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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살면서 누군가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오랜 시간과 큰 노력이 필요한지를 알게 됩니다. 좋은 관계를 지속하기 위해서는 틈틈이 서로 간에 관계를 정리하고 합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서로가 서로에 대해 몰랐던 부분들과 또 변화된 부분에 관해 이야기하고 맞추어서 서로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해 계속 알아가야 합니다. 물론 요즘에는 쉽게 MBTI로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고 합니다. 조금 더 친근해질 수 있는 계기가 되고, 서로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자 하는 목적에서 꽤 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외에도 여러 검사 유형을 통해서 나나 상대를 알고자 하여도 그게 진정인가 하는 의문이 든다는 것입니다. 또한 살면서 부딪히는 예상치 못한 일들로 인해서 과연 나라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그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하게 됩니다. 그렇게 시작되는 질문은 우리가 이 땅을 사는 동안에 모든 사람들의 고민이며 근원적 차원의 질문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는 서로의 관계 속에서 이 근원적이고 존재론적인 질문에 대해 예수님은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함께 나누어 보겠습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이른 아침 예루살렘 성전에서 많은 사람들을 가르치시던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음행 중에 잡힌 여자를 끌고 와서 가운데 세우고 어떻게 하겠느냐고 묻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율법에 따라 돌로 치라 하시고는 땅에 손가락으로 무언가를 쓰십니다. 잠시 후 일어나 주위를 보니 모두가 떠나가고 여자 혼자 남아 있습니다. 예수님은 여자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으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고 하시면서 연이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먼저 말씀 8장 12절에서 14절까지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내 참 자라고 예수께서 내가 나를 위해 예수님의 자기 선언, 나는 뭐 뭐이다는 엄숙하고 강조적인 용법에 예수님 자신에 대한 말씀이 요한복음에 7번 나옵니다. 요한복음의 특징이자 아주 독특한 예수님의 화법입니다.
나는 생명의 떡이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는 양의 문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요 나는 참 포도나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서술할 때 예를 들어 나는 계획형이고 책임감이 있고 또 혹은 내향적이고 친절하고 배려심이 있다는 추상적이며 사고적이며 감정적인 단어를 선택하여서 자신을 나타냅니다. 즉 영혼용을 가진 나라는 존재의 성격을 이야기합니다. 예수님은 자기 스스로의 성격을 말씀하시지는 않지만 성경을 통하여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사랑이 많으시고 인자하시고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 하시는 즉 하나님의 속성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말씀하실 때에는 앞에서 나눈 것과 같이 거의 다 실제로 볼 수 있는 나타내는 나타내어지는 실질적 단어를 사용하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빛 빛은 우리가 감지하고 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떡 우리의 양식입니다. 양의 문 열고 들어갈 수 있고 닫을 수 있습니다. 길 우리가 가야 하는 방향입니다. 부활 여러 사람, 죽은 사람들을 살리시고 또 예수님 스스로를 통해 직접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길입니다고 하지 않습니다. 간혹 나는 길과 같은 사람입니다고 할 수는 있지만 거기에는 이유와 설명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자기 존재에 대해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말씀하시는 그 근거가 과연 무엇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세가 출애굽기 3장에서 바로에게 가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내가 누구 가데 바로에게 가리까 하며 두려워하자. 하나님께서는 내가 너와 함께할 것이라는 말씀으로 용기를 주십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두려워하면서 예수님 여호와께 이름을 묻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고 하십니다. 나는 나다 나는 처음이다. 나는 알파요 오메가이라는 말씀입니다. 즉 존재 그 자체이시며 영원히 영혼부터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존재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창조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이신 예수님이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 나타내시는 실제가 빛이며 길이며 부활이라는 것입니다. 길과 같은 예수님, 빛과 같은 예수님이 아니라 길이며 빛이며 생명신 그 자체에 나는 나다 내가 그이라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이 자기 선언에 사용하신 모든 단어의 근거는 예수님의 하나님으로서의 존재, 실존 그 자체를 나타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인간입니다. 영혼욕을 가진 인간에 대해 많은 세계의 철학자들은 물론 우리 자신도 우리 존재에 대해 많이 고민하고 알아가고자 합니다. 거기 있는 자 그저 세상에 내 던져진 존재라는 하이데거의 철학적 사유는 물론 수많은 학자의 존재에 대한 질문은 쉽게 그 답이 찾아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 스스로가 결코 찾을 수 없는 질문에 답이기 그러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피조물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누군가가 나를 만들었기에 나를 만든 주인 창조주에게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정의와 개념을 물어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자기 선언에 바리새인들은 그 증언이 옳지 않다고 반박합니다.
증언이란 사실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음행한 여인에 대해 율법에 따라 돌로 치되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하십니다. 돌을 던진다는 것은 그 여자의 죄에 대해 증언하는 것이며, 율법에 따라 마땅히 행하여야 할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인을 정죄하던 사람들이 다 떠나가고 여인과 예수님만 남아 나누는 마지막 대화에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이 참 증언이 아니라고 반박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자신에 대해 나는 이 세상의 빛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바리새인의 말에 예수님은 이렇게 답변하십니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내가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간 것을 안다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육신을 입고자 오시기 전에 하나님의 존재로 계셨던 곳과 십자가 소환 후에 신적 영광으로 다시 돌아갈 것에 대해 아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예수님은 자신에 대해 하나님으로서의 가장 존재론적인 나는 스스로 있는 나다는 답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진정 누구신지를 모르는 그들은 당연히 예수님이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는 예수님의 지적인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세상에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우주의 무한함을 깨달아 알고 있습니다. 나 자신을 먼지와 같은 존재라 생각하고 자연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이렇게 조화롭고 아름다울까 또 이 모든 것이 정말 우연으로 존재하는 걸까 질문하면서 그 어떤 절대자를 생각하거나 또는 창조주가 정말 계시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모든 인간에게는 알아가고자 하는 욕구와 지혜가 있다고 기독교 영성학자인 조안 볼스키코는 이야기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이 그런 욕구와 지혜를 가지고 태어나게 한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죄성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은 예수님의 생명의 빛에 의해 창조적 가능성과 능력을 가진 지혜를 가진 영적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른 새벽 성전에서 빛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고 있던 수많은 군중 사이에서 창조적 가능성과 능력을 깨달은 그 누군가를 시작으로 하여서 하나 둘씩 음행한 여인의 주변으로부터 다 떠나게 된 것인지 모릅니다.
세상의 빛인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어둠에 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은 창조성을 가진 존재 그래서 거룩한 삶으로 초대를 받은 존재, 그 존재들은 바로 저와 여러분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이러한 존재라는 사실을 과연 우리는 얼마나 깨닫고 살아가고 있는지요.
그 영적 존재로서의 창조적 능력과 가능성이 지금 나라는 존재에게 어떻게 나타나고 실현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그 실현을 위해 이곳 파리에서 최선을 다하며 살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한 번 더 하나님과 나 자신의 존재에 대해 깊이 묵상하고 성찰하시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바랍니다.
다음은 15절에서 18절 말씀을 함께 봉독하겠습니다. 조금 길지만 한목소리로 하겠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는 내가 나를 나를 지원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사 이에 그들이 못들, 그들이 무대 내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있다고 내 앞에서 가지 있다는 거다.
아멘, 바리새인들은 율법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과 달리 아무도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세상 끝날에 예수님은 심판을 위해 재림하십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심판이 아니라 구원을 위해 오셨기 때문에 판단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에서 두 사람 이상의 증거를 요구하는 까닭은 상대방의 말이 신빙성이 있느냐 없느냐를 밝히기 위해서입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두 돌판에 새겨주신 하나님의 계명 외에도 수많은 기준의 율법을 수천 년 동안 세워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수많은 인간적인 해석의 율법이 패하게 됩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창조성과 능력을 올가맵니다. 그러기에 그 누구도 온전히 지킬 수 없었던 율법을 예수님은 십자가를 통하여 온전히 완성하십니다.
예수님이 완성하신 율법의 첫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두 번째는 내 웃음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우리 또한 예수님을 통하여 율법을 완성하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공생의 기간 동안 많은 비유와 예화를 통하여 말씀하며 가르쳐 주십니다. 그 이유 중에 하나는 우리가 율법적이 되지 않도록 율법에 매이지 않도록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히려 비유와 예화를 통하여서 각자의 마음으로 깨닫고 성령 안에서 받은 지혜로 창조적인 많은 능력과 가능성을 우리 삶 가운데서 나타내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두 사람의 증언이 없길 참 증언이 아니라 하는 바리새인들에게 예수님은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기, 나와 내 아버지가 두 증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유대인들은 예수님 공생애 내내 예수님에 대해 반박하고 급기야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하였던 결정적 이유는 그들 스스로는 의인이라고 칭하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죄인이라고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음행한 여인은 자기가 죄인임을 알았기에 돌로 맞아 죽을 각오로 예수님과 군중 앞에 섰지만,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인들이었기 때문에 돌로 치는 자리에 서 있었던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성경 말씀에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지만, 그들은 로마의 통치에서 벗어나려는 정치적 메시아를 기다렸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원하는 메시아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 해박하다고 자부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잘못된 해석과 이해로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는 못하는 것은 물론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도 알아채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핍박하고 죽이기까지 한 그들 앞에서 스스로를 증언하시는 성육신 하신 예수님과 아들을 증언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궁극적 목표는 바로 피조물인 인간과의 관계 회복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과 깨어진 관계는 용서와 화해가 필수입니다.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과 화목케 되어야 그 관계가 살아서 생명이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에 최대 관심사는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관계인가 죽어 있는 관계인가 하는 것일 겁니다.
복음이란 종종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기쁜 소식이라고 합니다. 맞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죄 용서받고 구원받았다는 소식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성경 전체의 복음에 대한 초점은 죄 용서받고 구원받은 내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나의 구주로 모시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성삼위 하나님과 지금 여기에서 살아있는 관계, 친밀한 교제를 실현하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는 믿음의 고백과 그 지식을 훌쩍 넘어서서 하나님과의 회복된 관계로 말미암아 우리 삶 전체에 하나님의 스필이 시러 넘치는 그것이 복음의 주요 주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그 친밀한 관계에 대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적인 가능성과 능력이 있는 영적인 존재로 지으셨습니다. 그런 존재로 창조하신 이유는 예수님과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처럼 하나님은 우리와 친밀한 교제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원하시는 뜻을 위해 하나님은 사랑으로 이 세상을 지으셨고, 사랑으로 우리와 소통하시길 원하시고 더불어 이웃을 향하여 사랑으로 반응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렇게 우리 존재 자체는 하나님을 사랑하며 삶 속에서 결코 우리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우리의 증언이 되어 주시는 세상의 빛이 되신 예수 그리스도, 그 생명의 빛을 따라 이웃을 사랑하며 이웃과 함께 걸어가야 하는 관계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하나님과 살아있는 관계, 이웃과의 친밀한 교제를 위해 여러분은 지금 여기 파리에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바라기는 함께 깊이 생각하시고 기도하시어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창조적인 가능성과 능력을 가진 영적 존재로서 빛인 예수님을 따라 빛으로 살아내시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
“And when the angel stretched out his hand toward Jerusalem to destroy it, the LORD relented from the calamity and said to the angel who was working destruction among the people, ”It is enough; now stay your hand.“ And the angel of the LORD was by the threshing floor of Araunah the Jebusite.
And David built there an altar to the LORD and offered burnt offerings and peace offerings. So the LORD responded to the plea for the land, and the plague was averted from Israel.” (2 Samuel 24:16,25)