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약)
1. 이승훈 선생님에 대한 기억과 분위기
선생님의 방, 잡채밥, 박카스, 담배 등 사물과 일상의 디테일로 인물 회상
시론 시간인지 담배 품평회인지 모를 정도로 자유로운 수업 분위기
얇은 담배를 조공하던 시절의 개인적 추억과 시인이자 인간으로서의 이승훈을 정감 있게 회고
2. 시란 무엇인가? 친구와의 대화에서 시작된 사유
“이것도 시야?”라는 친구의 질문에서 출발 → “시인이 썼으니 시지”라는 직관적 답변
시와 비시(非詩) 사이의 균열에 대한 고민 → 시를 쓴다는 건 목숨을 건 도약 → 시인은 “말을 시로 만드는 존재”
시인이 아닌 사람이 현대시를 쓰기 위한 조건: → 시적 감각, 언어의 감각, 의미 너머의 리듬과 감정
3.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을 통한 문장 인상
제목 그대로 정직한 책이며, 이승훈 특유의 단순하면서도 명료한 개념 정리
기존의 철학적·정신분석적 언어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아 읽기 쉬움
4. 밑줄 긋기: 이승훈식 문장과 사유의 흐름
예시 1: 박인환의 ‘한 잔 술’ 해석 술의 잔 수에 따라 감정이 달라짐 문장 자체가 시인의 감각을 보여주는 예
예시 2: 성민의 시 ‘놀이’ 반복을 통해 정서의 지속 강조 “대부분 사람은 나만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이 든다”는 아포리즘적 문장에 감동
예시 3: 다(多)와 다(da)의 언어유희 ‘다’는 무한의 의미를 담고, 동시에 ‘여기’(da)의 존재 의미로 해석됨 언어의 다층성, 존재의 철학까지 확장
예시 4: 소월의 ‘진달래꽃’ 해석
이별에 대한 다섯 가지 여성 반응 → 감정적, 사디스트적, 허무주의적, 현실주의적, 샤머니즘적 남성의 반응도 분석: 야만적/내성적/망설이는 남자 등
예시 5: 언어유희의 중요성
언어의 기표/기의 분리, 지연 속성 설명 판피린과 기침약, 일상의 병치로 유머 섞인 철학적 사유
예시 6: 장르보다 양식 장르는 중요치 않음 → 양식이 중요 “양식은 나의 운명이고 브랜드이고 애인”이라는 선언적 문장
예시 7: 박목월 시인을 회상하며 시인으로서의 정체성 형성과 스승에 대한 존경 이승훈이라는 존재의 근간에 자리한 은사의 흔적
5. 이승훈의 시와 문체
문학은 곧 비정형의 길 → 직선이 아닌 곡선, 우회와 틈, 감각과 유머
“사물 A”의 시적 결말 인용 → 시적 이미지와 정신적 내면의 충돌과 부유 → “닭들을 키운다”는 구절은 정신의 시적 생산과 고통의 은유
6. 총평
『알기 쉬운 현대시 작법』은 작법서이기보단 문학적 사유의 결을 보여주는 산문집
이승훈의 문장은 유머, 철학, 시적 감각이 혼종적으로 결합된 글쓰기
현대시는 결국 삶의 감각을 언어로 사유하는 태도라는 사실을 암시
“얇은 담배 한 갑”처럼, 지금에서야 비로소 아쉬움을 깨닫는 회고적 정서
----------------------------------- 이승훈의 알기쉬운 현대시 작법(펌)
이승훈 선생님을 생각하면 당신의 방이 생각나고 사물 A가 생각나고 매일 점심마다 시켜 항상 반쯤 남기시던 잡채밥과 힘겨운 비명을 지르며 돌아가던 박카스 뚜껑과 오렌지와 싸우는 대포와 염소와 개미와 차가운 맥주와 검은 김 몇 장이 생각나고 무엇보다 얇은 담배 한 대가 생각난다. 강의가 무르익어 갈 무렵이면 선생님은 종종 내 이름을 부르셨고, 오늘은 무슨 담배를 피우느냐고 물으셨는데, 아직 이십대 초반의 새파란 청춘이었던 나는 한 담배에 정착하지 못하고 이런 저런 담배를 전전했던 탓이고, 선생님은 종종 담배를 가져오기를 잊으셨기 때문이었다. 물론 나는 얇은 담배를 피우지 않았는데, 내가 새파란 청춘이었다는 건 이미 말했고 얇은 담배는 팔다리가 가늘어지는 노인들이나 피우는 것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시간이면 즉석에서 담배에 대한 품평이 오가게 마련이고, 오늘 담배는 너무 독하다거나, 맛이 괜찮다거나 뭐 이런 이야기가 오고 갔던 기억이다. 사정을 모르는 타과생이었다면 이게 시론 시간인지 시창작 시간인지 아니면 '시가' 품평회인지 헷갈렸으리라. 시에 대한 소양의 턱없는 부족에도 불구하고 내가 좋은 성적을 받았던 건 바로 담배에 대한 소양 때문이라 나는 아직도 담배를 끊지 못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도 그 시절에 선생님을 위해 따로 얇은 담배 한 갑 준비할 생각을 못했던 것은 내가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고, 지금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갑자기 이승훈 선생님을 떠올리게 된 것은 가을밤 무슨 감상에 젖어서가 아니고 지긋지긋한 담배 때문도 아니고 차가운 맥주는 떨어졌고 하지만 위스키는 남아 있고 물론 오렌지와 대포와 염소와 개미 때문도 아니다. 대학을 다닌 시간 보다 대학을 졸업하고 허송세월한 시간이 더 길어져버린 이 마당에 선생님을 다시 생각하게 된 이유는 당연히 현대시 때문이다. 며칠 전에 연신내에서 내 가난한 친구와 나눈 대화 때문이다. 사회학과와 심리학과를 복수전공하고 어떤 작은 신문사에 월에 100만원을 받으며 다니던 친구는 결혼을 해서 애가 생기고 100만원으로는 생활할 수가 없고 그래서 프로그래밍 학원을 3개월 동안 다닌 후에 IT 회사에 취직해서 밤낮 없이 일을 하고 있는데 월급은 그렇게 늘어난 것 같지 않고, 갑도 아니고 을도 아니고 병도 아니고 정으로 일하는 그 친구를 위해 나는 소설을 쓰겠다고 약조하고 <정의 자세>란 제목까지 생각해놓은 바 있으나 주체할 수 없는 게으름 탓에 미루고 미뤄 이제는 모두 백지가 되어버린 터였다. 하지만 고맙게도 친구는 자기가 발견한 괜찮은 술집에서 술이나 한 잔 하자고 나를 불렀고, 고마운 마음에 나는 그 술집은 일전에 우리가 그곳을 지나다 내가 들어가 보자고 했으나 네가 거절한 바로 그곳이라는 지적을 굳이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때 마침 내 손에는 시집이 한 권 들려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이것은 황태의 기본 / 국물엔 뜨거운 파…’ 가 아니라 ‘이것은 기계의 기본 / 기둥엔 차가운 피’라는 멋들어진 시인의 말이 있는 황병승 시인의 <트랙과 들판의 별>이었던 것이다. 친구는 내 손에서 시집을 낚아채더니 몇 장인가를 후루룩 살펴보곤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것도 시야?”
그럼, 하고 내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자 친구는 미심쩍다는 듯 한참을 들여다보더니 책과 함께 “전혀 이해할 수가 없는데”라는 말을 돌려주었다. “이게 어째서 시지?”
물론 나는 한국 모더니즘 시의 거장인 이승훈 선생님께 6학기 동안 담배를 ‘조공’하던 모범생으로서 명쾌한 답변을 돌려줄 책무를 마음 속 깊이 느꼈다는 것을 이 자리에서 밝혀야겠지만 시에 대한 소양이 부족한 자로서 대답이 궁했다는 사실 또한 인정하는 것이 최소한의 인간적 소양을 보여주는 길이리라. 나는 다만 이렇게 말할 수 있었을 뿐이다.
“시인이 썼으니까 시지.”
“그럼 내가 아무 말이나 하면 시인가?” 녀석이 다시 물었고
“아니 그건 아니지.” 내가 사려 깊게 대답했다. “너는 시인이 아니니까.”
그리하여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피상적이고 쓸모없는 논의가 얼마간 진행되기도 했는데, 이는 우리가 남아도는 시간을 보내기 위해 곧잘 하는 수작으로 가장 최근의 예로는 “왜 샌프란시스코의 영건이자 에이스인 틴 린스컴을 좋아할 수 없는가?”가 있다. 나는 네가 이미 나이를 먹은 아저씨가 되어서 젊고 잘나가는 재능 충만한 젊은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게 되었기 때문이라는 다소 고리타분하지만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를 했고, 녀석은 이런저런 반례를 펴며 오전 시간을 보내다 결국 점심시간이 닥쳐서야 우리는 ‘생긴 게 맘에 안든다’는 비교적 흡족한 결론을 내릴 수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수작을 일컫는 ‘오늘 하루도 시간 잘 때웠네(오하때)’라는 표현까지 갖고 있었다. 하여간 서른 살이 먹도록 돈과 시적 소양과 ‘티미’에 대한 호감을 갖추지 못한 우리는 기묘한 패러독스에 빠져들고 말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시인 아닌 사람이 현대시를 쓸 수 있을까?
현대 시인이 쓰면 현대시이고, 같은 말이라도 우리가 아무렇게나 뱉어 놓는 말은 현대시가 아닐 지언데, 그렇다면 시인과 비시인 사이, 시와 비시非詩 사이의 그 균열은 도대체 무엇이냐 말이다. 나는 마치 저녁 먹고 한가롭게 공원을 산책하다가 크레바스에라도 빠진 기분이었다. 시와 비시 사이의 넓고 깊고 어두운 구멍에 빨려 들어간 기분이었다. 시인이란 사람은 시를 쓰는 사람들이고 그 사람들이 무슨 말을 하건 어쨌거나 시라고 생각하면 적어도 머리 아플 일은 없겠지만, 시인이 아닌 사람이 시를 쓰려면 시인이 되어야 할 텐데, 과거의 정형시를 흉내내보았자 그것은 그저 우스운 어린애 장난에 불과할 것이고, 그렇다면 시인이 아닌 사람은 시를 쓸 수 없는데 무슨 수로 시인이 될 수 있느냐는 말이다. 그건 내게 ‘목숨을 건 도약’을 연상시켰다. ‘비시’라는 이름의 이쪽 편에서 ‘시’라는 저쪽 편으로의 목숨을 건 도약. 그것은 정말 목숨을 건 도약이라고 밖에는 표현할 수 없는데, 그런 일을 한다고 어디서 돈이 생기는 것은 아니며 자칫하면 그 사이에 떨어져 ‘오하때’에 열을 올리는 나와 내 친구 같은 꼴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내 또 다른 가난한 친구가 언젠가 알려준 ‘DC 문학갤’이라는 곳에 가보면 그런 예를 얼마든지 볼 수 있다. 건필하시길!)
술을 마시고 돌아온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이나 ‘시-비시’에 끼어 벗어날 줄을 몰랐다. 심지어 주변의 예를 들어 30대의 연애에 대해 말하던 여자 친구와의 대화 와중에도 나는 빌어먹을 시와 비시를 생각했던 것이다. 남자와 여자가 적당히 섞인 술자리에서 여자 친구는 “그런데 어차피 남자가 여자랑 연애하는 건 자려고 그러는 거 아냐?”라고 도발적인 질문을 던졌고(잠깐만 근데 너는 나를 그렇게 생각했던 거냐) 그 자리에 있던 다른 남자들은 검지 하나를 곧추어 세우며 너는 아직 멀었다고 했단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남자는 여자랑 자고 나서야 연애가 시작된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또한 충분히 시간을 들여 생각하며 하루를 때울만한 또 하나의 ‘오하때’의 예이겠지만, 나는 자려고 연애하는 남자와 자고 나서야 연애하는 남자의 사이에 또 다시 끼인 채 시와 비시를 생각했다. 나는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놈이니까. 말하자면 글러 먹었지만 굴러먹지는 않는 놈인데, 그건 이 자리에서 논의할 상황이 아니고 또 손도 너무 춥고 하니까 다음 기회에 이야기해보도록하자.
그래서 내가 펼친 것은 현대시라는 출판사에서 나온 <이승훈의 알기 쉬운 현대시작법>이란 책이었다. 이토록 정직한 제목의 책이 다 있을까. 이승훈이 썼고 알기 쉽게 썼으며 현대시에 관한 책인데 특히 작법을 말한다. 특히 충격적인 부분은 ‘알기 쉬운’이란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도 ‘이승훈’이란 걸 감안하면 충분히 납득할 수 있다. <당신도 15분 간 유명하다> 같은 에세이를 제외하면 이 책은 선생님이 쓴 가장 쉬운 책들의 하나이리라. 그렇다고 선생님이 항상 무슨 어려운 이야기를 늘어놓는다는 말이 아니다. 프로이트와 융과 라깡을 이야기하고, 바슐라르와 바르트를 이야기하고, 선불교와 데리다의 해체를 이야기하시지만 선생님의 개념정리는 그 누구의 개념정리 보다 단순하고 명쾌하다. 다만 문제는 프로이트와 융에서 라깡으로 넘어가고 다시 바슐라르와 바르트 그리고 선불교와 데리다로 넘어가는 그 생각의 흐름을 종종 종잡을 수 없고 본인도 그걸 명쾌히 정리해 설명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것인데, 이 책에는 그런 이름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지나가는 말로 바르트 이름이 한 번인가 나오고 프로이트의 전집 인용이 조금 나오긴 한다. 그러고 보니 내가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선생님에게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식한 것은 다만 충분히 배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하자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건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에도 역시 의식의 흐름이랄까, 도무지 하나로 정리해 담을 수 없는 노 시인의 넓고도 광대한 의식이 흐르는 결을 엿볼 수 있는 단서는 많다. 그게 선생님의 스타일이니까. 다만 그것은 개인적인 이야기들이고, 아프고 강의는 고되고 삶은 지루하지만 그럼에도 하루하루 살아 벌써 육십 년이 넘는 마일리지를 채워 만들어진, 이승훈이라는 인간의 본질에 대해 너무도 적확히 말해주는 바가 있어 이 글을 쓰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일종의 밑줄 긋기인데 서론이 이렇게 길어져버렸다. 그러니 아마 뒷부분은 흐지부지 끝나게 되리라. 그것이 나의 스타일이고 나의 게으름이다. 나는 그것을 벗어날 방법을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
“박인환은 한 잔의 술을 마시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에 대해, 그리고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에 대해 이야기한다. 두 잔의 술, 세 잔의 술, 열 잔의 술과 한 잔의 술이 주는 의미는, 최소한 시에서는, 다르다. 이것도 센스의 문제이다. 한 잔의 술은 외로움, 고독, 그리움, 결핍을 상징한다. 열 잔의 술을 마시고 무슨 말을 한다는 것은 이미 술주정이고 횡설수설이고 주사일 것이다. 외로워서 술을 마시지만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외로움을 모른다.
그러므로 어떤 유행가 가사에는, 지금 내 기억이 틀림없다면, 하기야 기억이 틀림없다는 말도 말이 안 되지만 아무튼 ‘한 잔 술에 떠오른 얼굴’이라는 가사가 떠오르고 이 주인공 역시 한 잔 술에 애인의 얼굴이 떠오르지 두 잔, 세 잔, 열 잔 술에 떠오르는 것은 아니다. 물론 두 잔 술에도 떠오를 수 있지만 독주라면 이미 취한 상태이고 술이 센가 약한가도 문제이므로 술에 약한 화자라면 밀밭에만 가도 사라진 애인의 얼굴이 떠오를 수 있다. 한 잔 술에 떠오른 얼굴은 도대체 어디에 떠오른 얼굴인가? 술잔인가? 화자의 생각인가? 머리인가? 가슴인가? 술잔에 애인의 얼굴이 떠올랐다면 술을 마시는 것은 그리운 애인의 얼굴을 삼키는 행위가 되고, 그러므로 그리움은 해소된다. 나와 그녀 혹은 나와 그 남자가 술을 매개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다소 빗나간 감이 있지만 모든 문학이 그렇고 삶도 그렇고 바른 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른 길로 곧게 나가는 것도 아니다. 특히 문학은 바른 길로 바르게 걸어가는, 말하자면 직선으로 앞을 향해 가는 게 아니다.” (58-59p)
시인의 예민한 감각을 이야기하며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를 이야기하다가 술이 몇 잔인지, 그게 독주인지 술은 센지 약한지로 넘어가서 삶과 문학의 길로 자연스레 넘어가는 이 문장의 길을 보라. 이것이야말로 ‘보여주기’가 아닌가. 무엇이 예민한 것인지를 설명하지 않고 문장의 흐름 그 자체로 보여주는 것이다.
“그대
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대
날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렇게
잠이
들었다
- 성민, ‘놀이’ 전문
이런 반복은 내용을 강조하기도 하지만 이 시의 경우 시간은 변하지만 아무 사건도 발생하지 않는, 따라서 한결같이 지속되는 정서나 관념의 흐름을 강조한다. 내가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이 아니라 그대가 나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그러니까 그대의 마음과 내 마음이 하나가 되는 마음으로 잠이 드는 사람들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고 아름다운가?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나만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기 때문이다.” (102-103p)
여기서 빛나는 것은 한 줄의 아포리즘이다. 대체로 많은 사람들은 나만 그대를 기다리는 마음으로 잠이 들기 때문이다, 라는 부분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시를 모르는 인간이고, 내 가슴을 친 것은 시보단 선생의 그 문장이었다.
“이미지와 관념의 관계가 ‘1:다’라고 할 때 다는 다라는 것이 아니라 아직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말하자면 상징의 의미는 아무리 퍼내도 쏟아붓고 계속 의미를 부여해도 모자란다는 뜻이고 그러므로 다多는 다이고 다가 아니다. 그런가 하면 또한 다는 다da이다. 이 다는 다자인dasein, 현존재라는 의미의 다자인의 접두사이고 현재 존재하는 나, 지금 여기 있는 나의 의미를 강조한다. 현존재는 존재sein와 현da이 결합된 존재이고 그러므로 여기 da가 중요하다. 여기는 어디인가?” (109p)
다가 다가 되고 다시 다가 되며 결국엔 ‘여기는 어디인가’로 끝나는 이런 문장.
“시의 화자는 김소월이 아니라 한 여인이고, 이 여인은 님과의 이별을 근심한다. 자신이 역겨워서, 싫어서, 구역질이 나서 떠난다면 어떻게 하나? 만일 자신이 역겨워서 님이 떠난다면 화자는 ‘죽어도 아니 눈물 흘리겠다’고 말한다. 말이 되는가? 자신이 역겨워 님이 떠난다면 이런 님에 대한 반응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첫째는 님을 붙잡고 떠나지 말라고 울며불며 하소연하는 고전적이고 감상적인 태도. 둘째는 칼이나 총을 들고 떠나지 못하게 위협하거나 님의 옷을 찢는 공격적인 사디스트의 태도. 셋째는 이별을 체념하는 나 같은 허무주의자의 태도. 넷째는 뭐? 역겹다구? 그래 나도 네가 역겨웠다. 그러니까 잘 되었다고 기뻐하는 낙천적 현실주의적 태도. 다섯째는 재수없다고 소금을 뿌리는 샤머니즘의 태도. 물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여러 가지 경우가 있을 수 있다.” (129p)
국민시 김소월의 ‘진달래꽃’을 이야기하며 ‘나보기가 역겨워 / 가실 때에는 / 말없이 고이 보내 드리오리다.’라는 화자의 문제적 언술을 놓고, 일반적으로 이별을 통고 받은 여성들의 다섯 가지 반응을 정리했는데 그것이 1. 고전적.감상적 태도 2. 사디스트의 태도 3. ‘나 같은’ 허무주의자의 태도 4. 낙천적 현실주의적 태도 5. 샤머니즘의 태도다. 난 정말 웃음을 참을 수가 없다. 물론 글쓴이는 웃기려는 의도가 없었겠지만, 누군가는 이게 뭐가 웃기냐고 묻겠지만. 참 웃긴데, 진짜 웃긴데, 어떻게 설명할 방법이 없다. 바로 다음 페이지에 나오는 이런 여성의 언술을 맞닥뜨린 남성의 반응에 대한 분석을 보자.
“이런 여인의 행위에 대한 남자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는 진달래꽃을 그냥 밟고 가는 남자. 둘째는 사뿐히 즈려 밟으려고 노력하다 쓰러지는 남자. 셋째는 도대체 이 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망설이는 남자. 물론 사뿐히 즈려 밟고 가는 남자도 있을 수 있다. 이 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밟고 가는 남자는 야만적이고 씩씩하고 늠름하고 남성적이다. 한편 사뿐히 즈려 밟으려다 쓰러지는 남자는 내성적이고 섬세하고 병적이고 아둔하고 아마 내가 이 모양일 것이다. 문제는 이 꽃 앞에서 망설이는 남자. 싫어서 떠나는 남자가 가는 길에 꽃을 뿌리는, 그것도 빨간 진달래꽃을 뿌리는 이 여인의 행위는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쁘다는 표현인가?” (130p)
야만적이고-씩씩하고-늠름하고-남성적인 남자와 내성적이고-섬세하고-병적이고-아둔한 남자를 대조한 후, 후자에 대고 ‘내가 아마 이 모양일 것이다’라고 말하는 그의 자기 인식. 나는 그게 우습고 또 슬프다. 참고로 나는 사뿐히 즈려 밟으려고 노력해 결국 넘어지지도 않고 지나왔지만, 나중에 발바닥에 붙은 진달래꽃의 파편을 보면서 곰곰이 생각하는 지지부진한 남자다.
“대체로 언어유희는 말장난이고 그렇기 때문에 진지하고 엄숙한, 그런 면에서 도덕주의자에 속하는 이 땅의 많은 시인들은 이런 유희를 비판하고 부정하고 혐오하지만 과연 그런가? 예술이 궁극적으로는 놀이이고 장난이고 이 놀이는 현실원칙을 뛰어넘는다. 그만큼 자유롭다는 말씀. 언어유희를 강조해야 하는 또 하나의 이유는 언어의 조건과 관계된다. 언어는 기표(소리)와 기의(의미)로 구성되지만 이 기의는 한 번도 완성된 적이 없고 언제나 지연되고 다른 것으로 치환된다. 지금도 치환된다. 이런 말을 하려면 끝이 없고, 내일까지 해도 모자라고, 내가 기침 감기로 고생을 하는 것도 끝이 없다. 3월부터 두통 때문에 이브론정과 판피린을 복용하다가 다시 기침 감기로 코푸정과 판피린을 복용하는 게 20일이 넘는다. 감기는 자랑이 아니지만 수치도 아니다. 물론 언어는 감기를 모른다. 그러나 기표와 기의가 따로 논다는 것도 모른다. 언어유희, 특히 동음이의어로 하는 장난은 언어가 보여 주는 이런 차이, 사이, 틈을 파고든다. 어디 시뿐이랴? 진리는 언어유희를 지향한다.” (140p)
끊임없이 의미가 지연되는 언어 자체의 속성, 하여 언어유희의 필연성을 이야기 하는 와중에 ‘이런 말을 하려면 끝이 없고, 내일까지 해도 모자라고, 내가 기침 감기로 고생을 하는 것도 끝이 없다’같은 문장으로 넘어가고 이어 이브론정과 판피린과 코푸정을 이야기하는 이 능청스러움을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문제는 장르가 아니라 양식이고 양식은 그것이 양식이기 때문에 우리를 살지게 하고 배부르게 한다. 일용할 양식이 없다면 우리는 굶을 수밖에 없고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단식 농성을 할 때 찾아가 굶으면 죽는다고 말했다. 그렇다. 굶으면 죽는다. 무슨 말들이 그렇게 많은가? 양식이 있어야 하고 물론 양식樣式은 양식糧食이 아니지만 한편 양식일 수도 있다. 양식이 양식이라고?
다시 피로가 오나 보다. 어제는 목요일 방학 중에도 중앙일보 시창작 야간 강의가 있었고, 한낮엔 따뜻하던 날씨가 저녁이 되면서 다시 추워 오고 강의가 업이라고 생각하면서 힘들게 강의 두 시간이 끝나면 추운 겨울밤 젊은 시인들, 나이 든 학생들과 함께 서소문 뒷골목 시끄러운 분식집에 앉아 호프를 마시는 것이 거의 습관이 되었다. 가을밤 호프 한 잔이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고 야간 강의의 피로도 풀리지만 다음 날이면 피로가 더 심해지고 오늘도 그렇다. 피로는 나의 운명이고 나의 브랜드이고 나의 애인이다. 문제는 양식이고 양식이 아니고 문학에는 세 가지 장르가 있는 게 아니라 슈타이거 식으로 말하면 아홉가지 장르가 있을 수 있다. 도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195p)
장르와 양식에 대해 말하다가 양식과 양식을 가지고 장난을 치시다가 문득 시창작 야간 강의 이야기로 넘어가고, 그것은 (양식을 벌기 위한) 업이고, 그네들과 함께 시끄러운 분식집에서 호프한잔(양식) 마시는데, 피로를 풀지만 다음 날이면 피로가 더 심해지고 오늘도 그러시단다. 당할 길이 없다. 더군다나 그 틈을 타 피로는 나의 운명이고 브랜드이고 애인이라고 천명하기까지. 나도 오늘 술을 마시며 이런 글을 쓰고, 이런 글을 쓰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조금 즐겁기도 하지만 내일이면 더욱 스트레스를 받을 거라는 걸 알고 있다. 하지만 그게 나의 운명이고 브랜드이고 애인이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는 없다. 아무리 해도 그럴 수는 없다. 그러니 이제 자야할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화자는 나이가 든 경상도 남자로 저편(저승) 강기슭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듣지만 그 목소리는 분명치 않다. 따라서 화자의 목소리는 시의 후반으로 올수록 더 강해진다. ‘뭐락카노’라는 목소리는 5연에 오면 세 번 반복될 정도이다. 박목월 선생이 지금(시를 쓰던 그때) 강기슭에 서 있는 게 아니라 그가 아닌, 혹은 그가 경상도 노인의 탈을 쓰고 말한다. 물론 박목월 선생은 경상도 출신이다. 그러나 선생은 이렇게 강한 어조로 말씀하신 적도 없고 그런 시도 없다. 갑자기 선생님 생각이 나고 겨울 저녁 하늘이 흐려오고 우울하고 슬퍼진다. 선생님 생각이 나기 때문이다. 인연은 갈밭을 건너는 바람인가? 글을 더 쓸 수가 없다. 선생님은 나의 은사이시다.” (165p)
학교에는 세어 보다 항상 중간에서 포기하고 마는 138단 짜리 계단이 있고, 그 계단의 중간에는 박목월 선생님의 시비가 있다. 박목월 선생님이 공대에 다니는 이승훈 선생님을 설득해 국문과로 오게 했다니 선생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애틋할 것인가. 그냥 수업을 듣기만 한 나도 이승훈 선생님을 생각하면 이렇게 애틋한 것을.
사실 선생님의 책은 ‘현대시 작법’이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지만 그것은 이 글이 ‘밑줄 긋기’라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고 다만 나는 그때 선생님을 위해 얇은 담배 한 갑을 준비하지 못했음을 후회할 뿐이다. 아직도 이 모자란 학생을 기억하고 계실지는 잘 모르겠지만 빨리 건강해지셨으면 좋겠다, 바랄 뿐이다. 남은 술 들이키고 이제는 정말 자야하겠다.
사나이의 팔이 달아나고 한 마리 흰 닭이 구 구 구 잃어버린 목을 좇아 달린다. 오 나를 부르는 깊은 명령의 겨울 지하실에선 더욱 진지하기 위하여 등불을 켜놓고 우린 생각의 따스한 닭들을 키운다. 닭들을 키운다. 새벽마다 쓰라리게 정신의 땅을 판다. 완강한 시간의 사슬이 끊어진 새벽 문지방에서 소리들은 피를 흘린다. 그리고 그것은 하아얀 액체로 변하더니 이윽고 목이 없는 한 마리 흰 닭이 되어 저렇게 많은 아침 햇볕 속을 뒤우뚱거리며 뛰기 시작한다.
- 이승훈, '사물 A'
그러고보니 선생님은 보라색을 좋아하셨고, 보라색 볼펜으로 답안지를 쓰면 A+를 준다는 뜬소문도 돌았더랬다. 나는 볼펜 색깔과 상관 없이 항상 A+를 받는 학생이었으므로 소문의 진위 따위는 모른다. 그리고 현대시가 무엇인지도,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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