지 않는 경우와 흡사하다. 사실상 안과 밖의 기여와 역할 중 어느
쪽이 더욱 우월하고 중요한가 하는 문제는 제각기 주장하기 나름이다.
비평의 역사는 바로 이같이 상충하는 관점이 머리가 터지라고 충돌을 되풀이해온 과정에 다름 아니었고 자기 입장의
정당성을 내세우기 위해 상대의 입장을 헐뜯고 비난해온 역사에 지나지 않는다. 갈등과 반복이 해소될 수 없었던
것은 관점 자체가 안고 잇는 모순 때문이다.
즉 전통 시학은 통합의 관점으로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고찰하지 않은 탓에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소모의 역사를 답습
했던 셈이다.
이 소모적인 논쟁은 화해의 기미를 보이기는커녕 이십 세기에 접어들어서 오히려 절정에 이른다. 그 상충하고 반목
하는 양쪽의 입장과 관점을 각기 대표하는 것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사회학적 비평과 형식주의 비평이다.
내용과 형식의 문제를 둘러싸고 오랜 세월 반복되어온 전통 시학의 해묵은 시비를 실질적으로 종식시킨 것은 구조
주의 서사학이다. 구조주의자들은 이야기가 매체의 장벽을 뛰어넘어 자유롭게 전이될 수 있다는 사실로부터 서사
물이 하나의 자율적인 전체성이라는 강력한 근거를 이끌어낸다.
그러한 자율적인 이야기의 구조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똑같은 줄거리가 아무런 손상도 입지 않는 채 상이한 매체에
수용될 수 없다는 것이다.
분명히 서사물은 하나의 전체이다. 왜냐하면 사건적 요소들 및 사물적 요소들 그 자체와 그러한 요소들로 구성된
서사물은 서로 다른 것이기 때문이다. 사건적 요소들이나 사물적 요소들은 고립적이며 불연속적인 반면, 서사물은
하나의 연속적인 구성체이다.
더군다나 서사물 속에서 사건들은 상호 관련적이거나 상호 수반적이다.2) 이러한 설명은 서사물에서 사건들이 어떤
모양과 방식으로 결집되는가를 암시한다. 서사물에서 사건들은 임의적인 집합의 형태가 아니라 불가분의 유기적
전체로서 상호 연관된다.
이야기가 하나의 매체에서 다른 매체에로 자유로이 전이될 수 있다는 사실은 또한 서사물은 자기 조정self-regulation
기능을 가진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자기 조절이란 구조가 그 자체로 지탱되고 완결되는 것, 피아제의 말에 의하면
‘하나의 구조 속에 내재된 변형들은 결코 그 체계를 넘어서지 낳고 언제나 그 체계에 속한 그리고 그것의 법칙을 보존
하는 요소들을 발생시킨다는 것’을 의미한다.3)
그러므로 서사물을 ‘구조’라고 부르는 것은 그 말의 엄격한 구조주의적 의미 규정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타당한 것이
라는 채트먼의 말은 우리의 눈에도 타당해 보인다.
3. 이원론의 양상들
구조주의 서사이론을 가장 조리있고 생산적으로 종합하고 체계화시킨 서사이론가가 구조주의 서사학을 정작 창안
하고 발전시킨 불란서 사람이 아니고 미국 사람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처럼 생각된다. 그러나 독창적이기는 하지만
산만한 것들을 끌어다 모아 거기에 체계와 분명한 윤곽을 부여한 채트먼의 능력 또한 창의에 값하고도 남는다.
특히 그가 근년에 간행한 <<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관점들>>은 서사 현상을 분석하는 그의 폭넓고도 깊이 있는 안목
을 유감없이 과시해 주고 있어서 서사이론가로서의 그의 생산성을 새삼 확인케 해준다.
되풀이되는 진술이지만 구조주의 서사이론의 골격이자 요체는 서사 구조론이다. 그리고 서사 구조론의 골격이자
요체는 모든 서사물은 이야기story와 담론discouse이라는 이분법적 국면을 가진다는 내용으로 요약할 수 있다.
이야기란 사건들의 연쇄와 사건들에 관련되는 사물적 자질들의 총화를 가리키고 담론이란 이야기가 전달되고 소통
되는 방식을 지칭한다.
당연히 이같은 이원론을 구조주의 서사학의 독창적인 이론적 전유물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억지에 해당한다.
유사한 인식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도 발견되어지고 문학을 내용과 형식의 결합이라고 보는 전통 시학
의 관점 역시 같은 이원론이다.
특히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개발한 개념인 파블라와 수제트의 구분은 프랑스 구조주의자들의 개념과 대체로 대응
한다고 보아진다. 서서물의 구성인자로서 서사물의 바탕이 되는 소재 혹은 서사적 담론화의 대상이 되는 사건들
전체와 그러한 사건들을 작가의 서술 행위에 의해 텍스트로 정착시킨 이야기를 그들은 파불라와 수제트라는 개념
으로 구분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연하자면 파블라란 결과적으로 일어난 일을 가리키고 반면에 수제트는 독자가 그
일어난 일을 인식하는 경로를 지시한다. 따라서 짝을 이루는 이 두 개념은 내용의 국면인 스토리와 그것이 전달되고
소통되는 국면인 담론과 거의 일치한다고 판단해도 무방하다.
이렇게 살펴보게 되면 구조주의 시학의 서사 구조론은 오랜 동안 답습되어온 이원론적 이론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바바라 허언스타인 스미스Babara Hernstein Smith가 지적하고 있듯이 구조주의 서사이론이 기대고 있는 것은
사실상 이 낯익은 이원론적 체계이다.4)
특히 채트먼의 <<이야기와 담론-소설과 영화의 서사구조>>는 서사의 구조를 해석하는데서 뿐만 아니라 서사의 거의
모든 상황과 국면들을 이 이원론에 근거해서 설명하고 있다. 내용의 차원과 표현의 차원, 순차성과 비순차성, 이야기
의 시간story-time과 담론의 시간discourse-time 등이 바로 그런 이원론적 대비이다.
이같은 이원론은 비단 채트먼에게서만 발견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레마스의 핵심 개념인 심층구조와 표층구조나
바르트의 주된 용어인 중심사건kernels과 위성사건satellites 역시 같은 이원론이 산출시킨 대비적 개념이다.
이중성의 극명한 대비적 관점에 기초하는 이론의 장점은 뭐니뭐니해도 그 선명성과 수학적 아름다움에서 찾아진다.
그러나 복잡하고 다양한 현상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고 도식화시킨 험은 있다.
다시 말하자면 이 이론은 서사현상에 대한 폭넓고 경험적인 접근으로부터 만들어진 것은 아니라고 보아야 한다.
이러한 사실은 ‘정의들은 만들어지는 것이지 발견되어지는 것이 아니며, 문학적 개념들의 연역적 방식이 그것의
귀납적 방식보다 더 시험성이 높고 그러므로 더 설득력을 가진다’5)라고 말함으로써 채트먼 자신도 은연중 시인
하고 있다.
당연히 비판이 제기됨직하다. 해체론자들인 씬시아 췌이서와 죠나단 컬러는 담론이 스토리를 뒤쫓거나 반복하기
보다는 반대로 스토리는 담론에 의해 구축된다고 주장함으로써 구조주의 서사학의 기본적인 관점에 도전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는 바바리 허언스타인 스미스의 <서사 판본과 서사이론>은 오로지 채트먼의 <<이야기와
담론-소설과 영화의 서사구조>>의 전제가 되는 이론적 가정들을 비판하고 반박하기 위해 씌어진 논문이다.
우선 그는 서사는 매체로부터 독립된 공통의 이야기를 가진다는 구조주의 서사학의 기본 전제를 공박하기 위해
콕스가 수집한 345종에 이르는 신데렐라 판본을 분석해 보인다.
그 결과는 상이한 판본들 간에 존재하는 공통의 심층 구조를 드러내주기보다는 그러한 결론으로 유도하는 잘못된
요인들을 반영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잘못된 결론으로 우리를 유도하는 요인들을 그는 다음과 같이 지적해
낸다. 우리가 과거에 들은 바 있는 여러 판본들간의 유사성, 우리가 익힌 이야기의 진술 방식의 유사성, 그리고
특정한 상황에서 특정한 문제와 관련된 줄거리를 요약하는데서 우리에게 가해지는 제약과 조건의 유사성6) 등,
요컨대 그는 장황하리만치 사례를 들고 지루하리만치 주장을 반복함으로써 구조주의 서사학의 이원적 이론에 대한
그 자신의 반감과 비판에 대한 공감을 구하고 있다.
그는 담론의 시간과 스토리의 시간 관련에 대한 구조주의 서사학의 분석 모델도 도무지 쓸모가 무엇인지 모르겠
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조주의 이론으로는 서사 현상을 온전히 설명해 낼 수 없고 서사의 분석이 그런 방법에만
의존할 필요도 없으며 언어를 통한 의사소통과 인간관계 전반을 좀더 잘 이해시킬 수 있는 포괄적인 이론의 개발이
절실하다는 말을 결론으로 삼고 있다.
이 글에 대한 채트먼의 반응이 궁금하다. 그러나 채트먼은 이 공박의 글에 별다른 반응을 나타내지 않은 것같다.
그리고 필자가 보기에 그것은 채트먼이 비판에 귀기울일 아량이 없는 편협하고 닫힌 마음의 소유자이기 때문만은
아닌 것같다.
왜냐 하면 그는 최근 간행한 <<<<소설과 영화의 새로운 관점들>>에서 아주 솔직하게 <<이야기와 담론>>에 포함된
자신의 일부 이론적 오류를 시인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이 솔직히 시인한 오류 중에 <<서사 판본과 서사이론>>
이 제기한 문제점들은 들어있지 않다. 필자의 판단으로도 <<서사판본과 서사이론>>은 조리보다는 반감과 비판을
앞세운 논문같다. 비판의 논지는 비판 대상의 문제점보다 논지 자체의 문제점을 더 많이 내포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가령 구조주의 서사학이 가정하는 독립된 이야기 구조는 ‘매체의 차이로부터 독립된 것’이지 판본의 차이로부터
독립된 이야기 구조가 아니라는 점에서 비판의 전제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다. 동일한 언어 이야기가 영상으로도
혹은 발레나 마임으로도 옮겨질 수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는 것은 억지에 다름 아니다.
영화 <<의사 지바고>>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원본이 된 소설과의 여러 가지 표현 기법의 차이에도 불구
하고 기본 줄거리를 공유한다. 따라서 소설이 상이한 판본을 가지지 않고 전이의 과정에 의도적인 왜곡과 조작이
개입하지 않는 한 동일한 이야기의 구조는 매체의 차이를 뛰어넘어 존재한다는 가정 자체가 도전을 받을 이유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가 쓸모가 무엇인지 알 수 없다고 말한 담론과 사건 사이의 시간 관련 양상에 대한 분석 역시 마찬가지이다.
스토리의 시간과 담론의 시간이 동일한 순차로 제시되는 역사의 기술에서라면 물론 이 문제는 논란 거리가 되지
않는다. 신문의 사건 기사나 경찰의 조서 역시 그런 경우이다. 사건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정확하고 분명하게 재현
하는 것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해야 할 중요한 문제를 예상하기 어려운 그같은 서사물에서라면 사건의 시간 순차를
혼란시킴으로써 사건의 본질과 윤곽을 불분명하게 만들 필요가 없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미를 추구하는 문학적 서사에서는 사정이 판이하다. 문학적 서사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건의 진실이
아니고 사건의 흥미이다. 논문의 후미에 첨부한 자료 텍스트를 사례로 삼아 이 문제를 살펴보겠다. (자료 참고)
자료로 제시한 아뽈리네르의 꽁트에서 담론의 시간은 화자가 첫 문장으로부터 차례차례 끝 문장까지를 진술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반면에 스토리의 시간은 화자가 사건을 경험하는 데 소요된 시간을 가리킨다. 이 꽁트가 반영하고
있는 시간 양상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이야기하는 시간 순서와 사건이 경험된 시간 순서가 몹시도 어긋난다는
사실이다. 예컨데 담론의 순서상 제일 먼저 진술된 문장은 화자에 의해 경험된 기이한 사건의 순서로서는 맨 마지
막의 일을 보고하고 있다.
일일이 시퀀스 분석을 해보이지 않더라도 스토리의 전말은 빈번한 소급제시와 사전제시로 그 시간 순서가 몹시도
뒤헝클어져버렸다는 사실이 누구의 눈에도 확연할 것이다.
화자는 무슨 필요 때문에 스토리의 시간 순차를 이처럼 복잡한 모양으로 변조시키고 왜곡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일까. <오노레 쉬블락의 소멸>의 경우 그 이유는 명백해 보인다. 우선은 경험의 기이성이 그같은 필요성을 야기
한다. 사건의 전말을 경찰에 진술하거 갔다가 광인 취급을 받고 쫓겨난 사실에 대한 사전보고는 독자들로하여금
황당무게한 이야기를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를 시킴과 동시에 호기심을 부추키는 이중의 효과가 있겠기 때문이다.
다른 한 가지는 모든 문학적 담론이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이념이 요청하는 필요성과 관련되는 이유이다.
만일 <오노레 쉬블락의 소멸>의 담론이 사건이 경험된 시간 순차를 곧이곧대로 답습했다고 가정해 보라.
독자는 결코 이 이야기를 읽는 일에서 경이감을 체험할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만일 이 꽁트가 흥미있게
읽혔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이 꽁트의 담론이 스토리의 시간을 흥미있게 변조한 결과라고 보아야 한다.
스토리의 의미와 흥미는 단순히 순차의 조작에만 좌우되지 않는다. 그것은 시간 지속의 문제와도 결정적으로 관련
을 가진다. 일정한 시간에 걸쳐 발생하고 진전된 사건은 담론에 의해 이상적이고도 합리적으로 가속되거나 감속
되지 않을 때 독자의 열정적인 반응을 효과적으로 이끌어내기를 기대할 수 없다.
흥미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서술이 한없이 연장되는 경우를 가정해 보라. 인내심을 시험하는 게 목적이 아니라면
독자의 독서 충동은 더 이상 지속되기 어렵게 될 것이 너무도 당연하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다시말하자면
정작 상세한 서술이 요청되는 흥미있고 의미있는 서사적 국면이 번번이 생략되거나 지나치게 가속 서술되면 독자는
서술자의 둔감과 어리석음을 비웃게 될 것이다.
이 정도로만 살펴보아도 담론의 시간과 스토리의 시간 사이의 간극에 대한 논의가 왜 그토록 강조되어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비난은 단순히 비난을 위한 비난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요컨대 담론의 시간과 스토리의 시간 분석은 서사텍스트의 구조를 판단하는 데서는 물론이고 서사텍스트의 소통의
양상을 살피는 데서도 똑같이 중요하다.
4. 또다른 서사적 층위
이원적 서사구조이론의 특징은 결과된 텍스트의 사실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한정시킨다는 데서 찾아진다.
다시말하자면 이 이론은 서사화 활동은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서사 텍스트의 구조는 그러한 구조를
실현시키는 서사화 행위의 산물이다. 따라서 이 국면을 또 하나의 서사적 층위로 설정하는 서사이론이 가능하다.
현대 서사학의 발전에서 가장 독창적이며 생산적인 기여를 한 사람중의 하나인 제라르 주네트는 바로 그러한 서사
구조론의 가능성을 강력하게 암시해 보이고 있다.
곧 드러나겠지만 나에게 서사 담론의 분석은 언제나 다음과 같은 관계의 분석을 의미한다. 한편으로는 담론과 그
담론이 다루고 있는 사건과의 관계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담론과 사실적이건(호머) 허구적이건(율리씨즈) 그것을
생산하는 행위와의 관계가 그것이다.
우선 용어사용상의 어려움과 혼란을 피하기 위해 서사적 현실의 세 국면에 일정한 개념을 부과하기로 하겠다.
씨니피에나 서사의 내용은 스토리로, 기표․진술statement․서사 텍스트 그 자체는 내러티브로, 그리고 허구적인
것이든 사실적인 것이든 그같은 상황을 서사화하는 활동은 서사행위narrating라고 부르기로 하겠다.7)
인용한 쥬네뜨의 진술에는 서사 텍스트를 둘러싸고 있는 여러 가지 측면들에 대한 매우 세심하면서도 논리적인
인식이 반영되어 있다. 그가 면밀하게 구별해내고 있는 세 가지 개념- 스토리․내러티브 그리고 서사행위는 분명히
서사적 국면들을 식별해내는 데 유용한 척도로 활용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쥬네뜨 자신은 그같은 활용성이나
이원적 서사구조이론이 가진 문제점을 타개할 수 있는 가능성 때문에 그같은 개념을 제안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목적은 서사적 문제들 중에서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과 될 수 없는 것을 가려내는 데 있을 뿐이다.
즉 그에게는 서사의 세 가지 층위 중 분석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서사 담론narrative discourse뿐이라는
그의 생각을 말하기 위해 그같은 구별이 필요했던 셈이다.
그러나 쥬네뜨의 서사 층위에 대한 이같은 식별은 또다른 독창적인 서사 구조론의 모태가 된 것처럼 필자에게는 생각된다.
5. 삼원적 서사구조론
필자와 강덕화가 《서사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으로 공동 번역한 미케발의 《서사학-서사이론 입문Narratology-
Introduction to The Theory of Narrative》의 초판이 발간된 것은 1980년의 일이고 1998년에 개정판이 나왔다.
서사학은 구조적이고 실용적인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지금까지 이러한 서사학에 대해 지속적인 관신을
갖고 연구를 계속해왔다. 특히 이야기하기telling stories에 내포되어 있는 이념적인 활동성과 미학적인 힘 그리고
심리적인 영향력과 수사적인 정교함 등을 주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아왔다.8)
인용한 것은 발이 한국어판에 특별히 붙인 서문의 일부분이다. 이 서문에는 그녀의 서사 연구의 중심 영역이 무엇
인지, 그리고 서사에 대한 그녀의 관심의 무게가 어느 쪽으로 더욱 실려있는지가 분명하게 암시되어 있다.
저자가 스스로 주요한 연구 대상으로 삼아왔다고 천명하는 이야기를 진술하기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과된 구조를
결과시키는 활동의 국면을 가리키는 것이고 동시에 쥬네뜨가 말하는 바의 서사화 행위narrating의 국면을 가리킴에
다름아니다. 그리고 그 국면은 이원적 서사 구조론이 논의의 대상에서 배제시킨 국면이기도 하다.
따라서 서사화 행위의 국면까지를 포괄할 때 좀더 역동적으로 서사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의 개발이 기대된다.
발은 말하자면 이같은 기대를 충족시킨 서사 이론가라고 할 수 있다.
발은 서사구조의 층위를 세 가지로 나누고 그 각각의 층위를 텍스트․스토리․파블라라고 부른다.
미케 발은 명쾌한 이론가라기보다는 독창적인 이론가인 것처럼 필자에게는 보인다. 명쾌성은 일급의 이론가에게
요청되는 필수적인 자질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독창성이 그보다 덜 중요한 자질이라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모든 명쾌한 이론은 사실은 독창성의 산물에라고 보아야 옳기 때문이다. 그렇더라도 독창적인 모든 이론은 곧 명쾌한
이론이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고 발의 이론이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하는 이론이라고 필자는 생각하고 있다.
이론의 독창성은 《서사란 무엇인가》의 곳곳에서 쉽사리 발견되어진다. ‘사건이란 한 상황에서 다른 상황으로의
전이이다’라는 설명이나 ‘모든 화자는 나이다’라는 화자이론 따위가 그런 예이다.
발은 모든 서사이론가들이 애를 먹지 않고는 설명할 수 없는 사건의 개념을 이처럼 간명하게 요약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삼인칭이니 일인칭이니하고 구분하는 말하기의 주체가 사실은 모두 서술자 자신이라는 점을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거울 텍스트mirror text라는 개념의 고안도 독창성의 산물이다. 그러나 다른 무엇보다도 텍스트․스토리․
파블라로 짜여지는 그의 이론적 체계 그 자체가 바로 독창적이다.
《서사란 무엇인가》가 독창적인 이론을 담고 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는 너무나 쉽다. 이 책은 이미 대세가 되고
권위화된 구조주의 서사학의 이론적 체계나 개념에 기대지 않고도 훌륭하게 서사의 문제를 설명해내고 있기 때문
이다. 우선 그녀는 그녀의 이론적 체계를 구축하기 위해 서사 텍스트의 특징을 엄밀하게 정식화할 수 있는 토대를
찾는다. 그가 찾아낸 서사 텍스트의 이상적인 특징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1) 모든 서사 텍스트에는 두 가지 유형의 발화자가 있다는 사실. 그것은 파블라에서 역할을 하는 발화자와 그러한
역할을 하지 않는 발화자이다.
2) 서사 텍스트에서의 세 단계-텍스트․스토리․파블라를 구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사실. 아울러 그 각각의 단계를
기술하는 일 역시 가능하다는 사실.
3) 서사 텍스트가 관련을 가지는 것-곧 내용들은 행위자에 의해 야기되었거나 경험되는 사건의 연쇄라는 사실.
그리고 발은 서사 텍스트란 위에서 열거한 세 가지 특성이 발견되는 텍스트라고 정의한다.9) 두말할 필요도 없이
그녀의 서사이론은 이같은 전제와 토대 위에서 전개되고 있다.
이 서론의 관점에 따르면 텍스트는 언어 기호로 구성된 한정적이고 구조화된 전체이며 서사텍스트는 행위자가 있는
서사물과 관련된 텍스트이다. 그리고 스토리는 특정한 방식으로 제시된 파블라를 가리키며 파블라는 연대기적으로
연결된, 행위자에 의해 야기되거나 경험된 사건의 연쇄이다.10)
이것이 발이 고안한 자신의 이론적 체계에서 서사적 국면의 세 가지 단계를 가리키는 텍스트․스토리․파블라에
대한 설명이다.
그녀는 자신의 진술상의 모호함이 스토리와 텍스트의 개념에 대한 혼동으로 야기될 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발은 다양한 ‘엄지소년Tom Thumb' 판본을 예로 들어 그 두 가지 개념이 혼동될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고자한다.
다시 말하자면 엄지소년 이야기를 읽은 많은 사람들은 같은 내용-스토리를 읽은 것이기는 하지만 그것을 같은
판본-텍스트로 읽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함으로써 스토리와 텍스트의 개념을 구별해내고 있다.
그녀는 동시에 엄지소년 판본의 사례를 통해 스토리와 파블라의 개념도 구별하고자 한다. 그녀의 설명에 따르자면
스토리와 파블라는 사건의 시퀀스와 사건이 제시되는 방식의 차이에 의해 그 개념이 구분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설명의 방식은 명쾌한 것이 아닐뿐만아니라 충분한 것도 아닌 것처럼 생각된다.
오히려 스토리와 파블라의 구분은 ‘파블라가 상상의 산물이라면 스토리는 순차ordering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는 설명에서 좀더 분명해지는 것같다.
발의 서사 구조론에서 파블라는 텍스트를 구성하는 내용 또는 질료에 가까운 개념인 듯싶다.
발 자신은 명시적으로 개념의 성격을 규정하지 않고 있지만 파블라에 대한 논의가 사건들, 행위자, 시간, 장소 등
으로 구성된 사실은 그러한 판단을 뒷받침한다.
파블라는 스토리에 의해 순차화 되는 대상이다.
필자는 구조화된 스토리를 파블라와 구분해주는 주요한 특징을 양상mode이라고 불러왔다. 이 용어를 사용함
으로써 스토리-서사 텍스트에서 구분한 세 층위 중에서 두 번째-가 파블라와 다른 질료로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런 질료들을 특정한 시각으로 고찰한 것이라는 점을 설명하고자 했다. 11)
인용한 설명은 스토리가 파블라를 테스트의 질서로 재편하는 과정이거나 파블라로부터의 ‘연대기적 일탈’을 가리
키는 개념임을 시사한다. 연대기적 일탈이란 필연적으로 시간 변조를 수반하는 과정임은 부연할 필요조차 없다.
이 과정을 설명하면서 발은 또한번 독창성을 발휘한다. 시간 변조가 사건의 진행을 방해할 때, 드러난 사건은
파블라의 ‘현재’로부터 일정한 간격으로 분리되기 마련인데, 발은 이 간격을 ‘거리’라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거리를 토대로 두 가지 종류의 시간 변조-외적 회상과 내적 회상을 구분해낸다. 기간span, 예견,
무시간성achrony 따위들도 발의 이론적 체계 속에서는 모두 특수한 개념들을 얻고 있다.
텍스트의 층위에서는 화자의 문제가 매우 흥미있게 고찰되고 있다. 화자 곧 서사 행위 주체는 언어학적인 주체
이고 기능이지 텍스트 자체를 구성하는 언어를 진술하는 작중인물이나 실제 작가와는 무관한 개념임을 강조한다는
점에서는 프랑스 구조주의자들과 동일한 입장을 보인다.
그러나 문법적 관점에서 보자면 화자는 항상 일인칭이고 따라서 ‘삼인칭’이란 불합리한 개념이라고 말함으로써
화자에 대한 본질적인 인식을 일깨우고 있다. 그녀의 설명대로 ‘언어가 있다는 것은 바로 그것을 발화한 화자가
있다는 뜻이고’ 따라서 언어적 진술이 있는 곳엔 그 진술의 주체 곧 화자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런 사실을 감안
하면 화자는 그녀의 말대로 ‘그’나 ‘그녀’가 아니다. 이 문법적 일인칭 화자가 ‘그’나 ‘그녀’에 대해 말하는 것일 뿐
이다. 그리하여 발의 화자 이론은 ‘나’의 유형을 구분하는 이론이 될 수밖에 없다.
앞에서 필자는 발의 삼원론적 서사구조이론의 독창성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러나 독창성이란 보편성의 결핍을 뜻하
기도 한다. 발의 이론에서 결핍된 것이 바로 이 보편성이다. 특히 그녀는 너무나 독자적으로 용어와 개념들을 사용
하는 나머지 이해에서 불필요한 혼란과 장애를 초래시키고 있다. 이 이론가는 흡사 남의 캠버스에 지산의 그림을
덧칠하려는 화가를 연상시킨다. 이론적 개념들이 투명하게 드러나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이다.
엄밀하게 말해서 발의 삼원론은 순수하게독창적으로 고안된 이론이라고 볼 수는 없다. 그것은 선행 이론들 -
토도로프와 쥬네뜨, 그리고 스토리와 담론으로 구성되는 이원적 서사 구조론의 토대 위에 구축된 이론이라고 봄이
옳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같은 지적은 이 이론이 가지는 장점과 생산성을 과소평가하는 일과 혼동되어서는 안될 듯 싶다.
이 이론이 이원적 서사 구조론이 배제시킨 서사적 국면을 포괄함으로써 서사의 현상을 좀더 폭넓게 그리고 역동적
으로 기술할 수 있는 분석의 틀을 제공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하기는 어려울 터이기 때문이다.
6. 결론과 전망
지금까지 필자는 두 가지 종류의 서사구조론 - 이원론적 이론과 삼원론적 이론에 대해 살펴보았다.
그리고 그 논의는 주로 S. 채트먼의 <<이야기와 담론-영화와 소설의 서사구조>>와 미케발의 <<서사란 무엇인가>>
를 중심 삼아 전개되었다.
이 시점에서 판단하건대 러시아 형식주의가 토대를 만들고 프랑스 구조주의가 체계를 발전시킨 현대 서사학은
20세기에서 문학을 분석하는 가장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으로서의 역할과 소임을 충실히 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하여 시학poetics이란 용어는 문학의 분석에서 서사학의 이론을 적용시키는 일과 같은 뜻으로 이해되었다.
그러나 20세기가 다 저문 지금, 서사학을 둘러싸고도 변화의 징후들이 나타나고 있다.
탈구조주의자들은 구조주의 서사학의 이론적 전제들에 의문을 제기했고 포스트 모던 시대의 성급한 진단가는
서사학은 이제 죽었고 시학은 정치학politics으로 대체되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야기의 현상을 분석하는 도구
로서의 서사학의 역할과 용도가 폐기되었다고 보는 입장이 널리 공감을 얻지는 못하고 있는 것처럼 필자에게는
생각된다.12)
필자에게는 오히려 서사학의 용도는 더욱 중대될 것처럼만 보인다.
이러한 전망은 우리의 문화적 현실이 근거한다. 우리 주위에 이야기는 날이 갈수록 넘쳐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이야기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영화, 소설, 비디오, 텔레비젼 드라마, 뮤직비디오, 만화, 컴퓨터 게임, 저널리즘 스토리, 이야기로 구성된 광고,
사회적 스캔들 등 이야기의 종류는 이루 다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하루 중 많은 시간은 까십, 유머, 소담과 일화를 유통시키고 수용하는 일에 소비된다.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일에서는 물론이고 우리의 실존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서도 이야기라는 틀은 우리가 기대지
않으면 안되는 인식의 틀이다.
이처럼 역동적인 문화의 현실을 역동적으로 분석하자면 이론의 틀이 좀더 유연해지지 않으면 안되고 그런 점에서
좀더 생산적인 이론의 개발이 절실하다는 생각은 공감을 얻고도 남는다.
<자료>
<<오노레 쉬블락의 소멸>>
가장 면밀한 수사에도 불구하고, 경찰은 오노레 쉬블락의 행방불명에 관한 수수께끼를 밝히는 데 도달치 못했다.
그는 나의 친구였고, 나는 그의 사건에 관한 진상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어떠한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재판소에 알리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생각했다. 나의 진술을 청취하고 난 판사는 대단히 겁에 질린 공손한 태도로 나에게 대하였기 때문에, 그가 나를 미친 것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쉽사리 깨달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그것을 말했다. 그랬더니 그는 한층 더 공손해지며, 일어서서는 나를 문이 있는 쪽으로 밀어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서기가, 만약에 내가 광태를 부리면 내게로 덤벼들 채비로 주먹을 쥐고 서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고집하지 않았다. 사실 오노레 쉬블락 사건은 그 진상을 믿기 어려울만큼 너무나 이상하였다. 신문 보도로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쉬블락은 괴짜로 알려져 있었다. 그는 겨울이나 여름이나 소매 넓은 외투 하나밖에는 입지 않았고, 발에는 슬리퍼밖에는 신지 않았었다. 그는 굉장한 부자였다. 그래서 나는 그의 이런 복장이 의아하였기 때문에 하루는 그 까닭을 그에게 물었다.
“그건 필요한 경우에 조금이라도 옷을 빨리 벗기 위해서지.”하고 그는 대답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이란 거의 아무 것도 안 입고 외출하는 일에 빨리 익숙해진단 말야. 속옷이나 양말이나 모자 없이도 견딜 수 있단 말이야. 나는 스물다섯 살 때부터 이렇게 살고 있지만 아직 병에 걸린 일도 없네.”
이런 얘기들은 나로부터 의문을 풀어주기는 커녕, 오히려 호기심을 돋구어주었다. “그런데, 무슨 이유로 오노레 쉬블락은 그렇게 속히 옷을 벗어야 할 필요가 있었단 말인가.”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수많은 가정(假定)을 만들어 보았다.
어느날 밤-1시나 1시 15분은 되었을 것이다-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 이름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것이 내가 스치고 지나가는 담에서 들려오는 것 같았다. 나는 기분이 나쁘고 놀라서 주춤하고 멈춰섰다.
“큰 길엔 이제 아무도 없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나야, 나, 오노레 쉬블락이란 말야.”
“대체 당신 어디에 있소?”
나는 내 친구가 숨을 만한 장소를 생각해낼 수가 없어 사방을 둘러보며 소리쳤다.
나는 다만 보도(步道) 위에 널브러져 있는 그의 유명한 소매 넓은 외투와 그 곁에 그만 못지 않게 유명한 슬리퍼를 발견하였을 뿐이었다.
“바로 이것이 오노레 쉬블락이 눈 깜짝할 사이에 옷을 벗어야 하는 필요서을 지닌 경우로구나. 마침내 나는 엄청난 비빌을 알게 되나보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길엔 아무도 없소, 친구. 나와도 돼요.”
갑자기 오노레 쉬블락이 그 담에서, 말하자면 떨어져 나왔다. 그는 내가 못 알아볼 만큼 담에 들러 붙어 있었다. 그는 완전히 벌거숭이가 되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일에 앞서 그는 그의 소매 넓은 외투를 집어 걸치고 될 수 있는 대로 속히 단추를 끼었다. 다음에 슬리퍼를 끌고 우리 집 문까지 동행하여 주저하지 않고 나에게 이야기하였다.
“자네. 놀라고 있네 그려!” 하고 그가 말했다. “하지만 이제야 내가 이렇게 괴상한 복장을 하고 있는 이유를 알았을 걸세. 그러나 자네는 내가 어떻게해서 그렇게까지 완전하게 자네의 시선을 피할 수 있었는 지를 모르겠지. 그건 아주 간단한 일이지. 그건 의태현상(擬態現象)에 불과하니까…… 자연은 좋은 어머니란 말야. 그 어머니는 자기 아이들 중에서 위혐에 빠져 있는 자들, 그리고도 너무나 약하여 스스로 방어하지 못하는 자들에게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것들과 함께 합쳐버릴 수 있는 재주를 나누어 주었지.
아니, 자넨 이런 것쯤 다 알고 있지않나 말일세. 아다시피 나비는 꽃을 닮았고, 어떤 종류의 벌레는 나뭇잎과흡사하고, 카멜레온은 주위의 상태에 따라 몸을 잘 감출 수 잇는 빛깔로 바꾸기도 하고, 북극 지방의 토끼는 빙산처럼 희게 되어 있어 이지방 토끼들이나 마찬가지로 비겁하게 거의 볼 수 없게 되어 도망친단 말야. 이와 같이 하여 약한 동물은 그들의 모습을 변화시키는 본능적인 기교에 의하여 그들의 적으로부터 피하는 것일세.
그리고 나는 끊임없이 한 적에게 쫓기며, 싸움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하는 소심한 나는, 이 동물들과 비슷하단 말이야, 그러니까 원하는 대로 그리고 두려움에 의하여 나를 둘러싸고 있는 환셩 속에 뒤섞이고 마는 것일세. 내가 처음으로 이 본능의 힘을 행사해본 것은 벌써 여러 해전 일이었네. 내 나이 스물다섯, 그리고 여자들은 대체로 나를 호감이 가고 볼품 있는 사람으로 알아줬지.
그런 여자들 중의 하나로 유부녀(有夫女)가 있었는데 내가 거절할 수 없을 정도의 애정을 표시해 왔네. 치명적(致命的)인 관계였네…… 어느날 밤 나는 나의 애인의 집에 있었네. 그의 남편은 본인 말로는 며칠 동안 출장 중이라고 하였네. 우리들은 신화 속의 신(神)들처럼 벌거벗고 있었단 말일세. 그때 갑자기 문이 열리며 그 여자의 남편이 권총을 들고 나타났단 말야. 내 공포란 이루 말할 수 없었지. 그러니까 아직도 그렇지만 소심하기만 한 나는, 그저 꺼져 없어져버렸으면 하는 소원밖엔 아무것도 없었네. 벽에 등을 붙이며 나는 벽과 더불어 내가 함께 되기를 기원하였단 말일세.
그런데 갑자기 예기치 않은 일이 실현되었네 그려. 나는 벽지의 색깔이 되어버렸고, 내 사지는 의지(意志)의 힘으로 엄청나게 늘어나서 납작하게 되었으며,나는 담벼락과 한 덩어리가 되어, 그 후론 아무도 나를 보지 못하는 듯하였네. 그건 사실이었어. 그 남편은 나를 죽이려고 찾고 있었네.
그는 나를 보았었고 내가 도망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단 말이야. 그 남자는 미친놈처럼 되어 그의 분노를 그의 아내에게 전환시키며 그 여자 머리에 권총 여섯 발을 쏘아, 무참하게 죽였네 그려. 그리고는 절망하여 울어대며 사라져버렸네. 그가 가버리고 나니까 본능적으로 내 몸은 정상적인 모양으로 되돌아가며 본래의 색깔이 되었네. 나는 옷을 입고 사람이 오기 전에 가버릴 수가 있었단 말일세.
의태(擬態)의 영역에 속하는 이 요행스런 능력을 나는 그 후로부터 지니고 있는 것일세. 남편은 나를 죽이지 못했기 때문에 이 과업의 성취에 그의 생애(生涯)를 걸었단 말야. 그 자는 세계를 종횡(縱橫)하며, 오래 전부터 나를 뒤따르고 있었단 말이야. 그리고 나는 파리로 오고나서부터 그 자를 피하게 되었다고 생각하였네. 그런데 나는 자네가 지나가기 조금 전에 그 사람을 보았네 그려. 나는 공포로 이가 맞부딪치며 덜덜 떨었네.
나는 겨우 옷을 벗어버리고 벽에 붙여서 벽과 섞여버리는 시간밖에는 없었어. 그 자는 보도(步道)위에 내던져진 이 소매 넓은 외투와 슬리퍼를 이상한 눈초리로 바라보며 내 곁을 지나갔네. 자네는 내가 간략한 의상을 입고 다니는 것이 얼마나 당연한가 하는 것을 알았겠지. 만약에 내가 여느 사람들과 같은 옷을 입었다면 내 의태 능력(擬態能力)은 발휘될 수 없었을 것이네. 나는 살인자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충분히 빨리 옷을 벗을 수 없었을 것이며, 무엇보다도 내 의복이 담에 납작하게 붙어 방어를 위한 나의 소멸(消滅)이 헛일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선, 내가 벌거벗어야만 하는일이 중요하단 말일세.”
나는 그 증거도 보았고 또 그가 부럽기도 하였기 때문에 쉬블락 그에게 그 본능의 능력을 축하하였다.
그 후 며칠 동안 나는 그 일밖에는 생각지 않았고, 항상 형태와 색채를 변경해보려는 의지를 작용하고 있는데 깜짝 놀랐다. 나는 자신을 자동차로 변형해 보려고도 하고, 에펠탑으로도, 아카데미 회원으로도, 일등상 상금 당선자로도 변신해 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나의 노력은 허사였다. 나는 소원대로 되질 않았다. 나의 의지는 충분한 힘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또 나에겐 오노레 쉬블락의 본능을 불러일으킨 그 성스러운 공포와 형용할 수 없을 만큼 큰 위험이 없었던 것이다.
나는 얼마 전부터 그를 도무지 보지 못하였는데, 그러던 어느날 그가 허둥거리며 찾아왔다.
“내 적, 그 사람 말야. 그 자가 도처에서 나를 노리고 있네 그려.”하고 그가 말했다.
“나는 세 번이나 본능 능력을 써서 그 자를 피하였네. 하지만 난 무서워 죽겠단 말야. 여보게.”
나는 그가 야윈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에게 말하지 않았다.
“할 일은 하나밖에 남지 않았소.”하고 나는 단호히 말했다. “그처럼 냉혹한 적을 피하기 위해서라면 출발하시오! 어느 시골 마을에 가서 숨으시오. 나중 일은 나에게 맡기시오. 그리고 가장 가까운 정거장으로 가시오.”
그는 내 손을 잡으면서 말했다.
“나하고 함께 가주게. 소원일세. 난 무서워 죽겠네!”
거리를 우리는 아무말 없이 걷고 있었다. 오노래 쉬블락은 불안한 표정으로 쉴 새 없이 고개를 돌려 돌아다봤다. 갑자기 그는 소리치며 그의 소매 넓은 외투와 슬리퍼를 내동댕이치고는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한 남자가 우리 뒤에서 달려오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자를 멈추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 자는 나를 피했다. 그자는 한 자루의 권총을 쥐고 오노레 쉬블락의 방향을 겨누고 있었다. 오누레 쉬블락은 병영(兵營)의 긴 담에 막 도달하였다. 그리곤 마술에 걸린 것처럼 사라져버렸다.
권총을 든 사나이는 분노에 찬 소리를 높이 외치며, 넋이 나간 듯 멈춰섰다. 그리곤 그의 희생물을 앗아간 것만 같은 벽을 향해 복수나 하듯이 그의 권총을 오노레 쉬블락이 사라진 자리에 대고 마구 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달음질쳐 가버렸다.
사람들이 몰려오고 순경이 그들을 해산시켰다. 그래서 나는 친구를 불렀다. 그러나 그의 대답은 없었다.
나는 벽을 더듬어 보았다. ‘그것은 아직도 미지근하였다. ’ 그리고 자세히 살펴보니 권총 6발 중 3발은 ‘사람의 심장’높이를 맞혔고, 다른 세 발은 좀더 높게 벽토(壁土)를 스쳤는데 그곳에 어렴풋이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 있는 것같이 생각되었다.
(G.K.아뽈리네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