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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사회 참여
- 사회(참여적) 수필에 대한 진단과 모색 -
정 순 진
지금까지의 논의
한국현대수필문학은 고전산문문학, 그 중에서 한문수필과 국문수필의 전통에서 시작되어 외국문학을 전공한 문인들에 의해 서양 ‘에세이’의 영향을 일부 받아들이고 신변의 잡사를 감각적인 미문으로 다루는 일본 특유의 취향도 전래되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수필을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인생이나 자연 또는 일상생활에서의 느낌이나 체험을 생각나는 대로 쓴 산문 형식의 글. 보통 경수필과 중수필로 나뉘는데, 작가의 개성이나 인간성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유머, 위트, 기지가 들어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수필은 자유로운 산문 그러나 문학작품으로서의 산문”이라는 정의나 “수필은 가치 있는 체험을 정제된 언어로 독자에게 직접 전달하는 열린 형식의 문학”이라는 정의 역시 사전적 정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가 대할 수 있는 수필은 경수필로 저자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사사로운 체험을 소재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고백적으로 토로하는 서정적 수필이 대부분이다. 그러다 보니 수필은 문학성이 떨어지는 신변잡기란 오해를 받기도 하고 대부분의 수필이 비슷비슷해서 수필집을 한 권 받아 두세 편만 읽으면 나머지는 그 얘기가 그 얘기처럼 지루해진다는 독자들의 소리를 듣기도 한다. 수필 장르의 장점인 친근성이 작가정신의 안이성으로 변질된 것은 아닌지 우려스러운 부분이다.
위에 인용한 정의만 보아도 수필은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고’, ‘자유로운’, ‘열린 형식’을 특징으로 하는 장르인데 현재 발표되는 수필은 일정한 형식을 따르지 않는다기보다는 비슷비슷한 형식을 따르고, 자유롭지도 않고, 열려 있지도 않은 폐쇄성을 보인다. 개인적이고 일상적인 신변잡사를 특별할 것도 없는 범박한 자아성찰과 버무려 몇 개의 단락으로 정리하면 수필이 된다고 가르치거나 배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필론이 본격화된 1930년대부터 많은 평론가, 이론가들은 수필문학이 아주 품이 너른 문학이라고 말해 왔다.
1) 다시 돌이켜 수필이란 것이 문학이 되는 이유를 생각할 때 이 모랄이란 것의 중대성을 생각지 않을 수 없다. 중대성 뿐만 아니라 그 형식이 비문학적인데(즉 문학의 불완전성!) 불구하고 그것이 사상으로서 전연 모랄적인데 불가불 문학적인 외에 도리가 없는 것이다.-중략-
이런 의미에서 수필은 체계나 법식을 좇아 무엇을 교설하는 것이 아니라 사색이나, 생활의 진솔한 개성적인 기록임을 요하는 것이다. 이 개성적인 점, 일신상의 각도에서 모든 것이 이야기되는 친밀성, 육박미는 수필이 문학인 때문에 생기는 별다른 맛이다.
수필의 미는 요약하면 만인이 다 같이 보고 느끼는 일상 세계 가운데서 투철한 개인만이 가지고 있는 개성의 자유로운 정신활동이 초래하는 소산이다. 그러므로 사상이 개성의 모랄이란 세계에까지 편입되지 못하면 정작 좋은 수필은 쓰여지지 않는다.
2) 일상적 사생활 또는 화조월석에서만 소재를 구하고 서정적 수필만이 수필다운 수필이라는 견해를 고집한다면, 한국의 수필은 곧 한계에 부딪칠 것이다. 그리고 수필을 쓰는 일은 수필가들 사이에서만 알아주는 우물 안 작업이 될 것이다. 수필이 문학의 세계에서 확고한 자리를 얻기 위해서는 한가한 사람들만의 자기만족을 넘어서는 경지로 나아가야 하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수필의 지평 그 자체를 크게 넓혀야 한다.
수필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정치와 경제 또는 교육 등 사회적인 문제도 다루고, 삶과 죽음 또는 신과 인간 등 철학적인 문제도 다루어야 할 것이다. 어떤 글이 문학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글이 어떤 의미 있는 말을 하고 있느냐 하는 문제이다. -중략-
비록 구체적이고 작은 문제라 하더라도, 그것을 영원한 문제의 부분으로 다루면 ‘중수필’로서의 무게를 가지게 될 것이며, 부드럽고 여운을 남기는 필치로 일관하면 ‘문학성’도 따르게 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문장력과 표현의 기교만으로는 문학성 높은 작품을 만들기 어려울 것이다. 작가의 ‘마음의 깊이’에서 오는 미적 감동이 겹쳐서 상승작용의 효과를 거둘 때, 비로소 수작을 얻게 된다.
3) 수필의 양면성, 즉 예술성과 철학성의 특징을 피력하되 이것들의 융합에서 수필의 진수가 드러남을 시사한다. 말하자면 수필은 장미 같은 아름다움이 있으면서도 인생의 새로운 의미를 해석하고 이해시키는 사상성을 지녀야 하는 글이다. 그것들이 모두 언어 속에 용해되어 하나로 나타내는 글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장미의 아름다운 향기를 풍기면서도 그 꽃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옥한 땅이 필요하듯 거기엔 밑거름을 주어야 한다. 그럴 때 그 토지는 꽃을 위해 존재하고, 꽃은 그 토지로 하여 피어나면서 새로운 의미를 제시하게 된다.
수필은 바로 이 양자의 융합에서 피어난 꽃이다. 그 꽃은 흙(사상)으로 하여 향기를 풍기되 새로운 의미를 발산하는 향기로운 꽃(예술성)이기도 하다.
4) 수필가들은 이제 끝없이 탐닉하여 안주해 왔던 자기애(自己愛)의 껍질을 과감히 벗어 던져야 한다. 언제까지 회고조의 자전적(自傳的)인 이야기에만 맴돌 것이며, 언제까지 풍류를 내세워 화조풍월(花鳥風月)만 읊조리고 있을 것인가.
이제 수필가는 자신의 울타리에서 과감히 벗어나 '더불어 사는 사람'들에게 애정의 시선을 돌려야 한다. 지금까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던 타인의 삶이 실은 자기 자신의 삶이기도 하다는 인식 속에서 수필은 그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나'에게서 출발하여 '우리'의 삶으로 확대되는 작가의식은 첫째로는 작품의 세계를 심층적으로 확대시켜 줄 것이며, 둘째로는 인간에 대한 폭넓은 애정의 관심을 고양시켜 주게 될 것이다.
사상과 모랄의 유기적 결합이 좋은 수필이라고 보는 임화, 수필의 지평을 넓히기 위해서는 사회적 주제, 철학적 주제를 다루어야 한다는 김태길, 예술성과 철학성의 융합이 수필의 진수라는 장백일은 모두 수필에서 주제의 중요성을 역설하는 논자들이다. 그런가 하면 이정림은 수필의 편협성을 타개할 방향으로 사회수필과 철학수필을 제안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필 창작에서 이들의 주장이 크게 받아들여진 것 같지는 않다. 이에 필자는 위 논자들의 주장을 계승하면서 사회 수필이 필요한 이유와 저조한 이유를 생각해보고 해결 방안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2. 사회 수필이 필요한 이유
위의 논의를 바탕에 두고 생각해 보면 사회 수필이 필요한 이유는 자명해진다.
첫째는 문학성의 획득을 위해서이다. 한자 문화권에서 글은 ‘문, 사, 철’의 학예를 통칭하는 것으로 인식되어 왔다. 근대 이후 서양의 영향으로 문학을 언어예술로 정의한다 해도 문학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되 언어를 매재로 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언어를 매재로 한다는 것은 언어로 표현한다는 의미만이 아니라 언어로 이루어지는 모든 활동을 그 대상으로 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언어를 ‘존재의 집’이라 하기도 하거니와 인간 활동 영역에서 언어화되지 않는 영역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동양 사회에서 대표적으로 꼽은 것이 문, 사, 철인 것이고 실제로 진리탐구 영역, 도덕과 철학의 영역, 예술 영역 즉 진선미를 추구하는 모든 영역이 포함된다. 문학이 예술의 한 장르라 해서 아름다움만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장르의 예술과는 다른 추상성, 관념성을 갖게 되는데 그건 직관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형상을 갖고 있지 않은 언어의 속성 때문이다. 이에 따라 문학은 다른 예술과 달리 의미를 아름다움의 한 축으로 삼는다. 한 폭의 그림을 보고, 혹은 선율과 화음이 아름다운 음악을 듣고 의미가 무엇인지 따져 묻지 않지만 문학작품을 읽고는 꼭 의미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또한 언어는 특정한 시대와 사회의 문화적 산물로서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크게 받는 특색을 가지고 있기에 언어에서 시대와 사회의 영향을 제거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세미나 주제로 잡은 ‘사회참여적 수필의 문학적 의의와 한계’에서 ‘사회참여적 수필’이라는 명칭은 ‘순수수필’을 염두에 둔 상대어로 이것은 6.70년대 현실참여문학 대 순수문학의 대립을 연상시킨다. 일제 강점기 문학에서 현실에 대한 발언을 금지시켜 기형적으로 탄생한 것이 순수문학이다. 문학은 인간의 가치 있는 체험을 형상화하는 것이고 인간은 특정한 사회와 문화를 떠나서 살 수 없기에 인간의 모든 발언은 사회적이다. 문학을 사회 문화의 나침반이라 여기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그런 의미에서 문학은 다양한 영역으로 촉수를 뻗어 문학의 자양분으로 사는 능력이 뛰어난 잡학이다. 그리고 생물학에서도 순종보다 이종이 힘이 세다.
둘째 축소된 수필 영역의 확대를 위해서이다.
수필 장르의 특성이 다양성과 개방성이라 정의하면서 기실 창작되는 수필은 한정적인 것은 사회(참여적) 수필은 한계가 있다는 오해에서 비롯된다. 개별 작품의 한계는 소재나 주제에서 오는 게 아니라 형상화의 미숙에서 오고, 장르의 한계는 편협성에서 온다. 형상화란 분명히 나타나지 않은 것을 구체적이고 명확한 모양으로 나타내는 것이니 모든 예술에서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작업이다. 수필 또한 예술이기에 어떤 소재나 주제만으로 좋은 작품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에 가장 합당한 형과 태를 갖추었을 때 비로소 심미적 쾌감을 주는 예술작품이 된다. 이 형상화가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어떤 소재와 주제를 가지고 글을 써도 수필이 아니다. 현재 발표되는 수필에서 한계가 가장 많이 보이는 것은 바로 이 형상화의 미숙에서 말미암는다. 의미가 정확하게 통하는 글이면 다 수필이 아니라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으면서 아름답기까지 해야 수필인 것이다. 소위 서정수필이라 불리는 수필 중에서도 형상화가 미숙한 글은 모두 수필로서 한계를 지니고 있다.
현재 창작되는 많은 수필을 서정수필이라 부르는 것도 ‘서정’ 장르를 오해해서 붙인 명칭이다. 대표적인 서정 장르가 시인데 시가 정서를 중심으로 다룬다고 해서 소재를 편협하게 가져오던가? 한국문학사에는 치열한 사회 인식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형상화된 아름다운 서정시가 많다.
문학은 어떤 장르이든 언어를 매재로 이루어지는 예술이라 반성적 사유를 특징으로 한다. 반성적 사유란 자신의 삶과 주변을 돌아보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곱씹어 생각하는 일이니 문학에서 주제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이다. 그러나 시와 수필은 깨달은 삶의 진리 혹은 진실을 직접적으로 주장하거나 설명하는 대신 정서적으로 표현한다. 시는 의미를 리듬과 은유를 통해 정서로 표현한다면 수필은 문장과 단락의 미적 구성을 통해 자신이 깨달은 통찰을 정서적으로 표현한다. 통찰이란 어떤 사태에 직면했을 때 과거의 경험에 의존하지 않고 장면을 재조직함으로써 갑작스럽게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다. 수필 장르의 특성은 자신의 체험에 기대어 세상만사에 개방되어가는 과정을 형상화한다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소설과 수필은 처음과 중간과 끝이 있는 일련의 사건을 서술함으로써 세상사를 상징적으로 표현한다. 그러나 소설은 허구적 상상력을 특징으로 하는 장르이라 소설가가 마음껏, 적극적으로 허구적 상상력을 펼치지만 수필은 기본적으로 내가 보거나 듣거나 겪은 실제의 체험을, 상상적으로 구성한다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또한 소설은 사건 자체에 관심을 집중시키지만 수필은 사건이 중심이 아니라 사건을 바라보는 나의 생각과 느낌이 중심이다. 희곡과 수필은 대화를 통해 상황과 인물을 생생하게 보여줄 수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희곡의 대부분은 대화로 이루어져 있고 배우를 통해 무대 위에서 공연되어야 완성되는 반면 수필은 집약적이고 상징적인 대화를 허용하지만 희곡식으로 말하자면 지문이 중심이라는 차이가 있다. 비평과 수필은 직관적 논리로 구성된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지만 비평은 직관적 논리를 객관적인 합리성으로 증명한다면 수필은 객관적 합리성이라는 틀로 잡을 수 없는 개인의 사소한 경험에 개념의 논리가 아니라 정서의 논리로, 심미적 합리성에 기대어 의미를 부여하고 아름다움을 창조한다는 차이가 있다.
이렇게 본다면 수필의 정신은 시와 소설의 사이, 운문과 논문의 사이, 고백과 소문의 사이, 주체와 타자의 사이, 사람과 사물의 사이, 개인과 사회의 사이에서 질문하고 모색하고 반성하며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역동성을 특성으로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 수필의 세계가 편협하다면 아름다움의 범주를 지나치게 축소시켜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술가란 아름다움의 범주를 넓혀가는 사람들인데 수필가들은 곱고 예쁜 것만 아름다움의 범주에 해당한다고 여기고 그 이외의 것은 수필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배제하는 것은 아닌지 숙고해 볼 일이다.
3. 사회 수필이 저조한 이유
첫째 자전적 자기 고백이 수필이라 오해하기 때문이다.
수필을 모르는 일반인에게 수필지나 수필집을 선물하고 읽어본 소감을 물었더니 첫 마디가 나이든 사람이 자기 기억과 추억에 의존해 쓴 글이 많아서 한 권을 다 읽기는 힘들었다고 한다. 기억과 추억에만 의존하는 글은 쓰는 사람에게는 글 전체를 통찰하게 하기보다 기억과 추억에 집중하게 만들어 진기가 빠지게 만들고, 그런 기억과 추억이 없는 독자에게는 공감할 수 없어 겉돌게 만든다.
수필의 출발점은 나 자신이다. 하지만 수필은 자신에게 돌아오지 않고 세계를 향해 나아가 삼라만상과 만나 나와 삼라만상 사이에서 의미를 창조한다. 자서전이나 수기의 출발점도 나 자신이다. 하지만 자서전은 오래 전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여기저기 공간을 헤집고 다녀도 끝내는 자신에게 귀환하고 만다. 자서전이나 수기가 기억과 회상을 토대로 자기 과거의 삶을 고백하고 성찰하며 자신을 이해하려는 욕구에 충실한 양식이라면 수필은 관찰과 상상을 토대로 의미와 재미가 결합된 미적 대상물을 창조하려는 욕구에 충실한 양식이다. 그런 점에서 자서전이나 수기는 사실성에 방점을 찍고 수필은 문학성에 방점을 찍는다.
수필이 자전적 자기 고백과 겹쳐지는 부분이 많다 해도 자전적 자기 고백에 멈춘 글은 수필이 되지 못한다. 고백은 타인의 눈과 귀를 배제한 채 자기 소리만 반복하는 자기중심적 행위로 거기에는 반성과 성찰이 끼어들 자리가 없다. 반성적 성찰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비평적 거리가 필요하다. 사람의 눈은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보지 못한다. 사람의 귀는 너무 커도 너무 작아도 듣지 못한다.
나이 들어 자신의 삶을 기록하고자 하는 욕구는 소중하지만 단순히 과거의 사실을 기억하고 회상하며 과거에 멈추고 자신에 멈추어 있는 글은 수필이라 할 수 없다. 수필이 사실의 기록에서 문학으로 승화되기 위해서, 그리고 보편적이고 심미적인 진실을 추구하기 위해서는 관찰하고 상상하고 사유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며 사실과 상상과 사유를 재배치하여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이 구성력이 수필을 있었던 사실을 기록하는 역사와 다른, 있을 법한 일을 서술하는 문학으로 만드는 힘이다.
따라서 수필은 사실을 넘어서고, 단순한 기억과 회상을 넘어서고, 과거를 넘어서며 이야기를 넘어선다. 뿐만 아니라 수필은 나를 넘어선다. 나로 돌아가는 대신 나와 보편성을 잇는 최적의 길을 찾아가는 과정을 아름답게 형상화하는 작업이다.
둘째 수필은 전문 영역이 아니라는 오해 때문이다.
글이란 기본적으로 의사소통을 위해, 그리고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문자로 쓴 모든 것이다. 그러니 모든 글이 문학은 아니다. 그런데 일부에서는 지식이나 정보를 전달하기 위한 글을 제외한 글 중에서 시와 소설, 희곡, 비평을 뺀 나머지는 다 수필이라고 오해하는 듯하다. 어느 장르이건 제대로 된 작품을 쓰기는 어렵지만 수필 쓰기가 어려운 것은 시와 소설과 연극은 문자에 정착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반면 수필은 문자 이후에 생겨났기 때문이다. 시는 글이 좀 부족하다 싶어도 음률과 참신한 비유가 채울 수 있고, 소설은 사건의 재미가 채울 수 있고, 연극은 배우의 연기가 채울 수 있지만 수필은 오롯이 글의 가치와 아름다움에 기대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수필은 글쓰기의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이 말은 글을 배울 때 수필에서 시작하지만 그 글 자체가 예술의 경지에 오르는 것도 수필이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수필은 자유자재로 소재와 주제에 딱 맞는 형식을 빚어낼 수 있는 글쓰기의 고수가 되어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는 장르이다. 그러나 현실은 글쓰기의 초보가 겨우겨우 짜깁기한 글이 수필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오는 형편이다.
대저 어찌하여 비슷함을 구하는가? 비슷함을 추구한다는 것은 진짜는 아닌 것이다. 천하에서 이른바 서로 같은 것을 두고 반드시 ‘꼭 닮았다’ 하고 구분하기 어려운 것을 또한 ‘진짜 같다’고 말한다. 대저 진짜 같다고 하고 꼭 닮았다고 말할 때에 그 말 속에는 가짜라는 것과 다르다는 뜻이 담겨 있다.
연암의 예술론과 산문미학을 가려 뽑아 번역하고 해석한 『비슷한 것은 가짜다』에서 인용한 위 글은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수필이 아니라 수필 비슷한 것만 양산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중앙 일간지 신춘문예에서 수필 장르가 사라진 것도 수필이 문학의 전문 영역에 미달한다고 여기기 때문이고,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수필집을 내면서 수필집이라 하지 않고 산문집이라 하는 것도 수필은 문학성, 전문성이 떨어지는 것 같아서라고 한다. 심지어 신문이나 잡지에서 신간을 소개하거나 서평을 쓸 때 수필집은 아예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한다.
수필 쓰는 사람을 ‘수필가’라 하는데 이때 ‘가’는 그 분야에 일가를 이룬 사람을 일컫는 말이니 수필이 의사소통을 하기 위한 일반적인 글이 아니라 전문적인 예술 영역에 속한 글이고, 거기에서도 독자적인 경지나 체계를 이룬 상태라는 의미인데 과연 그 호칭이 바르게 사용되는 것인지 수필 쓰는 사람 모두 냉철하게 판단해 볼 일이다.
셋째, 현재 개별 수필 작품이 가장 많이 보이는 한계는 특정 소재를 다루기 때문이거나 주제가 없어서가 아니라 형상화가 부족해서이다. 가장 많이 접할 수 있는 글은 ‘기승전+교훈’으로 짜인 글이다. 자신이 보고 듣고 겪은 일화에 교훈을 덧붙이면 수필이 된다고 여기는 듯하다. 덧붙여진 당위적인 윤리와 도덕을 읽는 순간 숨이 턱 막힌다. 왜 잘 나가다가 마지막에 교훈을 덧붙일까? 기본적으로는 독자를 믿지 못해서이다. 내가 말해 주지 않으면 의미를 찾아내지 못할까봐 불안해서 과잉친절을 베푸는 것이다. 설교, 설명, 설득은 모두 의미와 관련되어 있으면서 내가 아는 걸 독자에게 가르쳐 주려는 의도에서 나타난다. 일상에서든 문학에서든 가르쳐 주려는 의도가 꼭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지만 정말 가르치고 싶으면 가르치는 방법에 대한 고려가 필수적이다. 독자는 글을 읽고 감동해서 스스로 깨닫게 되기를 바라지 설명이나 설교를 듣거나 설득당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독자는 나에게 당위적인 윤리와 도덕을 배우러 온 어린 학생이 아니다.
넷째 수필계의 자족성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세 가지 오해와 부족이 통용되는 터전을 만들어 주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끼리끼리 발표하고, 끼리끼리 추어주고, 끼리끼리 몰려다니며 세를 과시하고 정치를 한다면 그 터전에서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은 나무에 올라가서 물고기를 구하는 격이라 하겠다.
누가 수필을 읽는가? 수필 쓰는 사람만 읽거나 수필 쓰는 사람도 읽지 않는다면 수필 장르의 발전은 요원한 일일 것이다.
무엇을 공부하는가? 문학이 잡학이니만큼 글을 쓰는 사람은 공부해야 할 것이 많다. 자신의 정신세계와 마음밭을 성찰하고 돌보지 않고 어떻게 자신에게서 출발하는 글을 시작할 수 있으리오. 언어를 매재로 예술 활동을 하겠다는 사람이 언어의 밭을 풍성하게 가꾸지 않고 어떻게 언어의 속살을 어루만지며 문장의 갈피갈피에 재미와 의미를 융합시켜 아름다움을 창조할 수 있으랴. 삼라만상을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대면하고 관찰하고 상상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나에서 출발해 삼라만상으로 개방되어가는 수필을 쓸 수 있겠는가.
비슷비슷한 연령대의 사람들만 모여 있어도 고인 물이고, 비슷비슷한 계층의 사람만 모여 있어도 고인 물이다. 젊은 수필가가 부족하고, 실험 정신이 부족하다. 기억과 회상에만 의존하고 관찰과 상상이 부족하다. ‘서 있는 위치가 다르면 보이는 풍경이 다른 법’, 다양한 조건에 처해 있는 다양한 사람이 자기 삶을 돌아보고 내다보는 글들이 모여 우리 시대와 사회의 가치 있는 경험을 형상화하는 문학이 되는 것이다. 좁은 우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수필은 지금처럼 문단의 아웃사이더로 존재할 뿐 깊고 너른 문학의 바다에는 이르지 못하는 게 아닐까 저어된다.
4. 해결 방안의 모색
이런 현상을 해결해 나갈 방법이 무엇일까? 결국은 수필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 중 수필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변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다.
첫째, 수필을 쓰는 수필가들의 몫이 크다.
수필가는 전문 예술가라는 자부심과 책임감으로 한 편, 한 편 독자들이 공감하고, 공감한 나머지 태도의 변화까지 이끌어내는 수필을 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수필가는 자신에 대해서는 물론 시대와 사회에 대해서 우주 삼라만상에 대해서, 특히 한국어에 대해서 끊임없이, 치열하게 공부해야 한다. 나는 생물학적으로 나이가 들었어도 내가 체험한 연대에만 매몰되지 말고, 손자 손녀들이 살아가는 시대와 사회에 대해, 그들이 당면하고 있는 삶의 정황에 대하여, 그들의 시선을 사로잡아 그들과 소통하고 그들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하여 고민하고, 공부하고, 탐색하고, 사색하고 창조해야 한다.
그런가 하면 의미를 정서화 시키는 훈련을 해야 한다. 설명문을 쓰거나 논증문을 쓰는 게 아닌 만큼 의미를 날것으로 드러내면 꼰대의 잔소리가 되고 만다.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 좋은 책이라고 추천할 때 꼭 붙어다니는 말이 ‘교훈을 늘어놓지 않아서…’라고 한다. 우리가 쓰는 글이 훈화가 아니라 예술이라는 걸 기억하면 도움이 되리라.
나는 수필가들에게 필요한 것이 시방(十方)의 상상력이라 본다. 수필가만이 아니라 모든 문학하는 사람에게 필요하지만 특히 기억에만 의존하여 수필을 쓰는 수필가들에게 문학에는 상상이 필수라는 걸 강조하고 싶다. 시방은 동, 서, 남, 북 사방과 동남, 동북, 서남, 서북의 사우, 그리고 상,하를 가리키지만 수필에 필요한 시방의 상상력은 자신을 중심에 놓고 전후좌우와 상하내외, 그리고 역전과 전복이다. 시방의 상상력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서로 이질적인 것을 접속시켜 정신적인 이미지와 감각과 개념을 형상으로 창조해야 한다. 평면적 사고가 아니라 입체적 사고, 전방위적 상상, 언어에 대한 끊임없는 숙련은 수필가의 운명이다.
둘째, 수필 비평가의 몫도 크다.
그동안 수필계에서 수없는 세미나가 진행되었고, 그때마다 수필의 변화를 위한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크게 바뀌지 않은 것에는 수필 비평가의 책임이 크다. 제대로 된 엄정한 작품비평이 드물기 때문이다. 많은 수필 비평이 수필의 내용을 요약하는 것에 그치고 있어 비평이라 말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비평가가 잡지편집자의 눈치를 살피고, 수필가의 눈치를 살핀다면 제대로 된 비평이 나오기 어려운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비평은 감정적 비난과 달리 글의 선악, 호오, 미추, 시비에 대한 판단을 객관적, 합리적 사실에 근거해 기술하는 장르이다. 수필의 제재로 쓰인 저자의 체험 자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그걸 누가 평가할 수 있으랴!) 그 체험이 어떻게 형상화 되었는지, 왜 아름다운지, 왜 힘이 있는지 논리적으로 설파하는 글이다. 창작자들은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평가를 받는 게 유쾌하지 않을 수 있지만(그래서 어느 장르이건 창작자와 비평가는 사이가 좋지 않다)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지지 않는 분야는 발전을 기약하기 어렵다. 작품을 둘러싼 다양한 준거에 따라 같은 작품을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게 예술이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양하고 활발한 비평 활동은 좋은 글을 쓰는 창작자를 격려하고 지지하며 인정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며 수필가와 독자 사이를 잇는 길을 낸다.
셋째, 전문 편집인의 몫이다.
안목 있는 잡지 편집자가 필요하다. 문화권력을 얻기 위한 문단정치의 수단으로 잡지를 운영하는 발행인이나 편집자가 글 쓰는 훈련이 덜 된 사람을 수필가로 등단시킨 것이 문제의 출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잡지 편집자는 좋은 수필을 골라 잡지를 펴내고, 수필을 공부하는 사람들이 모범으로 삼을 좋은 수필선집을 만들어내는 일을 자신의 사명으로 삼아야 한다.
이 세 주체는 서로 맞물려 있으면서 영향을 미치는 관계에 있다. 수필가들이 등단할 때는 수필에 대한 애정이 넘치고 기량이 빼어났어도 점점 안이하고 느슨한 글을 쓴다면, 그런 글을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주례사 비평이나 한다면, 그런 수필과 수필 비평을 잡지에 싣는다면, 그리고 엄정하게 작품의 질을 따지지 않고 친분과 이해관계로 수필선집을 펴낸다면 누구의 책임이랄 것 없이 수필에 관여한 모든 주체가 함께 수필을 구렁텅이로 몰아가게 될 것이다.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수필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서로 나서서 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수필을 문학예술의 반석 위에 올려놓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이 글은 처음도 중간도 끝도, 나를 포함하여 수필을 사랑하는 분들을 위해, 수필에 선한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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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진 sjin2974@daum.net>
1991 평론 등단 (문학예술). 수필집 <롤러브레이드 타는 여자>, <행복은 힘이 세다>, <기쁨이 노을처럼>, <해와 달, 서로를 품다>, <괜찮다, 괜찮다>
저서 <김기림문학연구>, <한국문학과 여성주의비평> 외 다수
전 대전대학교 국문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